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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애니아를 고쳐 줌 9:32~35
32 그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34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려 줌 9:36~43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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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베드로가 룻다에서 8년간 중풍병을 앓던 애니아를 고치니 이를 보고 많은 사람이 주님께 돌아옵니다. 욥바에서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하던 여제자 다비다가 죽었는데, 베드로가 기도해 다비다를 살립니다. 이 일을 알고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습니다. 베드로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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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애니아를 고쳐 줌 9:32~35
그리스도 복음의 초기 단계인 초대교회 시기에는 순회 전도 사역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루살렘에만 머물지 않고 순회 전도를 했습니다. 그는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사론 평야와 인접해 있는 룻다에 사는 성도들을 방문합니다. 룻다는 예루살렘에서 약 40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중풍병으로 8년째 누워 있던 애니아를 고칩니다. 당시에 룻다는 국제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이로 인해 애니아를 고친 기적 소식이 인근 지역에 빠른 속도로 퍼져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 돌아오게 됩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 줌으로 복음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르게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베드로가 애니아를 고친 기적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내가 치유와 회복을 위해 기도할 지체는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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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려 줌 9:36~43
욥바에 다비다(도르가)라는 여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습니다. 초대교회는 다비다와 같은 헌신적인 여인들로 인해 든든히 세워졌습니다. 그녀가 병들어 죽자 신자들이 룻다에 있는 베드로를 데려옵니다. 욥바와 룻다의 거리가 약 20km였기에, 신자들은 베드로가 애니아의 병을 고친 일을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모두가 울면서 다비다의 살아생전 선행 증거를 내보입니다. 베드로가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다비다를 위해 기도하고 외치자, 다비다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다비다를 향한 신자들의 사랑과 베드로의 믿음의 기도에 주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은 복음 전파와 그분의 영광을 위해 기적을 베푸십니다.
● 더 깊은 묵상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았던 여제자 다비다의 죽음에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내가 참여하는 선행 혹은 구제 사역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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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일어난 기적
아무리 재주가 많은 사람이라도 무생물체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는 없다. 알파고 같은 첨단 로봇을 만들 수는 있어도 죽은 것을 살려 낼 수는 없다. 다윗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시 36:9)라고 고백했다. 한 생명을 죽음에서 건지고, 영원히 살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 중 죄와 사망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요 사망을 짊어진 존재다. 죽음이 사망이 아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가운데 태어난 것이 사망이다. 이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만이 참생명이다. 그래서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할 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죽은 육신이 살아나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죄와 사망의 운명을 안고 태어난 저주받은 존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다. 복음의 능력을 믿고 선포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우리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
또한 하루에도 몇 번씩 죽 끓듯 변덕이 심한 내가 믿음을 지키고 사는 것도 기적이다. 세상을 좋아하던 내가 하나님 은혜로 복음을 전하는 것도 기적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모든 기적이 우리에게 베풀어졌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 유재명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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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사도행전 9장 40절
사랑의 자리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다비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성도들은 그녀가 죽자 베드로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의 기도로 다비다가 다시 살아납니다. 주어진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했던 다비다에게 기적은 하나님 사랑의 응답이었습니다. 기적은 사랑의 동기에서 시작되고, 사랑의 관계에서 역사하며, 사랑의 현장에서 모두에게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성도는 사랑하는 일에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허황된 바람은 기적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기적과 능력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다. - 하용조
오늘의 기도
하나님, 하나님의 기적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를 보여 주는 도구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무엇보다 가장 큰 기적은 이기적이고 탐욕이 가득한 제가 하나님과 이웃을 전심으로 섬기고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기막힌 기적에 감사하며 진리의 말씀을 전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272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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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보여 주셨던 섬김과 나눔의 삶을 우리도 그와 같이 행하길 바라시는 예수님입니다.
박해가 잠시 잠잠해진 사이(31절), 베드로는 유대에 있는 여러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방문합니다(32a절). 그는 룻다에서 팔 년 동안 중풍병으로 누워 있는 애니아를 고쳐 주었고(32b~34절), 룻다에서 약 20km 떨어진 욥바에서 착한 일과 구제 사업을 많이 한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병들어 죽자 그를 다시 살렸습니다(36~41절). 이 때 베드로가 보여준 언행은 주님이 병자를 치유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실 때 하셨던 것과 거의 일치합니다(막 2:11; 5:40~41). 베드로는 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면서도 그 능력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34, 40절). 이와 같은 베드로의 사역으로 많은 사람이 ‘베드로’가 아닌 ‘주님’께 돌아왔습니다(35, 42절).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모든 말과 행동이 우리 삶의 기준이 되도록 하고,
그 섬김과 나눔,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자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병든 자들을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희생하시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면서, 그분께서 맡겨 주신 일들을 성실히 감당해 나가도록 하자
풍성한 결실은 온전히 주님께 맡겨 드리고, 매일매일 성실히, 그리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일꾼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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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기적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예수님의 모범을 따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은 기적을 베푸는 자의 능력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해 일어난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게 되고 믿지 않는 자들이 회심하게 되는 놀라운 성령의 손길을 목격하게 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의 영역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이 드러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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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떠나 곳곳을 다니며 성도를 돌아봅니다. 이때 주님이 그를 기적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베드로가 룻다에서 애니아라는 중풍병자를 고치자, 이 기적으로 룻다와 주변 지역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옵니다.
