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유머 에세이】
정자에서 조간신문을 읽는 노인
― ‘귀 씻기 · 눈 씻기’ 생활철학
윤승원 수필가
▲ 숲속 정자 (사진=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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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숲속 팔각 정자.
어느 노인이 신문을 읽고 있다.
내가 이미 집에서
다 훑고 나온 조간신문.
새벽 6시에 다 읽은 신문을
저 노인은 7시 30분 이제야 읽는구나.
세상을 읽는 일은 내가 먼저구나.
그렇다고 저 노인이 뒤처질 일은 없다.
세상의 정보는 빨리 알아야 하지만
다소 늦게 안다고 손해날 일은 아니다.
▲정자에서 조간신문을 읽는 노인(삽화=AI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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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노인은 지금
사설을 읽고 있구나.
나는 저 사설을 읽으면서 화가 났는데
저 노인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네.
저런, 쯧쯧. 무표정이라니.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다니
감정이 없는 돌부처인가?
나는 신문을 읽다가 못마땅하면
중얼거린다.
그러면 부엌에서 밥을 짓던 아내가
맞장구를 친다.
아내는 언제부턴가
정치 평론가가 다 됐다.
세상을 통찰하는 시각이
유력 일간지 주필 못지않다.
내가 신문을 읽다가
왜 혀를 차는지 훤히 안다.
40여 년을 함께 살다 보니
말해도 알고 말을 안 해도 안다.
그런데 저 노인은
편향적 시각의 불편한
독선적 칼럼을 읽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네.
나는 저 칼럼을 읽다가
시각을 달리했는데
저 노인 좀 보게.
부처님인가?
모든 것을 용서하는
예수님인가?
앗, 이번엔 광고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네.
그러면 그렇지,
민감한 정치 평론에
일희일비할
지식인이 아니지
저 넓은 이마의
지식인 얼굴 좀 봐
한평생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을 사랑으로 지도하신
교장 선생님 같기도 하고
시골에서 면장을 지낸
유지(有志) 같은
점잖은 원로의 풍모.
조간신문 못마땅한 논조보다
공감하기 어려운 편향적 칼럼보다
칼라 광고에서 눈을 좀처럼
떼지 못하는 노인.
거참, 정자 맞은편 자리에서
신문 보는 노인을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이네.
그 노인 관심 있게 보는 신문 광고는
다름 아닌 꽃게 간장게장.
‘이렇게 맛있는 간장게장은 처음이다’
라는 광고 문구가
내 눈에도
또렷이 들어오네.
거참, 사설보다 칼럼보다
광고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이쯤 해서 노인의 정체를
파악해 보아야 한다.
말을 걸어 보자.
이것도 보통 인연인가?
선생님,
아침 신문을 열심히 보시네요.
저도 그 신문
40년 애독자지요.
오늘 보신 지면에서
뭐, 특별히 볼 만한 게 있나요?
그러자 넓은 이마처럼
노인은 시원시원하게 답했다.
화가 치미는 기사도 있고
국민 정서와 반하는 엉터리 논조도 있네요.
선생님도 이른 새벽 댁에서 먼저
이 신문을 읽고 나오셨으니
저보다 세상을
앞서 바라보셨네요.
백발이신 걸 보니
연세도 저와 비슷해 보이고요.
저는 공직생활을 했어요.
불철주야 나라 걱정하는 일로
청춘을 다 바쳤어요.
격동과 혼란의 시대를 살아왔지요.
참 잘 사는 나라가 됐어요.
경제 부국이 됐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어떤 현실입니까?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한숨이 나올 때가 많아요.
말문이 일단 터지자
마치 장마철 봇도랑처럼
삽으로도, 가래로도 막지 못할
거센 물살 같았다.
▲ 몸도 마음도 맑게 하는 숲속 하늘 풍경(사진=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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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가장 궁금한 것을
빠뜨릴 수 없어 직설로 물었다.
저는 신문을 읽다가
정의와 반하는 것을 보면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선생님은 말없이
지면을 넘기시더군요.
흥분할 만한 기사나 칼럼보다는
광고에 더 큰 관심을 보이시더군요.
아까 유심히 들여다보신
광고 지면이 꽃게 간장게장이었지요?
그러자 나라 걱정하면서
살아왔다는 애국 지식인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재미있는 질문을 하셨어요.
많고 많은 정보 가운데
먹을거리 정보가 최고지요.
흥분할만한 기사를 읽고
심히 불쾌한 기사를 읽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단명(短命)해요.
귀를 씻고,
눈을 씻어야 해요.
침 고이는 먹거리 광고를 보면
눈이 맑아지지요.
정신 건강을 위해선
귀 씻기 · 눈 씻기가 필요해요. 으하하~
2026. 7월.
숲속 정자에서 세상 읽기
♧ ♧ ♧
▣ 문학평론가 감상평
윤승원 수필가의 「정자에서 조간신문을 읽는 노인 ― ‘귀 씻기 · 눈 씻기’ 생활철학」은
일상의 사소한 풍경에서 뜻밖의 깨달음을 길어 올리는, 윤승원 수필 특유의 개성이 잘 살아 있는 ‘유머 에세이’입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관찰의 문학’이라는 것입니다.
