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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⑦ 큰 앎과 작은 앎. ⑧? 有用之用과 無用之用 / 김정탁의 장자 이야기
ysoo 추천 0 조회 42 16.04.04 23: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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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는 道學은 大知…가까이서 보는 科學은 小知



▲ 일러스트=안은진



김정탁의 장자 이야기 - ⑦ 큰 앎과 작은 앎


앎의 방식에도 자료(materials)-정보(information)-지식(knowledge)-지혜(wisdom)의 순으로 서열체계가 있다. 자료를 이해하는 게 가장 낮은 단계의 앎이라면 그 위로는 정보가, 또 정보 위에는 지식이, 지식 위에는 지혜가 마지막을 장식한다. 물론 처음부터 지혜의 단계에 곧바로 진입할 순 없다.

자료에서 정보를 추출하고, 정보에서 지식을 추출하고, 지식에서 지혜를 추출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물론 ‘지혜롭게 되는 게(to be wise)’ 빠를수록 의미 있는 교육이 쉽게 자리 잡는다. 그래서 가능한 한 적은 양의 자료에서 정보를, 또 적은 양의 정보에서 지식을, 또 적은 양의 지식에서 지혜를 만들 때 교육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자료-정보-지식-지혜의 피라미드가 수직적일수록 바람직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오늘날 자료-정보-지식-지혜의 피라미드는 옆으로 너무 퍼져 수평적이 되고 만다. 즉 많은 양의 자료에서 적은 양의 정보만을, 또 많은 양의 정보에서 적은 양의 지식만을 찾다가 결국 지혜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채 앎의 피라미드를 헝클어 버린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라는 경제 원칙이 교육의 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사태이다.


사실 한국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오늘날 교육은 지혜로움에 이르지 못한 채 ‘지적으로 되는 데(to be knowledgeable)’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자료와 정보만으로 자신이 지혜롭다고 착각하는 학생조차 있다.

그 결과 대학교육이 보통교육화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창조경제’를 구현하려면 무엇보다 자료-정보-지식-지혜의 피라미드가 효과적으로 작동함으로써 지혜로움에 도달하는 확률이 높아야 한다.


장자는 앎을 큰 앎(大知)과 작은 앎(小知)으로 구분한다. 자료-정보-지식-지혜의 피라미드에서 가장 위에 위치한 지혜가 큰 앎이라면 밑으로 내려갈수록 작은 앎에 가까워진다.

그렇다면 장자가 말하는 큰 앎과 작은 앎은 어떤 것일까?

장자에 따르면 큰 앎은 세상을 멀리서 볼 때, 즉 도학(道學)을 할 때 얻어지는 반면 세상을 가까이서 보면, 즉 기학(器學) 내지 과학(科學)을 하면 작은 앎에 그치고 만다. 멀리서 보면 세상만물들 사이에 구분이 사라지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 구분이 뚜렷하게 드러나서이다. 이것이 구별되어 드러나는 황(黃)과 구별되지 않고 가물가물한 현(玄)의 차이이다.

장자서가 대붕의 비상으로 시작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대붕이 9만 리나 높이 날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땅 위의 모든 게 구별되지 않고 모두가 푸르지 않았던가?

(문화일보 9월 2일자 24면 장자이야기 4회 참조)


그런데 높이 날지 못하는 작은 동물, 예를 들어 매미나 어린 비둘기는 기껏 날아봐야 느릅나무 높이에 이르러서 멈추고, 때론 거기에도 이르지 못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이런 존재들은 대붕이 느끼는 현(玄)의 관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로선 이마저도 대단히 높이 날아오른 셈인데 거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모든 게 뚜렷하게 구분되어질 뿐이다. 그러니 이들은 오로지 황(黃)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물론 대붕이라도 항상 높이 나는 건 아니다. 바람(風)이 날개 밑에 두껍게 쌓여야만 9만 리씩이나 높이 날 수 있다. 만약 바람이 충분히 쌓이지 않으면 대붕은 큰 날개(大翼)를 띄울 여력이 없다. 이는 충분한 물(水)이 고이지 않으면 큰 배(大舟)를 띄울 수 있는 여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예를 들어 마루 팬 곳에 물 한 잔을 부으면 작은 풀잎은 떠서 배가 되지만 작은 풀잎보다 훨씬 무겁고 큰 잔을 거기에 놓으면 뜨기는커녕 밑에 달라붙고 만다. 이는 물은 얕은데 배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붕의 큰 날개를 띄우려면 거기에 합당한 바람이 날개 밑에 반드시 쌓여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대붕처럼 하늘을 높이 날 수 없지 않은가? 날 수 없다면 인간은 어떻게 세상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을 건가? 멀리서 바라보아야 큰 앎을 얻을 수 있는데 대붕처럼 날 수 없다면 인간은 그저 작은 앎을 얻는 데 그치는 걸까? 이런 의문은 분명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런 점을 예상했는지 장자는 멀리서 보는 것을 ‘높음’이라는 공간에 제한하지 않고 ‘길다’는 시간으로 확장했다. 그래서 수명을 짧은 수명(小年)과 긴 수명(大年)으로 구분한 뒤 짧은 수명은 긴 수명에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아침에 생겨났다 해가 지면 사라지는 조균(朝菌)은 밤과 새벽을 모르지 않는가. 또 여름철에만 활동하는 매미는 봄과 가을을 알 턱이 없지 않은가. 이는 오로지 짧은 수명 탓이다.