주님의 능력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역사해 그들을 믿음으로 이끕니다. 또 베드로는 욥바 교회에서
섬김의 모범이었던 여제자 다비다를 살립니다. 이 기적으로 주님의 역사를 기대하던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많은 영혼이 주님께 돌아옵니다.
주님의 일꾼이 믿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헌신하는 곳에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 묵상 질문: 베드로는 어떻게 병을 고치고 죽은 이를 살릴 수 있었나요?
- 적용 질문: 내 일상에서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의 능력을 간구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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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다에서 이러한 사역을 하는 동안 근처 지역인 욥바에서 선한 영향력으로 살아가던 다비다가 병들어 죽게 되었고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씻어 다락방에 두면 근처에 있는 베드로를 급하게 찾아 그를 그 집에 초정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신 예수님처럼 기도 후에 그녀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했고 그가 다시 살아난 사건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떠남으로 보혜사 성령이 임하며 그가 행하신 일보다 더 큰일을 행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며 그의 이름으로 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인생이 되는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분을 온전히 의뢰하며 절름발이와 중풍 병자와 같던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키시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으로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오늘 하루의 삶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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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베드로를 통해 룻다에서 중풍병으로 누운 애니아를 일으키시니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행9:32~35)
또한 욥바에서 심히 많은 선행과 구제를 한 여제자 다비다가 죽은 것을 다시 일으키시니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행9:36~42)
주께서는 지금도 이러한 믿음의 기도를 통해 병든 자와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 구원하십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5:15)
이것은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입니다
"그 거주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사33:24)
주께서는 죄인을 사망에서 일으키시고, 넘어진 자를 수렁에서 일으키시고, 실패자를 절망에서 일으키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줄 믿습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2)
우리를 이렇게 일으키신 것은 주와 함께 하늘에 앉히시려는 것입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6~8)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어나 여호와께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렘31:6)
그때에 저들이 다 비틀거리며 엎드러질지라도 우리는 일어나서 바로 서며 힘차게 걷게 될 줄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시2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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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통한 믿음, 기적을 통한 확신” 안광복 목사
사울이 회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을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 내려가 거기서 중풍 병으로 여덟 해나 누워있는 애니아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가 애니아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하니 곧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성령 충만할 때 하나님은 믿음을 주시고 담대한 능력을 주십니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옵니다.
이 때에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한 욥바에 사는 다비다라는 여 제자가 병들어 죽습니다.
욥바는 룻다와 가까이 거리에 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베드로가 룻다에 있는 것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욥바로 와 달라고 간청합니다.
제자들은 이미 죽은 다비자의 시체를 씻어 다락방에 누인 후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릴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베드로를 부릅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지체 없이 욥바로 가서 다비다의 시체가 있는 다락방에 올라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죽은 다비다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자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입니다.
베드로는 죽은 다비다를 살리는 놀라운 기적을 이루어냅니다.
이는 베드로의 성령 충만한 능력과 죽은 다비다를 살리고자 하는 사도들의 사랑으로 이룬 기적의 결과입니다.
기적의 결과를 온 욥바 사람들이 알게 되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게 됩니다.
모든 기적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기적은 많은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게 합니다.
오늘 하루도 복음의 능력을 믿고 기적의 확신을 가지고 가족과 이웃에게 말씀을 전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 라파 되시는 하나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굳건한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 믿음의 역사가 날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능력으로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성령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 일상에서도 사건으로 나타나게 하셔서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모든 성도들의 몸과 마음을 고쳐주시고
영적으로 잠자는 영혼들을 깨어나며 죽은 영혼들이 다시 살아나는
회복의 역사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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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사도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려주는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여기서 보시면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욥바에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욥바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항구 도시입니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할 때 이 항구를 통해서 두로 왕 히람이 레바논에서 목재를 실어 왔습니다(대하 2:11-16). 또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 배를 타기 위해 거쳤던 항구가 욥바입니다. 그런데 이 곳에도 복음이 전파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 여자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여성이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 특히 지위가 높은 집안의 많은 여성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 욥바에 사는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었습니다. 1세기에는 사람들이 보통 2가지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사도바울도 유대식 이름은 사울이고, 로마식 이름은 바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주로 상대할 때는 사울이라고 불렀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로마식 이름인 바울을 사용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비다는 아람어로 부르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바디다를 헬라식으로 부르면 도르가입니다.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비다를 헬라식으로 번역하면 도르가입니다. 그래서 다비다나 도르가나 같은 이름입니다. 다비다의 뜻은 원래 암사슴입니다. 암사슴은 당시에 아름답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비다는 아름답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다비다가 외모가 어떠한 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비다는 삶은 이름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습니다. 여기서 선행과 구제란 오늘 본문에 보면 가난한 과부들을 향한 선행과 구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39절을 보시면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다비다가 죽자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 즉 다비다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보여줍니다. 다비다가 살아 있을 때 가난한 과부들을 위해서 속옷과 겉옷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죽자 그에게 은혜를 입었던 모든 과부들이 그가 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주면서 울고 있습니다.
