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몽의 꿈 많던 젊은 시절의 苦行을 읽어 보니 정말 더운 피의 소중함, 젊음이 희망이요, 용기 그 자체라는 걸 느꼈네.
나 대머리도 젊은 시절, 용기와 패기 많던 시절이 있었지. 동몽의 젊은 시절을 읽고 나니 나의 젊은 시절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가는구먼. 동몽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나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적어 볼 용기가 생겼다. 벗들, 욕해가며 읽어 주게나.
스무 살, 초임 햇병아리 교사로 첫 발령을 의성군 구천초등학교에 권기진, 권영길, 김현주(고인), 나 넷이서 받아 부임해, 학교 鳥瞰圖를 그리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운동장 표현을 붓 터치로 했더니 교장선생님이 붓자국 없이 사진처럼 다시 그리라고 해 너무나 황당했던 미술 교사 초년생이 나의 출발이었지.
군 제대 후 군위군 山城초등학교(中央線 花本驛 앞)에 발령을 받아 미술반 아이들을 데리고 寫生 지도를 열심히 했지. 그 결과 軍威郡 백일장에서 전학년 上位 賞을 휩쓸어 교장이 상장을 한아름 안고 와 싱글벙글 했어. 後日談을 들어보니 군위중고등학교 미술 선생님 두 분이 審査를 했는데 아동화를 제대로 지도한 학교는 山城초등학교 뿐이었기에 상을 모조리 주게 되었다고 하더군.
며칠 후 장학사가 일부러 학교에 나왔는데 도대체 金正泰가 어떤 선생인지, 그리고 환경정리(벽에 그려 붙이는) 솜씨는 어떤지 보러 온 것이었단다.
이듬해 3월 말(신학기가 4월 초였던 때)에 山城초등학교 근무 1년 반 밖에 안되었고 교장 內申도 없었는데 軍威初等學校로 발령이 났다.(당시 군내 轉補 규정에 한 학교에 2년 이상 근무하고 교장 내신이 있어야 轉補 가능). 軍威初等學校가 道 指定 圖書館 연구학교로 지정이 되어 郡內에서 환경정리를 잘 할 교사를 물색 중 내가 발탁 된 모양이었다.
교장이 펄펄 뛰었다. 어찌 인사 규정을 무시하고 쓸만한 교사를 데려 가는냐 이거지. 교장이 나에게 집(故鄕)에 가서 1주일만 쉬다가 오라는 것이었다. 辭令狀을 주지 않는 것. 팔자에 없는 휴가를 명 받아 5일간 쉬고 학교에 나가니, 校長이 郡 敎育長과 성냥곽을 집어던지며 대판 싸움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개학 후 며칠이 지난 4월 5일날 사령장을 들고 신임지 軍威初等學校에 가니 선생들이 쑤근쑤근거리며 나를 힐끗힐끗 보는 게 심상치 않은 눈초리였다. 어떤 놈이길레 그런 소동까지 피웠느냐는 표정.
내딴에 뽑혀 왔으니 잘 해야지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열심히 그려 붙였다. 토요일 오후, 일요일도 없이 그리고 또 그려, 학교 안의 벽이란 벽은 모두 도배를 했어. 평일에는 퇴근도 늦추고 밤 10시까지 그렸으니.....그 결과는 賞福, 생각지도 않은 賞이 자꾸 주어졌다.
군위초등 근무 시 그 바쁜 渦中에도 당시 아주 생소한 Band部를 만들어 군 교육청에서 주최한 군내 초등학교 합동 학예회에서 발표해 뜨거운 박수를 받기도 했지. 아마 당시로서는 아주 새로운 試圖였으니까.(사범학교 1학년 때 1년간 Band部에 섞여 허수아비 부원 놋릇한 덕분이었지 아마...)
그 후, 어머님께서 내가 열여덟 살 때 別世하셔서 아버님께서 손수 진지를 끓여 드시기에 어쩔 수 없이 22살에 장가를 가고 어린 여동생 둘과 외롭게 사시는 아버님을 모시려고 고향(안동군 남후면)에 갈려고 하니 저 吉安 골짜기에 발령이 났다. 안동군 길안초등학교는 나, 문군자, 임재운, 김항동 등이 근무했던 학교이다. 이웃 길안중학교에 이창호가 근무했고....