이에 반해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 남쪽에 명령(冥靈)이란 나무는 500살을 봄으로 삼고, 500살을 가을로 삼았다고 하니 나무의 수명이 1000년이다. 게다가 이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던 대춘(大椿)이란 나무는 8000살을 봄으로 삼고, 8000살을 가을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니 나무의 수명이 무려 1만6000년인 셈이다.

장자가 볼 때 이쯤 되어야 긴 수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들은 800년을 산 팽조를 부러워하며 자신의 수명을 이와 비교하려고 드니 장자가 볼 때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면 장자에게 작은 앎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지식(知), 언행일치의 행동(行), 덕(德)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유가(儒家)가 유난히 강조하는 가치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장자는 지식, 행동, 덕에 대해 작은 앎이라고 낮게 평가한다.

그래서 지식이란 ‘한 개 정도의 벼슬(一官)’을 수행하는 데 적당하고, 행동은 ‘한 개 고을(一鄕)’을 다스리는 데 적당하고, 덕은 군주와 뜻이 맞아 ‘한 나라(一國)’의 신임을 받는 데 적당할 뿐이라면서 이것들을 평가절하한다. 물론 지식보다 행동이, 또 행동보다 덕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장자에게는 지식·행동·덕에 입각해 있는 사람들은 매미나 어린 비둘기처럼 높이 날지 못해 세상을 분명하게 구분지어 보는 황(黃)의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장자는 왜 이리도 지식·행동·덕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못하는 걸까? 아마도 이것들이 유위(有爲), 즉 하고자 함에 입각해 있다고 본 탓이다. 공자의 말씀을 기록한 ‘논어’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로 시작하는 건 우연은 아니다. 유가에서 배움(學)을 특별히 강조하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어서이다.

그렇지만 장자가 볼 때 배움은 너무나 유위적이다. 우주자연의 원리(天道), 인간의 도리(人道), 그리고 인간세상의 이치(治道)는 배움만을 통해 얻어지는 게 아니다. 배우기에는 우주자연이 너무나 넓고, 인간세상 또한 복잡해서이다. 그래서 무위(無爲), 즉 하고자 함이 없는 바로 임할 때 비로소 그 원리와 이치를 터득할 수 있다. 무위의 터득, 이를 위해 장자는 가장 무위자연의 존재인 바람과 물을 큰 새(大鵬)의 비상과 큰 배(大舟)의 띄움을 위해 동원했다.


그렇다면 무위자연의 상태에서 큰 앎을 얻은 사람 중에는 과연 어떤 사람이 있을까?

장자는 송영자(宋榮子)와 열자(列子)를 그 예로서 든다.

송영자는 송견(宋)으로 알려진 인물로 흔히 송자(宋子)라고 높여 부른다. 송영자는 만물을 대할 때 편견을 갖지 않고 이들을 가능한 한 화합시킴으로써 세상만물 모두를 조화시키려고 애썼다. 또 모욕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이를 수치라고 생각하지 않고 나라 간의 싸움을 막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이처럼 남을 위하는 일에 몰두하다가 자신을 돌볼 틈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를 칭찬해도 더 이상 애쓰려 하지 않고, 또 헐뜯어도 더 이상 꺾이지 않았다. 송영자는 한마디로 훌륭한 사람의 표본인 것이다.


그럼에도 장자가 보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면이 있다. 그것은 송영자가 화산 모양의 모자를 만들어 쓰는 데서도 드러나는데 모자 착용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바깥의 외물 사이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또 영예와 치욕의 경계를 확실히 했다는 점 때문이다. 이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여전히 현(玄)의 이치가 아니라 황(黃)의 이치에 입각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에 장자는 송영자에 비해 현(玄)의 이치에 보다 다가간 열자를 큰 앎을 얻은 사람으로 다시금 제시한다.