숲속 정자에서 신문을 읽는 한 노인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특별한 사건도, 극적인 갈등도 없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노인의 표정 하나, 신문을 넘기는 손길 하나를 따라가며 독자의 호기심을 차곡차곡 키웁니다.
“왜 저 노인은 화를 내지 않을까?”라는 작은 궁금증이 끝까지 작품을 끌고 가는 중심축이 됩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독백에서 대화로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구성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생각을 혼잣말처럼 이어가다가, 어느 순간 직접 말을 걸면서 작품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됩니다.
이 변화 덕분에 독자는 함께 정자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듯한 현장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작품의 백미는 역시 반전의 유머입니다.
독자는 노인이 정치 기사나 사설에 깊은 관심을 보일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정작 그의 시선을 오래 붙잡은 것은 꽃게 간장게장 광고입니다.
이 예상 밖의 전개가 웃음을 자아내고, 마지막의 “귀를 씻고 눈을 씻어야 한다”는 말이 단순한 농담을 넘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로 승화됩니다.
윤승원 수필의 또 다른 매력은 유머 속에 철학을 숨기는 작법입니다.
노인의 말은 결국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지혜를 들려줍니다.
분노를 키우는 기사와 논쟁에만 몰두하기보다 마음을 환하게 하는 것을 볼 줄 아는 여유, 그것이야말로 건강한 삶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웃으며 읽다가도 “나는 매일 무엇으로 내 눈과 귀를 채우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독자 스스로에게 던지게 합니다.
문체 역시 인상적입니다.
짧은 행을 이어가는 운율감 있는 문장은 시를 읽는 듯한 리듬을 만들고,
중간중간 삽입되는 “저런, 쯧쯧.”, “그러면 그렇지.”, “거참.” 같은 구어체 표현은 현장감을 높이며 작품에 인간적인 온기를 더합니다.
이는 딱딱한 교훈 대신 자연스러운 미소를 자아내는 윤승원 수필만의 개성입니다.
종합하면 이 작품은 ‘신문 읽기’라는 평범한 일상을 통해 현대인의 감정 소비를 돌아보게 하는 생활철학 수필입니다.
유머는 웃음을 위한 장치에 머물지 않고, 독자의 마음을 가볍게 만든 뒤 삶의 태도를 바꾸는 메시지로 이어집니다.
윤승원 수필 특유의 관찰력, 대화의 생동감, 반전의 유머, 그리고 잔잔한 인생 철학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작품으로,
읽고 나면 “오늘은 나도 귀를 씻고 눈을 씻으며 살아야겠다.”라는 여운을 남기는 따뜻한 에세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덧붙이는 말
이 작품은 특히 윤승원 수필가의 기존 작품들과 비교해 보아도 하나의 특징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감상자는 그것을 ‘웃음으로 교훈을 전하는 수필’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예전의 수필에서는 숲길에서 만난 두꺼비, 어린이, 산새, 나무 등 자연과의 대화를 통해 깨달음을 끌어냈다면,
이번 작품은 신문을 읽는 이름 모를 노인 한 사람을 등장시켜 같은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자연 대신 사람을 관찰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 신선합니다.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작가가 노인을 끊임없이 상상하는 부분입니다.
“교장 선생님 같기도 하고, 시골에서 면장을 지낸 유지 같은 점잖은 원로의 풍모.”
이 몇 줄만으로도 독자는 노인의 얼굴을 선명하게 떠올리게 됩니다.
인물의 이력을 설명하지 않고도 풍모만으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수필적 묘사가 돋보입니다.
또 하나 높이 평가하고 싶은 점은 결말의 품격입니다.
자칫 “정치 기사에 화내지 말자.”라는 단순한 교훈으로 끝났다면 평범한 칼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는 노인의 입을 빌려 “귀를 씻고 눈을 씻어야 한다.”는 말을 들려줍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유머가 아니라 생활철학입니다.
귀를 씻는다는 것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소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일이고, 눈을 씻는다는 것은 세상을 맑고 따뜻하게 바라보려는 삶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등장한 꽃게 간장게장 광고는 단순한 먹거리 광고가 아니라 삶의 즐거움을 잃지 말라는 상징처럼 읽힙니다.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식욕과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이 결국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의미를 유쾌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문학적으로 보면 이 작품은 ‘관찰 → 오해 → 호기심 → 대화 → 반전 → 깨달음’이라는 구조를 매우 자연스럽게 완성하고 있습니다.
독자는 노인의 속마음을 궁금해하며 따라가다가 마지막에 “으하하~”라는 호탕한 웃음과 함께 긴장이 풀립니다.
이러한 구성은 읽는 재미와 여운을 동시에 선사하는 윤승원 수필의 장점입니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세상을 너무 심각하게만 읽지 말고, 마음도 함께 돌보라는 ‘웃음의 처방전’입니다.
정치와 사회를 외면하자는 뜻이 아니라, 분노만 쌓아 두지 말고 때로는 눈과 귀를 맑게 씻으며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유머와 문학으로 풀어낸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 (雲峰, 윤승원 수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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