위의 네 친구 모두 열정이 넘치던 20대 末이어서 아이를 패서 모두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지. 이때 같이 근무한 우리의 동기 문군자 선생은 잘 기억할 거다.
길안초등에서도 꾸준히 그려 붙였더니, 또 서후초등학교가 道 指定 실과연구학교(1966-1968년)가 되자 길안초등 근무 1년 만에 나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또 서후초등으로 발령이 났다. 서후초등에서는 나, 권순태, 이헌영, 권성명이 함께 근무를 했다.
서후초등학교에서는 꽃을 가꾸었는데, 아마 권순태군은 기억할 게다. 1년 草 種子를 90여 종 수집해 가꾸었는데, 종자를 採種해서 도내 여러 학교에 나누어 주었더랬는데, 이 사실이 대구 매일신문에 나고 안동 KBS 방송에도 나고... 그 땐 꽃 가꾸기에 미쳤더랬지.
도 지정 연구학교 3년 차를 마치고 드디어 고향 학교 남후초등으로 가게 되었다. 고향에서 오래 근무할 줄 알았는데 만 1년 밖에 근무치 못했다. (남후 하면, 무릉 보트장, 암산 유원지가 있지. 사범학교 재학 시절에 한 번 쯤은 가 봤지 않은가?)
당시 「한국일보」광고 몇 줄이 또 나를 고향을 떠나게 했다. 광고인즉 "특기교사 채용", 남은 교직을 끝까지 마치게 한 私立 城東初等學校로 오게 되었다. 그 때가 1971년 2월 18일! 지금 알고 보니 서울 변두리 따라지 私立學校인 城東初等學校는 지원자 미달인 말 그대로 따라지 학교였다. 그러나 교사 지원자는 240여 명이나 되어 3일간 나누어 銓衡을 치르고 당당히 合格하여 출근해 들어보니 학생 수가 모자라 월급도 제대로 못 주는 그런 학교란다. 앞날이 캄캄, 교사들 말이 "城東初等學校에 들어오자면 제 발등 찍을 손도끼 하나씩 준비해서 오라."고 할 정도....
여기서 내 온 정성을 쏟자!!! 죽을 각오로 열심히 가르치고, 근무했다. 서른 두살 때인 부임 1년 후 내 업무 분장이 연구주임, 환경계(미술교육), 자료계(과학주임), 교재원, 생활지도(생활주임), 나중에 새마을주임, 민방위담당자... 따져 보니 5-6명이 할 업무를 혼자 맡아 하고 있었다. 우리의 동기 김종만군이 나를 찾아 와 내가 만든 「학교운영계획서」를 얻어 갔고, 故人인 장실광군이 1989학년도에 얻어 간 「학교운영계획서」가 경기도 안산시의 표준안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장실광이한테 나중 들었다.
藝術祭(말하자면 學藝會)가 되면 김정태 판이었다. 프로그램(안내장) 컷 그리기부터 시작하여, 무대 구성 즉 무대 배경 그리기, 합창지도, 농악지도, 사진 촬영...이 걸 하느라 藝術祭 때는 코피나게 뛰었다.( 내가 지도한 합창부가 옛 동양방송 TBC '누가누가 잘하나'에 출연도 했어. 그리고 농악 지도를 해 효창운동장에서 '서울시민 단오잔치'에 출연해 TV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지.)
학교가 차츰 궤도에 오르고 학력이 우수한 학교(서울시 교육청 주최 과학학력 경진대회에서 3년 간 계속 1위인 金賞 수상)로 학부모들에게 공부 잘 가르치는 학교로 평판이 난 名門 私立이 되었다. 이웃에 위치해 경쟁 관계이고 유명 사립학교인 경복초등, 한양초등은 매년 銅賞을 받았는데 말이다.
