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촌 네트워크
인도양 해역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원양항해가 이루어졌다. 이는 매우 흥미롭고도 중요한 사실이다. 직관적으로는 원양항해가 상당히 발전한 문명의 산물인 것 같은데, 실제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인더스 문명이 성립되기 훨씬 이전부터 원양항해가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두 지역이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문명이 발전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문명이 원양항해를 낳은 게 아니라 원양항해가 문명의 발전을 촉진한 셈이다.
초기 항해와 교역의 주체는 어민 공동체였다. 최근 많은 연구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에서 바다든 민물이든 어업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심지어 약 1만-5000년 전에는 현재의 사하라사막 지역이 사바나 초원지대였으며, 이곳에서는 메기와 틸라피아(tilapia, 인류가 식용으로 사용한 중요한 물고기 중 하나다)가 주직이었다.(Van Neer) 아프리카 서해안 지역에서는 환경 변화로 생활 여건이 악화할 때 해상 어업이 생존에 핵심 역할을 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Deme) 고대 지중해 세계 또한 마찬가지다.(Zucker) 고대의 여러 작가는 생선을 주시으로 하여 살아가는 바닷가 마을 사람들을 특별히 익시오파고이(Ichthyophagoi, '생선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라는 용어로 지칭했다. 기원전 4세기에 스트라보(15권 2장 2절)가 묘사한 발루치스탄(Baluchistan, 오늘날 파키스탄 서쪽에 해당하는 지역) 사람들이 그와 같은 사례다.
"이 사람들의 집은 대개 고래 뼈와 굴 껍데기로 지었다. 갈비뼈를 기둥으로 삼고 턱뼈를 문으로 삼았으며 척추골로 반죽을 했다. 그들은 생선을 햇볕에 말리고 두드린 다음 밀가루를 약간 섞어 덩어리를 만들었다.....진흙 그릇에서 생선을 굽기도 하지만, 대개는 날것으로 먹는다. 생선을 잡는 그물은 야자수 껍질에서 나오는 실로 만든다."
아마도 이들은 환경 요인으로 인해 다른 식량 자원을 구하기 힘든 상황에서 그나마 구할 수 잇는 마지막 자원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들로 보인다.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잇듯이 때로는 수산 자원이 내륙의 수렵-채집 자원보다 더 안정적인 생존 여건을 제공할 수도 있다. 세계 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진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이와 관련된 사실을 읽을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기원전 6000년경, 범람하는 강물로 인해 생겨난 늪지에 소규모 마을들이 들어서서, 농민들이 밀과 보리를 재배하고 염소와 양을 치는 한편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다. 기원전 3000년대 중엽에 등장한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이런 지역에서 노아의 홍수를 연상시키는 대홍수가 온 세상을 덮쳐 순식간에 작물과 가축을 휩쓸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엿새 낮고 엿새 밤이 지나는 동안 바람이 불어 닥치고 태풍과 홍수가 세상을 휩쓸었다. 태풍과 홍수는 마치 싸우는 투사처럼 서로 기승을 부렸다. 이레째 되는 날, 동이 트자 남쪽에서 올라오던 폭풍이 잠잠해지고 바다도 고요해지고 호수도 잔잔해졌다. 나는 땅거죽을 보았다. 거기엔 침묵만이 있었다. 모든 인류는 진흙으로 변해버렸다. (샌다즈, 97)"
이처럼 홍수가 농촌 생활 기반을 모두 파괴해버릴 수도 있는 가혹한 조건에서 물고기는 매우 중요한 보조 식량이었다. 어부들은 갈대로 만든 카누와 같은 원시적인 배를 타고 습지대를 헤치고 다니며 물고기를 잡았고, 이것이 장기적으로 원양항해의 벌전으로 이어졌다. 점차 선박과 항해술이 더 발전하면서 먼 바다로 나가는 게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원격지 간 해상 교류가 가능햇던 이유에 대해 과거에는 상상력을 동원한 선험적 설명에 의존했다. 예컨대 선원들이 두려움을 이겨내고 점점 더 먼 바다로 과감하게 나아간 결과 원거리 항로가 개척되었다는 식이다. 그렇지만 실상은 연안을 따라 늘어서 있는 어민 공동체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물품들이 순차적으로 이웃 지역으로 전해져, 결과적으로 먼 지역까지 이동한 것이다. 바다로 나간 어부들이 자연스럽게 이웃 지역들을 방문하며 어촌 마을 간 교류가 시작되었고, 점차 더 먼 지역들이 연결되었다. 예턴대 중동 지역에서 인도까지 해안 지역에 형성된 어민 공동체 간 교역 활동으로 오래전부터 토기 같은 생필품들이 유통되고 있었다. 그리고 어촌 마을과 내륙의 농경 및 목축 공동체 간에도 교류가 이어졌다.(Reade, 16)
