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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나눔방 스크랩 경북 영주(2) : 금성대군錦城大君과 단종복위운동에 얽힌 이야기
신용복 추천 0 조회 22 12.06.30 12: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금성대군錦城大君과 단종복위운동 

 


금성대군신단 錦城大君神壇 : 사적 제491호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76번지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1426-1457)은 세종의 여섯 째 아들로,

조선 세조 2년(1456)에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을 추진하다가 

순흥順興(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으로 유배되어 

구덩이를 파서 가시돋힌 탱자나무로 에워싸 외부와 격리시키는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금성대군은 이듬해인 세조 3년(1457)에

다시 이곳에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및 향중鄕中 유림儒林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전의 밀고로 발각되어 실패하고

제의사諸義士들과 함께 참형을 당하여 순절殉節하게 되는데,

 

이곳을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마련된 제단이다.

단종의 복위가 실패하자 순흥부는 폐부廢府되었다가

숙종 9년(1683)에 순흥부가 다시 복원되고,

순절의사들이 신원伸寃되자

200여년이 지난 숙종 19년(1693) 부사 정중창이 금성대군이 위리안치 당했던 자리에 처음으로 단을 쌓았고,

동왕 45년(1719) 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삼단三檀으로 고쳐 쌓았고,

영조 18년(1742)에는 경상 감사였던 심성희沈聖希가 이를 정비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중앙에 금성대군을 모시고

대군의 단 오른편에는 순의비殉義碑를 세웠다.

 

*소수박물관에 있는 탁본...

 

오른편에는 이보흠,

왼편에는 많은 의사들을 모신 석단石壇이 있고,

그 비로 아래에는 허단虛壇이라고 해서 당시 희생된 무명의 하층민의 넋을 기리며,

해마다 봄, 가을로 이 지방의 유림들이 제사를 드리고 있다.

 

 

 


피끝마을은...

소수서원 입구 오른 편에 죽계천이 흐르고 있는데 그 죽계천은 정축지변丁丑之變의 단종애사로부터 시작된다.

수양대군(세조)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금성대군은 부당한 방법으로 왕위를 빼앗은 세조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한명회의 책략에 의해 이리저리 귀양을 다니게 되었고 영주 순흥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였다.

그 고을의 한 처자가 위풍당당한 금성대군을 흠모하고 있었다.

금성대군은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하여 고을의 수령과 은밀히 일을 도모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흠모의 정을 못 이긴 처자가 용기를 내어 어느 날 금성대군을 찾아갔으나

거사를 도모하던 금성대군은 처자를 냉정하게 물리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처자는 원한을 품고

금성대군의 방에서 거사에 가담할 사람들의 명단이 적힌 문서를 빼내와 한 관노를 시켜

<이것을 조정에 가져다주면 너는 큰 공을 세우게 되어 앞으로의 네 일신이 새로워지리라.>고 일러주며 관노를 조정으로 보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금성대군과 고을의 수령은 옆 고을의 수령에게 그 관노를 잡아다 줄 것을 부탁했는데...

말을 타고 뒤쫓아 온 옆 고을의 수령 풍기현감 김효급에게 관노는

<나를 잡아갈 것이 뭐 있겠느냐, 우리 함께 조정에 가 공을 세우자>고 하였다.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옆 고을 수령은 한참을 가다가

<이놈을 죽이고 나면 공은 오로지 내 것이 되는 것을!>

마음을 바꾼 옆 고을 수령은 절벽에서 관노를 밀어뜨리고 혼자 조정으로 향했다.

그러나 벼랑에 떨어진 관노는 죽지 않았다.

그는 한명회의 사촌이 사는 안동으로 달려가 자초지종을 고하고...

이로 인해 거사를 일으켜 보지도 못하고 순흥 고을은 피바람이 불게 되었다.

문건에 이름이 적힌 수많은 고을의 선비들이 참수를 당해 죽계천의

죽계제월교竹溪霽月橋 인근에 버려지게 되었는데,

그 피가 수십 리 내[川]를 흘러 내렸다.

죽계천은 오백여 년 전의 피비린내 나는 사연을 안고 오늘까지 흐르고 있다.

 

                                                                        * 소수서원 옆으로 흐르는 죽계천...

