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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민수기의 말씀 13,1-2.25―14,1.26-30.34-35
그 무렵 주님께서 파란 광야에 있는
1 모세에게 이르셨다.
2 “사람들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찰하게 하여라.
각 지파에서 모두 수장을 한 사람씩 보내야 한다.”
25 그들은 사십 일 만에 그 땅을 정찰하고 돌아왔다.
26 그들은 파란 광야 카데스로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왔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과 온 공동체에게 그 땅의 과일을 보여 주면서 보고하였다.
27 그들은 모세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우리를 보내신 그 땅으로 가 보았습니다.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곳 과일입니다.
28 그러나 그 땅에 사는 백성은 힘세고, 성읍들은 거창한 성채로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그곳에서 아낙의 후손들도 보았습니다.
29 아말렉족은 네겝 땅에 살고, 히타이트족과 여부스족과 아모리족은 산악 지방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족은 바닷가와 요르단 강 가에 살고 있습니다.”
30 칼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진정시키면서 말하였다.
“어서 올라가 그 땅을 차지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해낼 수 있습니다.”
31 그러나 그와 함께 올라갔다 온 사람들은, “우리는 그 백성에게로 쳐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하면서,
32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자기들이 정찰한 땅에 대하여 나쁜 소문을 퍼뜨렸다.
“우리가 가로지르며 정찰한 그 땅은 주민들을 삼켜 버리는 땅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땅에서 본 백성은 모두 키 큰 사람뿐이다.
33 우리는 또 그곳에서 나필족을 보았다.
아낙의 자손들은 바로 이 나필족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눈에도 우리 자신이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랬을 것이다.”
14,1 온 공동체가 소리 높여 아우성쳤다.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다.
26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27 “이 악한 공동체가 언제까지 나에게 투덜거릴 것인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나에게 투덜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28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주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
29 바로 이 광야에서 너희는 시체가 되어 쓰러질 것이다.
너희 가운데 스무 살 이상이 되어, 있는 대로 모두 사열을 받은 자들, 곧 나에게 투덜댄 자들은 모두,
30 여푼네의 아들 칼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만 빼고, 내가 너희에게 주어 살게 하겠다고 손을 들어 맹세한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34 너희가 저 땅을 정찰한 사십 일, 그 날수대로,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너희는 사십 년 동안 그 죗값을 져야 한다.
그제야 너희는 나를 멀리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35 나 주님이 말한다.
나를 거슬러 모여든 이 악한 공동체 전체에게 나는 기어이 이렇게 하고야 말겠다.
바로 이 광야에서 그들은 최후를 맞을 것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죽을 것이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5,21-28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아,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가나안 부인의 마귀 들린 딸의 치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예수님의 침묵에 대해서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마귀 들린 딸의 어머니인 가나안 여인은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쳐댔습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에 들렸습니다.”
(마태 15,2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 15,23)
그 제자들마저도 그녀를 돌려보낼 것을 재촉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침묵하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아니 거부당하고 있다고 여겨질 때 참으로 착잡해지기도 합니다.
더구나 꼬인 문제가 해결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 꼬여갈 때는 하느님의 침묵이 참으로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이, 당신께서 우리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이때에, 당신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더 깊이 끌어들이고자 하실 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 순간에,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한 걸음 더 “예수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마태 15,25)
그야말로 예수님의 침묵과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또 그를 둘러싼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더 가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 15,26) 하시며, 또 다시 냉혹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욕과 냉혹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도록 눈물겹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마태 15,27)
여인은 진정, 자신의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을 '강아지'로 고백하고 낮춥니다.
마땅한 권리로서의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고 믿을 뿐입니다.
비록 이방인이라도 주인의 상 아래서 자녀들과 함께 빵부스러기를 먹게 되는 구원의 섭리를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인의 겸손과 믿음, 구원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드디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아,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마태 15,28)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결코 단순히 거절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침묵’은 가나안 여인의 갈망을 깊게 하였고(아우구스티누스), 여인의 믿음을 굳세게 하였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야말로, 그분의 침묵과 냉대 속에는 당신의 놀라운 경륜과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말없이 ‘침묵’으로 풍랑 속에서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셨지만 끝내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셨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침묵’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골고타로 끌려가시지만 끝내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합니다.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하느님 사랑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마태 15,23)
주님!
