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황혼(은퇴한 정치인)
뒷맛까지 더럽고 혐오스런 정치의 계절이 지나간다. 경제는 서민들의 삶을 위협하고, 민심은 갈수록 거칠어 진다.
밤 10시가 가까워 오는 시각. 나는 친구들과의 모임을 하다말고 서둘러 귀가길에 올랐다. 전철을 내려 바쁜 걸음으로 지하도를 걸어나와 백화점앞 지하 광장에 이르렀을때 30여명 사람들이 줄을 서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밤에 무엇을 하려고 줄을 서 있는 것일까? 멀리서보니 옷차림이 남루한 것으로 보아 청소를 하려고 모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지하상가 문닫는 시간이래서 그럴까? 그래도 뭔가 이상하였다. 분수대 건너편 의자에 잠시 앉았다. 궁금한 것 못참는 내 성격 탓이다.
밤늦은 지하광장엔 사람들의 발걸음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고 그러한 분위기는 종착역에 마지막 열차가 들어 온 이후의 분위기였다. 그 순간 건너편 의자 주변에선 취객인 듯한 두사람이 말다툼을 벌였고, 오가는 사람들은 그들을 피해 힐끗거리며 바쁜 걸음을 옮겨가고 있었다.
술꾼인 내가 그런 분위기를 모를턱 없었고, 자칫 지하광장의 공기가 험악해 질 것만 같았으나 다행이 이내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해졌다.
뭔가 새로운 분위기가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청소를 하고있는 미화원 아줌마에게 다가갔다.
"아주머니 저 사람들이 왜 줄을 서 있어요?"
"저 사람들요? 국회의원과 장관을 지낸 김00이라는 분이 무료식사를 제공하려고 해서 그래요. 그분 아세요?"
"김00요? 아하! 알겠네요. 참 좋을일 하시네요."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아 그 광경을 바라다 보았다. 줄을 서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근처 의자에 앉거나 누워서 느긋하게 차례를 기다리는 무리들도 있었다. 잠시 후 준비가 끝났는지 배식이 시작되었다.
전직 장관(민정수석)이자 국회의원이 그릇에다 밥을 담아주면 부인인듯한 분이 국을 퍼담았다. 그리고 약간의 반찬을 그 위에다 얹었다.
머리가 희끗한 두분이 배식을 하자 기다리던 사람들은 차례를 지켜가며 그릇을 받아 근처 의자로 가서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벌써 수차례에 걸쳐 그러한 행사가 있었는지 사람들은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고 학습된 행동으로 질서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중 남자 두명과 여자 한명이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내가 앉은 의자로 다가왔다. 나는 그들에게 자리를 통째로 양보할까 생각하다가 그들이 먹는 밥그릇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여 조금 옆으로 비켜나 앉았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맛있겠네요. 그런데 뭐죠? 국수?" 하고 말을 건넸더니, 덩치가 큰 남자가 "밥인데요. 맛있어요" 하며 대답을 한다. 그들의 나이는 대략 나보다 많지는 않아 보였다.
그리고 다른 한사람이 일회용 숫가락으로 그릇을 휘저으며 "고기도 있고 조개에다 오징어도 있네." 하고 즐거워 하였다. 그리고 "밥이 좀 적네"하고 말하였지만 나는 지금 그들이 처한 주변환경을 살펴볼때 밥그릇 국그릇을 따로 준비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맨끝자락에 앉은 지능지수가 약간 모자란 듯한 여자는 먹지않고 입을 벌리고 헤헤거리고만 있었다. 내가 "아줌마! 식으면 맛없어요. 먹으세요." 하고 말을 건네자 그제서야 숫가락을 그릇으로 가져갔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여러가지 고기가 섞인 국물에 만 국밥은 정말 맛이 있을 것 같았다. 야심한 밤, 술과 안주로 뱃속을 채웠으나 그 거지 근성의 목구멍의 자극에 한그릇 얻어 먹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참을 밖에는...
나는 그들이 맛있게 식사를 하는 모습을 뒤로하고 12시 심야버스를 타기 위하여 서둘러 그곳을 떠나왔다. 지하도를 나오니 바람이 매우 차갑다. 이 추위에 배고픈 사람들을 위하여 먼길 마다않고 노구에 손수 음식을 준비하여 온 그분들이 너무 존경스러워 보였다.
정말 아름다운 황혼이었다. 모든 공직을 다마치고 나이 70에 이른 그분이 더 무슨 명성을 얻고자 저런 선행을 베풀 것인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솔직히 우리사회 국민들을 힘들게 하며,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인간적 도리와 진영을 배신하는 자들을 볼 수있다.
자신들이 없어주면 국민들이 더 행복해할 정치인들, 그들이 나오면 ㅂㅎ던 티비 뉴스 체널을 돌리다.
나는 버스를 타고오며 내내 그 모습이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소위 정치를 한답시고 국민앞에 날 보란듯이 서지만 막상 개인의 이익에 함몰되어 진영을 배신하고, 브라운관에 나오면 서둘러 채널을 돌리거나 역겨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택권이 제한된, 하는 수 없이 취할수 밖에 없었던...그에 비하면, 정말 젊지않은 나이에도 진심어린 마음으로 국민들을 사랑하며 그렇게 아름다운 황혼을 만들어 가고 있는 그분들이야말로 진정 우리들이 꿈꾸는 지도자의 귀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다는 것, 그게 크게 표나지 않아도 체면이 있어야 한다. 느낌과 되새김이 없다면 매미가 되는 굼벵이의 일생보다 의미가 못하지 않을까? 내가 노후에라도 진정 마음을 열고 누군가를 위하여 헌신할 수 있을까?
즐겁고 정말 아름다운 밤이다. 친구들이 건넨 술기운에 체온이 따스하고, 존경스런 노정치인의 모습에 가슴마져 훈훈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