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2018 국가 R&D 정책 포럼
기초과학 우수 성과 사례 10선 발표
메디톡스는 세계 최초로 액상형 보툴리눔 톡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 GIB
“저도 한 때는 미생물을 연구하는 기초과학자였습니다. 2013년 당시 한국의 작은 바이오벤처가 4700억 원에 로열티(기술사용료)까지 따로 받고 미국의 앨러간 같은 큰 글로벌 제약사에 기술을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은 기초연구에서 얻은 지식들 덕분이었습니다.”
지난해 한 해 동안만 1812억 원의 매출을 달성한 메디톡스의 정현호 대표는 5일 서울 국회의원회관에서 기초연구연합회 주최로 열린 ‘2018 국가 연구개발(R&D) 정책 포럼: 대한민국 기초연구의 새로운 도약, 어떠한 변화가 요구되는가?’에서 창업 성공 뒤에는 기초과학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기초연구연합회는 국가 기초과학 육성을 위한 정책을 발굴하고 제안하기 위한 단체로 지난해 9월 설립됐다. 대한기초의학협의회, 대한지질학회, 대한화학회, 생화학분자생물학회, 한국우주과학회 등 기초과학 분야 25개 학회가 소속돼 있다. 이날 연합회는 △학문 △경제 △사회 △문화 등 4가지 가치에 기여한 기초과학 분야 우수 성과 사례 10선을 소개했다. 정 대표의 사례도 그 중 하나다.
○ 매년 연구비 걱정하던 기초과학자, 시가총액 4조 원 기업 대표로
보톡스의 원료인 보툴리눔 톡신을 최초로 국산화 한 메디톡스는 정 대표가 2000년 선문대 교수직을 떠나 창업한 기업이다. 부작용 우려가 있는 알부민(혈액 속 단백질)을 쓰지 않는 액상형 보툴리눔 톡신 개발에 세계 최초로 성공해 앨러간의 러브콜을 받았다. 바이오 업계는 앨러간과 메디톡스의 기술 계약을 세계 6번째 ‘빅딜’로 평가했다.
정 대표는 “앨러간은 연간 1조 원에 이르는 비용을 R&D에 투자하고 있었지만 기초과학자가 없었다. 앨러간 대표가 이례적으로 직접 1년여 간 우리를 설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과거엔 기초 연구비가 지금보다 더 없었다. 당연히 연구과제 공모에서 계속 떨어졌고 10여 명 규모의 실험실을 운영하면서 매년 연구비를 걱정하며 지냈었다”며 “기초과학은 산업 전반의 기반이 된다. 연구자들이 안정적으로 기초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올해 3월을 기준으로 메디톡스는 시가총액이 4조 원인 회사로 성장했다.
이정은 경희대 우주과학과 교수가 기초과학 연구성과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 송경은 기자 kyungeun@donga.com
○ “소규모 과제 2개로 연구비 충당…안정적인 지원 이뤄졌으면”
또 다른 우수 사례로 발표에 나선 이정은 경희대 우주과학과 교수는 지난해 세계 최대 전파간섭계 망원경인 아타카마 대형 밀리미터 관측망(ALMA·알마)으로 원시별 주변의 원시행성계 원반을 탐사해 작고 멀리 떨어진 쌍둥이 별이 난류에 의해 탄생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최근에는 세계 최초로 원시행성계 원반에서 유기분자를 관측하는 데 성공해 별과 행성의 탄생 과정을 밝힐 새로운 화학적 단서를 제시했다.
이 교수는 “연구기획서 제안부터 논문 출판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다”며 “소규모의 일반연구자 지원사업과 중견연구자 지원사업을 통해 받은 연구비로 연구를 하긴 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하나의 연구과제로 수행했다면 좀 더 효율적인 연구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미국, 유럽 등 선진국들은 연구자들에게 안정적인 천문 관측시간을 확보해 주기 위해 수백 억 달러의 비용이 드는 고성능 대형망원경에 투자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경제 규모에 비해 투자 규모가 매우 작은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천문학 연구가 자발적인 연구를 통해 발전해 왔다고도 했다. 그는 “2025년 도입되는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JWT) 역시 1990년대 천문학자들이 제안한 것”이라며 “연구자가 주도하는 기초연구가 지금보다 더 확대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학문적 가치 넘어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가치 실현하는 기초과학
그 밖에 우수 성과 사례 10선으로는 △위상수학과 대수기하학의 두 이론을 통합해 새로운 4차원 공간을 찾아 60여 년 간 세계 수학계의 난제를 푼 박종일 서울대 교수 △전자 스핀 양자현상을 통해 차세대 자기 메모리 소자의 작동 원리를 밝힌 이경진 고려대 교수·박병국 KAIST 교수의 사례가 학문적 가치를 실현한 우수 성과로 꼽혔다.
경제적 가치 부문에서는 △세계적인 수준의 펩타이드 단백질 제조 기술과 바이오 신약 개발로 부가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김재일 광주과학기술원(GIST) 교수 △벤처 창업으로 자가혈당측정기의 핵심 기술인 혈당검사지를 국산화하고 세계 80여 개국에 수출해 1800억 원 매출을 달성한 광운대 차근식·남학현 교수의 사례가 소개됐다.
△난치성 희귀병인 샤르코마리투스병의 원인 유전자를 10개 이상 찾아내 분자진단기술을 개발한 정기화 공주대 교수·최병옥 성균관대 교수 △특정 오염물질이 대기, 토양, 물 등 환경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방법을 고안한 김기현 한양대 교수가 기초과학으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한 사례로, △국내에서 1억 년 전 익룡, 새, 공룡 등 고생물 화석을 발굴한 김경수 진주교육대 교수 △백두산이 다시 폭발할 수 있는 젊은 활화산임을 밝힌 윤성효 부산대 교수가 문화적 가치를 실현한 사례로 꼽혔다.
송지준 KAIST 교수는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계를 떠올리진 않았지만 뉴턴의 법칙이 훗날 기계를 비롯한 다양한 산업의 발전을 이끈 것처럼 기초과학은 목적성 없는 자율성과 다양성이 핵심”이라며 “기초과학은 모든 과학기술의 근간이다. 열매를 맺기까지 50~100년, 심지어는 수백 년이 걸릴 수도 있다. 국가의 미래 성장동력을 위해 저축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명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은 “아직도 기초과학 연구가 마치 학문적인 가치에만 몰입하는 것처럼 보는 시각이 있다. 이제는 기초과학을 비롯한 학계와 산업계, 정부, 시민사회가 함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발상을 전환해야 할 때”라며 “국민들에게 과학이 학문을 넘어 경제, 사회, 문화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하는 것도 기초과학 연구자들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이날 포럼에는 더불어민주당 변재일 의원과 정의당 심상정 의원, 국민의당 오세정 의원, 자유한국당 박대출 의원, 바른미래당 신용현 의원을 비롯해 김명자 회장과 노정혜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김승환 기초연구연합회 회장(포스텍 교수), 임대식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 등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