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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도읍지 천도(遷都) 추정경로(3-3)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왕검(檀君王倹)이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단군왕검이 도읍지를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으며, 주(周) 호왕[虎王, 무왕(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단군(檀君)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다시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과연 장당경(藏唐京)은 어디인가?
'장당경(藏唐京)'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당(唐)의 도읍지를 감춘다는 뜻인데, 단군 시대에 요(堯)임금이 있었으니 요(堯)임금의 나라 당(唐)의 수도라면, 당요(唐堯)의 도읍지로 추정할 수 있는 현재의 산서성 남부지역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삼국시대 당(唐, 618~907년)의 도읍지 장안(현 섬서성 서안시)을 의미하는 것일까?
즉, 앞서 3-2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백악산 아사달의 위치를 현재의 산동성 태산 아래 제남시 주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었는데, 단군이 도읍지를 산서성 남부지역이나 섬서성 서안시로 천도했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온 것일까?
아무튼 장당경(藏唐京)이란 지명이 1280년경에 『삼국유사』를 처음 쓸 때부터 기록되어 있었던 지명인지, 아니면 1512년에 『삼국유사』를 재간행하기 이전에 뜯어고쳐지면서 임의 삽입한 지명인지 명확히 알 길은 없다.
그런데 조선 후기 유학자 허목(許穆, 1595~1682년)이 지은 『미수기언(眉叟記言)』에는 장당경(藏唐京)을 당장경(唐臧京)이라고 표기하였는데, '유주(幽州)에 당장경(唐臧京)이 있었으니, 『고려사』에서 그곳을 단군조선의 도읍지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조선 중종 25년(1530년)에 발간된『신증동국여지승람』과 권상로(權相老, 1879~1965년)가 편찬한 『한국지명연혁고』에도 당장경(唐臧京)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한편, 조선 명종(明宗, 1534~1567년) 때 조여적(趙汝籍, ?~?)이란 도교 선인이 편찬한 『청학집(靑鶴集)』에 당장경천도(唐莊京遷都)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단군의 네 아들이 고조선의 도읍지를 평양성에서 당장경(唐莊京)으로 옮긴 것에 관한 설화로서 도교적 시각에서 전승 설화를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이 설화에 따르면, 단군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이 부루(夫婁), 부여(夫餘), 부우(夫虞), 부소(夫蘇)로서 각기 뛰어난 재주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장남인 부루(夫婁)는 하나라의 우 임금이 도산에서 제후들을 소집했을 때 알현하러 갔고, 부여(夫餘)는 '구이설유의 난'이 일어나자 평정하였으며, 부우(夫虞)는 나라에 질병이 돌면 의약을 마련하여 백성들을 구제하였고, 부소(夫蘇)는 산에 맹수가 들끓었을 때 사냥을 하여 퇴치하였다고 한다.
요임금 때 황하가 범람하여 큰 홍수가 났으나 치수 사업에 실패하였고, 우임금 때 다시 황하의 치수를 하였는데, 큰 홍수가 일어나 중국 산동성에 있는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바다와 대동강이 넘쳐 고조선의 도읍지인 평양성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단군의 네 아들은 황해도 구월산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본 후, 가장 적당한 곳을 택하여 도읍을 옮겼는데, 그곳의 원래 지명인 당장리(唐莊里)라는 이름을 고쳐서 당장경(唐莊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세종실록』 지리지 황해도 문화현조(文化縣條)에 '장장평(庄庄坪)은 현(縣) 동쪽에 있고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한 곳으로서, 즉 당장경(唐莊京)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庄庄坪在縣東 世傳檀君所都 卽唐藏京之訛).'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2 문화현조(文化縣條)에도 '장장평(庄庄坪)은 현(縣) 동쪽 15리(약 8.1km)에 있으며,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한 곳으로서 그 터가 아직 남아 있다. 『고려사』에 장장평(庄庄坪)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당장경(唐莊京)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莊莊坪在縣東十五里 世傳檀君所都 其址尙存 高麗史以爲莊莊坪 乃唐藏京之訛).'라고 하였다.
즉,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따르면, 장당경(藏唐京)의 위치는 현재의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이 된다.
그런데 앞서 3-1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왕검(檀君王倹)이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단군왕검(檀君王倹)이 최초로 조선을 건국한 곳은 고구려 '평양성'(현 산서성 덕주시로 추정)이 있었던 곳이 아니고, 위만조선의 도읍지가 있었던 '왕검성'(현 하남성 안양시로 추정)으로 추정할 수 있었으며, 그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즉, 『삼국유사』에 '평양성'이 삽입된 이유는 단군조선의 최초 도읍지를 현재의 이북 평양으로 변이시키기 위한 위사(僞史)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림 1] 하남성 안양시, 산동성 제남시와 요성시 등
다시 말해서 단군왕검(檀君王倹)이 최초로 조선을 건국한 도읍지는 '왕검성'으로서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고려 시기에는 그곳에 서해도(西海道)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 해주(海州)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서해도(西海道)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 해주(海州)에 속하는 방어군(防禦郡) 풍주(豐州)에 유주(儒州)가 내속(來屬)되어 있었는데, 풍주(豐州)와 유주(儒州)에 관하여 각각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풍주(豐州)는 본래 고구려 구을현(仇乙縣)[굴천(屈遷)이라고도 한다.]으로,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 14년(995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현종 9년(1018년)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별호(別號)는 서하(西河)이다[성종(成廟) 때 정하였다.]. 초도(椒島)·석도(席島)가 있다. 속군(屬郡)이 1개, 속현(屬縣)이 5개이다."
