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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6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제1독서 : 탈출 24,3-8
제2독서 : 히브 9,11-15
복 음 : 마르 14,12-16.22-26
12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3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14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15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
16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2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23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2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26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렸을 때의 기억 하나가 떠올려졌습니다.
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매년 봄이 되면 제비가 날아와서 둥지를 쳤습니다
(박 씨는 한 번도 가져다주지 않더군요).
제비 둥지를 보면서 정말로 신기했습니다.
특히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둥지에서 새끼 제비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작고 예쁜 새끼 제비를 볼 수 있었지요.
현재, 성지에서 제일 큰 나무 꼭대기의 까치둥지를 볼 수 있습니다.
도저히 사람의 손이 다을 수 없는 곳에 만든 까치둥지입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보았던 제비 둥지는 늘 사람이 사는 집 처마 밑에 있었습니다.
당연히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둥지를 만들어야 안전할 것 같은데 제비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습니다. 이런 내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글쎄 제비는 사람 가까이를 제일 안전한 곳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뱀이나 구렁이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안전한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제비를 다른 동물로부터 보호해 주었으며,
주변이 조금 지저분해지더라도 좋은 새라면서 환영했습니다.
제비의 사람에 대한 믿음을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힘 센 분 밑에 머물러서 보호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성체성사를 특별히 기념하고, 그 신비를 함께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와 늘 함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단순히 2천 년 전, 잠깐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을 만난 사람들에게만
깊은 감동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살아있는 빵으로 우리 곁에 계시기 위해 성체성사를 세우셨고,
자그마한 성체 안에 내재하시면서 우리가 쉽게 당신을 모실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다가오신 주님이신데, 우리는 그 사랑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스스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한 마음으로 인해서,
마치 예수님을 반대했던 당시의 종교지도자처럼,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예수님과 정반대의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매번 최고의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사람들과 함께 사는 제비들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으며, 주님 안에서 참 기쁨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성체를 모시면서 이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
이수철 프라니스코 신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지난 주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이었고
오늘 주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그대로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의 절정의 축일입니다.
이런 거룩하신 대축일을 통해 역으로 인간이 얼마나 존엄한 품위의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저절로 나오는 고백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의 고백도 그대로 우리의 심중을 대변합니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오늘 아침성무일도시 마음에 감동으로 와 닿은
참 아름다운 아침기도 후렴과 즈카르야의 노래 후렴도 생각납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렇듯 아름다운 전례로 감동스럽게 표현됩니다.
“당신 백성을 천사들의 음식으로 배불리셨고, 하늘의 빵을 우리들에게 주셨도다. 알렐루야.”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 온 살아있는 빵이로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리라.”
하느님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천사들의 음식이자 하늘의 빵이신 성체성혈을 모시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아름답고 거룩하게 살아가게 될 우리들입니다.
문득 김지하 시인의 '밥'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민중신학자 고故 안병무 박사가 성체성사의 본질을 참 잘 드러냈다고 극찬極讚했던 시입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언제 읽어도 감동입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밥이자 성체성혈입니다.
비단 공동 미사전례는 성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식당에서의 공동식사로
또 일상에서 사랑의 나눔으로 연장됨을 봅니다.
참으로 하느님 자녀들의 삶은 성체성사화된 사랑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비로소 성체성사의 완성이자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예수님이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임을 깨닫습니다.
장상 사임 후 오랫동안 양노원에 계신 분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나 휴가 못간다. 낙樂이라곤 미사 하나뿐인 노인들을 두고 어떻게 휴가 갈 수 있겠나?
나 휴가 못간다.”
나이들어 갈수록 남는 낙樂이라곤 미사뿐이 없다는 고백을 자주 듣곤 합니다.
가톨릭 교회도 교회 생활의 원천이며 절정인 성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장엄하게 고백합니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교회의 모든 교역이나 활동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성사들은
성찬례와 연결되어 있고 성찬례를 지향하고 있다.
실제로,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다.
곧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신다.’(가교1324)
자 그렇다면 이런 주님의 사랑에 어떻게 응답하며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하여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을까요?
저는 네 측면에 걸쳐 답을 찾아냈습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입니다.
성 베네딕도도 당신 수도승들에게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도 앞세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최후만찬시 당신 존재 전체를 사랑으로 내어 주신
주님께 대한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입니다.
