尙美會 - 삼국통일의 발자취를 찾아서
[모택동의 중국, 맥아더의 미국과 한국]
조갑제: 아까 말씀드린 백두산호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백두산함은 원래 미군에서 PC(Patrol Corvette)함이라고 불렀습니다. 哨戒艇(초계정)이라는 거죠. 700톤짜리입니다. 이 배를 인수해서 우리나라에 도착한 게 6·25 사변이 일어나기 한 달 전쯤입니다. 최근 그 배와 관련된 영화도 만들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이 배는 해군에서는 하나의 전설처럼 돼 있습니다.
이 배는 2차 대전 때 쓰던 배였습니다. 우리나라 해군이 미국 뉴욕에 가서 이 배를 인수해 오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처음 뉴욕을 출발해 파나마 운하를 거쳐 태평양으로 나왔습니다. 그 다음에 연료가 모자라 하와이에 일단 기항을 했습니다. 거기서 기름 싣고 처음으로 3인치 포를 실었답니다. 그 다음에 괌을 거쳐서 한국에 왔습니다. 그 때 배를 인수하기 위해 간 인원이 16명이었습니다. 그 배는 원래 70명이 타야 하는데 16명으로 인수한 겁니다. 당시 백두산함의 인수는 우리나라가 해군 배를 몰고 태평양을 최초로 건넌 겁니다. 한국의 마젤란이죠.
여기 尙美會도 해군과 관련이 많습니다. 우리 회원 중 한 분은 한국 최초의 해군이십니다. 저도 수산대학교를 나왔습니다. 회원 구성들이 그래서 해외 여행을 많이 하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700톤짜리 배를 가지고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요새는 20만톤급 탱커(Tanker), 10만톤급 항공모함 등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700톤이면 요즘의 요트 수준입니다. 그걸로 태평양을 건넌 겁니다. 이걸 인수하셨던 우리 회원께서는 그 후에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전하셨답니다. 인천 상륙작전 때는 영국 항공모함에 타셨답니다. 당시 항공모함 이름이 트라이엄프(Triumph)입니다. 1961년 인천지구 해군사령관을 마지막으로 軍門을 나오셔서 지금까지도 파일럿(導船士)을 하고 계십니다.
조선이 왜 망했느냐 이유를 따져보면 우선 尙武 정신이 없어 망했고 그 다음에는 진취적 정신이 없어서, 즉 바다를 멀리해서 망했다고 봅니다.
반면 신라는 달랐습니다. 삼국통일의 마지막을 뭘로 장식하느냐 하면 海戰으로 장식합니다. 676년 당나라가 손을 들고 물러가는, 삼국통일을 완성하는 마지막 전투는 육상에서 있었던 게 아니라 676년에 伎伐蒲(기벌포)라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기벌포라는 곳은 현재 錦江 하구로 추정됩니다. 기벌포라는 데서 당나라 해군과 신라 해군이 정면으로 붙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신라 해군이 이기면서 삼국 통일이 완성됐습니다.
신라는 해군을 상당히 중요시했습니다. 兵部(병부)에 船府署(선부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해양부를 만들었습니다. 동양에서 해양부를 별도로 만든 건 신라밖에 없었을 겁니다. 장보고가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원래 신라의 해상력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그걸 뭘로 알 수 있느냐. 일본의 천태종을 만든 엔닌(圓人)이라는 중이 장보고 시절에 당나라로 갔습니다. 이 때 세 척의 배를 이끌고 갔는데 그중 두 척은 파괴되고 한 척만 남아 살았습니다. 이 사람이 당나라에서 10년 동안 살면서 장보고의 부하들 도움을 받아서 공부하고 돌아올 때는 신라 배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신라배를 타고 돌아오는 과정이 그의 여행기에 잘 남아 있습니다. 물살을 가르듯이 편안하게 하카다까지 돌아오는 게 쓰여 있습니다. 그때 신라가 동지나해의 해상무역을 장악했다는 것은 신라 사람의 배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신라는 작은 나라였습니다만 항상 두 가지가 다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엄격하기도 하고 너그럽기도 하고, 文도 있고 武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말을 잘 탔습니다. 신라의 지배 민족들은 모두 말 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말도 잘 타고 배도 잘 탔습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지금까지 세계사는 누가 이끌어 갔느냐. 소총이 발명되기 전인 16세기까지는 말 타던 사람들이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즉, 기마민족 출신들-몽골족, 투르크족 등-입니다. 게르만 민족은 예외적으로 말을 잘 못타지만. 아무튼 이런 사람이 세계를 휩쓸다가 16세기부터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니까 그때부터는 배를 잘 모는 사람들이 세계를 재패했습니다. 아시죠.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그 다음에 미국 아닙니까. 미국이 해양 국가의 마지막 대제국이거든요.