                                                                           금성단이 인근에 있으니 이 인근에서 참화가 있었나 보다.

 

                                                                       * 죽계제월교 비 竹溪霽月橋 碑

                                                                       (현재 원래의 다리는 없어지고 비만 소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비는 소수서원을  휘감아 도는 죽계천 위에 놓인 다리의 비석으로

다리 옆 도로변에 세워져 있던 영주지역의 귀중한 금석문金石文 자료이다.

다리의 이름은 퇴계 이황이 명명命名한 것인데

송사宋史 주돈이 전 周敦이 傳에 나오는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비의 앞면에는 <죽계제월교 竹溪霽月橋>라는 다리 이름과

<강희 경인 오월 립 康熙 庚寅 五月 立>이라는 건립연대가 새겨져 있어 숙종 36년(1710)임을 알 수 있다.

뒷면에는 세운 사람의 이름이 있다.

일명 <청다리>라고도 불리는 이 다리는

<청다리 밑에서 아이를 주워 왔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참형을 당하면서 순흥면 내죽리 죽계천 제월교 앞 죽계천 이곳으로 흘러내린 피가

물길을 따라 십리 밖까지 흘러갔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그 피가 머물렀다던 순흥면 동촌(1)리는

그래서 피끝마을이라는 이름도 부었다(마을표지석... 충절의 마을)

 

 

          * 순절의 피가 흘러 내린 죽계천...

            피끝마을을 지나는 죽계천의 아침에 물안개가 자욱하다...

 

 


단종 때 명신인 박심문朴審問은 당시 조야朝野에서 단종 임금의 신망이 두터웠는데

그는 단종이 왕위를 찬탈 당하자 칭병稱病하며 벼슬을 물러난 뒤,

진달래를 심어며 울분을 삭였다.

성삼문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할 때, 서로 왕래하며 함께 모의하던 중

세조의 명에 의하여 질정관質正官으로 차출되어 몇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마지못해 명나라로 떠나게 되어 결국 단종 복위에 동참하지 못하였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의주에 이르러

성삼문 등이 장렬히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행하던 관원에게

<나는 여섯 군자[死六臣]와 단종 임금의 복위를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했는데,

 이제 나만 살아있으니 죽어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선대왕先大王 과 그들 육신六臣들을 뵙겠는가.>

라고 말하고는 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그 뒤 순조 때 이르러 그의 충절을 높이 기려 관직과 휘호 충정공忠貞公이 내려졌으며

후손들에게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받들라는 왕명이 있었으며

피끝 마을에 영모정永慕亭을 지어 기리고 있다.

현재 경기도 고양시 성사리 수억마을에 묘소 및 제실이 있다.


             ---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


시호를 내린 교지敎旨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事君盡節曰忠  임금을 섬기되 절의를 다하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淸白自守曰貞  맑고 곧은 마음으로 스스로 절개를 지키는 것을 정貞이라한다.


강원도 영월의 사육신과 함께 모셔진 사당 창절사彰節祠 봉안문에는

     地異一死 땅은 다르나 한 뜻으로 죽어

     義同六臣 의리가 여섯 신하와 같으니

     何先何後 어찌 선후가 있으리요

     愈久愈新 오래 갈수록 새롭구나.  

 

* 동천1리 찻길 옆에 있는 노인정에 있는 정자...

 


충절忠節의 마을 :

정축지변(1457년)후 구중심천九重深川에 떠돌던 참살된 충신忠臣들의 원혼의 한恨으로

마을 앞을 지나던 군마軍馬의 발굽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고 말에서 내려 걸어서 지나야 했는데

1711년 이곳 출신 [고]씨의 주선으로 성황제례후 평온이 찾아 왔다고 한다.

(현재 미궐봉 정상에 성황당이 보존되어 있고 제례를 올린다)

 

 

 

 

 

메밀묵밥과 금성대군 :

영주시 순흥면 산골마을에는 가마솥에 푹 끓여낸 메밀묵으로 삶을 지탱하던 시절이 있었다.

겨울로 접어들면 메밀타작이 한창이다.

메밀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이다.

논이 적어 쌀 구경하기 힘들었던 첩첩산중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은

산골사람들의 든든한 겨울나기 식량이었다.