열자는 노자 및 장자와 더불어 도가사상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열자는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기한 기술을 지닌 인물인데 한 번 바람을 타고 날면 보름쯤 지나서야 집에 돌아온다. 그러니 몸과 마음은 맑고 가뿐하다. 이처럼 열자는 땅을 걸어 다니는 수고는 면했지만 바람을 타는 법에 여전히 의존하는 바가 있다. 그러니 바람을 타는 법을 알지 못하면 하늘을 날아다닐 수 없다. 그렇다면 그의 소요(逍遙)는 바람을 타는 법, 즉 앎에 의존하는 셈이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얻어야 기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명예를 얻어야 기뻐한다. 그것은 이들의 소요가 부귀, 명예 등에 의존하고 있어서이다. 의존하는 대상이 있으면 그것을 얻어야만 비로소 소요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열자는 앎에 의존해서 소요하는 꼴이다.


장자는 천지본연의 모습(天地之正)을 따르고, 또 자연의 변화(六氣之辯), 즉 음(陰)·양(陽)·바람(風)·비(雨)·어둠(晦)·밝음(明)에 순응하여 무궁한 세계에서 노닐면 더 이상 의존할 데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야만 무위자연의 참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자연의 결에 따라 판단하면서 궁극에는 우주와 합일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큰 앎이다. 그렇다면 누가 큰 앎에 진정으로 이른 사람일까?

지인(至人)·신인(神人)·성인(聖人)이 그들이다. 지인은 나라는 의식이 없고(無己), 신인은 공을 이루려는 바가 없고(無功), 성인은 명성을 얻고자 하는 바 없는(無名)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지인·신인·성인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문화일보 10월 28일자 24면 6회 참조)






명성·스펙…‘쓸모있음’에 집착하는 세상

‘쓸모없음’의 ‘쓸모’ 깨달아야 의미있는 삶



▲ 일러스트 = 안은진



김정탁의 장자 이야기 ⑧ 有用之用과 無用之用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니 어떻게 사는 게 의미 있는 삶일까? 이에 대해 잘 알려진 대답 중 하나는 공자가 말한 이순(耳順)이다. 이순을 직역하면 귀(耳)가 순하다(順)이다. 인생을 마무리하는 나이 60에 이르러선 싫은 소리든 좋은 소리든 귀에 다르지 않게 들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오관의 편리함에 매몰되지 말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미망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바람직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러면 나이 70에 이르러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즉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더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삶으로 인생을 마감할 수 있다.


귀뿐 아니라 눈도 마찬가지이다. 아름답거나 추한 것을 보아도 느낌이 같으면 ‘안순(眼順)’이다.

물론 입도 그러하다. 달콤한 것이나 쓴 것을 맛보아도 느낌이 같으면 그것은 ‘설순(舌順)’이다.

과잉기표로 말미암아 스펙터클이 판치는 오늘날 사회에선 이순이든, 안순이든, 설순이든 간에 이런 감각관을 유지하는 게 점점 힘들어진다. 오늘날 미디어의 총아라 할 수 있는 텔레비전은 이런 스펙터클한 환경을 만들어내는 데 앞장서고 있다. 모든 채널마다 앞다투어 방영하는 먹거리 프로그램이 설순을, 또 화려한 무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가 안순을 방해하고 있지 않은가?


노자도 이런 점을 걱정했다. 노자에 따르면 청·백·적·흑·황의 오색, 즉 온갖 색을 밝히는 사람은 눈이 멀고, 궁·상·각·치·우의 오음, 즉 온갖 소리를 밝히는 사람은 귀가 멀고, 신맛·짠맛·매운맛·단맛·쓴맛의 오미, 즉 온갖 맛을 밝히는 사람은 입맛을 잃는다. 음식물에 인공 조미료가 뿌려지면 몸이 상하지만 언어에 인공 조미료가 첨가되면 마음까지 망친다. 컴퓨터 그래픽 등으로 구현되는 화려한 영상이 바로 인공 조미료가 잔뜩 뿌려진 과잉기표이다. 이런 과잉기표가 지금 우리 주위에 흔히 널려 있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공자, 노자가 구현하려는 삶과 점점 멀어진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장자가 말하는 의미 있는 삶은 어떤 걸까? 장자는 소요(逍遙)와 방황(彷徨)을 말한다.