이 배를 몬다는 것은 대단히 힘듭니다. 배를 몰고 망망대해로 나가면 뭐가 통하겠습니까. 아무리 글 잘쓰고 말 잘한다고 해도 자연 앞에서는 소용없습니다. 저 앞에 폭풍이 오는데 글 잘쓴다고 피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 때 통하는 건 오직 과학뿐이죠. 과학으로만 자연을 극복할 수가 있으니까 해양민족들은 자연스럽게 과학을 잘하게 돼 있어요. 과학의 힘으로써만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 바다를 항해할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모험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바다를 경유해서 서로 교통하는 과정에서는 개방성이 필요합니다. 무역을 해야겠죠. 이처럼 바다를 아는 것과 바다를 모르는 것의 차이는 천지 차이입니다.
과거에 동아시아가 잘 나가다가 왜 이렇게 돼버렸냐 하면 중국의 海禁(해금) 정책 때문입니다. 참, 그러고 보니까 올해가 상당히 의미있는 해네요. 명나라 때 鄭和(정화)의 대원정이라는 거 아십니까.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웠죠.
1405년, 명나라 永樂帝(영락제) 시대에 정화라는 宦官(환관) 출신 제독이 대함대를 만들었습니다. 함대 규모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배가 수백 척에 병력이 2만7000여 명이었습니다. 함대의 큰 배는 요새 톤수로 몇천 톤이 되는 배였습니다. 이들은 스리랑카에도 갔다가 마다가스카르까지 갔습니다.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하기 약 80년 전입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수집도 했습니다. 정화의 함대는 7차에 걸쳐 대항해를 했습니다. 그게 600주년 되는 해가 올해입니다.
그런데 그후 명나라는 어떻게 되느냐. 정화의 대항해가 끝날 무렵에 권력 투쟁이 일어나면서 다른 사람들이 집권했습니다. 새로 집권한 사람들은 큰 배를 만들어 무역하면 처벌한다고 아예 법으로 정해 버렸습니다. 딱 북한이 지금 하는 식이죠. 해상 봉쇄령을 내린 겁니다.
그래서 폴 케네디가 쓴 ‘강대국의 흥망’이라는 책에 보면 명나라의 해상 봉쇄령이 내려진 이때부터 동서양 힘의 균형이 逆轉(역전)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갈 때 세 척의 배를 이끌고 갔습니다. 산타마리아, 니냐, 핀타 이 세 척인데 그 배의 크기가 약 250톤 정도였습니다. 반면 정화가 대원정을 할 때 가져갔던 배 중 큰 배는 약 2000톤 규모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해상봉쇄령이 내려지고 무역을 못하게 되니까 서양의 발달된 문화를 수입하지 못하게 되고, 무역을 안하니까 외국 정보에 어둡게 되고 이런 이유로 서양의 과학기술에 밀리면서 결국 중국은 18세기, 19세기에 들어오면 아편 전쟁을 시작으로 영국에게 지고, 프랑스에게 지고 나중에는 결국 먼저 근대화를 한 일본에게도 쥐어박히는 등 약 100년 동안 서구 열강들에게 뜯어먹히는 나라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모택동이 1949년에 중국을 통일한 다음에 다시 중국이 성장하는 것 아닙니까. 중국이 급상승하는 겁니다. 중국이 잠에서 깨어난 거죠.
