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 줄리아 ジュリアおたあ Ota Julia(1580~미상)】
「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가 고결한 신앙을 지켰던 국민」
조선 출신의 전국 시대, 에도 시대 인물. 줄리아(ジュリア)는 세례명이며 세례명 이외에 지어진 일본어이름이 오타아(おたあ)이며 장음 표현을 생략한 '오타'로 한국에 알려져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임진왜란 당시 입양한 조선 아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입양이라고 하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아 납치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일각에선 양녀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사실 고니시가 오타를 시녀로 쓴 것은 맞지만 양녀로 입양했단 것을 증명할 사료는 없다고 한다. 하여튼 고니시 가문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처를 모시며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 집안이던 고니시가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인이 되어 '줄리아(ジュリア)'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 시기에 고니시 가문의 지식인 약학도 함께 배웠다.
1580년에 태어났으며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패배하고 처형당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다가 이즈 제도의 고즈섬(神津島こうづしま)으로 유배되었다. 유배된 이유는 이에야스의 측실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는 설도 있고 가톨릭 신앙이 금지되었어도 배교하지 않아서였다는 설도 있다. 후술할 남동생 건을 보면 적어도 이에야스의 총애를 받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유배된 후에는 고니시 가에서 배운 약학 지식을 살려 환자를 간호하는 등 신앙 생활과 봉사를 계속했다고 하며 정확한 년도는 불명이나 유배지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왜란이 터지기 전,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으나, 한양 점령으로 가족과 헤어지고, 왜병들에게 발각되어 몹쓸 짓을 당해 충격받은 그녀를 고니시 유키나가에서 거둬져 그의 영지로 간다. 그곳에서 그의 부인 주스타의 시녀로써 조선인 출신인 안나와 헤마를 만나고, 카톨릭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이후 세례를 통해 쥬리아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그러던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고 왜란이 끝났단 소식이 오타성까지 돌자 셋은 함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기뻐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후 고니시 유키나가는 처형당하고, 이 여파로 가토의 침공으로 우토 성은 함락되고 만다. 쥬리아는 포로로 끌려가던 중 안나와 헤마의 수급을 보게 되고 오열한다. 가토 앞에서 그의 침략과 그와 병력들의 만행을 비판하고 신앙을 빼앗으려는 악마들이라고 일갈하며 어떠한 폭력에도 굴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죽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가토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고 오히려 도쿠가의 마음에 들 것 같다며 후시미 성으로 끌고간다.
그 곳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대면하게 되고, 쥬리아를 본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을 막지 못해 조선의 백성이 고통에 빠진 것을 사과하고, 조선 및 명과의 교류 재개와 그를 통한 태평성대를 이루고 싶단 소망을 말하면서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 청하자 쥬리아는 조국과 안나의 헤마의 최후를 떠올리며 도쿠가와의 청을 받아들인다. 도쿠가와의 시녀가 된 그녀는 통신사의 방일로 통신사와 도쿠가와의 통역사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교류가 재개되었고, 어느날 시종을 통해서 어릴 때, 헤어진 그녀의 동생과 닳은 남자가 모리가의 가신 히라가 가문의 시종으로 살고 있단 소식을 듣고 반신반의해 서신을 보내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의 편지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에야스 사후(1616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일본 각지를 떠돌며 복음을 전파하고 선교사를 돕는 등 살아서 신앙을 전파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619년 나가사키에서 여자 아이들을 모아놓고 교리와 성가를 가르치기도 했다고 하며 1622년 오사카에서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산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더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를 보아 1622년까진 생존해 있음이 확실하지만, 여전히 언제 생을 마쳤는지는 불명확하다.
가톨릭을 믿는 재일교포들에게서 많은 존경을 받는다. 한국의 절두산 성지에는 한때 줄리아가 사망한 곳으로 추정된 고즈섬의 흙을 떠와 만든 가묘가 있었으나 줄리아가 고즈섬에서 죽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철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