장자서가 소요유(逍遙遊)란 제목으로 시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장자에게서 방황은 소요와 사실상 같은 의미인데 가야 할 길을 못 찾아 헤맨다는 식으로 요즘은 그 의미가 부정적으로 쓰여 안타깝다. 소요와 방황을 통해 구현하는 삶의 모습은 공자와 노자가 추구하는 인생관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공자와 노자가 말한 의미 있는 삶의 모습이 감각작용에만 매달린다면 소요와 방황은 의미 있는 삶의 모습이 다차원적으로 집약된 면모를 지닌다. 또 공자와 노자가 추구하는 바가 개념적이고 철학적이어서 다소 현학적이라면, 소요와 방황은 탈 개념적이고 소박하여 친숙하고 친근하다.


그렇다면 소요와 방황을 삶의 모토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일까?

장자는 이런 사람으로 성인(聖人), 신인(神人), 지인(至人)을 든다.

성인은 ‘명성을 얻고자 하는 바가 없는(無名)’ 사람, 신인은 ‘공을 추구하려는 바가 없는(無功)’ 사람, 지인은 ‘자기라는 의식, 즉 자의식이 없는(無己)’ 사람이어서이다.

지금 세상에는 명성과 공을 추구하지 못해 안달이고, 또 자의식으로 가득 찬 사람들로 우글거리고 있다. 그러니 ‘명성을 얻으려는(有名)’ 사람, ‘공을 추구하려는(有功)’ 사람, ‘자의식이 있는(有己)’ 사람들은 소요와 방황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삶의 기쁨에 도저히 이를 수 없다.


장자는 성인의 예로 허유(許由)를 든다. 허유는 요(堯)임금이 천하를 물려주려 하자 못들을 소리를 들었다고 냇가로 가서 귀를 씻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허유가 요임금의 제안을 단박에 거절한 것은 명성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조금치도 없어서이다. 요임금에 의해 이미 천하가 잘 다스려진 상태에서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면 허유에게는 왕이란 허명(虛名), 즉 실질의 껍데기만 남을 뿐이다.

수달이 강물을 마시더라도 작은 배 속을 채우기만 하면 충분하고, 뱁새가 깊은 숲 속에 둥지를 치더라도 나뭇가지 하나(一枝)면 족하다. 이것이 성인의 모습이다.

해남 대흥사에 가면 초의선사가 머문 암자가 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일지암(一枝庵)이다.


또 장자는 신인의 예로 저 멀리 떨어진 고야산(姑射山)의 신인들을 든다. 물론 이들은 실제 인물이라기보다는 전설상의 가공 인물이다. 이 신인들은 자신들의 덕(德)으로 만물을 반죽하여 이것들을 하나로 만드는 엄청난 능력을 지닌다. 게다가 만물에 의해 피해를 입는 일도 없어 홍수 때는 물이 하늘까지 차오르더라도 빠지지 않으며, 가뭄 때는 암석이 녹아 흘러 땅과 산이 타더라도 뜨거운 줄을 모른다. 또 먼지, 때, 쭉정이, 쌀겨처럼 보잘것없는 것으로도 요·순 같은 성인을 만들 수 있다. 그러니 고야산의 신인들이 애써가며 천하를 자신의 일거리로 삼을 까닭이 없다. 신인들의 존재 자체가 ‘공이 있는’ 존재여서이다.


지인은 성인과 신인에 비해 현실적인 인간이다. 그런 탓인지 장자도 주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이름 없는 나그네를 지인의 예로 든다.

그 나그네는 세탁소 주인에게 겨울에 손발이 트지 않는 비법을 금 백 냥에 샀는데 마침 월(越)나라가 오(吳)나라를 침략해서 벌어진 겨울철 수전(水戰)에서 오나라 장수로 발탁되었다. 그는 오나라 군사를 지휘하여 손발이 터 제대로 싸우지 못한 월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고, 이 승리로 인해 제후에 임명되었다.

손발이 트지 않는 기술은 같았지만 어떤 사람은 제후가 되고, 어떤 사람은 솜 빠는 일에서 못 벗어났다. 사용하는 바가 달라서였는데 나그네는 비법을 빈 마음(虛心)으로 대했기에 다른 용도를 볼 수 있었던 반면, 세탁소 주인은 그러지 못했다. 이런 빈 마음은 자의식을 만들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성인·신인·지인이 추구하는 공통된 가치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가치를 지녔기에 성인은 명성을 바라지 않고, 신인은 공을 추구하지 않고, 지인은 자의식을 만들지 않을 수가 있다.