지금 우리나라 바로 옆에서 세계사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 중국이라는 인구 13억의 나라가 연평균 경제성장률 9%의 성장을 25년 연속으로 이루고 있습니다. 세계사에서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3000달러가 될까 말까입니다. 하지만 연평균 9%의 경제성장을 앞으로도 20년~30년 더 하면 어떻게 되느냐. 이미 철강, 시멘트, 석탄 등 원자재는 전부 중국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중국은 세계의 거대한 블랙홀입니다. 그러니까 기름값도 올라가고 야단났습니다. 이걸 앞으로 20년 동안 더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가 되면 어떻겠습니까. 13억 인구가 말입니다. 이미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를 합친 GDP가 미국을 능가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우리나라는 지금 잘 해서 이 바람을 잘 타면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이고 잘못하면 중국에 흡수돼 곤란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번 여행에서 對唐결전을 생각하면서 잘 봐야 합니다. 중국 옆에서 우리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려면 역시 미국과 친해야 된다, 가만 있으면 중국에 휩쓸려 가니까 우리와 별 유감도 없고 우리에게 영토 같은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 미국과 친해야 균형이 잡히는 거지 한미 동맹이라는 밧줄을 끊어버리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중국에 편입될 수밖에 없는, 거대한 자석이 중국에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요새 낙동강과 한강을 연결해서 경부 운하를 만든다는 계획을 들으셨을 겁니다. 그 계획은 이명박씨가 처음 한 이야기는 아니고 여러 사람들이 그 전부터 검토를 한 겁니다. 세종대학교의 朱明建(주명건) 교수가 그 주장을 하면서 책도 쓰고 했던 겁니다.
처음에 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잘 믿기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명박씨가 가능하다 하니까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가능한 거 같습니다. 왜냐하면 경부 운하라는 것이 지금의 남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것인데 남한강은 충주댐 덕분에 물이 많이 잠겨 있습니다. 이 충주댐과 문경새재 밑으로 터널을 뚫으면 낙동강하고 연결이 되거든요. 지금 우리 토목기술은 대단히 높은 수준이라서 20㎞ 정도 터널을 뚫는 것은 기술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그래요.
경부 운하를 추진한 사람들 이야기는 경부 운하를 만들게 되면 우선 혜택을 받는 곳이 경기도, 충청북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이렇게 되고 그 뚫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자리도 생긴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 운하가 물류만이 아니라 관광에도 상당히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배 타고 서울에서 출발해서 느긋하게 1박 2일 정도로 중간에 거쳐서 내렸다 가는 여행이 되는 거죠. 또 그 코스가 상당히 좋지 않습니까. 산악 지방을 양쪽으로 두고 지나가니까 양쪽이 다 경치가 좋은 데 아닙니까. 어제 이재호 선생이 이야기한 대로 어느 쪽에서 보느냐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까지는 강을 위에서 내려다 봤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강에서 위로 올려다 보는 국토의 재발견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도 이건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봤습니다.
청계천도 사실 계획은 다 되어 있었습니다. 누가 하느냐의 문제였죠. 그러니까 이명박씨라는 사람은 속전속결에다 판단력이 빠르고 일을 해낼 수 있고 안목이 있고 하니까 청계천 사업을 해낸 겁니다.
요새 청계천에 가보면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많이 옵니다. 또 여기 계신 분들은 걸어보셨겠지만 즐겁게 거닐 수 있게 설계가 잘 돼 있죠. 아주 眼目(안목)이 있고 촌스럽지가 않죠. 지금까지 공무원들이 주도해서 만든 것들은 촌스러운 것들이 많았는데 청계천만은 건축적으로 아주 괜찮은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부 운하는 어떻게 보면 그 주변에 있는 각 시·도 지자체에서 찬성하면 청계천보다 더 쉽다는 그런 이야기도 하더라구요. 그러니까 기술상의 문제가 아니라 주민 반대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라는 겁니다. 하여튼 경부 운하 계획이라는 것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이 ‘야, 그거 하면 참 재미있겠다, 빨리 해가지고 배 타고 국토를 한 번 종단해 봐야겠다’ 하는 생각, 이런 상상력을 가지도록 만드는 게 참 소중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그림을 그려보게 하고 ‘개통되면 내가 제일 먼저 타야겠다’든지 이런 식의 꿈을 주는 것, 그게 바로 정치가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게 비전(Vision)을 주는 겁니다.