1세기 당시에 속옷와 겉옷은 단순히 입는 옷만 아니라 재산의 가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었을 때도 군인들이 속옷을 가지려고 제비를 뽑습니다. 또 겉옷은 외투만 아니라 낯에는 햇빛은 가려주고 밤에는 덮고 자는 이불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겉옷은 고가에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비다는 그가 쓰고 남은 물건을 나누어주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과부들에게 필요한 고가의 속옷과 겉옷을 나누어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살아 있을 동안 했던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더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단어는 “심히”입니다. “심히”라는 말은 “플레레스”라는 단어인데 성경에서 이 단어는 충만하다고 할 때 사용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심히” 라는 말은 “충만하게”라는 말입니다. 충만이란 가득찬다는 말이 아닙니다. 충만이란 흘러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비다는 가난한 과부들에게 적당한 선행과 구제가 아니라 흘러넘치는 선행과 구제를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왜 다비다가 적당한 선행과 구제가 아니라 흘러넘치는 선행과 구제를 했겠습니까?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은혜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은 적당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적당하게 사랑하셨다면 절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주시지 않습니다. 또 주시더라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적당한 사랑이 아닙니다. 흘러넘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비다가 왜 예수님을 따르는 여 제자였습니까? 또 왜 과부들을 위해서 흘러넘치는 선선행과 구제를 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을 부터 적당한 사랑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부터 흘러넘치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비다는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흘러넘치는 선행과 구제를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구제에 관한 말씀들을 봅니다. 특별히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을 봅니다.
출21: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24.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이 말씀에서도 왜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아야합니까?
그 이유도 우리가 애굽 땅에서 종이고 나그네였는데,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를 보면 복음 전도와 구제는 절대 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행6장에서도 예루살렘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과부들에 대한 구제를 먼저 사도들이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일곱 집사에게 맡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왜 구제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까?
그 이유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사랑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흘러넘치는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사랑을 받아 과부들 흘러넘치는 선행과 구제를 행한 다비다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래서 3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다비다가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서 다락에 누입니다. 보통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씻고 향유를 붓습니다. 그런데 향유를 붓지 않고 그냥 다락에 누입니다. 또 보통 당시의 관례대로 한다면 시체를 1층에 누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와서 조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체를 가지고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죽은 사람에게 사용하는 향유도 붓지 않고, 1층이 아닌 다락에 누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다비다를 다시 살리기 위함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사르밧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어떻게 합니까?
왕상 17: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여기서도 엘리야는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다락에 누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욥바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주실 것을 믿음으로 엘리야와 같이 다락에 다비다의 시체를 누였습니다.
그리고 3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룻다가 욥바에서 가깝습니다. 그래서 룻다에 베드로가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합니다.
특별히 왜 룻다에 있는 베드로를 청했겠습니까? 오늘 본문 앞 32-3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행9:32.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34.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룻다에 있는 애니아라는 사람이 중풍병으로 침상이 누운 지 8년이 되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애니야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그때 8년 동안 중풍병을 앓아서 누운 애니야가 일어났습니다. 그로 인해서 룻다와 그 옆에 있던 사론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룻다와 가까운 곳에 있던 욥바에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룻다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39절에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이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죽은 다비다를 위해서 우는 과부들을 보면서 다비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동안 얼마나 많은 과부들을 도와주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었는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40절에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다락에 있는 사람들을 다 내보냅니다. 여기서 내보다는 강제적으로 내보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죽을 딸을 살리려고 했을 때도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내보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당시에는 기도할 때 서서 합니다. 그런데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항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는 이 시신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시신 앞에서 무능이고 절망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은 나에게 없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주님 앞에 항복하오니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어 주시옵소서”라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렇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고 난 다음에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했던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도 “달리다 쿰” 이라고 했습니다.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다비다 쿰”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합니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바다야 일어나라”고 합니다. 여기서 일어나라는 것은 단순한 바람이 아닙니다. 여기서 일어나라는 것은 명령형입니다.