참으로 매일 우리의 밥으로 오시는 하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신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바로 이런 사랑의 표현이 순교요 순교적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최후만찬시 주님은 성체성혈을 나누시며 말씀하십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받아 마셔라.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세상에 주님과 사랑으로 일치되는 이 미사시간보다 행복한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근원적 치유의 처방도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은총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전 성체송가 23절도 참 은혜롭습니다.
“참된 음식 착한 목자 주 예수님 저희에게 크신 자비 베푸소서.
저희 먹여 기르시고 생명의 땅 이끄시어 영생 행복 보이소서.”
둘째, 감사입니다.
새 계약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는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감사도 됩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에서 모세는 피를 뿌리며 말합니다.
“이는 계약의 피다.” 그러나 구약의 의식에는 뭔가 2%가 부족합니다.
제단과 백성에게 뿌리는 피는 다름 아닌 동물의 피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를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피, 성혈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통쾌한 고백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 성혈의 정화 은총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더욱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잘 섬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입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우리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가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구약의 모세를 완전히 능가하면서 보완하는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한
새 계약의 중개자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셋째, 찬미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찬미입니다. 물론 하느님 찬미입니다.
찬미의 사랑,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입니다.
찬미의 맛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인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예수님 역시 이스라엘의 후손답게 찬미와 감사가 몸에 밴 분이십니다.
참으로 성체성사적 삶은 찬미와 감사의 삶입니다.
바로 우리가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 시편기도와 미사전례기도가
성체성사적 삶을 완성에로 이끌어 줍니다.
오늘 복음중 최후만찬시 분명히 언급되는 두 말마디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에 이어,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의 두 말마디에서 찬미와 감사가 한 셋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산으로 갔다.’
복음 말미에서 보는 것처럼 찬미로 시작해서 찬미로 끝나는 최후만찬임을 봅니다.
성무일도시 우리는 ‘주님을 찬미합시다’ 하면, ‘하느님 감사합니다’로 화답합니다.
제 행복기도 중 강조 되는 바 역시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넷째, 희망입니다.
성체성혈의 성체성사야 말로 희망의 성사입니다.
성체성사 성찬례는 어제의 예수님을 되새기는 회상제回想祭요,
오늘의 그리스도를 섬기는 현존제現存祭요,
내일의 주님을 기다리는 희망제希望祭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과거를 새로이하고 현재에 충실하면서 미래의 희망을 북돋아 주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이런 생생한 희망의 은총 선물이,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영원한 청춘의 영혼으로 살게 합니다.
바로 이런 황홀한 미래를 앞당겨 보여 주는
저녁 성무일도 마니피캇 후렴과 성체송가24절도 참 깊고 아름다워 감동을 줍니다.
“오 거룩한 잔치여 예수의 몸은 음식이 되었도다.
수난의 기념, 은총의 충만, 장차 영광의 보증이로다. 알렐루야.”
“전지전능 주 예수님 이 세상에 죽을 인생 저 세상에 들이시어,
하늘 시민 되게 하고 주님 밥상 함께 앉은 상속자로 만드소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절망이요 허무입니다.
바로 희망의 성사, 사랑의 성사인 성체성사야 말로
절망과 허무에 대한 최고 처방의 명약名藥이자 영약靈藥임을 깨닫습니다.
살만한 세상입니다. 바로 이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의 성체성사 은총 덕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사랑의 사람, 감사의 사람, 찬미의 사람, 희망의 사람이 되어
한결같이 성체성사적 찬미와 감사의 삶에 정진精進하게 하십니다. 아멘.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6월의 첫 주일입니다. 성체성혈대축일입니다.
6월이면, 떠오르는 꽃이 있죠.
수도원 올라오는 길가 젬마 자매님 집 울타리에도, 가타리나 자매님 울타리에도,
우리 성모님 정원 앞에도 뒤에도, 피어있는 장미입니다.
“6월의 장미”라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입니다.
하늘은 고요하고
땅은 향기롭고
마음은 뜨겁다
6월의 장미가
내게 말을
건네옵니다.
사소한 일로 우울할 적마다
‘밝아져라’
‘맑아져라’
웃음을 재촉하는 장미
삶의 길에서
가장 가까운 이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무심히 찌르는 가시를
다시 가시로 찌르지 말아야 부드러운 꽃잎을 피워낼 수 있다고
누구를 한 번씩 용서할 적마다
싱싱한 잎사귀가 돋아난다고
6월의 넝쿨장미들이 해 아래 나를 따라오며
자꾸만 말을 건네옵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 아름다운 장미의 계절에
내가 눈물 속에 피워 낸
기쁨 한 송이 받으시고 내내
행복하십시오.