이명박씨를 전번에 만나니까 그런 이야기를 합디다. 박 대통령이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느냐. 박 대통령은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고속도로, 공단을 만들어 놓으니까 더 이상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의 국토 전체가 박정희의 선전장이기 때문에 누가 아무리 깎아내리려고 해도 그게 안된다는 겁니다. 지금은 청계천이 이명박씨의 宣戰場(선전장)이 됐어요. 청계천에 오는 사람들이 모두 ‘이거 누가 만들었지’ 이러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청계천을 보고 돌아가서는 ‘아, 거 괜찮은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니까 지금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통령 가능성에서 1등으로 올라선 겁니다.
이명박씨가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비전만 있고 실천력이 없는 지도자가 제일 위험하답니다. 비전만 있고 실천력이 없으면 헛소리를 하게 되거든요. 말장난만 하게 되고 사람들 붕 뜨게 만들고 되는 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묵묵한 실천력이 필요한 겁니다. 예전 70년대 공무원들이 발령받았을 때 신문에 소개되는 문구를 보면 항상 공통되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뭐냐하면 ‘과묵한 실천력’ 이런 표현이 많이 나왔어요. 그 옆에는 ‘컴퓨터 달린 불도저’ 이런 상투적인 표현이 많이 있었습니다.
1970년대 우리나라 근대화를 추진했던 사람들 성격이 대부분 그랬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고 말은 적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大衆(대중) 정치 시대가 되다 보니까 말이 앞서고 행동은 따르지 않는 겁니다. 개혁이라는 말만 난무하고 정작 개혁은 되지 않는 게 지금 한국의 상황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낙동강을 지나다가 보니까 생각나는데 6·25 때 왜 미군이 참전했느냐. 당시 미군이 꼭 6·25 사변에 참전해야 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 전에 애치슨이 ‘우리의 방어선은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 필리핀 등’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김일성이 ‘야, 우리가 쳐들어가도 미국이 참전 안하겠구나’ 왜냐하면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이 그렇게 死活的(사활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곳이 아니라고 誤判(오판)한 겁니다.
그래서 김일성은 6월 25일 전면 남침을 했습니다. 그때 트루먼 대통령은 자기 고향인 미주리州의 인디펜던스라는 곳에 가 있었습니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트루먼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We must stop the son of bitchs no matter the what."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이 개자식들은 여기서 저지해야 한다”고 한 겁니다. 트루먼 회고록을 보면 자기가 그 결정을 하는데 10초 걸렸다고 합니다. 우리로써는 트루먼 대통령을 잘 만난 겁니다.
이 트루먼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1차 세계대전에 포병장교로 참전했고 그 뒤에도 예비역으로 있으면서 대령까지 올라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미주리라는 美중부 지방 출신으로 아주 보수적인 성향에다 성격이 칼날처럼 아주 결단력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구질구질하지 않고 당당하고 정직한, 전형적인 미국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일찍부터 공산주의나 파시즘이나 똑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들을 다 전체주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차대전 당시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할 때 소련을 지원하지 말자고 주장했습니다. 두 악당이 서로 싸우다 지칠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이런 주장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이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약간 사회주의 경향이 있어 소련을 지원했습니다. 아무튼 트루먼은 일찌감치 공산주의의 본질을 정확하게 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루스벨트가 죽고 난 다음에 거의 공짜로 대통령이 되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제일 먼저 결정한 게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떨어뜨리는 거였습니다. 그 트루먼 대통령이 6·25 당시 바로 美대통령 자리에 있었다는 게 제일 중요한 겁니다. 그 이외의 복잡한 이야기들은 사후에 다 갖다 붙인 말입니다. 대통령이 결심하고 형식적인 절차 후에 맥아더 사령관에게 개입을 명령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나라 운명에 두 번째 영향을 끼친 사람이 맥아더입니다. 뭐 트루먼보다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아니죠. 이 맥아더라는 사람도 희한한 사람입니다. 맥아더의 군 경력은 당시 미군 중에서 최고였습니다. 맥아더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이도 그렇고. 당시 70대였습니다. 김유신하고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사람이 필리핀에 있을 때 연설문을 써주는 부관이 나중에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 대령이었습니다. 맥아더의 아버지도 육군참모총장, 맥아더도 육군참모총장을 지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는 그 전부터 알고 있던 아주 묘한 인연이었습니다.
