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죽습니다.
고전15:31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축복의 새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한 청년이 알프스 산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준비해간 물이 떨어져 심한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때 그는 알프스 계곡 사이에 있는 맑고 깨끗한 호수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단숨에 물을 꿀꺽꿀꺽 마셨습니다. 몹시 시원한 물이었습니다. 물을 마시고 돌아서는 순간 "포이즌(poison)"이라고 쓴 경고판을 보았습니다. 이 물 속에 독이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이 청년의 몸에서는 열이 나기 시작했고, 그는 심한 구토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온 몸이 떨 리고 얼굴은 창백해졌습니다. 그는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계시판을 잘못 보았군요 그것은 '포이즌(poison)'이라고 쓴 것이 아니고 '포이존(poissun): 낚시금지)'이라 고 쓴 것입니다. 이 청년은 '포이존'을 '포이즌'으로 잘못보고 야단법석을 떤 것입니다. 의사의 말을 듣자마자 청년은 열이 내리고 구토도 멈추고, 깨끗이 나았습니다.
생각하면, 감정이 생기고, 삶이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I die every day“라고 했습니다. 죽는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데 바울은 왜 이처럼 표현했을까요? 이 말씀의 의미를 나누면서 바울의 마음을 이해하고, 신앙적으로 날마다 죽음으로 얻는 구원의 감격을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미완성의 존재입니다.(incomplete)
2005년도에 제가 벤츄라교회의 부목사로 오기 전에 나성금란교회에 잠시 출석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때 주일이라도 온전히 섬기자는 마음으로 8시 예배부터 참석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아침도 제대로 못먹었죠. 그것을 본 교회 권사님 한분이 주일마다 김밥을 사다주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권사님이 책장 필요하시죠 묻더군요. 주일 저녁에 권사님 부부가 오셨는데, 책장이 안보이고 왠 박스만 잔뜩 있었습니다. 저는 그게 뭔가했는데, 권사님 부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조립을 하시더군요. 가구 조립 후에 말씀하시기를 “주일에 저희 가족을 위해 김밥을 대접하기 시작하고서, 이민생활 20년 만에 최고의 수익을 남겼어요. 우리들은 작은 것으로 나눠도 하나님께서는 큰것으로 주셨어요”라는 간증을 하시더라구요.
그분들이 가구를 샀습니다. 그런데 그 가구는 완성품이 아닙니다. 조립해야 완성되고, 역할을 합니다.
바로 우리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보혈을 우리들을 속량하셨습니다.
구원이란 바로 십자가의 보혈로 속량 받은 자, 바로 여러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받은 순간, 우리의 존재를 정확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허물 많은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요즘 새벽에 사무엘상을 통독하고 있습니다.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브닌나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그도 제사장 집안의 아내였습니다. 오늘날도 말하면 사모였는데, 한 남편을 섬기는 한나를 괴롭혀 눈물나게 만듭니다. 엘리 제사장은 어떻습니까? 자식들을 잘못 가르쳐, 제사장의 직분을 통해 사리사욕을 채웠습니다. 엘리도 늙기도 했지만, 게으르고, 영적으로 어두워져, 그 끝이 비참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완성된 존재로서 영적인 조립을 함으로 완성된 존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배가 영적인 조립의 시간입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도 영적인 조립의 과정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령을 사모하는 것도 영적인 조립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과정의 첫 번째 전제가 우리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죽어야 하고, 교만이 죽어야 하고, 욕망이 죽어야 합니다.
바울에게 고린도교회는 참으로 아프게했던 교회였습니다. 가장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었던 교회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적 배신감도 느꼈을 것이고, 분노도 솟구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죽어야, 기도합니다. 자신이 죽어야 성령을 의지합니다. 자신이 죽어야 하나님의 영역을 인정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재적 은총을 베푸셔서, 많은 것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선택할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95%는 우리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콘트롤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꽉잡고 계신 것입니다. 시간, 생명, 질병 등등 그런데 이것이 진짜입니다.
이것을 알면, 미완성의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번주 목요일에 미국 대사관에서 인터뷰가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비싼 돈을 지불하고 변호사를 고용했고, 온갖 서류를 다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새벽마다 간구합니다.