무용지용(無用之用), 즉 쓸모없음의 쓸모가 이들에게 발견되는 공통된 가치이다. 무용지용의 도를 터득하면 명성과 공을 굳이 추구할 필요가 없으며, 또 나를 내세울 필요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유용지용(有用之用), 즉 쓸모 있음의 쓸모에 익숙해 있다. 그래서 인물로, 스펙으로, 용도로 상대를 곧잘 평가하곤 한다. 이런 쓸모 있음의 쓸모는 매우 제한적인 사용처만 발견할 수 있다. 세탁소 주인이 손발이 트지 않는 비법을 솜 빠는 일에만 사용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점이 장자가 추구하는 인생관과 그의 ‘절친’이자 중국판 소피스트 원조에 해당하는 혜시(惠施)가 추구하는 인생관 사이의 결정적 차이이다.


위(魏)나라 왕이 혜시에게 큰 박 씨를 주어 혜시가 그걸 심은 일이 있었다. 심은 뒤에 박은 쌀 다섯 섬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자라났는데 혜시가 볼 때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물을 채우면 그걸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단단하지 못했고, 또 갈라서 바가지로 쓰려 해도 납작해서 아무것도 담을 수 없었다. 크기만 컸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화가 난 혜시는 바가지를 깨뜨리고 말았다.

이 얘기를 들은 장자는 혜시를 보고 정말로 큰 것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조롱한다. 그 큰 박을 물에 뜨는 통으로 삼아 강이나 호수에 띄워 그 안에서 유유자적하게 머물 생각은 하지 않고, 큰 박이 소용없다는 불만만 터뜨려서이다. 친구라 할지라도 장자가 볼 때 혜시는 빈 마음(虛心)의 소유자와 반대되는 ‘마음이 꽉 막힌(有蓬之心)’ 답답한 사람일 뿐이다.


이에 기분이 상한 혜시는 장자에게 당장 반격을 시도한다. 혜시는 자기 집 근처에 큰 가죽나무가 있는데 몸체는 뒤틀리고 옹이는 가득해서 그야말로 크기만 컸지 쓸모없는 나무라고 말한다. 게다가 뒤틀린 정도가 심해 먹줄을 튀길 수 없고, 가지 또한 굽어 있어 곱자와 그림쇠에 들어맞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니 길가에 덩그러니 서 있어도 목수들이 거들떠보지 않고 지나치고 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재목감으로 쓸모가 없어서이다.

혜시가 볼 때 장자도 쓸모없는 그 큰 가죽나무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장자 말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세상 사람들은 장자를 상대하지 않고 모두 떠나버리지 않는가 하고 장자를 향해 힐난조로 말한다. 논리주의자 혜시답게 아픈 돌직구를 장자에게 날린 셈이다.


물론 장자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살쾡이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다가 먹잇감을 발견하면 높고 낮은 데를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뛰어다니는데 결국 덫이나 그물에 걸려 죽고 만다. 인간 세상으로 치면 남을 죽이고 자신도 마침내 죽고 마는 전쟁터의 군상들이라고나 할까?

장자가 볼 때 이것이 쓸모 있음의 쓸모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반면 검은 들소는 하늘을 덮은 검은 구름처럼 엄청나게 큰 몸을 지닌다. 그렇지만 검은 들소는 살쾡이처럼 생쥐 한 마리조차 잡을 능력이 없지만 오히려 이 무능함으로 인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쓸모는 없지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검은 들소가 장자이고, 쓸모는 있지만 결국은 생명을 잃고 마는 살쾡이가 혜시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쓸모가 있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제 장자가 생각하는 쓸모없음의 쓸모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장자는 혜시에게 큰 가죽나무가 쓸모없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점잖게 말한다.

그 큰 가죽나무를 ‘무하유 마을(無何有之鄕, 아무것도 있는 것이 없는 마을인데 후세 사람들에 의해 속세 밖 이상향이란 의미로 쓰임)’ 이나 광활한 들판(廣莫之野)에 심어 놓고 하고자 함이 없는(無爲) 마음으로 그 나무 곁을 이리저리 ‘헤매어 돌아다니거나(彷徨)’, 나무 밑에 엎드려 자며 ‘유유자적하는 게(逍遙)’ 어떤가 하고 제안한다. 그러면 그 나무는 세상 사람들의 소용에 와 닿지 않으니 도끼질을 받아 넘어질 염려도 없고, 또 가지도 잘릴 염려가 없다. 생명을 유지하는 것, 나아가 마음을 여유롭게 두는 것,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이다.(문화일보 11월 25일자 24면 7회 참조)




성균관대 교수


△1954년생 △1985년∼현재 성균관대 사회과학대 교수(소통학)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미주리대 언론학 박사 △중앙일보 기자, 한국언론학회 회장 △禮와 藝:한국인의 의사소통사상을 찾아서, 玄:노장의 커뮤니케이션(저서)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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