당신이 침묵할 때 바로 그 순간이,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는 순간임을 깨닫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에, 한 걸음 더 다가가 꿇어 엎드려 절하게 하소서!
바로 그 때에, 주님께서 믿음과 사랑을 더 깊이 끌어들이고 계심을 깨닫게 하소서!
오늘, 당신의 침묵 안에서 제 겸손과 끈기와 믿음을 길러내소서!
침묵 속에서 오로지 당신 자비에 의탁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그러나>
어제와 오늘 연일 보지만 그리고 내일도 보게 되겠지만,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은 아주 문제적인 인간들입니다.
불평불만이 많고, 그러니까 욕심이 많고, 그러면서도 자신감은 형편없습니다.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은 많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여인과 비교할 때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없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겸손과 믿음과 사랑의 열정은 있어야 하고, 교만과 불신과 패배주의적 자포자기는 없어야 합니다.
이면에서 역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뽑으신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없어야 할 것만 있고, 그들이 개무시하는 가나안 여인에게는 있어야 할 것이 있다는 면에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방인을 무시할 때 흔히 쓰는 표현으로 가나안 여인의 자식을 강아지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우리말로 하면 개새끼지요.
그런 개새끼가 하느님 선민보다 낫고 선민이란 자들이 개새끼만도 못한 겁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은 강아지 소리를 들어도 그렇다고 합니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인의 이 '그러나'에서 겸손만큼이나 강한 믿음을 느낍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참으로 겸손하기에 모욕당해도 위축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참사랑에 대해서는 믿음이 있고 은총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사람들과 비교하면, 나는 비록 강아지지만 ‘그러나’ 주님 사랑은 참되시기에 주님께서는 강아지에게도 은총을 베푸실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비하합니다.
이것은 자기 비하이고 터무니없는 과소평가지 겸손이 아닙니다.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도 교만이지만 실은 과소평가도 교만입니다.
교만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둘 다 나왔다는 뜻입니다.
어제도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겸손을 소개했지만, 우리가 겸손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다면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모든 것을 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나의 약점과 단점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나를 통째로 부정하지 않고 장점도 있음을 볼 것입니다.
나의 약함을 보고 인정하지만, 나는 할 수 없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미천함과 죄스러움을 보지만, 주님의 참사랑을 믿기에 은총과 구원에서 배제되었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메뚜기이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지 않고, 강아지라도 아주 작은 사랑을 크게 누리는, 그런 겸손과 믿음과 은총의 사람들이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우리 옛 속담에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또는 “마음이 흔들비쭉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말입니다.
선한 마음을 일관되게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다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을 드러내고 말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야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 본마음을 알게 됩니다.
‘가나안 부인’은 그 지방 토박이 부인이란 뜻으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부인이 자기 딸을 살려달라.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마태 15,21)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 15,22)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제자들의 태도가 마땅찮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어려움이 생긴 여인을 보살펴 주도록 안내할 수 있는 마음을 잘 지킨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야고 5,15-16)
예수님께서는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 15,22.25) 하고 애원하는 이방인 여인의 간절한 바람을 통하여 그의 믿음을 보셨습니
처음에는 침묵하셨고, 두 번째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말씀하셨으며, 급기야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예수님의 선언에 가나안 부인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단지 이방인이라는 상황과 조건 때문에, 구원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외침입니다.
이런 감동으로 예수님께서는 탄복하시며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치유를 선언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하겠습니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듯 믿음의 뿌리가 깊은 만큼 풍성한 은총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 11,25) 하고 고집스럽게 거듭거듭 반복해서 청해서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라는 확답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이 깊은 영혼은, 교활하고 힘센 원수인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는 악마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믿음으로 마음을 견고히 하고, 악마를 대적하라’고 하셨습니다.
결코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히브 11,6)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간사한 마음을 다스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능력을 만나고 기뻐하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부스러기라도 감사할 때 빵도 받는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의 딸을 치유해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예상 외로 가나안 여인에게 불친절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하십니다.
이에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믿음을 이렇게 보여줍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자존심도 없나?’란 생각이 드는 대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믿음이 있어야 바라는 대로 됩니다.
믿음도 없이 바라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것의 부스러기라도 바라는 겸손에서 나옵니다.
나를 믿음이 하느님을 믿지 않음이고 하느님을 믿음이 나를 믿지 않음입니다.