오늘 우리는 기쁨의 장미 한 송이로 행복합니다.
그런데 더 기쁘고 더 행복한 것은 예수님의 성체성혈로 피어난 꽃, 용서와 화해의 꽃,
고백성사의 집이라는 꽃이 수도원 입구에 참으로 아담하고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오늘은 이 용서와 화해의 꽃집을 마련하기까지 여러 모양으로 도움을 주신 은인들을 모시고,
이 집을 축복하고 개장하는 날입니다.
오늘 모두 이 용서와 화해의 꽃집에서 축복과 기쁨 영적 꽃다발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이 꽃집의 이름은 미사 후, 축복식 때 원장수사님께서 발표하시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성체성혈의 신비는 “계약”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신비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도 “계약”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단어도 “계약”입니다.
계약에서 가장 두드러진 표현은 ‘죄의 용서’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고백성사의 집’을 축복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 깊은 일입니다.
<제1독서>는 시나이에서 맺은 “옛 계약”으로, 모세를 통하여 맺어지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의 계약입니다.
<복음>은 최후만찬에서 행하신 성체성사의 설정을 통하여 맺어지는 “새 계약”의 장면입니다.
그리고 <제2독서>는 새 계약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죄를 속량하시고
상속재산을 받게 해주셨음을 되새깁니다.
<제1독서>의 시나이 계약에서, 모세는 희생된 짐승의 피를 절반을 제단에 뿌리고 나서,
“계약의 책”을 백성에게 읽어줍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탈출 24,7) 하고 응답합니다.
모세는 나머지 피를 백성에게 뿌리며 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 24,8)
여기에는 계약을 구성하는 요소가 세 가지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말씀이요, 둘째는 백성들의 응답이요, 셋째는 피를 뿌리는 예식입니다.
곧 계약은 용서를 위한 피의 의식을 통해서 제정되지만,
동시에 하느님 말씀의 수용을 통해서 제정됩니다.
이처럼, 계약에 있어서 말씀과 의식은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이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어안이 벙벙해지는 놀라운 사실을 드러냅니다.
곧 야훼 하느님과 백성이 같은 피로 결합되었다는 것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관계로의 친교를 말합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의 자손들”(탈출 24,5)은
이 친교로 “야훼 하느님의 혈족, 가족”(‘am’)이 됨을 말합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계약인 것입니다.
이는 순전히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호의의 선물이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계약은 나아가서, 우리를 형제 사이로 만듭니다.
하느님의 가족으로서 형제가 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가족이며, 서로 형제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형제인 것은 바로 계약이 가져다 준 선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해방절(마르 14,12;“무교절 첫 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의 양이 되십니다.
곧 당신의 피를 계약의 피로 뿌리십니다.
그리하여 옛 계약 안에 이미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드러나게 됩니다.
곧 구원의 사랑이 선포되고,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그런데, 여기에는 구약의 계약과는 다른 것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곧 ‘새 계약’은 구약의 ‘옛 계약’과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예언자 예레미아는 말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 31,31-34)
그렇습니다. “죄 사함”의 용서가 “새 계약”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미사 중에 <성찬제정 축성문>에서, 사제는 포도주를 들고서 허리를 굽혀 말합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들을 위하여 흘리는 피다”
나아가서, ‘죄를 사하여’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것’이 ‘새 계약’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 피’,
이것이 바로 성체성혈의 신비에서 보여주는 주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이토록 오늘 그리스도의 성체성혈로 죄 사함의 용서와 자비를 입었으니,
마땅히 자비와 용서를 베푸는 계약의 삶, 타인을 위하여 내놓는 삶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이제, 이 미사 중에, 예수님의 성체성혈로 맺으신 “새 계약”을
우리의 삶으로 기념(anamnesis)하고 찬양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주님!
제가 산산조각 났을 때
저보다 먼저 산산이 부서진 이는 당신이십니다.
저를 풍기박살 낸 이도 바로 당신이십니다.
그래야만 온 몸을 쪼개고 피 흘리신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오늘도 당신처럼, 다른 이들을 “위하여”
먼저, 부서지고 찢어져 피 흘리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전에 ‘황제펭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은 3달 동안 남극의 눈보라를 맞으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알이 부화될 때까지 품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암컷은 바다에 나가서 새끼를 위해 먹이를 잡으러 갑니다.