맥아더는 어떤 야망을 가지고 있었느냐. 이 사람은 철저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적화된 중국을 수복해야 되겠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이끌던 UN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쪽으로 진격을 하자 중국은 미국에게 계속 경고를 합니다. ‘한국군이 북한으로 들어오는 건 아무 말 안하겠지만 만약 UN군이 38선 이북으로 들어오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맥아더는 그냥 진격해 버립니다.
맥아더의 계산은 무엇이냐. ‘너희들이 개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개입하면 더 좋다. 개입하면 이것을 기회로 전선을 중국으로 확전시켜가지고 중국을 수복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중국군이 개입하지 않아도 좋고 개입하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계산으로 중국의 경고를 무시해버리고 올라갑니다.
그때 미국 합참에서 보니까 위험한 상황인 것 같지만 어떻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후에 맥아더가 완전히 영웅이 돼버리는 바람에 워싱턴에서 어떻게 컨트롤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맥아더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위임을 해버립니다.
그때 고민에 빠진 게 모택동입니다. 모택동은 원래 김일성이 남침했을 때 미군이 개입하면 도와주겠다고 言質(언질)을 줬습니다. UN군에게 밀리면서 망하기 직전까지 몰린 김일성이 모택동에게 약속을 지켜 우리를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니까 모택동이 중국 공산당 정치국 회의를 소집합니다. 이 회의에서 참전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의하니까 전부 반대를 합니다. 참전하면 안된다. 왜냐. 나라를 만든 지 1년밖에 안되는데다 우선 대만을 점령해서 통일을 완성해야 하는데 괜히 조선의 일에 개입하면 안된다고 합니다. 모택동만 찬성을 합니다. 그래서 회의를 몇 번이나 합니다. 그러나 당시 모택동의 권위에 도전할 사람이 없으니까 결국 개입을 결정하게 됩니다. 결국 참전하기 위해 군대를 만들고 개입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당시 스탈린은 만약 중공군이 육군을 보내면 우리는 공군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공군을 보낼 수 없다. 이 상황에서 잘못하면 미국과 세계 3차대전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참전을 못한다’면서 약속을 파기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모택동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안그래도 반대 의견이 많은데. 또 2,3일 동안 회의를 합니다. 회의 끝에 ‘그래도 우리는 간다’고 결정해서 6·25 전쟁에 개입하게 됩니다.
당시 모택동의 그 결정이 없었으면 우리는 이미 통일이 됐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그걸 알고 모택동을 존경한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걸 알고 모택동을 존경한다면 모택동의 한국전 개입에 대해 존경한다는 말이 됩니다. 戰史(전사)를 읽으면 모택동 한 사람 때문에 신라 통일 이후에 1300년 동안 이어져오던 한민족과 중국 민족 사이의 우의가 깨진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모택동을 존경한다는 사람이 청와대에 앉아있다는 겁니다. 戰史를 읽어보면 죽일 놈이 세 명입니다.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입니다. 김일성이 제일 죽일 놈입니다.
20세기에 사람을 정치적으로 제일 많이 죽인 사람이 스탈린도 아니고 히틀러도 아닙니다. 모택동입니다. 모택동 때문에 7000만 명이 죽었다는 거 아닙니까. 하여튼 戰史에는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한국의 운명을 결정한 게 우리와 직접 관계가 없었던 트루먼, 모택동, 맥아더죠. 그렇게 중국군이 개입하니까 맥아더는 잘 됐다면서 원자폭탄을 써서라도 擴戰(확전)을 하자고 합니다. 여기서 트루먼이 제동을 걸었죠. 그렇게 하면 3차 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으니까 전선을 일단 원위치하는 것으로 목표를 바꿔버립니다. 그래서 1·4 후퇴가 시작되죠. 여기 북한에서 내려오신 분들은 아마 1·4 후퇴 때 내려오신 분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이렇게 중공군이 개입해서 밀고 내려오니까 그때는 맥아더가 패닉(Panic·恐慌) 상태에 빠졌어요. 그래서 그때는 반대로 한국에서 철군하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제주도만 확보한다, 한국 사람들 중에서 구제해야 할 사람들 10만 명 정도의 명단을 작성하라’고 명령합니다. 이게 참 난감한 거죠. 그렇게 1월 4일 서울을 내주고 내려오죠. 맥아더는 한 번 후퇴하기 시작하니까 싸우지도 않고 계속 후퇴를 ! 합니다.