‘포크포크’엔 ‘모두가 거부한 아이 입양한 여성. 20년 뒤 놀라운 운명 마주해’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한 여성이 모두가 싫어하는 아이를 입양하게 됩니다.
잉게보르는 수년간 125명의 위탁 아동을 보살펴왔습니다.
조던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잉게보르는 조던을 입양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조던의 생모는 백인이 흑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며 자기 아들이 잉게보르에게 입양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흑인 남자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4년이 지나서야 잉게보르는 조던을 입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잉게보르와 조던은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는 친모자와 다를 바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뒤, 잉게보르는 어느 날부턴가 복부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통증은 더 심해졌고 의사는 너무 늦어서 신장을 이식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신장을 줄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잉게보르가 모든 것을 놓고 주저앉으려는 순간 조던이 어머니 몰래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어머니에게 자신의 신장을 이식할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조던이 친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식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조던은 끝까지 주장하였고 의사들이 맞춰본 결과 놀랍게도 조던의 신장은 어머니 것과 정확히 일치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조던 것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이미 조던의 마음은 굳어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제게 모든 것을 주셨잖아요.
이제 제가 돌려드릴 때가 됐어요.
이 모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은 그 안에 나에게 꼭 필요한 더 큰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작은 생명을 무시하며 영원한 생명을 달라고 청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약 자수성가한 부자가 걸어 다니다가 길에 떨어진 10원이 있으면 주울까요, 줍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제가 읽고 본 내용들을 종합하면 그들은 반드시 그 돈을 줍습니다.
돈은 하늘이 주시는 것인데, 그 작은 것을 대하는 자세가 큰 것을 대하는 자세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은 하나 같이 적은 돈을 소중히 여기라고 합니다.
천 원짜리도 다리미로 다려서 빳빳한 장지갑에 넣고 다니라고 합니다.
돈도 하나의 인격체라 자기 새끼에게 잘못하는 사람에게 가려 하지 않습니다.
어느 분이 자신의 회사 앞에 있는 거지에게 조금 큰돈을 주었더니 그가 벌떡 일어나서 잔돈을 버리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래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은총도 마찬가집니다.
작은 은총을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큰 은총을 주실 리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받은 것에 항상 감사합시다.
그리고 혹시 작은 은총을 무시해버리지 않는지 살펴봅시다.
저도 더 많은 신자가 나왔으면 좋겠다고는 하지만, 아직 요양원에 계신 분들을 다 챙기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만간 우리 지역 요양원을 조사하여 신자들을 찾아내어 하로 따로 시간을 내서 봉성체를 하려고 합니다.
이미 집에서 봉성체 하시는 분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가장 작고 약하고 힘없고 소외된 분들 먼저 챙기지 않으면서 더 많은 신자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은총을 청하면서 그것과 관련된 작은 것들은 무시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겸손하게 부스러기부터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스러기를 잘 챙기는 우리를 보며 주님께서 큰 빵 덩어리 하나를 주지 않으실 리 없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할 때 큰 것도 받게 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강아지들>
오늘 복음 이야기는 ‘우상숭배자’들은 구원받지 못하지만,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티로와 시돈 지방, 가나안 부인, 강아지들’이라는 말은 여자가 이방인이며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분명히 거절입니다.
그러나 그냥 거절은 아니고, 은총을 청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상태를 반성해 보라는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여자가 생각하는 하느님은 여러 우상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평소에 자기가 섬기는 우상에게 소원을 비는 것처럼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여자의 간청에 대답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여자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께 간청하려면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누군가가 가르쳐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자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또 주님으로 믿은 것은 아닙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라는 말씀도 거절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도 그냥 거절은 아니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느님의 양이 되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으로 귀화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에 연결됩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
(마태 10,5-6)
이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선포하라는 뜻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는 말씀도 거절인데, 이 말씀도 그냥 거절은 아니고, “자녀들의 빵을 먹고 싶다면 먼저 자녀가 되어라.”, 즉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싶다면 먼저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
(마태 7,6)
따라서 이 이야기에서는 여자가 ‘이방인’이라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자’ 라는 점이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에게 은총을 주신 이야기가 아니라, ‘우상숭배자’를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주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 거절하시는데도 여자가 끈질기게 간청한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간절함’ 때문입니다.
그 간절함이 결국에는 믿음으로 이어졌지만...