내 이름이나 내 능력이 아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고 명령했습니다.
마 10장 7절과 8절을 보면 예수님은 “마10: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면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을 때 입으로만 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병자를 고쳐주는 능력을 주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주십니다. 또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능력을 내가 거저 주었느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예수님으로부터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일어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다비다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병자를 고쳐주는 능력을 주옵소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옵소서,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주옵소라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능력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특히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실재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죽음보다 더 무서운 영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영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영적으로 죽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족들이 영적으로 죽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내가 영적으로 죽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다비다야 일어나”고 한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적으로 죽은 자리에서 날마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41절과 42을 보시기 바랍니다.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룻다에서도 베드로가 애니아의 중풍병을 고쳐주었을 때 룻다에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죽은 다비다가 살아난 것을 보고 온 욥바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이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주신 목적은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역사는 없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때만 특별히 일어났던 기적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기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내게 영적으로 죽었다가 살아가는 기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영적으로 살아나는 기적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나를 통해서 주님을 믿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마지막 본문 4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려주고 여러 날 욥바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있었던 곳이 무두장이 시몬의 집이었습니다. 무두장이란 가죽수선공입니다. 지금은 가죽수선공이 전문직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구두수선공은 사람들이 절대 접촉하지 않는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죽은 동물의 시체를 만지는 것만으로 부정하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가죽을 만들려면 동물을 죽여야 합니다. 그러면 동물의 시체를 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두장이는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을 머문다면 살려준 다비다의 집에 머물렀어야하지 않습니까? 또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려주었기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집에 머물기를 바랬겠습니까? 그런데 왜 베드로가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는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렀습니까? 죽은 자를 살려주었던 베드로가 자신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공생애 시절의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과 베드로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이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제자들을 강제적으로 재촉하셔서 그 곳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그곳을 떠나서 다시 산에 혼자 올라가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겠습니까? 만일 그 자리에 계속 있으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고 제자들도 높은 자리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또 굳이 자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오천 명을 먹이셨지만, 자신도 영광을 받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자리보다 혼자 하나님에 서 있는 것을 더 좋아하셨습니다. 또 제자들도 절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에 베드로라면 절대 무두장이의 집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죽은 자를 살려주었다고 하면서 그 집에 계속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이 능력이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빨리 그 장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이 모든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또 죽은 자를 살리는 것보다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온 것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베드로는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죽은 자가 살아난 것보다 더 큰 기적이 무엇입니까?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주님께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도 다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자는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
러나 예수를 믿는 자도 죽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죽은 자가 살아난 기적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최고의 기적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구원의 은혜에 늘 감사하면 찬송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7월11일 동인천 지하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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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 베드로의 기도로 죽은 다비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록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발생되니 엘리야에 이어, 엘리사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에 이어 그의 제자인 베드로에 의해 일어납니다. 그 후에 사도 바울에게도 이어집니다. 특별히 다비다의 소생은 종합작품이기도 합니다. 즉, 과부들의 믿음, 베드로의 무조건적인 순종,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소 베푼 다비다의 선행과 구제라는 점입니다.
만약 그녀가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그토록 많이 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감동하지도, 특별히 죽은 사람을 살리려는 그런 무모한 짓을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다비다가 부활의 은총을 경험한 것은 바로 그녀가 쌓은 선행과 구제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지는 않지만,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에 그럴 것입니다. 주변에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질병과 물질로 고통 받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쌓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착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이 우선이라고 봅니다. 그런 마음가짐이 없이 착한 일을 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바쁘기 때문입니다. 다음 의지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강하게 마음먹었더라도 여건과 환경이 방해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아까운 시간, 우리가 쓰기에도 부족한 물질, 또한 그것보다 더 급한 일, 기타 등등이 포함 될 수 있습니다. 제거해야 할 장애물입니다. 또한 막상 착한 일을 하려면 주저하게 하는 것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남들의 곱지 않은 시선, 하지 않던 일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어색함 등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자유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 이름을 위하여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다 분명히 인식한다면, 자연스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은 착한 일을 하고 나서일 것입니다. 슬그머니 보상심리가 작동될 수도 있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 섭섭한 마음이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위기입니다. 조금이라도 공치사가 들어간다면 착한 일을 하고선 곧장 시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 주님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고, 또한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결국 마음을 비우면 됩니다. 빈 마음에는 어떤 목적하는 것이 없으니까요.
