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계의 구조와 권력
박영택(미술평론가)
우리 미술계를 형성하는 기본 권력구조는 미술관, 화랑, 그 미술관과 화랑의 관장과 화상,주인들, 화랑가의 주요 고객층, 큐레이터 그리고 평론가와 신문기자, 미술잡지기자 및 미술대학 교수, 미술관계 고급공무원 등이다. 이런것들이 다소 복잡하게 연결된 구조가 다름아닌 한국미술계의 현실적 지형도를 그리고 있으며 이들의 공모와 연대감, 연합등이 권력의 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같은 구조에 의해 제도화된 틀 속으로 편입하는 것, 그것이 예술과 작가가 되는길이고 인정받는 길이 되었다. 20세기의 모더니즘이 확립되고 난 후에 경계지워진 영역으로서의 예술, 하나의 물건으로서의 예술이라는 개념 그리고 그에 따른 아티스트란 개념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것들이고 한시적이며, 공간적으로는 뉴욕이나 파리같은, 서구의 몇몇 모더니즘의 수도들이란 지역에 한정된 것이란 주지의 사실이다.
어떻든 이후 미술관이야말로 하나의 제도로서, 담론의 장치로서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오늘날 모든 작가들은 그 미술관을 겨냥해 작업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미술관은 어떤 대상에 작품의 지위를 부여하는 한편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기도 하고 작품뿐 아니라 관객에게 질서를 부여하고 그들을 교육, 통제, 훈련하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미술관은 결코 가치중립적인 기구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현대미술은 그 미술관과 그 미술관과 관련된 수많은 작가,큐레이터,평론가.화상, 언론 사이의 끊임없는 거래와 공모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그 미술관을 위시해서 미술계의 권력 구조 내에서 예술작품이 예술작품으로 인정받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권력의 작용이다. 오늘날 그 인정의 주체란 미술관과 갤러리, 관장과 큐레이터, 전문비평가, 전문딜러, 전문미술잡지 등이다. 이런 구조에 인정받고 받아들여져야만 된다. 인정받는다는 것은 삶의 문제, 먹고 사는 일과 직결된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한국미술의 주류의 역사가 만들어져 왔다. 예술권력의 생산, 재생산 구조에 적극 동참하게 되면서부터 그 규율과 권력의 작용에 길들여져 간다. 특히나 이 헤게모니를 둘러싼 치열한 투쟁을 통해 제도로 진입하고 권력을 잡게 되면서부터 미술계의 '신분귀족층'이 된 작가들은 나름의 작가정신, 학력, 공모전 수상,경력만들기를 통해 소위 제도권미술의 핵심중추가 된다. 이들 스스로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해나간 이들이다.
한국미술계에서 선호되는 그림을 일정하게 만들어나가고 이를 내재화하며 그 그림들이 하나의 '권력'이 되도록 만들어 이를 강력히 옹호하고 (70년대 한국모노크롬미술,80년대 민중미술,90년대 탈모더니즘미술 등등이 그렇다)전시를 거듭하면서 또는 평론가의 글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담론화하고 대형 화랑이나 미술관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어 가면서 미술계의 주류가 되어나간 것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대학에 자리잡은 교수화가들이다.
대한민국에서 교수가 된다는 것은 화가재벌로서 커나갈 가능성을 우선적으로 실질적으로 담보하는 것이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고 확산시키며 제도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점거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그림의 값을 올려놓는다.따라서 이들은 무엇보다도 고급화랑이나 미술관의 주인들, 언론 그리고 미술평론가와 큐레이터와의 친목과 공모를 부단히 도모한다. 이들간의 적절한 사교, 친분관계 그리고 어떤 공생공사 의식이야말로 살아남는데 우선적인 것이다. 그것을 동물적으로 파악하고 대처해 나간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그에 따라 오늘날 특히나 권력이 커지는 것이 다름아닌 미술관, 화랑의 오너들과 큐레이터들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권력은 자본에서 나오고 미술 역시 막강한 자본가들의 힘에서 나온다. 한국 사회에서 재벌미술관의 오너들이 특히나 그렇다. 삼성의 호암갤러리, 대우의 아트선재센터, 금호의 금호미술관 같은 재벌급 미술관이 그렇다는 것이다. 나아가 고급화랑, 예를 들어 갤러리현대,국제화랑,가나아트센터 등이 그렇다. 그같은 미술관/화랑에서의 전시와 작품 판매는 실질적으로 한국미술계의 역사가 되고 주류미술계의 중심이 된다. 그리고 이는 곧바로 해외미술계와 연결되고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의 구실까지 한다. 이른바 스타작가로서 커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들간의 먹이사슬과 사교의 형식, 관리방식과 그 모든 것들을 선배들을 통해 고스란히 모방하고 그를 통해 똑같은 권력의 틀과 행태를 반복한다. 그리고 이는 또한 후배작가들과 그같은 권력을 선호하고 제도 내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모든 후배작가들, 젊은 작가들의 본보기가 되거나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것이 우리 미술계의 모범이고 모델로 둔갑한다. 따라서 미술의 문제이기 보다는 권력의 헤게모니와 제도권의 중추가 되기 위한 암중모색, 아니 노골적이고 비겁한 투쟁으로 일관된 것이 우리 미술계의 창백한,피투성이의 초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명세,명망성을 얻기 위한것 말이다.
