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장군 곽재우와 ‘의병의 날’
황원갑 <소설가, 역사연구가>
6월 1일이 ‘의병(義兵)의 날’로 제정되었다. 지난달 18일 국무회의에 상정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개정안 가운데 6월 1일을 국가기념일 ‘의병의 날’로 의결한 데 따른 것이다.
이날을 의병의 날로 정한 것은 이날이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날이기 때문이다. 그날 1592년(선조 25)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이 6월 1일이다. 의병의 날 국가기념일은 공휴일은 아니지만 정부 주도의 행사로 치러져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더욱 깊이 되새길 계기가 되었다.
곽재우는 1552년(명종 7) 음력 8월 28일 의령군 유곡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본명이나 아호 망우당(忘憂堂)보다도 홍의장군이란 별호로 더욱 이름난 당대의 쾌남아였다. 그는 벼슬길을 외면한 채 초야에 묻혀 있다가 선조 25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산을 털어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간 유격대를 조직했으며, 뛰어난 전략과 빼어난 용병술로 상승불패의 신화를 남김으로써 ‘바다에는 이순신(李舜臣)이 있었고, 땅에는 홍의장군 곽재우가 있었다.’는 전설을 낳았다.
곽재우의 의병은 그해 5월 4일과 6일에 벌어진 거름강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26척, 합포해전에서 5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곽재우가 거름강전투에서 왜적을 통쾌하게 무찔렀다는 소식이 퍼져나가자 이웃 친구와 머슴 10명으로 출발한 홍의장군의 의병부대는 얼마 안 가서 2,000명을 헤아리는 대부대로 군세가 불어났다.
정암진전투는 홍의장군의 의병 활동 가운데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그해 6월 6일, 고바야카와(小早川) 휘하의 왜군 2만 대군이 의령을 점령하고 전라도로 침범하려고 정암진에 이르러 도하작전을 시도할 때 곽재우는 매복계를 펼쳐 적군을 전멸에 가깝게 궤멸시켰다. 그 뒤 왜군은 홍의장군의 의병부대만 만나면 “신장(神將)이 나타났다!”면서 도망치기에 바빴다. 홍의장군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경상좌방어사로 창녕의 화왕산성을 지켜냈다.
그러나 그는 임금이 내린 벼슬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내버렸다는 죄명으로 2년간 영암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풀려났다. 그가 벼슬을 끝내 마다한 것은 백해무익한 당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헛된 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한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은 김덕령(金德齡)을 죽이고, 이순신마저 죽이려고 덤벼든 선조(宣祖)의 엽기적 시기심과 악랄한 성품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곽재우는 창녕 비슬산 기슭에 망우정을 짓고 은거했으니 그의 자호 망우당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의병은 싸울 뿐이지 뽐내지 않는다.’며 필승의 전략으로 백전백승하던 유격전의 명장 곽재우가 향년 66세로 우화등선(羽化登仙)한 것은 1617년(광해군 9) 음력 4월 10일이었다.
의병은 ‘정의를 위해 일어난 군사’란 뜻. 정규군이 아니라 백성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군대다. 우리나라는 고조선 이후 일제강점까지 거의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왔고, 이에 따라 의병의 역사도 오래됐다. 의병은 관군(官軍)이 없으니 국가도 믿을 게 못되고, 내 힘으로 내 고을과 나라를 지키고자 일어났다. 우리가 숱한 위기에도 오랜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의병의 고귀한 호국정신, 희생정신 덕분이다.
천암함사태를 계기로 또다시 국가안보가 위기국면에 빠져들었다. 여기에 6.2지방선거와 맞물려 국론이 분열상을 보이고 있으니 매우 걱정된다. 이런 때일수록 국론을 통일하고, 적과 맞서 나라와 겨레를 내 힘으로 지키려는 의병정신을 되새기고 가다듬어야 마땅하겠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