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정사는 로마를 한 세기 동안 지배한 세습 왕조다. 세습 왕조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로 이어졌다, 세습 왕조들은 임페라토르(Imperator)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칭호로 이어진다. 티베리우스는 AD 13년 로마군 지휘관과 종신 호민관 등 아우구스투스의 모든 특권을 부여받아 사실상 공동 황제가 되었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아우구스투스가 이룩한 제국의 제도와 영토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재위 초기에는 지혜롭고 절제된 통치의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새롭게 커다란 정복사업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속주 총독도 교체하지 않았다..
로마제국의 재정낭비를 중단시켰고 로마의 권력을 그 어느때 보다도 안정시켜 놓았다. 그는 해군을 강화했고 검투사 경기를 벌이는 관습을 폐지했다. 그러나 이따금 전쟁이나 야만적 폭압이 벌어지기도 했다. 말년(AD 26년)에 근위대장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에게 통치를 일임하고 카프리섬에 장기간 은둔 생활하면서 온갖 음란하고 변태적인 소문이 돌았고 그는 결국 성도착자라는 악명을 얻었다. 그리고 로마의 중요 인물들에게 공포정치를 실행했다. 예수는 티베리우수 황제 시절인 빌라도 총독 치하에서 유대교 사제들의 고발로 십자가형에 처해지며 세상을 떠난다.
AD 37년 티베리우스가 병사하자 뒤를 이어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인 가이우스(칼리굴라) 황제가 즉위했다. 가이우스는 아버지인 게르마니쿠스가 지휘하던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지어준 '칼리굴라'(꼬마 장화란 뜻)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하였으며, 70대의 노쇠한 티베리우스 황제 말년 공포정치에 지친 로마 시민들은 24세의 젊은 나이에 즉위한 칼리굴라에 열광하였다. 그러나 가이우스(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제왕 교육을 받은 탓에 노골적인 황제 권력 강화와 전제화 하기 시작했다. 황제의 생활 역시 화려하고 방종한 편에 있어 원로원 내에서 티베리우스와 다를바 없다는 말이 나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이우스 황제를 노린 암살 시도는 AD 39년 후반부터 시도해 서기 41년 1월 근위대장을 포함한 20여명에게 암살당하였다. 가이우스 황제는 변덕스럽고 노골적인 전제 권력화 시도는 4년만에 끝났다. 가이우스(칼리굴라) 황제 뒤이어 숙부인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제 3대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정치적 능력과 행정력과 판단력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고 황제 암살이라는 초유의 위기상황 속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서기 43년 브리타니아(영국)를 정복한 후 47년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를 총독으로 임명하였으나
그가 사망하면서 52년 아울루스 디디우스 칼루스가 총독이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벌어지고 로마제국의 관료 조직이 급속하게 발전했다. 이탈리아 경제 발전과 사회 안정 정책으로 본 궤도에 오른다. AD 54년 클라우디우스는 저녁 식사 후 급사하고 뒤를 이어 제 4대 황제 네로가 즉위한다. 네로 황제는 즉위 초기 선정을 펼쳤고 속주들이 원만하게 통치되고 있었으며 파르티아 제국과 50년간의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등 로마제국 자체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친모자 지간인 황제의 모후와 대립으로 궁중 음모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네로는 여자 문제로 친모자 지간에 권력투쟁으로 확대되고 네로를 둘러싼 궁중 암투속에서 피바람이 불었다. 친어머니, 아내, 처남, 고종 사촌형까지 처형하였다. AD 64년 로마 대화제 이후 네로는 비난의 대상이 된다. 네로는 대화제 원인을 그리스도교인들이 방화로 뒤집어 씌워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고 황금궁전을 짓겠다고 발표하는 등 인심이 흉흉하였다. 네로의 박해가 극에 달했던 AD 67년 로마에 끌려온 사람은 베드로 뿐만이 아니었다. 바울 역시 쇠사슬에 묶여 사형 판결을 받은지 며칠 후 형장에서 목을 베인다.
그야말로 티베르 강이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만큼 수많은 목숨이 죽어갔다. 한편 소수 남은 황실 일가를 반역죄로 처형시키면서 제손으로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 핏줄을 끊어버린다. 따라서 로마인들에게 부도덕한 인간으로 지탄받게 된다. 이 와중에 소아시아로 여행 중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이를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망 높은 명장 코르불로를 의심해 자살 권유로 자살케 한다. 결국 네로 황제는 AD 68년 코르불로 숙청사건으로 근위대 반란과 갈리아 총독 율리우스 빈덱스 주도의 탄핵 연설 등으로 몰락의 늪에 빠진다.
로마 사회 전체에서 완전히 고립된 네로는 자신의 실정으로 벌어진 내전의 와중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렇게 하여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가문으로 이어진 왕조가 단절되고 만다. 네로가 죽은 이후 반란을 일으켰던 갈바가 AD 68년 6월8일 황제로 즉위하였지만 경직되고 비타협적이었으며 잇딴 실책을 벌였고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라는 정통성을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많은 반란을 불러왔다. 부정부패까지 기승을 부려 신망을 완전히 잃어 같은 해 1월15일 쿠데타 발생으로 실직되고 오토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였다.
오토가 황제가 되었으나 3개월 뒤 비텔리우스군에 패해 자신의 잘못으로 여겨 자살했다. 운좋게 비텔리우스는 단독 황제가 되었으나 국가의 적으로 공인된 네로를 존경한다며 로마인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주었다. 유대전쟁을 수행하고있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가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리하여 AD 69년 한 해 동안 로마제국에는 황제가 4명이나 등장하는 대혼란이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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