자, 이때 미국이 영국의 제안으로 중국에게 중대한 제안을 합니다. 그때가 1951년 1월 4일 후퇴 다음입니다. 영국, 미국이 합동으로 중국에 대해서 현 위치에서 휴전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때는 이미 서울이 중국군에 넘어간 다음이고 수원 정도까지 밀렸을 때입니다. 현 위치에서 휴전하자는 제의를 중국이 거부합니다. 만약 그때 휴전합의가 됐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1951년 1월 수원 정도에서 휴전이 되었다면 대한민국은 그대로 없어졌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한국이 오늘날 여기까지 오는 데는 우연과 같은 일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 美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죽지 않습니까. 워커 장군이 왜 죽었는지 아시죠. 당시 자기 아들이 참전하고 있었습니다. 워커 장군이 자기 아들에게 훈장을 주고 다른 부대로 가는 도중 의정부에서 뒤따라오던 한국군 트럭이 장군의 지프차를 받아버렸습니다. 그렇게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안해서 한국군 트럭 운전사를 당장 사형시키라고 하니까 하우스맨이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참모 역할을 하던 미군 대위가 이러면 안된다고 말려서 징역 3년인가 선고받았다고 합니다. 그 후임으로 온 사람이 릿지웨이 장군입니다. 가슴에다 수류탄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공수부대를 이끌고 참전했던 장군입니다. 싸움 잘하는 걸로 유명한 장군입니다. 릿지웨이 장군이 8군 사령관으로 와서 전선을 수원에서 막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올라가서 1951년 3월에 서울을 수복했습니다. 이 릿지웨이 장군이 상당히 고마운 사람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했으면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했든지 서울을 수복하지 못했을 겁니다. 릿지웨이 장군이 두 번째로 한국을 살린 사람입니다. 그렇게 다시 원위치 되니까 이제 휴전하자 이렇게 된 거죠. 그 다음부터 한국에서는 고지 쟁탈전이 시작된 겁니다. 백마고지, 수도고지 등 고지 하나를 뺏으려고 수천 명이 죽는 소모전이 2년 동안 계속 됩니다. 소모전이 계속 되니까 김일성도 죽을 지경이 됩니다. 그러자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휴전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스탈린이 휴전하지 말라고 합니다. 계속 싸우라고 합니다. 계속 싸워서 미국을 한국에 붙들어놔야 다른 곳에 개입하지 못한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이런 쓸데없는 전투를 하면서 서로 피를 흘립니다. 휴전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자 흐루시초프, 말렌코프 등이 모여 휴전하기로 결정합니다. 독재자 한 사람이 죽으니까 금방 휴전 결정이 나온 겁니다. 4개월 만에 휴전이 결정된 거 아닙니까. 스탈린이 죽기 전에는 스탈린의 권위가 워낙 강하니까 스탈린이 하지 말라고 하면 모택동과 김일성은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6·25 때 워커 장군은 죽었고 워커 장군 다음의 릿지웨이 장군, 그 다음으로 온 사람이 밴플리트 장군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전투기 조종사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해외 근무경험이 있어 한국전에는 올 필요가 없었는데도 자기 아버지가 8군 사령관으로 있으니까 자원해서 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양에 폭격하러 갔다가 실종됐습니다. 사령관 아들이 실종되자 대대적인 수색을 했습니다. 밴플리트 장군은 그걸 보고 자기 아들을 구하기 위해 특별하게 수색하는 것은 불공평하니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8군 사령관도 죽고 8군 사령관의 아들도 죽었습니다. 그 외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죽은 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국 전쟁에서 미군이 몇 명 죽었느냐 하는 게 헷갈릴 겁니다. 3만5000명이 죽었다고도 하고 5만 명이 죽었다고도 하는데 미국 사람들은 전사자 통계를 정확하게 냅니다. 전투중 사망자를 K.I.A라고 합니다. Killed In Action이라고 합니다. 순수한 전투사망자입니다. 그게 3만5000명입니다. 그 다음에 전쟁을 하다보면 사고로 더 많이 죽습니다. 주로 차량사고가 많습니다. 이런 비전투 사망자가 약 1만5000명 정도됩니다. 그래서 총 전사자가 5만 명 정도 됩니다. 거기다 실종자 7000명, 포로 7000명인데 돌아온 사람이 3분의 1밖에 안되니까 이걸 다 계산해보면 약 7만 명 정도 사망했습니다. 부상자는 10만 명이 조금 넘습니다.