千戶洞 校舍를 팔고 성동구(현 광진구) 紫陽洞에 매머드 새 校舍를 지어 이사도 했다. 학년 당 4개 학급.
주경야독하는 심정으로 퇴근 후 밤에 「韓國典禮院」에 나가 예절 공부를 했지. 거기서 예절지도사 자격을 따 퇴임 후 消日꺼리가 되게 하기도 했어. 학교에 「예절교육실」을 만들기도 했지.
2000년 2월 말 名退까지 城東初等學校 勤續 滿 29년, 내 젊음을 묻은 학교, 내 열정 모두를 쏟아 부은 학교. 내 사랑 "城東初等學校". 누가 뭐래도 城東初等學校는 나 혼자는 아니지만 분명 김정태가 일군 학교다.
내 인생이라고 후회가 없을가? 20代 末까지 이젤을 메고 동해안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시골 茶房에서 세 번이나 전시회까지 했는데, 성동초등에 와서부터는 붓을 놓아버렸다. 순수 미술과는 담을 쌓고 오로지 학교 일에만 매달렸기 때문. 이제 와서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점은 그림(純粹 繪畵)을 놓아버린 점이다.
며칠 전 現 城東初等學校 교장, 교감, 교무, 연구가 나를 포함해 선배 선생 네 분을 모셔서 저녁을 샀다. 그 자리에서 이영세 前 교장이 '김정태 선생님은 위지(謂之) 교유자이셔.' 라는 인사를 했다. 현 城東初等學校 김봉환 교장은 나 보고 '김정태 선생님, 우리 후배들은 김선생님을 진실로 존경했고 지금도 존경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다른 세 분에게는 하지 않은 말을 나에게만 했다.
序頭에 욕하며 읽으라고 했었지? 정말 낯간지러운 말을 내 손으로 쓰기가 부끄러웠지만 동몽의 젊은 날 기록을 보니 오맛 감회가 스쳐가서 주제 파악을 못하고 씰데없는 말을 씨부렁거렸다. 거듭 말하건데 욕하며 읽어주게나!!!
첫댓글 성동초등학교 29년 장기근무 정말대단하네. 내가 꿈꾼것을 저네는 실천한 삶을 열정을 갖고 살았고 나는 꿈만 꾸고 살았다고 보지. 정말 대단하네. 그런데 우리 너무 늦게 만났다. 같은 곳에서 29년이나 같이 살면서 말이다. 내 형되는 사람도 장애인인데,성동초교 이사장과는 친구라네.그래서 성동초등학교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네. 우리안사출신들은 열정만은 못말리는 사람들이지. 자네나 나나. 열정만은 알아 줄거야 지금까지 몰랐던 자네의 살아온 길을 속속들이 알아서 더친밀감을 갖게 되 네 감명깊게 두번이나 읽고 또읽었네. 지금도 그 열정 우리 동기생들에게 쏟아 붙고 있잖나. 정태 화이딩
요즈음에 모임을 하나 운영해도 솔선해서 앞장에서 이끌어 나가는 사람에 따라서 그 모임이 잘 되나 안되나가 결정된다고 하지않나 흔히 하는 말로 미쳤었군 자기가 하는 일이 얼마나 즐겁고 신나는 일이면 남들이 미쳤다고 하겠어. 바로 대머리님이 바로 미쳤었구나 모든 정열을 한 곳에 쏟아부은 님에게 머리숙여 존경의 뜻을 표합니다. 앞으로 남은 세월도 분명 보람있는 일에 정열을 바치면서 부디 건강하고 활기찬 앞날에 늘 행운이 함께하기를 빕니다.
사실 자네 말씀대로 내가 미쳤어. 다른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많은 걸 투자하고 만년에야 그 방면에 일가를 이루고 사회적 명망도 얻고 하는데, 나는 바보처럼 학교만을 위해 올인해 일선에서 물러나고 보니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 윗글에서 말했듯이 그 좋아하던 그림까지 계속하지 못한 내가 너무나 바보였지. 허나 따라지 학교를 '명문 학교' 소리를 듣게 만든 거름이 된 것, 그 하나만을 만족으로 여길 거야. 그럴 수 밖에 없지만...........
