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장갑 엄마, 나도 장갑 하나 사줘. 응? 소영이는 벌써 한 시간째 엄마를 조르고 있었다. 엄마는 단칸방 한구석에 앉아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구슬만 꿰고 있다. 커다란 소쿠리에 구슬이 산처럼 쌓여있다. 지치고 서러워진 소영이는 울먹울먹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애들은 앙고라 털장갑도 있고 눈 올 때 신는 부츠도 있는데.... 난 장갑이 없어서 눈싸움도 못한단 말야. 엄마는 여전히 말이 없다. 소영이는 더 약이 올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씨.... 애들이 나도보 집에가서, 엄마랑 같이 구슬이나 꿰래! 엄마는 재빠르던 손놀림이 갑자기 멈춰졌다. 누가 그랬어? 누가 너더러 구슬이나 꿰랬어? 나직하면서도 노여움이 묻어 있는 엄마의 목소리에 주눅이든 소영이는 그만 생각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몰라! 애들이 그러는데 엄마가 연탄 배달을 하도 많이 해서 내 얼굴이 까만 거래! 소영이는 미닫이문을 꽝 닫고 나와 버렸다. 등뒤에서 엄마의 한숨소리가 포옥 새언왔다. 눈 내리는 골목길을 외투도 없이 터벅터벅 걸으며 소영이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사실 그런 어리광을 부릴 생각도 없었고 밤낮으로 힘들게 일하시는 엄마를 슬프게 할 생각도 없었다. 단지 점심시간에 눈싸움을 하다가 장갑이 없어서 손이 조금 시렸을 뿐이었다. 그냥 혜진이의 예쁜 앙고라 털장갑이 조금 부러웠을 뿐이었다. 그런데, 괜스레 엄마를 속상하게 만든 것이다. 찬 바람이 헤진 내복을 뚫고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소영이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코를 훌쩍이다가 별이 뜨고 나서야 집에 들어갓다. 엄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온몸에 기운이 쭉 빠진 소영이는 따뜻한 방 안에 들어오자 졸음이 몰려와 아랫목 에서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잠결에 소영이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연신 귀 뒤로 넘겨주며 가슴께로 이불 끝을 여며주는 엄마의 손길을 느꼈다. 엄마는 그렇게 오래오래 소영이를 들여다보며 밤새 구슬을 꿰는 것 같았다. 붉은 전등불이 꺼지지 않고 아침까지 엄마의 손끝을 비추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미적미적 학교 갈 준비를 하는 소영이에게 엄마가 빨간색 벙어리장갑 한 켤레를 내밀었다. 엄.....마....... 장갑의 손등엔 하얀 털실로 뭉친 작음 방울까지 매달려 있었다. 소영이는 함박웃음이 되어 와락 엄마를 껴안고는 양손에 장갑을 끼고 나는 듯 학교로 달려갔다. 손끝까지 따스했다. 그날 오후, 신나게 눈싸움을 하고 집으로 가는 언덕을 오르는데, 저만치서 연탄 수레를 끌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소영이는 너무나 반가워 엄마에게 달려가 벙어리장갑을 깐 손 으로 엄마의 목에 매달렸다. 엄마, 엄마, 나 오늘 눈싸움해서 이겼다아! 손 하나도 안 시렸다아! 그래, 잘했다. 얼른 집에 가서 아랫목에 있는 밥 꺼내 먹어라. 엄마는 웃으면서 소영이의 얼굴을 어루만져 주셨다. 순간 소여이는 흠칫 놀랐다. 등이 오싹해질 만큼 너무나 차가운 엄마의손... 엄마는 다시 수레를 끌기 위해 벗어놓았던 장갑을 주워 끼었다. 그 추운 겨울 날씨에 차디찬 연탄을 나르는 엄마의 손에는 낡아빠져 여기저기 구멍이 나고 닳은, 얇은 고무장갑 하나뿐이었다. 소영이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연탄공장에서 성탄절 선물로 배급받은 작업용 털장갑을 풀어 자신의 벙어리장갑을 짜주셨다는것을.... 실이 얇아 이중으로 짜야 했기에 졸린 눈을 치켜뜨며 하룻밤을 꼬박 새워야만 했다느것을 ..... 그 해 겨울방학, 소영이는 오랫동안 밥을 주었던 빨간 돼지 저금통을 찢었다. 그 돈으로 몽실몽실한 털실 한 뭉치를 샀다. 그리고, 서투른 뜨개질 솜씨로 밤새 풀었다. 엮었다를 되풀이 하며 장갑 한 켤레를 짰다. 구멍이 뽕뽕 뚫려 있는 성근 장갑 이었지만 엄마는 그 어떤 선물보다도 더욱 기뻐했다. 그리고 소영이는 손이 켜져 손가락이 장갑안에서 퍼지지 않을 때까지 겨울마다 그 빨간 벙어리장갑을 끼고 또 꼈다. 엄마의 시린 손만큼이나 가슴 시렸던 사랑을 곱씹으면서... - 아랫목의 한부분 ★ 권미경님 엮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