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모임에 영길이가 전날 밤 새벽 5시까지 바둑을 두고 혼자 운전해오느라 엄청 애먹을 것이다.
그렇게 강화도 모임을 끝내고 바로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17일 행사를 끝내고 또 야간근무 후 18일, 19일 쉬는 날, 미리내 엄마랑 교대근무자와 손뼉 딱치고 교대 후 예천을 떠나 충남 서산으로 떠났다.
이렇게 주야장차 시간만 나면 떠나는 것은 노조활동할 때부터 일단 무슨 활동을 하려고 나서면 거기에 시간을 주로 뺏기니 가족들과는 뒷전이었다. 그래서 미리내 엄마는 늘 불만이었고....그래서 노조활동 끝나면 시간되면 놀러 다니자, 애들도 대학가니 더구나 다녀보자 했었다. 그런데 노조활동 그만두자 민족문제연구소와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민족문제연구소 경북북부지부 활동은 창설부터 새로하는 조직이라 시간을 너무 뺏겨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서로 부부간에 타협한 것은 주간근무는 낮이니 할 수 없고, 야간근무 때는 낮동안 사회단체활동을 하고 비번일, 휴일 이틀은 둘이서 놀러 다니자고 시간할애을 약속했다. 그런데 비번일, 휴일에도 주로 내가 시간을 더 쓰는 편이다. 그런데 어찌 되었건 이번 강화도 모임 후 첫 근무 한주기(주간, 주간, 야간, 야간, 비번, 휴일 - 3조 2교대 식으로 주주야야비휴)를 지나고 바로 철새를 보러 떠났다. 이젠 이력이 생겨 밥, 반찬, 간식거리, 카메라 간단히 챙겨 무작정 떠나는 것이다. 갔다하면 1박 2일은 쉽고, 더러 지정휴일까지 겹치면 2박3일이 쉽다. 그리고 동해 쪽으로 가면 망상해수욕장 앞에 있는 망상수련원에서, 서해 쪽으로 가면 무창포수련원, 속초 쪽으로 가면 낙산수련원에서 쉽게 잔다. 그외에는 찜질방에서 잔다. 경비도 별로 들지 않는다. 이를 이름하여 시간할애하기.
<11월18일, 서산 벌판>
<철새 탐조대 - 새가 사람을 보면 안정을 취하지 못한다고 새가 사람을 보지 못하게 짚으로 가리개를 만들어 막아 놓았다.>
<철새들이 쉬고 있는 모습들 - 하늘을 나는 것은 가창오리인 거 같다.>
<간월호의 철새들. 앞에 점점이 보이는 것은 기러기들의 헤엄치는 것이고, 뒷쪽 오른쪽에 섬처럼 보이는 것은 가창오리가 물에 떠있는 것이다.>
<가창오리가 날아 오른다. 가운데 섬처럼 보이는 것이 카메라에 잡힌 군무시작이다.>
<가창오리 군무 -낙조가 끝나고서야 날아 올랐다. 거리가 500미터는 족히 넘어 보인다. 그래서 새가 군무를 추는 것이 호수 가운데 섬처럼 보인다. 그날 따라 날이 꽹하게 맑지 않고 안개가 약간 있었다. 180밀리 망원렌즈로 찍은 것인데 저정도 거리의 철새를 찍으려면 600밀리는 돼야한다니 또 맘이 끌리네>
<기러기의 V자로 날기>
<간월도 쪽으로 낙조가 시작되고>
<서산낙조- 안개로 해조차 명확하지 않다.>
<18일 저녁, 간월도 쪽 마지막 낙조 - 역광이고 어두워 플래쉬를 썼는데 낙조에 촛점을 맞추니 얼굴이 약간 흐리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보고 싶어하던 철새들의 군무를 이번에는 보고자 맘 먹고 떠났다. 상주에서 고속도로타고 경부선으로 옮겨타고, 다시 대전당진고속도로타고 서산에 진입, 천수만 철새 휴게소에 도착하여 준비해간 점심을 먹고 15시 30분, 철새 기행전 버스에 승차했다. 차가 떠나기를 기다리는데 우리 뒤에 앉은 아저씨가 "이제 먹고살만하니 별 걸 다 구경하러 다니누만. 뭘 보겠다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그먼 거리를 와서...." 하여서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현대에서 천수만을 막아 서산간척지를 개간하는 바람에 몰려오기 시작한 철새, 그중에서도 가창오리의 군무를 보고 싶어서였다. 버스타고 가면서 보니 그래도 새는 큰고니가 보기 좋았다. 학이라고 하는 것은 두루미를 말하는 것이고 황새는 황새목이라 한다. 탐조대에서 바라본 철새들은 여러가지가 있었다. 철새는 먹이가 풍부하고 기온이 적당한 이곳을 찾아오는데 사철 관찰이 가능하다고 한다. 간월호 주변을 도는 제방길, 1시간 반을 도는데 새가 날아 오를 때는 탄성이 저절로 나왔고, 앉아 있는 모습만 봐도 좋아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안내하는 아줌마 김인숙씨 말씀이 "호주에서 칩을 부착한 도요새가 무리를 이탈했는데 그 한마리가 이동한 경로를 추적하니 무리를 이탈했음에도 혼자 한시간에 60킬로미터씩 꼬박 7일 밤낮을 쉬지않고 먹지않고 날아서 카나다까지 갔는데 처음보다 몸집이 1/3이 되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뼛속까지 태우면서 날아가는 것이다"라는 설명에 모두들 감탄사가 나오고 숙연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렇게 탐조를 마치고 마지막 경로를 도는데 그렇게 날아오르지 않던 가창오리가 간월호 저만치에 모래톱처럼 까맣게 앉은게 보이더니 약 1분가량 날아 올랐다. 