그런 뜻에서 ‘다비다’의 이름이 참 어울리는 이름 같습니다. 난센스로, 한글로 하면 다 비웠으니까요. 상급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지상에 상급이 있다면 착한 일이 아니죠.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땅에서의 영광! 우리는 결단코 받아서도 안 되고, 누려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선행과 구제는 장차 우리가 받고 누릴 하늘에서의 영광을 위한 일입니다. 다비다가 그 좋은 모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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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룻다와 욥바에서 베드로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복음의 확장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확장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도시에서 많은 이들이 믿게 되었고 이제 이스라엘 전지역으로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빌립의 사마리아에서의 사역과 에디오피아 사람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는 것까지 나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샤론 평야지역에 복음이 확장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샤론 평야는 남쪽으로는 욥바에서 북쪽으로는 갈멜산까지 이르는 해안 옆의 긴 평야지역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욥바라는 해안도시와 그 동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룻다라는 도시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Ac 9:32) 베드로가 사방으로 복음을 전하며 룻다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성도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곳에 이미 믿음의 공동체 곧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공동체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릅니다. 혹자는 빌립에 의해 복음이 전해졌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스데반과 함께 사역자로 세워진 여섯 명의 사역자 중에 빌립이 아닌 다른 사역자가 세웠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또 다른 무명의 사람이 세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위하여 이름 없이 사역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이르렀을 때도 역시 그곳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Ac 9:36)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었고 그는 이미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에 그를 '다락'에 누이었다고 말합니다. 아마 그 다락은 교회가 모여 예배하는 장소로 사용되던 장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바에는 누가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를 세웠을까요? 그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 세운 믿음의 사역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이 전방위로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이곳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는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헌신하는 것이 사람들 보기에는 전혀 표시도 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사람들이 눈여겨 보는 어떤 것보다 더 귀한 마음으로 우리가 가는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수많은 텔레비젼이 생중계를 하는 어떤 스포츠 선수보다 더 귀한 마음과 열심으로 그 일을 감당하고 있어야 합니다.
2.주님의 임재
베드로가 샤론의 평야 지역에 두로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오늘 본문에 일어난 두 사건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더욱더 힘있게 전해졌다고 말합니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Ac 9:35) 8년 동안이나 일어나지 못하던 중풍병자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Ac 9:41–42) 죽은자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달리다굼'하시면서 죽은 소녀를 살리실 때를 상기시켜 줍니다. 중풍병자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린 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그대로 닮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임재하셔서 중풍병자를 고치셨고 죽은자를 살리셨습니다.
엘리야가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엘리사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오늘날 자신들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은자가 살아나지 않음으로 많이 실망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살린 사람도 또 죽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죽은 자에게 말한 '일어나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의 단어와 같습니다. 죽은자가 일어나는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소생입니다. 그런데도 같은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것이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요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생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그것이 가리키는 부활을 알게 될 때 소생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키는 소생이 없다 하여 오늘날 우리가 부활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부활을 가리키는 것은 다양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죽은 자를 살려서 주님의 부활을 드러냈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주님을 드러내는 수단은 또 다양한 많은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적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만약 그런 기적이 있어 그것에 놀란다면 그것은 여전히 그것이 가리키는 부활을 모르는 것입니다.
죽은 다비다는 경건한 신앙인입니다. 그가 믿음이 없어 죽은 것이 아니고 그의 동료들이 믿음이 없어 살리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 그 일을 하기 원하셨을 뿐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다양한 임재방식을 알았으면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임하여야 한다고 우기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어떻게 임재하시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대에 지금 우리 안에 어떻게 임재하고자 하시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직하게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고자 하는 사람은 그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샤론 평야에 복음이 확장되게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곳에 베드로가 가서 복음이 더욱더 확장되고 있지만 사실 그 전에 이미 복음이 들어가 있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의 두 가지 기적으로 복음이 더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사건을 보면 베드로일지라도 그렇게 기적으로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 사울의 경우 또한 그렇습니다. 또한 우리들의 경우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주님의 임재를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시대에 주님의 방식으로 임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어떻게 임하고 어떻게 역사하실지를 미리 정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임하시고 어떻게 일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임재하고 일하실 것입니다. 샤론평야에 복음이 전해졌듯이 오늘 우리가 있는 곳에 복음이 전해지기를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1.베드로의 치유사역
베드로는 룻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애니아라는 중풍병자를 만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34절)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욥바에서 다비다라는 여제자를 죽음에서 다시 살립니다.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40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일이 베드로를 통해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가 행한 치유사역이 오늘날에도 일어날까요? 물론 당연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왜 오늘날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베드로 같은 위대한 인물이 없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에 의해 제한받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의 이적은 베드로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 이런 치유사역을 행할 때 그가 원하여 그렇게 하였을까요?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셔서 그 때 베드로에게 그런 마음을 주셨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아무 때나 죽은 자를 살린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에게 일어나라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런 마음을 주셨을 때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살면서 죽은 자를 살리고 싶은 마음은 꿀떡 같았겠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과 능력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자 하실 때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그런데 단지 치유사역이라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그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치유와 신앙
병이 낫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과 같은 놀라운 치유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한 치유는 복음이 아주 빈약한 곳에서 복음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정당성을 위한 표징(증거)로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한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치유사역에서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병보다 더 위에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 때문에 실족합니다. 믿음에서 멀어집니다. 병이 생기면 그것은 한 개인에게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면 결과는 어떻게 나올까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병이 낫는 사람이 있고 병이 낫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병이 나은 사람은 신앙이 더 좋아지고, 병이 낫지 않은 사람은 신앙이 더 추락할까요? 결코 그런 공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병이 고쳐짐으로 신앙이 잘못되는 사람도 많이 봅니다. 병이 고쳐진 것 때문에 더 이상한 신앙으로 빠지고, 급기야는 건강이 하나의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낫지 않는다고 신앙이 뒤로 갑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그 또한 죽은 자도 살리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지만 그의 병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병이 고쳐지지 않는 것 때문에 신앙이 뒤로 간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갔습니다.