여자는 처음에는 예수님의 침묵의 뜻도, 또 거절하시는 말씀의 뜻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강아지들이라는 말을 듣고 비로소 ‘말씀의 뜻’을 알아들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라는 말은 자신이 강아지라는 것을, 즉 ‘어리석은 우상숭배자’ 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우상숭배를 버리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는 말은 “제가 비록 우상을 숭배하면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좀 주십시오.” 라는 간청입니다.
사실 ‘간절한’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 그 ‘간절함’만으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간절함’ 때문에 더 심하게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여자가 예수님에게로 온 것 자체를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부르심과 여자의 응답이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라는 말씀은 여자의 변화와 결심을 칭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올 때에는 믿음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여자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칭찬하신 말씀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버리고 이제 새롭게 믿음을 갖게 된 것을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복음서의 기록만 보면, 여자가 금방 깨닫고 금방 변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아마도 예수님과 여자 사이에 더 많은 대화가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좀 더 있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간절함만으로 금방 우상숭배를 버린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는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즉 신앙인이면서도 ‘미신’을 믿고 ‘점’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녀’인 사람이 스스로 ‘개’가 되는 일이고, 십계명 제1계명을 위반하는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영적승리의 삶” -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와 회개, 믿음의 훈련>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루카 7,16)
어제 입추가 지난 오늘 새벽 밤은 서늘했고, 맑고 푸른 하늘엔 빛나는 별들 가득했으며, 풀벌레 합창 소리도 참 영롱했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듯 별들 총총한 하늘을 바라봅니다.
이 행복으로 시작하는 하루입니다.
기후 재난으로 이 보석같은 아름다운 지구에서 인류의 종말은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이자 비극입니다.
지구 보호에 정신 바짝 차리고 모두가 곧장 행동에 돌입해야 하겠습니다.
제가 아침 산책 중 사람 없을 때 자주 열창하는, 수차례 인용했던 '늙은 군인의 노래'는 늘 불러도 새롭고 힘이 납니다.
부르면서 영적 전의를 새로이 합니다.
일부 가사를 변경하여 “이 강산”은 “수도원”으로, “군인이”는 “수도자”로, “푸른옷”은 “검은옷”으로 “30년”은 “41년”으로 바꿔 부릅니다.
“나 태어나 수도원에 수도자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길 어언 41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 청춘
검은옷에 흘러간 꽃다운 이 내 청춘”
비감한 느낌보다는 정신이 새로워지는 영적 전의를 느낍니다.
예로부터 수도자를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라 부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주님의 전사입니다.
아니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얼마나 영예롭고 자랑스런 칭호,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인지요!
말 그대로 수도자는 물론 믿은 이들 모두가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에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들입니다.
혼자의 영적전투가 아니라 더불어의 영적전투요, 함께 하는 영적전우들 사이에는 영적 전우애가 형성되기 마련입니다.
어제는 수도원을 사랑하는 코이노니아 자매회 월모임이 있었습니다.
2005년 제가 재판받을 때 함께 했던 자매들이 모태가 되어 시작됐으니 무려 18년 역사입니다.
여전히 활동중인 분이 베로니카 형수와 수산나 자매입니다.
이 두 분 역시 한결같이 빛나는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입니다.
특히 제 형수는 제가 제대 후 1973년 교대 다니고 교편생활 때부터 지금 수도생활 때까지 한결같이 도움을 주고 있으니 무려 50년 반세기(半世紀)!
새벽 강론쓰면서 새삼스런 감사와 감동에 놀라움이었습니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2013년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 88세 고령의 연세에도 한결같기가 참으로 훌륭한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입니다.
제37차 세계 젊은이 날 행사후 귀국후 기내에서 회견 중 교회법에 위반된 이들에 대한 사목적 지혜에 감동했습니다.
“교회는 모두에게 열려 있으나 교회 내에는 규율하는 교회법이 있다.
교회법에 따라 어떤 이들을 성사에 참여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것은 교회가 닫혀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각자는 교회 내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하느님을 만난다.”
부득이 교회법에 저촉되어 성사에 참여하지 못해도 하느님과의 친교는 계속되니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교회생활에 충실하라는 교황님의 목자다운 사목적 배려의 사랑과 지혜입니다.