지금 이라크에서 미국이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는데 지금까지 전사자가 2000명입니다. 이라크 전사자의 35배 되는 젊은이들이 한국에서 죽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우리보고 배상해 달라고 그랬습니까. 뭐라고 그랬습니까. 그런 미국 사람들에게 우리가 맥아더 동상 끌어내린다느니 뭐한다느니 하는 게 도대체 뭘로 보이겠습니까. 입장을 거꾸로 바꿔보면 인간으로 안보이겠죠. ‘배은망덕해도 유분수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그런 표현을 좀처럼 안하죠. 미국 사람들은 세계에서 화를 제일 늦게 내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화를 내면 절대 태도를 안바꾸죠. 지금 미국인들의 화를 돋우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 혼자 다 시킨다더니 나쁜 놈들 몇 놈 때문에 한국 전체가 국제사회에서 이상하게 돼버렸습니다.
물론 이렇게 된 것은 정부 책임이죠. 정권이 그런 행동을 사실은 비호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말이죠, 맥아더 동상 불법철거를 하지 말라면서 그 이유를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역사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보존해야 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맥아더 동상은 나쁜 역사지만 보존해야 한다’ 이 말이거든요.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말 한 마디 하더라도 ‘맥아더 장군 덕분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다’ 이렇게 말했다면 노무현 싫어하던 사람도 그것 참 말 잘했다고 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는지 보면 됩니다. 노무현이 좋아한다고 말한 사람이 누굽니까. 모택동이죠. 노무현이 싫어한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사람이 누굽니까. 이승만, 박정희입니다. 특히 이승만. 또 맥아더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봐야죠.
그러니까 한국전쟁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한 모택동은 좋아하고 우리를 구해준 맥아더와 이승만은 증오한다 이러면 이 사람이 어느 편에 서있는 사람이냐. 대한민국 편에 서 있는 사람인지 의문이죠. 이 사람은 지금 김정일을 주적으로 삼아야 할 헌법 상의 의무를 가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지금 주적으로 삼고 있다 이겁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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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좀 긴 내용이지만 기막힌 고증입니다. 우리의 수천년 역사의 90퍼센트가 중국에 짓밟히고, 10퍼센트가 일본에 눌렸습니다. 앞으로도 그럴겁니다. 모택동이 한국전쟁에 개입을 안했다면 벌써 민주 자유 통일이 되어 세계속의 한국으로 우뚝 서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코소보 등 몇개 국가를 제외하고 민족을 중시하는 나라가 있나요? 민족보다 국가가 우선이지요? 중국도 56게민족, 인도네시아도 300여게 민족, 미국도 수많은 민족이 있어요. 단일 민족이 뭉치면 밥 공짜로 먹여줍니까?
못사는 단일 민족 국가와, 잘사는 다민족 국가 어느것을 좋아하셔요? 잘 생각하셔요. 지금 세계는 국제화, 글로벌 하여 민족과 이념이 사라지고 동일 생활권내 있지 않습니까? 시간적으로1초를 아껴쓰고, 공간적으로1미리를 인식할때입니다. 개인간, 기업간, 국가간 무한한 약육강식의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우리나라는 현제 1인당 국민소득 49위 3류국가에 머물고 있어요. 후손들을 위해서도 각성해야합니다.국제화 시대에 대비하여 개인의능력을 향상시키고, 기업 국가 경쟁력도 키워야 합니다. 정말 토인비의 " 흥망과 도전"의 교훈으로 정신을 가다듬을때입니다. 무거님 고맙군요.
등장 인물들이 다 귀에 쟁쟁한데 소상한 행적들로 정리해주시니 당시 정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읍니다. 무거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조갑제의 컬럼에서 복사햇어요,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