나는 어릴 때 - 종이를 접어 딱지 치기를 했는데- 거기에 미쳤지. 그 다음에 구슬치기를 했는데. 거기에 또 미쳤지. 나중에 시골에 갔을 때-술방내기 화투에 미쳤지. 그 다음에 칠곡군 약목면에 있을 때- 마작에 미쳐서 며칠 밤을 새웠지. 그 다음에 - 바둑에 미쳤지... 나중에 신학 공부에 미쳤지. 그리고 보니 나는 평생 미친짓만 하고 살았다오.== 세월이 지난 지금은 또 미친데가 있지... 그 건... "산파"일세. - 산파 아이를 받아 내는 "산파" 말일세. 이것이 내 마지막 미친 일을 하고 있네...== 산파 윤 형 선 올림==
지금은 멀리 보는 망원경과 세균보다 더 미세한 것을 보는 현미경으로. 성층권을 바라보고 , 그 성층권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 보는 일에 미쳤다오. 나는 평생 미친 놈. ===산 파 윤 형 선 올림===
솔뫼님!! 그대는 성층권 위를 바라 보는 망원경과 현미경을 가지기를 원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눈에 비늘 덮힌 것을 벗어야 하고. 귀에 할례를 해야 한다오. 눈이 새롭게 되고, 귀가 열리면= 성층권 위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성층권 위에서 전개 되는 사건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다오. 솔뫼님!! 거듭나기를 바라오. === 산파 윤 형 선 올림===
,,왜 미치지 않고는 살아가지 못할 까? 가만히 생각 해 보니,-재미를 따라가고. 욕망을 따라가고. 자기 성취를 따라가고.자기자랑하려는 마음이 미치게 하고. 다른 사람과 경쟁심이 있어서 미치고.--마음 둘 곳이 없어서 미치게 되고...그러니, 바람이 이리로 불다가 저리로 불고. 미친듯 휘돌아 불고...내 마음이 어리석고 지혜가 없고, 알지 못하여 미치게 됨을 알고 나서- 아! 내 어리석음이 미친 것이구나!! 곧 인생의 마음이 어리석고. 악하여 방향을 알지 못하니, 평생 미친 마음을 품다가--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구나!!! 이것이 나의 미친것. 내 젊을을 바친 삶일세=== 산파 윤 형 선 올림===
이러다가 우리 동기들이 모두 文人이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숨은 끼들이 살아나는데 몸이 따르지 않음이여! 구천아재의 팔방미인은 익히 잘아는 터이지만, 장문의 글이 아니라 구수한 이야기에 숨죽이며 읽었네. 안사출신 들이 뭔가 달라. (나는 빼놓고) 몇일전 카페에 신재가 "꿈"을 말했는데, 가는 그날 까지 우리는 꿈을 꿔야해! 그래야 눈에 빛이나고 생기가 돌아! 모두들 구천아재를 따라 새로운 꿈을 찾아서 앞으로!!
내 자랑 일색인 위의 글을 쓰면서도 몸이 간질간질해서.... 주책 떨어서.... 늙은 탓이라고 하기엔 내가 봐도 너무 뻔뻔해!!!
무슨 자랑이 그리 늘어졌는고. - 동네 길을 비자루로 쓸고,, 종소리를 딸랑 딸랑 울리며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치우던 거리의 천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평생을 대한 민국의 길을 청소한 분들.. 국민 훈장 받아야 마땅한데. 엉뚱한 사람들이 표창받고 훈장을 다 받아가고, 공평하지 않는 세상. -청소부 아져씨와 훈장 받은 자- 같은 -저울에 달면 누가 기울어 질까? - 나는 바보, 나는 못난이- 선배님 술 심부름 부지런히 하였고. 술취하여 비툴거리는 선배 부축한 일. -이것 저것 시키는 일에 분주했고. 어리석은 바보가 아이들 앞에 선 것 밖에 기억이 안 나니. 나는 바보. 산파 =윤 형 선 올림=
=젊은의 촛불을 태우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쉰 머리가 증명하고. 주름살이 증명하고. 약해진 건강이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세월속에 묻혀진 젊음을 다시 파헤쳐 보면- 홍안의 소년 소녀가 아닌 자가 어디 있는가? 모두 피에 생기를 발할 때가 있었는데. 우리 인생에 지나간 시간을 -빼기 해 보면- 도토리 키 재기 아니었던가?