또 교황님의 감동적인 사례는 해외 사목방문 전후로 꼭 성모경당을 찾아 마리아 성모님께 문안 인사를 드린다는 것이니, 이 또한 주님의 목자, 주님의 전사로써 효성스런 면모입니다.
이번도 성공적 포르투칼 순례여정 후 성모님께 감사인사를 드리니 성모님을 만나기 무려 교황님 재위 후 110회입니다.
보고 배움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이렇게 교회 수장의 믿음을 보고 배우는 우리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행복합니다.
믿음의 전사 중의 전사가, 믿음의 총사령관이 바로 복음의 예수님이요, 민수기의 모세요, 오늘 가톨릭교회의 교황입니다.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가나안 부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과 가나안 부인간의 싸움이, 영적전투가 참 치열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깊이 믿었고, 딸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기에 영적승리를 이끌어낸 가나안 부인입니다.
영적전투의 진행과정이 흥미진진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이 싸늘합니다.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다가 제자들의 재촉에 마지못해 반응합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가나안 부인은 좌절함이 없이 가열차게 영전전투를 이어갑니다.
겸손히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계속되는 자비송의 기도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수모스럽기까지 한 주님의 반응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가나안 부인은 주님을 깊이 신뢰했고 겸손했고 지혜로웠습니다.
가나안 부인의 좌절함이 없는 영적탄력이 놀랍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겸손의 절정입니다.
이어 가나안 부인의 겸손한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의 항복선언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늘 읽을 때마다 감동하는 가나안 여자의 믿음입니다.
그러니 가나안 부인은 자기와의 싸움에 승리했고, 주님과의 싸움에 승리한 것이며, 궁극에는 악마와의 싸움에 승리한 것이니 3중의 승리입니다.
아마도 보이지 않는 악마는 가나안 부인이 포기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가나안 부인의 백절불굴의 탄력 좋은 믿음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어제 복음의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꾸중듣던 수제자 베드로와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군계일학처럼 주님의 전사로서 그 믿음이 참 탁월합니다.
믿음의 총사령관 모세의 믿음을 보고 배웠음이 분명합니다.
위기에 처한 모세를 구한 분은 위 두 분입니다.
10대 2의 열세이지만 모두가 좌절하는 상황에서 두 분의 대응이 감동입니다.
우선 칼렙이 용감하게 모세 앞에 나서서 술렁대는 군중을 진정시킵니다.
“어서 올라가 그 땅을 차지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해낼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는 생략됐지만 반대파들의 격렬한 저항에 모세와 아론은 온 이스라엘 백성의 회중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절체절명의 순간,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칼렙이 옷을 찢으며 외칩니다.
이 두 분의 믿음의 웅변이 감동적이라 그대로 전합니다.
“우리가 가로지르며 정찰한 저 땅은 정말 무척이나 좋은 땅입니다.
우리가 주님 마음에 들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저 땅으로 데려 가셔서 그곳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주님을 거역하지만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저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이제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을 덮어 주던 그늘은 이미 걷혀 버렸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온 공동체가 돌을 던져 그들을 죽이려는 순간 하느님은 개입하셔서 이들을 절멸하려 하자 백성을 살려 달라는 모세의 간절한 기도로 반역의 공동체는 살아나지만 하느님은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여푼네의 아들 칼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만 빼고, 내가 너희에게 주어 살게 하겠다고 손을 들어 맹세한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나 주님이 말한다.
나를 거슬려 모여든 이 악한 공동체 전체가 바로 이 광야에서 그들은 최후를 맞을 것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죽을 것이다.”
공동체에 책임이 있는 모세도 예외가 아닙니다.
모세의 한계일 뿐 모세는 여전히 위대한 주님의 종, 주님의 전사입니다.
결국 주님의 전사 칼렙과 여호수아의 승리는 믿음의 승리요 하느님의 승리임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의 모범이 복음의 가나안 부인과 제1독서 민수기의 칼렙과 여호수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부단한 기도와 회개, 믿음의 훈련으로 참 좋은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가 되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평화신문 신앙 강좌 기획팀’ 모임에서 ‘Mission Statement(꿈을 이루기 위한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답을 들으면서 ‘신앙 강좌 기획팀’의 열정과 헌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은 풋볼을 너무 좋아해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신앙보다는 풋볼이 더 좋았던 형제님이었습니다.