"유주(儒州)는 본래 고구려의 궐구(闕口)였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9년(1018년)에 (풍주에) 내속(來屬)시켰다. 예종 원년(1106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 46년(1259년)에 위사공신(衛社功臣)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유경(柳璥)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문화현령관(文化縣令官)으로 승격시켰다. 별호(別號)는 시령(始寧)이다[성종(成廟) 때 정하였다.].
구월산(九月山)[세상에 전하기를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한다.]·장장평(庄庄坪)[세상에 전하기를 단군(檀君)이 도읍한 곳이라 하는데, 곧 당장경(唐莊京)이 와전되었다.]·삼성사(三聖祠)[단인(檀因)·단웅(檀雄)·단군사(檀君祠)가 있다.]가 있다."
즉, 풍주(豐州)와 유주(儒州)는 모두 서해도(西海道)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 해주(海州)에 속하는 지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풍주(豐州)와 유주(儒州)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에 있는 크고 작은 도시 중에 속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림 2] 하남성 안양시 주변
다시 말해서 앞서 3-1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고려의 서해도(西海道)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 해주(海州)를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로 추정할 수 있으므로, 해주(海州)에 속해 있었던 풍주(豐州)와 유주(儒州)도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인근에 있는 크고 작은 도시 중의 하나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위에 언급한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풍주(豐州)에 초도(椒島)가 있었다고 한다.
또 초도(椒島)에 관하여 『신당서』 지리지 하북도에 기록되어 있는데, (압록수 입구에서) '남쪽으로 해안을 따라가면, 패강구(貝江口)․초도(椒島)를 지나 신라 서북쪽의 장구진(長口鎭)에 도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요사』 지리지에는 초도(椒島)가 초주(椒州)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고구려 평양성이 있던 곳이 초주(椒州) 암연현(巖淵縣)이였는데, 그 동쪽 경계는 신라였으며 옛 평양성(平壤城)이 암연현(巖淵縣) 서남쪽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간 본 연구원이 고대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초주(椒州)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로 추정할 수 있으며, 고구려 평양성은 초주(椒州) 암연현(巖淵縣)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즉,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는 삼국시대에 초도(椒島)라고 불렸으며, 고려시대에는 초주(椒州)라고 불렸던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초주(椒州)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발해만에서부터 패수, 즉, 현재의 오경하를 따라 서남쪽으로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인근지역에 이르는 길죽한 지역으로서 옛 삼국시대에는 옛 황하의 지류들이 형성한 섬(초도)이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또 위에 언급한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유주(儒州)에 구월산(九月山)[세상에 전하기를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한다.]·장장평(庄庄坪)[세상에 전하기를 단군(檀君)이 도읍한 곳이라 하는데, 곧 당장경(唐莊京)이 와전되었다.]·삼성사(三聖祠)[단인(檀因)·단웅(檀雄)·단군사(檀君祠)가 있다.]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왕검(檀君王倹)이 처음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했다가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으며, 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상기한『고려사』 지리지는 유주(儒州)에 아사달산(阿斯達山)과 당장경(唐莊京)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아사달산(阿斯達山)과 당장경(唐莊京)이 같은 지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과연 『삼국유사』기록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고려사』 지리지의 기록이 올바른 것인가?
이에 대한 판단은 간단하다. 왜냐하면, 명(明)초 조선초(1342~1512년)에 명(明)의 사관들이 중국23(史, 『사기』부터 『원사』까지)를 뜯어 고치자 조선의 사관들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을 뜯어고쳤으며, 그 이후에 발간된 조선의 사서들은 모두 꾸며진 역사로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중국 23사(史)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에 근거하여 위사(僞史)와 진사(眞史)를 분별하면서 고대 지명들의 위치를 연구한 결과, 단군왕검(檀君王倹)이 서기전 2333년에 최초로 조선을 건국한 곳은 '왕검성'이었는데, 그 위치는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지역으로서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또 단군왕검(檀君王倹)이 도읍지를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그 위치는 현재의 산동성 태산 아래 제남시 주변지역으로서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추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장당경(藏唐京)이 당장경(唐莊京)이었다고 하나, 당장경(唐莊京)이 유주(儒州)에 있었으며, 아사달산(阿斯達山)이 구월산(九月山)인데, 유주(儒州)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고려사』 지리지 기록대로 유주(儒州)의 위치를 추정하면,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남성 활현, 준현, 또는 내황현 등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왕검(檀君王倹)이 처음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했다가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으며, 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천도 경로를 [그림 3]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그림 3] 단군조선의 도읍지 천도 추정경로(왕검성-->아사달-->장당경)
그런데 『삼국유사』에 따르면, 아사달에서 장당경(藏唐京)으로 간 시기는 주(周) 호왕[虎王, 무왕(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한 때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기』에 따르면, 주(周)가 은(殷)을 멸망시키고 2년 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기록들이 일치하고 있지 않으나, 주(周)가 은(殷)을 멸망시킨 해는 서기전 1046년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그 당시 기묘(己卯)년은 서기전 1122년, 1062년, 1002년에 해당한다.
그런데 단군이 도읍지를 아사달에서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면, 시기적으로 볼 때, 주(周)와 은(殷) 간의 전쟁(서기전 1046년)이 그 당시 상황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사건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쪽에서 주(周)와 은(殷)이 전쟁을 하는데, 단군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천도했다는 것은 단군조선이 전쟁에 참여하거나.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 있지 않았겠는가?
아무튼 『고려사』 지리지 기록대로 장당경(藏唐京)의 위치를 유주(儒州)로 본다면, 단군조선의 도읍지 천도 추정경로를 [그림 3]과 같이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