텔레비젼에서 보는 것과 또 다른 모습이었다. 가창오리도 날고 기러기도 나는데 기러기는 큰새라 너울너울 날고, 가창오리는 두 주먹정도 크기라 살랑살랑 나는 것으로 보기에도 구분이 되었다. 가창오리는 떼로 날고 기러기는 항상 v자로 날았다. 그렇게 탐조를 마치고 차에서 내렸는데 간월암 쪽으로 낙조가 진다. 얼른 카메라를 대고 몇장 찍으며 돌아서는데 간월암에 해가 걸린다. 간월암의 낙조가 일품이라더니 허명이 아니더라. 과시 암행어사 박문수의 장원급제시 제목이 낙조(落照)라더니 그 시의 벽산은 간월암이라 바꾸더라도 바다와 섬과 암자에 걸리는 낙조는 천하제일이더라. 다만 현대의 대교 위에서 바라보는 것이 나룻배에서 바라보는 것 보다는 영판 아니리라.......그 시간에도 가창오리가 날아 오른 것이 너무 적어서 해지기까지 바라보며 한번 보고 떠나자하여 낙조를 보고 있는데 "지는 해는 붉음을 토하며 벽산에 걸려있고 찬기러기 날개짓 다하여 흰구름 사이를 날아가네..... " 박문수의 시가 생각나서 돌아보는 순간, 해는 졌는데 그때까지 움직이지 않던 가창오리가 여름날 하루살이처럼 까맣게 날아 오른다. 불과 2분을 날았을까, 그렇게 군무를 추고 내려 앉았다. 해가 지고 어두워서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가창오리가 세계에서 70만 마리 가량 되는데 번식하는 러시아에서는 군데군데 서너마리 보일 뿐, 열마리도 보기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가창오리가 처음 우리나라에 왔을 때 우리나라 조류학계에서 가창오리가 왔다고 러시아 바이칼 쪽에 공문을 보냈더니 러시아에서 오리과 한종류이지 가창오리가 아니라고 하더란다. 계속 공문을 보냈더니 러시아에서 우리에게 가창오리가 아닌 것을 증명하고 비웃으려고 왔는데, 막상 가창오리가 50만마리가 떼지어 군무를 추는 것을 보고 한국은 정말 축복받은 땅이라고 찬사를 쏟아내고 갔다고 한다. 그 가창오리의 90%가 서산에 오는데 이번에 우리가 본 것은 1차 다 호주로 떠나고 15만 마리 가량 남은 것을 본 것이라 한다.
더 보이지 않게 되자 숙소를 찾고자 서산을 떠나면서 언젠가 읽었던 조류학자 부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해방 후 북한으로 간 원광호 박사. 6.25가 터지자 자기는 뒤따라 가마 하고 12살난 아들 원병오 박사를 먼저 월남시켰다. 그러나 그길로 부자는 만나지 못하고 휴전이 되었다. 아버지가 새박사이니 나도 새박사가 되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생각한 아들은 자기도 새박사가 되었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가 전공인 북방 쇠찌르레기를 연구하기 시작.....어느날 철원 근처에서 발목에 고리를 찬 북방쇠찌르레기를 발견한 아들, 아버지가 살아있어 날려 보낸 것임을 직감하고 새를 잡아보니 과연 아버지의 필체와 서명이 있는 고리라, 뛰는 기쁨으로 자신의 살아 있음과 안부를 전해 날려보내니 아버지가 이를 잡아 다시 날려보내며 안부를 전하고....그렇게 몇년을 연구하며 부자는 북방쇠찌르레기를 매개체로 연락을 주고 받다가 서슬퍼런 5공 시절임에도 세계조류학자 모임이 스톡홀롬에서 열리자 순수하게 조류학자로서 방문을 신청하고 아버지도 그리하시라 전하고.....그래서 결국 거기에 서로 가서 부자가 상봉을 했다고.....나는 그 이야기를 읽고 감동해서 눈물이 흘렀었다. 이 부자는 서로를 만나고 서로를 잊지 않기 위해 새를 연구해서 이런 일가를 이루었는데 나는 무엇을 이루었는가? 돌아본 나는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제자리.....
<19일 아침, 무창포 앞바다>
<무창포 앞바다>
간월암의 낙조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숙소를 찾아 떠났다.....숙소는 무창포에 있는 코레일연수원으로 정하고 찾았다. 낙산, 망상, 무창포 중 가장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그렇게 하룻밤을 묵고 아침에는 무창포 바닷길은 바닷길이 나는 물때가 아니라 보질 못하고 영주로 돌아왔다. 철새의 군무 5분을 보고자 560킬로미터, 이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 겨울이 깊어지기 전 하늘은 나는 기러기를 볼 때마다 나는 가창오리리의 군무를 생각하리라.....그 군무처럼 큰고니 자태처럼 내마음의 정서도 그 어떤 노래로 가득차 흩어짐이 없었으면.....
2010.11.20.
영주에서 동규 올림
첫댓글 좋은 글 , 그림 잘 감상했네..항상 즐겁고 여유있는 삶을 사는 자네 모습 보기 좋구만..
총무님은 이젠 전국을 주유하며 50대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군...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