신앙 이야기는 30분도 힘들었는데, 풋볼 이야기는 5시간을 해도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 나가던 사업이 완전히 바닥을 쳤고, 건강하던 몸도 나빠졌다고 합니다.
그즈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책이 모두 신앙에 관련된 책이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형제님을 준비시켰다고 합니다.
아직도 시련과 고난이라는 가시못이 빠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확신이 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자신의 성구로 정했다고 합니다.
형제님이 마음에 품은 성구는 필립비서의 내용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풋볼도, 재산도, 건강도 예수님을 아는 확고한 가치 앞에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정도의 확신과 신념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확신이 있기에 9시간이 넘는 거리를 기쁘게 운전하면서 왔습니다.
형제님의 아내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너무 지나친 것 같아도 이해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불같이 타오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음을 걱정하였습니다.
한 자매님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여성으로 직장 생활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미국에 와서 한 수도회의 영성을 알게 되었고, 그 영성에 따라서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 수도회의 영성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함께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고민할 문제이고, 평신도는 그저 따라만 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팬데믹으로 열정이 식어가는 신앙인을 보았고,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신앙인을 보았다고 합니다.
몇몇 사람과 함께 식어버린 신앙을 다시 뜨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고, 줌으로 하는 ‘신앙 강좌’를 개설하였다고 합니다.
팬데믹으로 움츠려있는 신앙인들에게 영상을 통해서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꿈과 열정은 좋았지만 평신도들만으로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주로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어디에 속합니까? 지도신부님은 누구입니까?’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하느님나라를 선포합니까?’라고 질문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당신들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즈음에 저를 알게 되었고, ‘가톨릭평화신문 신앙 강좌 기획팀’이라는 이름으로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매님이 정한 성구는 고린토 후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평화신문과 함께 하면서 주변의 오해도 풀렸다고 합니다.
꼭 필요한 때에 하느님께서는 필요한 사람을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영상을 편집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회계 업무가 늘어났는데 하느님께서는 회계 업무를 도와줄 사람을 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는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오셨음을 망각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사람들은 이집트의 군대에 비하면 절대로 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두려움을 아시고 40년을 더 광야에서 머물도록 하셨습니다.
두려움이 있는 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쓰레기로 여길 수 있는 사람들만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절망의 순간에도, 풍랑의 시간에도, 박해의 칼날에도 주님께서는 늘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을 확신한다면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가나안 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인천교구 성직자 사진첩을 보다가 한 선배 신부님의 사진에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신부님과의 만남이 떠올려졌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섬세하시고 또 애정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차 한 잔을 마셔도 제대로 마셔야 한다면서 좋은 찻잔에 정성을 다해 맛있는 차를 만들어 주셨지요.
만약 차를 담을 찻잔이 없으면 저 같은 보통 사람은 아무 잔이면 어떠냐고 할 텐데, 신부님께서는 아예 차를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음식 역시 제대로 된 그릇에 담겨 있어야 맛이 나지 아무 그릇에 대충 담으면 그 음식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에게뿐 아니라 다른 사물에도 늘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유명한 식당에 가면, 그 음식에 맞게 멋진 접시에 담겨 있습니다.
만약 정말로 비싸고 맛있는 최고급 음식이 플라스틱 접시에 담겨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음식의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음식에 맞게 접시가 꾸며질 때, 음식의 맛이 더 좋게 느껴지고 실제로 음식 맛도 훌륭해질 것입니다.
이 제각각의 접시에 우리 마음을 대입해 보았으면 합니다.
즉, 주님을 담는 각자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주님을 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모습에 따라 주님의 영광이 더 환하게 세상에 드러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각자의 마음을 멋지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세상에 어떻게 비추고 있었을까요?
자기 마음의 상태와 모양이 중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떠나 이방인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어느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지요.
자기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다는 것입니다.
이 청을 곧바로 들어주셨을까요?
아닙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면서 거절하십니다.
사람을 강아지에 비유한다는 것, 상당히 모욕적인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은 가나안 부인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변하지 않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함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겸손의 마음이 가나안 여인이 얻고자 했던 치유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주님을 담는 마음으로 언제나 주님과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기 믿음을 훌륭하게 드러냅니다.
그런 멋진 마음이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보일 수 있었으며, 이로써 자기가 원하는 딸의 치유도 얻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런 그릇이 될 때, 가장 멋진 주님을 모시면서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잘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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