병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 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병이 낫는 것 때문에 신앙이 더 좋아지고, 낫지 않는 것 때문에 신앙이 나빠진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보다 건강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건강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신앙은 건강 그 위에 있어야 합니다.
병 때문에 기도하였을 때 어떤 결과를 얻었었습니까? 병에 집중하여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그것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병에 걸렸을 때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합니다. 병이 고쳐지도록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병고침을 받는 것이 하나님 위에 놓이지는 않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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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지금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기를 죽이려고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러자 많은 믿는 자들이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그중에 일부가 다멕섹으로 피했습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이 이들을 잡으려고 대제사장의 위임장까지 들고 기세등등하게 나섰는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를 회심시키셨습니다. 회심한 바울이 역으로 유대 회당까지 들어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본문 31절 말씀처럼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32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당시 베드로는 교회의 기둥과 같은 위치에 있었지만 한가롭게 예루살렘에 머물 수 있는 처지가 못되었습니다. 그는 사방으로 다니면서 열악한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들의 가르침을 확인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을 베풀며, 또한 사역자들을 세우기 위해 많은 교회들을 순회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선교사들이 열악한 상황에서 활동하고 있고 목회자들 역시 쉽지 않은 상황에서 목회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바울과 베드로의 시대에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상황에 비하면 황제 사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모든 사역자들은 초대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더욱 겸손해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수록 깨닫는 것은 전에는 스쳐갔던 문구 하나하나가 허투루 기록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모든 것을 기획하고 나서 세심하게 계획하고 판을 짠 듯한 한 편의 드라마인 것입니다. 맞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창조로부터 마지막 심판 날까지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그대로 행하시는 드라마 각본입니다. 다만 드라마는 허구이지만 성경의 기록은 지금 이 시간에도 생생하게 움직이는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인 것입니다(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금 이 순간에도 말씀은 각 사람의 영과 혼과 육신까지 파고 들어가서 회복시키시는 역사가 있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4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두 가지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첫째는 중풍병으로 8년 동안 침상에 누워있는 환자를 낫게 한 것이고, 둘째는 죽은 다비다라는 여제자를 살린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8년 동안 침상에 누워있었다는 것은 현대 의학적으로도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고, 또한 죽은 다비다라는 여인 역시 갓 죽은 것이 아니라 시체를 씻었다는 것은 이미 확실한 죽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가 행한 기적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못지않게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행한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기적을 행하는 모습은 철저하게 겸손한 모습입니다. 중풍병자인 애니야를 낫게 할 때에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힘으로 고치는 체 하지 않고 그 치료가 그리스도의 행위라고 선언하였습니다(34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또한 죽은 다비다를 살릴 때에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내보내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40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사도의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축사 사역이나 치유의 은사를 행하는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저들은 성령의 은사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역자의 경우 겸손으로 행하지 않음으로써 타락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의 모습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그에게 임한 성령의 능력이 크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특별한 자라서 주어진 능력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필요했기에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특정한 사역자를 통해서 주어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에 예수님이 행하신 것처럼 커다란 능력을 행하면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사역자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자신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여러가지 은사와 기적을 체험했을 때의 반응도 마찬가지입니다.
42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고 때론 기적을 베푸시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나 우리를 높이 세우시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오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 절대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마귀에게 밥을 주는 것이며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이유라도 주님은 겸손한 자를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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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나온 자리(행9:32-43절)
사도행전은 1-12장까지를 보통 베드로의 사역으로 봅니다. 그러나 7장은 스데반 집사로 할애되고, 8장은 빌립집사의 사역입니다. 그리고 9장은 사도 바울의 회심과 바나바의 중재가 다뤄지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소로 낙향해서 깨어짐의 학교 학생이 되어 있을 때 다시 베드로에게 초점이 넘어옵니다.