본능이라고 말하기에는 새끼를 위한 수컷의 사랑이 눈물겨웠습니다.
암컷이 돌아오면 수컷은 이제 먹이를 잡으러 바다로 나갑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면에서 황제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카르디널 피시(Cardinal fish)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 물고기는 암컷이 낳은 알을 입에 넣어서 부화시킨다고 합니다.
알이 부화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고 합니다.
수컷의 입안에 있는 알은 안전하게 부활 할 수 있습니다.
본능이라고 말하기에는 새끼를 위한 수컷의 사랑이 놀라웠습니다.
알이 모두 부화하면 비로소 수컷은 먹이를 먹을 수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면에서 추기경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가족을 위해서라면 장기를 기증하고, 목숨까지 바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능에 충실한 황제펭귄도, 카르디널 피시도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고, 목숨까지 바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만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최귀동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본인도 힘들게 구걸하는 가운데 더 어려운 할아버지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오웅진 신부님은 지금의 꽃동네를 일구었습니다.
걸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정성과 사랑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나병환자들을 위해서 맞춤 신발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서 밴드를 만들어 음악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과로로 짧은 사제생활을 마치고 하느님 품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을 따르던 학생들은 의사가 되어서 신부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더 많은 젊은이들의 열정과 희생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흐름을 바로 잡기 위해서 였습니다.
세상의 흐름이 강한 곳에서 약한 곳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긴 곳에서 짧은 곳으로 흘러간다면 세상은 공평해지고 아름다워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은 예수님이 꿈꾸던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있는 나라,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있는 나라,
사막에도 샘이 흘러 꽃이 피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공부해서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출세해서 자기만 잘 살고, 잘 먹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출세해서 세상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혼자서 5000명의 것을 빼앗아 먹을 수도 있지만, 혼자서 5000명을 먹여 살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혼자서 5000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 오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드리시면서 어떻게 해야 공평한 세상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체성사의 가장 큰 의미는 ‘내어줌’입니다.
사제는 미사 때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재현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것을 받아먹으십시오. 이는 여러분을 위해서 내어 줄 나의 몸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것을 받아 마시십시오.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려고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흘릴 피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십시오.’ 내가 잘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체 성혈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는 남을 잘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도, 예수님께서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도
모두 우리가 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또한 우리도 이웃을 잘 살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전에 읽었던 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꽃입니다.
꽃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 날려 보냅니다.
그래도 나는 하나도 잃은 것이 없답니다.
가을이면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간직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마르 14,1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며 이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내 방" 즉 당신의 방을 찾고 계십니다.
파스카 예식을 치르면서 함께 음식을 나눌 방이 필요하신 건데 왜 굳이 "내 방"이라고 하셨을까요?
"내 방"이는 당신이 지금 '필요로 하는 방'을 의미하고 또 '그분께 속한 방'이란 의미도 포함합니다.
머리 둘 것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에루살렘 도성 안에 당신 방을 소유하셨을 리는 없을 터이니,
이 "방"은 그저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을 겁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마르 14,22)"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예수님께서 파스카 예식 중 쪼개어 나눠주는 빵이 당신의 몸이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그 긴 세월 동안 내내 행하였던 의식이고, 빵 나눔인데,
당신의 영원하고 결정적인 파스카 제사를 준비하시는 이 때 그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신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시나이 산에서 주님과 백성이 계약을 맺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피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뿌리고 말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 24,8)
피를 뿌리는 예식은 모세가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를 일러주고,
이 모두를 실행하겠다고 백성이 응답한 뒤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기 직전, 주님의 백성이 문지방과 상인방에 바른 어린 양의 피는
그들을 대살육의 재앙에서 보호해 주었지요.(탈출 12,23 참조)
"피"는 함부로 흘리거나 먹어서는 안 되는 생명 그 자체로서,
이제부터 주님과 백성을 마치 혈연관계처럼 결속시켜 주는 동시에
주님의 소유가 된 백성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이루어진 새 계약을 이야기합니다.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히브 9,14)
성자의 희생 제사로 우리에게 더 이상 짐승을 잡고 그 피를 뿌리는 예식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봉헌하는 미사성제야말로 우리 구원을 위해
새롭게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십자가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를 마시는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르 14,25)
이스라엘이 짐승의 피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예수님의 피로 완성되었고,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마실 새 포도주를 기다립니다.
새 포도주는 성령, 사랑, 그리고 영원한 일치입니다.