“하나님, 당신 손에 달렸습니다. 허락해 주옵소서”
이것이 미완성의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미완성의 존재임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겸손한 주의 백성되기를 간절히 권면합니다.
둘째, 인간은 망각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는다”라고 고백했던 이유는 첫째 자신의 삶에서 나온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고린도교회 공동체를 경험하면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때에 약 18개월을 머물러 개척했던 교회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렇구나.. 남의 이야기라고 그렇구나... 하시죠.
요즈음 보통 개척교회가 성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저도 개척교회를 하면서 아내에게 설교할 때에 “허수아비라도 앉혀 놓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던 일이 있습니다.
어느 써커스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코기리 주인이 관중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코끼리를 울리는 사람에게는 100만원을 드립니다."이 사람 저 사람들이 나가서 코끼리를 울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코끼리를 울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때 목사님 한 분이 앞으로 나가더니 말했습니다. "내가 한번 울려 보지요." 그리고 귀에 대고 무어라고 한참 이야기하였더니 코끼리가 큰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코끼리 주인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였나요?"
목사님이 말했습니다."개척할 때 이야기를 하여 주었더니 울었어요." 이번에는 코끼리 주인이 말했습니다."내 코끼리를 펄쩍 펄쩍 뛰게 하는 사람에게는 100만원 드리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시도하였지만 역시 실패였습니다. 목사님이 나가더니 역시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코끼리는 갑자기 펄쩍펄쩍 뛰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이 물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였기에 저렇게 뛰나요?" 목사님이 '너 나하고 같이 개척할래?' 라고 말했더니 말도 하지 말라고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바울이 18개월 동안 머물며 고린도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정말 애를 엄청난 수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후 고린도교회는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바울의 헌신과 수고는 다 잊고, 바울의 사도권을 사지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가진 문제들이 15가지가 등장합니다.
1. 사람과 교리에 따른 교회의 분열(고전 1:10-17)
2. 어린아이 같은 신앙(고전 3:1-9)
3. 책임감의 문제(고전 3:10-17; 5:1-2; 고후 1:12-2:4)
4. 교회내의 징계(고전 5:3-13)
5. 송사(고전 6:1-11)
6. 음행(고전 6:18-7:1)
7. 결혼과 이혼(고전 7:2-16)
8.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 부족(고전 8:1-13)
9. 타종교 문제(고전 10:1-14)
10. 불신자들과의 관계(고전 10:27-30)
11. 예배 형식(고전 11:2-34)
12. 예언과 방언(고전 14:1-40)
13. 복음의 본질(고전 15:1-11)
14.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고전 16:1-9)
15. 돈과 인색함(고후 9:6-15)
바울이 떠날 때에는 이만하면 될거야 했지만 인간의 문제는 잘 잊는다는 것입니다. 잊는 것도 죄입니다. 요즘 선택적 기억 상실증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람이 유리한 것을 절대 잊지 않으면서 불리한 것을 잘 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매일매일, 기억해야 합니다. 매일매일 하나님과 사랑에 빠져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잘 죽어야 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전9:27)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묵숨을 잃는 자는 얻으이라”(마10:39)
옛날 어떤 임금이 민심을 살피기 위해 길 한가운데에 큰돌을 갖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지나가는 행인들을 살펴봅니다. 그곳을 지나가는 첫 사람은 욕을 하면서 지나갔습니다. 개인주의형이지요. 둘째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피해갔습니다. 무관심형이지요. 셋째 사람은 힘을 다해 그 돌을 치우고 갔습니다. 희생형이지요. 그런데 그 돌밑에는 임금의 치하문과 보석함이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사시렵니까? 조금 피곤하고 어렵지만 나를 죽이고 주님이 사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내일은 또 어떻게 사시렵니까? 삶의 분주함과 고뇌 속에도 주님의 찬양이 있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주님 안에서 죽고, 주님 안에서 살며,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상급으로 얻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죽음을 선택하여 생명의 길로 갔던 바울의 삶이 여러분의 삶 속에 날마다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