성도와 여제자(32, 36절)
오늘 본문은 세 사람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룻다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애니아와, 욥바에 사는 여 제자 도르가, 그리고 그들 사이를 왕래하며 치유사역을 감당했던 베드로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애니아의 경우입니다. 그에게는 성도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우선 생각해 볼 것은 어떻게 룻다에 성도들이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초대 교회는 핍박으로 흩어진 사람들에 의해서 곳곳에 복음의 불길이 번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가운데 행8:40절을 보면 빌립이 아소도에서 가이사랴로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룻다는 아소도와 가이사랴 사이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빌립이라는 사람이 룻다를 지나면서 그냥 지나쳤을 리는 만무합니다. 그래서 룻다에서도 복음을 전했고 거기에 성도들이 생겼다는 것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행 2:41절에 옛날 성경에는 제자의 수가, 개정 개역 성경에는 신도의 수가 삼천 명이나 되었다고 했는데 이 때 제자, 혹은 신도는 프쉬케(yuchv)입니다.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성도들이라는 말은 하기오스(a{gio")입니다. 구별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반면에 욥바에 있는 도르가는 여 제자라는 구별된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 여제자라는 말은 마데트리아(maqhvtria)입니다. 마데테스가 남자 제자를 지칭하는 말인 것을 생각해 보면 마데트리아는 여제자를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런 호칭의 차이가 나타났을까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주께로 돌아온 사람들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룻다의 성도들은 그래도 구별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제자인 도르가는 그보다 훨씬 헌신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아마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호칭을 구별해 쓰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배우는 사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는 보통 열두 제자를 의미했지만 사도행전에서 제자는 성도와 비슷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 제자라는 것이지요. 아직 여성들에 대한 편견이 많았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여제자라고 쓰고 있습니다. 뭔가 도르가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특별히 헌신된 사람이라고 차별화하고 싶은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그들 사이를 오가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 사역을 감당하면서 성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성도들의 고난관(33, 37절)
또 하나 주의해서 보셔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인 애니아와 여제자인 도르가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인 애니아는 중풍 병에 걸렸습니다. 8년이나 중풍 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풍이라는 병은 본인도 본인이지만 주변 사람들도 힘들고 지치게 만드는 병입니다. 육신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고통이 얼마나 힘이든 것입니까?
도르가의 경우는 더 심합니다. 본문에 뭐라고 합니까? 37절입니다. 병에 걸려 죽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병인지 성경은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병에 걸려 제대로 살지 못하고 갑자기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도, 여제자도 병에 걸리 수 있다는 성경의 냉엄한 현실 앞에 섭니다. 그렇지만, 성도는 그 다음이 다릅니다. 중풍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반응하는 것이 다릅니다. 사업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다릅니다. 시험에 탈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다른 사람들이 성도들입니다.
아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사람, 애나아와 도르가에게 “당신들은 중풍에 걸리고,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는 다면 그들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오히려 ‘아닙니다! 나는 나의 질병 때문에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돌아가시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를 믿습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서 그것을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환경적인 것 때문에 내 속에 있는 소망이 깨지지 않습니다. 평안이 소실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의 고난관, 질병관입니다. 내게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회의에 빠지는 것은 성도의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씀드립니다. 성도는 삶의 모든 영역을 성경적 사고방식으로 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영역들 가운데는 고난, 질병, 사업의 실패, 시험에서의 좌절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근과 핍박, 적신, 곤고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내가 원하지 않는 어떤 환경에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성도인 우리에게 주신 소망에 관한 이유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지나간 자리(39절)
그런데요? 도르가가 죽은 후에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반응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이 병들어 죽을 수가 있어? 저 사람 가짜 신자였던 것 아냐 라든지, 저주를 받은 거야, 죄가 있었던 거야!”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사고방식을 경계해야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슬퍼하며 아쉬워했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동안 자신들에게 베풀어준 증거들, 특히 의류 업계에 봉사했던 것처럼 보이는 도르가가 지어준 셔츠며 속옷을 보이면서 그가 떠난 자리를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슬퍼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보내서 베드로를 청했습니다. 아까운 사람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룻다에 사람을 보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룻다에서 욥바까지의 거리는 약 8Km입니다. 도보로는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왕복 6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고 불러온 것입니다. 왜요? 사람들은 도르가를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너무 아까운 사람, 가까이 두고 싶은 사람이 떠난 것입니다.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마음이 풀릴 것 같습니다. 그만큼 그가 떠난 자리가 컷 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내가 떠나간 자리에 대해서 묵상할 필요를 느낍니다.
목회자들도 사역을 하다보면 두 가지 평가가 엇갈립니다. 떠난 뒤에 “아 그 분이 진실한 분이었구나! 말씀을 성실하게 전했구나. 좋은 목회자였구나.”하는 평가가 있기도 하고, “아이고 그 양반 잘 떠났네. 어떻게 그런 사람이 목회자가 될 수 있지”하는 평가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지나간 자리를 아쉬워하면서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 쪽을 향해서는 얼굴도 돌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입니까?