더 이상의 고통도 눈물도 없을 그곳에서 우리의 죄를 씻어줄 피는
뜨겁고 열렬한 사랑의 합일로 이어져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해줄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영성체송)
오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을 전부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념하는 축제의 날입니다.
우리에게 내주시는 그분의 몸과 피는 이 세상에서 그분의 현존을 보증하는 실체입니다.
그리고 이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설령 아무리 부족하고 나약한 죄인이어도
주님께 머물러 차츰 주님으로 변모되어 갑니다.
우리 자신이 파스카 예식이 이루어지는 "내 방" 곧 '주님의 방'이 되어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성체의 삶을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의 몸과 피를 모시고 주님 안에 머물러 사랑을 누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코로나19의 조심스런 상황에서 첫영성체를 하는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을 축복하면서,
그들로 인해 우리 가정과 교회, 세상이 더욱 정화되고 성화되길 기도합니다.
아울러 우리 주변에 있는, 영육으로 굶주린 이들에게 소박한 나눔으로
성체의 삶을 완성하는 오늘 되시면 좋겠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양식은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이 사는 곳으로 초대하는 도구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이웃을 위한 양식이 되어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먹고 양식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양식’의 반대말은 ‘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식엔 사랑이 담겨있고 음식엔 이기심이 담겨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무엇이든 먹어야 삽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무엇인가는 먹었기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먹는 것이 음식인지 양식인지에 따라 그가 어디에 살게 될지가 결정됩니다.
모기는 어미로부터 양식을 받지 못합니다. 심지어 음식도 못 받습니다. 물론 탄생할 때는 부모도 조금은 희생합니다. 피 흘림 없이 태어나는 생명체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그것들은 부모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음식이 있는 곳에 머물게 됩니다. 물론 어디를 가든 환영받지는 못합니다.
동물들은 부모로부터 사랑이 섞인 양식을 먹습니다. 공동체가 더욱 끈끈할수록 부모와 지내는 시간이 깁니다. 부모로부터 사랑이 섞인 양식으로 길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부모처럼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사랑이 섞인 양식을 먹어야 부모가 있는 곳에 살 능력이 생깁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격리 원숭이’ 실험을 하였습니다. 새끼 원숭이를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떼어놓고 인간이 기른 것입니다. 인간도 분명 사랑이 섞인 양식을 새끼 원숭이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식은 음식만이 아니라 가르침도 포함합니다. 미사가 그래서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 둘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만 부족해도, 혹은 그 가르침이나 사랑을 감당할 수 없다면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양식을 먹은 새끼 원숭이는 원숭이 무리에 끼일 수 없었습니다.
굳게 닫혀있던 루마니아의 대형 고아원 ‘요람’이 1990년 개방되었을 때, 사진기자 ‘윌리엄 스나이더’는 그곳에 수용된 아이들의 상태를 찍어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는 요람을 ‘인간 창고’라 불렀습니다. 많은 아이가 몸을 앞뒤로 흔들거나 머리를 벽에 쿵쿵 들이받고 이상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사람이 다가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영혼이 없는 상태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학대도 당한 적이 없고 굶주린 적도 없었지만, 아이들은 사회에서 필요한 소통 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한 채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보모들이 주는 음식 속에는 ‘사랑’이 담겨있지 않았습니다. 요람에서는 일손이 부족하여 보모 한 명이 20~30명의 아기를 맡아야 했습니다. 보모가 하는 일은 음식을 배급해 주는 것뿐, 아이와의 따듯한 접촉이나 별다른 보살핌은 줄 수 없었습니다. 양식이 아니라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에 속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먹는 것이 음식인지 양식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먹는 것이 비단 식품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책도 먹고 동영상도 먹습니다. 뉴스에서 보니 15초짜리 ‘틱톡’ 동영상을 따라 하다가 많은 사고가 잇따른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공유되는 동영상인데, 예를 들면 운전하면서 율동을 따라 하다가 저수지에 빠지거나 기찻길에서 동영상을 따라 하다가 기차에 치이거나 스프레이로 불장난을 하다가 큰 화상을 입는 경우들입니다. 음식만 찾다가는 이와 같이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음식과 양식을 구분하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양식은 분명 그 안에 이기심이 아닌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틱톡은 그것을 올리는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보라고 올리는 것입니다. 상대의 이익을 위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 올리는 것입니다. 요람에서 자기 이익을 위해 음식을 아이들에게 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이지만 양식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자기 이익을 위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먹으면 짐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주는 음식만 먹는다는 말은 낮은 짐승의 수준에 머물고 모기나 기생충처럼 살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양식을 이루는 사랑과 진리는 하나의 실재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기에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전달됩니다. 사랑이 담겨 우리에게 오는 것이 양식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도 그분이 사는 곳에 머물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양식 안에는 사랑과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사랑이시고 진리이십니다. 이 사랑과 진리는 모기와 같은 본성을 벗고 자신에게 양식을 주는 이의 수준으로 우리를 향상합니다. 자신도 받은 것을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한 예를 봅시다.