몇 가지 연구 결과를 보자.(Reade, 12-16) 첫째, 이라크 북쪽에서 발견된 기원전 5000년경의 무덤에 부장된 목걸이는 해안 지역과 내륙 지역 간 교류를 말해주는 흥미로운 예다. 목걸이의 구슬 중 일부는 흑요석으로 만들었고, 일부는 800킬로미터 떨어진 페르시아만에서 나는 카우리 조개로 만들었다. 이는 선사시대에 연안 지역과 내륙 지역 간 물품 교환이 지소고디었음을 증언해 준다. 둘째, 이라트 중부의 텔 아스마르(Tell Asmar)에서 발견된 기원전 3000년대 구슬은 코펄(copal)로 만들었는데, 이것은 동아프리카에서만 자라는 나무의 수지다. 코펄이 육로로 아프리카를 관통해서 이집트까지 왔다가 이라크로 간 것일까? 연구자들은 그보다는 해안의 어업 공동체들 간 연쇄적 교환을 통해 전달되었다고 판단한다. 셋째, 동티모르의 몇몇 무덤을 발굴한 결과 이 지역에 없던 동물인 염소 뼈가 나왔다. 이 염소는 아마도 중동 지역에서 배를 타고 건너왔을 것이다. 넷째, 기원전 2000년대 시리아 지역의 고대 도시 테르카(Terqa)에서는 탄화된 정향(clove)이 출토되었다. 몰루카(Molucca)제도에서만 생산되었던 이 향신료가 그토록 먼 곳에서 발견된 것은 동남아시아의 바다와 인도양을 건너는 항해가 이루어진 사실을 증언한다. 향신료에 대한 수요와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원격지 교역이 이토록 일찍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 사례들을 보면 통상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바다를 통한 원거리 교류가 발전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5000년경이면 인도양 북족의 아라비아해, 페르시아만, 홍해 등 광대한 해안을 따라 항해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교역 네트워크는 어느 수준까지 발전했을까? 혹시 동남아시아까지도 연결되었을까? 솔하임(W. Solheim)은 이 시기에 이미 인도양 전반을 아우르는 누산타오 해양 교역 네트워크(Nusantao Martime Trading and Communicaiton Network, NMTCN)가 형성되었다는 과감한 가설을 제기한 바 있다. '누산타오(Nusantao)'라는 말 자체를 솔하임이 만들어 냈는데, '남쪽 사람'을 뜻한다.(Sen, 539) 베트남에서 기원한 해상 거류민이 확산해가며 마다가스카르부터 일본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하는 교역망을 만들어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정치체가 형성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이 이른 시기에 인도양의 드넓은 해역에 고정적인 '교역 체제'가 구성되었다는 주장은 분명 과도한 해석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근 지역을 넘어서서 상당히 먼 거리에 걸쳐 선박과 물자가 오간 것 자체는 여러 물증으로 볼 때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인도양에서는 선사시대 이래 늘 항해가 이루어지고 잇었다. 특히 말레이-폴리네시아계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넓은 해역을 항해하면서 해양 유목민(oceanic nomadism)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파도, 구름, 바람, 바다 생물들을 관찰하며 여행하는 항해 전문가였으며, 이들로 인해 상당한 수준의 원거리 소통이 가능해졌다. (Wormser, 920) 선사시대에 인도양 해역에서는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활기찬 항해가 수행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물론 그 자세한 사정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역사학 및 해양고고학 연구의 성과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