저는 과거에 섬겼던 교회를 생각할 때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어떤 분들은 지금도 아쉽습니다. 함께 하고 싶고, 가까이 두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꿈에라도 다시 만날까 두렵습니다. 얼마나 힘들게 하던지 말입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저나, 여러분들이 떠난 자리에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반응은 바로 내가 성도로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평가가 됩니다. 그것은 꼭 죽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현재의 삶 가운데서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에서도 드러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진지하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도는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도르가와 같이 칭찬과 아쉬움과 그리움을 남기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공동체에서 내가 지나간 자리에 어떤 이야기들이 회자될 것인가? 그것은 나의 현재적인 삶에 대한 성적표이기도 합니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34, 40절)
성도에게 있어서 또 하나 중요한 사고방식은 그리스도께서 주셨다는 주재권적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경륜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노력하고, 애써서 얻은 결과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내게 그런 시간과 재능을 주셨음을 고백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이 부분이 그렇게 쉽게 정리되지 않는 경우를 얼마나 자주 만나는지 모릅니다. 내가 영광 받기를 우리는 생래적으로 좋아합니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사람들이 나를 주목할 때, 사람들이 나를 높이려고 할 때 이런 자기 부인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은근히 내가, 내 능력으로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베드로 사도는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확고한 정리가 되어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미 우리가 살피고 지나온 3:12절의 상황은 아마 가장 위험스러운 순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이 베드로를 주목하면서 찬사를 보냅니다. 베드로의 권능인 것처럼 기이히 여깁니다. 그럴 때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것이 나의 능력, 나의 경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씀한 바 있습니다.
이미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는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본문 34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내가 낫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저 한 시대에 사용되는 그리스도의 종에 불과합니다. 능력의 원천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도르가 사건에서 좀 더 확연해 집니다. 40절입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하고 돌이켜”입니다.
무슨 베드로에게서 초자연적인 능력이 발출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뒤로 돌아서 기도하고 다시 돌이켜 말하는 것입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의식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치유로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치유와 표적들을 베푸시는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저는 도르가가 지나온 삶의 자리를 묵상하면서 내가 지나온 자리를 생각해 봅니다. 열심히 살아온다고 살아오기는 했는데... 과연 내가 지나온 자리에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그래서 오늘도 내가 지나온 자리에 아름다운 이름이 남도록 살아야 한다는 성령의 음성으로 하루를 열어 봅니다. 잘 살아봅시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건강하게 나누고 베풀며 살아봅시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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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이방인 선교를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베드로의 사역을 소개합니다. 그는 룻다와 욥바에서 중풍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이적을 행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전체 하나님은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을 통해 성도들이 장차 고통과 질병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사탄의 권세는 ‘죽음’을 무기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굴복하게 만들지만, ‘부활의 소망’으로 무장한 그리스도인은 능히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5장 55~58절). 그 어떤 사망의 위협에도 위축되지 마십시오.
32~34, 36~40절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요한복음 5장 1~9절), 죽은 소녀를 살리신(마가복음 5장 41절) 주님이 이제 베드로를 통해 침상에 누운 지 8년 된 애니아를 고치시고, 죽은 다비다를 살리십니다. 한때 십자가의 길을 막아서고, 칼을 들어 원수의 귀를 치고,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이제 주님을 닮아 하나님의 자비와 하늘의 능력(성령)으로 무장한 ‘작은 예수’가 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수많은 ‘작은 예수’(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일으키십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35,42절 애니아와 다비다가 일어나자 룻다와 사론과 욥바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베드로를 높이지 않고, 그가 전하는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일꾼은 설교, 강의, 저작, 전도, 봉사 등 모든 행위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36,37절 선행과 구제로 본이 된 제자 다비다처럼, 때로는 선한 삶이 이 땅에서는 보상받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많은 선행과 구제가 질병과 고난과 이른 죽음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이 땅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삶을 하늘에서 판단하시고, 마지막 때에 모든 인류를 공평한 잣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38,39절 ‘슬픔’은 불신앙이 아니라 긍휼의 표현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고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 이웃의 구원을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 주위에 고통당하고 슬퍼하는 이웃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그리고 어떻게 그들의 고통과 슬픔에 참여하고,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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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많은 문제들과 생각들로 세상에 매여 있는 나의 모습에서 돌이켜
날마다 그 눈을 들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과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도록 성령의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며
주어진 사명을 넉넉히 감당하는 제자 된 삶을 살아가기로
날마다 새롭게 결단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님의 말씀 앞에 섭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여 주시고,
말씀 속에 담긴 주님의 메시지를 깨닫고,
그 말씀을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송을 주님 앞에 올려 드리며,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