밀가루는 먹고 나면 금방 소화가 되는데 메밀은 끈기가 있다.

메밀은 주로 만두, 부침개, 묵을 주로 해 먹었고, 메밀쌀로 죽을 끓여 먹고 밥을 하기도 한다.

지금이야 별미로 먹는 곡식이라지만 산 사람에게 메밀은 삶의 버팀목이나 다름없었다.   

순흥 사람들이 주로 해먹는 음식은 메밀묵밥이었다.

메밀을 통째로 갈아 따뜻한 물을 무어 섞은 뒤 채에 걸러 내어,

걸러진 물을 가마솥에 넣어 푹 끓인다.

묵이 눌러 붙지 않기 위해서 묵이 끓는 내내 나무 주걱으로 저어야 한다.

묵이 걸죽해지면 한 시간여 동안 은근한 불에 천천히 오래 뜸을 들이며 끓여야 한다.

묵직하고 탄력 있는 묵이 만들어지면 퍼서 넓은 그릇에 담아 밖에다 내 놓고

하룻밤이 지나야 비로소 온전한 묵이 만들어 진다.

메밀묵을 푸짐하게 채 썰어 언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함께 넣고

멸치 육수를 부어서 훌훌 말아 먹으면,

겨울에 둘도 없는 별미가 되곤 하였다.

별스런 먹을거리가 없던 시절 조밥 한 술을 말아먹으면 시간이 흘러도 잊지 못할 겨울밤의 별미이다.

                                          

 

 

메밀묵으로 만드는 다른 음식으로 태평초라는 것이 있다.

김치와 돼지고기를 썰어 넣어 김치찌개가 다 되어 갈 무렵 메밀묵을 썰어 넣은 찌개이다.

태평성대를 기원하며 먹었다고 한다.

혹독한 산 추위에 속을 든든히 채우는 것으로 이만한 것이 없었다.

 

 

오랜 세월 산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메밀묵밥에는 아픈 역사에 얽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조선시대 순흥면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줄지어 있을 정도로 번성한 고을이었다.

그러나 세조 2년 금성대군의 유배지가 되면서 순흥의 영화를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순흥면 일대는 거의 폐허가 되어 살아 남은 사람들은 겨우 끼니를 이어갔다.

 

             * 이러한 시절을 알기나 하는지...

               오늘의 충절의 마을은 풍요롭기만 하다.           

 

 

                                                                      * 동촌1리(피끝마을) 앞에 있는 물레방아는 ...

                                                                          가을 추수를 끝내고 벼를 찧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 사물놀이의 평화로운 모습이 마을을 지나는 도로가 옆에 세워져 있다.

 


금성대군당 :

영주시 단산면 단곡리에는 금성대군당이 있다.

아픔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한 순흥 사람들은 금성대군을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살아간다.

서낭당에는 금성대군의 피가 묻어 있었다는 혈석도 모셔져 있다.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죽계천에서 몸을 닦고 황소를 잡아 금성대군과 희생된 옛 순흥 사람들의 혼백을 위로한다.

더 이상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마을의 안녕도 기원한다.

조선 왕실의 핍박을 피해 순흥으로 숨어들었던 선비들은 메밀밭을 일구어 먹었다.

그때부터 순흥사람들은 묵밥을 즐겨 었었다고 한다. 

 

 

[경敬]자 바위 :

소수서원을 통해서 흐르는 죽계천의 산비탈에 있는 바위에 새겨진 글.

<백운동白雲洞>은 주세붕 선생이 서원을 창건할 때

중국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참고 하여 붙인 이름으로

퇴계 이 황 선생이 각자刻字 후 흰 칠을 하였다.

<경敬>은 유교의 근본사상인 <경천애인敬天愛人 >의 머리글자이다.

 

문헌에 의하면, 

조선 세조 3년(1457) 10월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이 고을 사람들은 [정축지변]이라는 참화를 당하게 되었다.

그 때 희생당한 도호부민들의 시신이 이곳 죽계천에 수장되면서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를 듣게되어

당시 풍기군수 신재 주세붕 선생이 원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敬]자를 각자하고 위에 붉은 칠을 하고 정성들여 제사[위혼제慰魂]를 지냈더니

그 후로는 울음소리가 그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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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꽃과 솔나리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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