따라서 많은 작가지망생들,작가들,미술계의 구성원들은 그 명망성을 얻기위한 다양한 노력들을 기울인다. 그 명망성은 여러 활동과 그에 대한 기사화이다. 결국 저널이야말로 그 명망성을 가시적으로 확인해주고 부풀려 주며 확인시켜주는 셈이다. 당연히 기자와 잡지사,미술매체와 관련된 이들 및 평론가들이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작가들을 위해서 글(서문,평문,리뷰등)을 써주고 그 작가들의 권위에 일정한 힘을 부여해주는 서비스 기관의 역할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작가들은 적극 그런 기능을 요구하고 노골적으로 밝힌다. 작품평이나 작가론 등에 실리는 글들은 따라서 이들 작가들에게는 자신의 입장을 미화하거나 찬양하는 선에서 이루어져야지 그렇지않은 경우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기자, 평론가나 큐레이터들 역시 그런 요구에 은연중 길들여지고 그들의 요구에 응하게 된다. 특히나 언론의 미술담당 기자들 대부분은 그런 요구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대개 그들은 미술을 전공한 이들이 아니기에 그림에 대한 일정한 비평적 기준을 지닌 것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수동적으로 정보를 나열하거나 작가나 화랑이 요구하는 선에서 써주게 된다. 특히나 미술관, 고급화랑들은 그 열악한 미술지면을 거의 독점하면서 기자들을 관리한다. 관리의 방식은 결국 자본 인 셈이다. 작가들 역시 그 제한된 지면을 차지하고자 온갖 인맥과 연줄을 동원해 그 게시판같은 곳에 실리고자 한다. 일간지에 실린다는 것, 텔레비젼 문화 소식란에 잠깐 얼굴과 작품이 실린다는 것 자체가 미술문외한들에게는, 고객들에게는 그 작가의 권위를 새삼 인정해주는 것인 양 위장된다. 그저 정보나 소식에 불과해 보이는 현재의 언론의 미술난, 텔레비젼의 미술문화란은 미술계 정치구도를 은연중 만들어주는데 한몫하는 편이다. 그곳에서 진정한 비평과 문화를 점검하고 진단하는 기능을 찾기 어렵다.
큐레이터들 또한 오늘날 가장 첨예한 권력의 생산 지점에 위치해 있다. 90년대 들어와 더욱 심해진 이런 현상은 그만큼 대형전시공간, 미술관의 부재와 기획전시를 열만한 장소가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대형상업화랑과 재벌급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의 권력이 그만큼 커진 것이다. 따라서 이들과 작가들과의 친분관계, 학연과 사교야말로 미술계의 권력이 된다. 작가들은 당연히 그들과의 관계를 부단히 도모하고자 한다. 우리의 경우 재벌급 미술관의 오너들은 당연히 그 그룹의 친인척들이다.
피로 얼룩져있다. 당연히 그 그룹의 이해관계, 특정한 지연과 맞물려 있다. 그런 미술관과 관계하기 위해서는 오너와의 친분 내지 큐레이터와의 관계가 우선된다. 따라서 그곳에서 열리는 전시들이 과연 그런 관계나 이해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느냐 그리고 그곳에서 열리는 전시들, 큐레이터들이 기획하고 궁극적으로는 오너들이 관여하는 전시의 성격들이 과연 얼마만큼 공공성과 질적 측면을 담보하고 있으며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느냐는 매우 첨예한 문제이다. 그런 것들이 검증되고 비판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역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