휴스턴의 한 라디오 방송국의 마이크라는 진행자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네브래스카주의 목장에서 살고 12살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로건이라는 소년의 전화였습니다.
“마이크, 제 얘기 좀 들어주시겠어요?”
“물론이지, 로건. 무슨 일이니?”
“하느님이 저에게 하신 말씀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어제 우리 아빠가 송아지를 줄로 옭아매셨는데, 이 송아지는 매우 늙은 소에서 태어나서 엄마가 너무 늙어 건강한 우유를 먹지 못했어요. 비타민 C나 그런 좋은 성분이 있는 우유를 못 먹었어요.”
“그래서?”
“우리 송아지가 그만 등뼈가 부러지고 말았어요. 그래서 오늘 아침 제가 밖에 나가서 묻고 왔어요.”
로건은 통화 중에도 계속해서 훌쩍거렸습니다.
“하느님께 물어봤어요. ‘하느님, 왜 제 송아지를 데려가셨나요? 저에게 소중했는데.’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로건, 내 아들도 나에게 소중했단다. 하지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어야 했어.' 똑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전 그 송아지를 참 아꼈어요. 하느님의 아들도 매우 소중했어요.”
“로건, 네 말이 맞다. 사실이야. 로건, 괜찮니?”
“네, 괜찮아요. 하지만 이거 한 가지는 말하고 싶어요. 매우 중요한 얘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나 애완동물을 잃어버렸을 때, 하느님께서도 사랑하는 아들을 잃으셨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세요. 하느님은 모두 이해하세요. 하느님은 언제나 이해해 주세요. 그냥 하느님께 나아가면 돼요.”
동물이건 사람이건 본인이 보지 못한 것은 하지 못하고 본인이 받지 못한 것은 주지 못합니다. 내가 사랑을 하고 있다면 분명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혈은 이와 같습니다. 성체 성혈을 먹고 마시는 사람들은 그 받은 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소중한 아드님까지 내어놓으시는 아버지 앞에서 이기적으로 음식만 팔아 이익을 챙기는 사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대로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당신이 사시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양식을 먹는다고 다 하늘 나라에 합당한 수준으로 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원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고 싶으며 천상의 양식을 먹으면 양식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같은 이슬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양식이 될 것인지 음식이 될 것인지에 따라 양식 안에 든 사랑이 소화되기도 하고 사랑은 버려지고 음식만 소화되기도 합니다.
세상에 속하려는 사람은 성체를 영하더라도, 마치 피자나 햄버거를 사 먹듯 헌금을 내고 당연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내가 봉헌하는 헌금도 나 자신도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거저 받은 사람만이 거저 내어줄 수 있습니다. 거저 내어주지 못하면 나는 그저 음식이 되고 맙니다. 음식은 먹히거나 썩어버립니다. 잊히는 것입니다. 누가 생선 몇 마리, 돼지나 소 몇 마리를 먹었는지, 혹은 그 이름을 기억하겠습니까? 하지만 양식을 먹으면 그 양식을 준 이를 영원히 기억합니다. 그런 양식이 되는 삶을 살려면 양식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참된 양식이 되게 만드는 진정한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밖에 없습니다.
나도 양식이 되어야 영원히 삽니다. 음식을 먹으면 음식이 되고 양식을 먹으면 양식이 됩니다. 내가 먹는 것이 내가 됩니다. 이는 내가 음식, 즉 고깃덩이가 될 것인지, 양식 곧 그리스도가 될 것인지의 결심에 따라 결정됩니다.
뱀이 되려는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뱀이고 소가 되려는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소가 됩니다. 각자가 소화하고 싶은 것을 소화하기 때문입니다. 양식이 될 것인지, 음식이 될 것인지 먼저 정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 것인지 천국에 속하고 싶은지 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정했다면 그 살고 싶은 곳에서 오는 양식을 먹으면 됩니다. 양식은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이 사는 곳으로 초대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