모두들 생각들이 좋군!! 나는 달라요. 귀공들과 같지 않으니, 내가 어리석은 바보일세/ 직장에서 일터에서 수고하고 노력한 것. 다 알아요.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거든. = 수학공식을 써서 = 대입해 본다면....내 수고하고 노력한 것 100에서-- 빼기..내가 살고, 마누라 건사하고. 아들딸 키우고 시집보내고. 큰일 치고. 그리고 받은 대가. 보호받은 울타리 역할을 한 대가. 대접받은것 모두 합하면 500쭘 안되겠어. 그렇다면 (100 - 500 한다면--마이너스 400 )아닌가? 내 수고하고 노력한 것 아무 자랑 할 것 없지 않는가? =다르게 생각하는 꽈배기 계산 법을 내 놔 봐!! =산파 윤 형 선 올림.=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 온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어리석은 짓, 잘못한 일. 실패한일. 아! 그때 내가 부끄러웠지...부끄러운 일. 매끄럽지 못한 일만 생각나니,나는 바보인가 봐! =======산파 윤 형 선 올림=======
모두들 내 젊음을 바친곳. -내 젊은 날이 꿈을 찾아서---잘도 살았군! 나 보다 시야가 넒고, 그릇이 크군! 나는 어린때는 작고도 작은 구슬치에.딱지치기에 내 어린시절을 바쳤고. .화투를 처음 배울때 내 젊음을 화투에 바쳤고. 내 젊음을 마작에 바쳤고. 내 젊음을 바둑에 바쳤고.......때를 따라 미친짓을 많이 했다오. - 철이든뒤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인생은 모두가 미친 짓하고 산다는것을 깨닫게 되었다오... 술에 미친사람. 놀음에 미친 사람. 사업에 미친 사람. 축구에 미친 사람. 그림에 미쳐서 자기코를 자른 "코호". 농구에 미친 사람. 춤에 미친사람. 음란에 미친 사람. 박사 따기에 미친 사람. .미친짓 안한 사람있소
존경하는 김정태 선배님, 지난 세월 37,8년을 돌아보니 선배님과 같은 성동학교에서 청춘을 불살랐던 추억이 흑백 영화필름처럼 돌아 가네요. 그 때 김선배님의 불같이 타오르던 교육열을 저는 많이 배웠지요. 그러나 저는 그 학교를 5년 근무하고 허영의 늪으로 빠져들어갔으니 부끄럽기만 합니다. 선배님의 글을 읽고 길안이 고향인 저는 더더욱 죄송합니다. 지난 40여 풍상을 오직 승진도 바라지않고 교육이란 외길을 걸으며 희생봉사하신 김정태 선배님께 페스탈로찌상과 면류관을 씌어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영광스런 선배님의 카페에 들어와서 정중하게 인사 드리고 다음에 만나뵙고 건배 한 잔 올리겠습니다. 정용원
정 선생님! 오히려 정선생님의 교육, 문학에 쏟아부은 정열에 존경을 표합니다. 정선생님이야말로 우리나라 문학사에 빛나는 훌륭한 분 아닙니까? 그건 훌륭한 작품이 증거하는 것이지요. 정용원 선생은 우리 안사 14회로 대머리와 성동초등학교에 같이 채용시험를 치르고 들어 간, 말하자면 입사동기로 1971년도부터 5년간 성동초등에서 같이 근무한 분이지요. 사립 상명초등 교사, 거제도 대우초등 교감, 교장을 역임했고, 울산광역시로 옮겨 교장, 교육청 학무국장, 그리고 경남 문인회장이었으며 많은 文學賞이 그의 이력을 증명해 주는 훌륭항 후배입니다.
그 인품에 걸맞는 교육자적 정열을 불태운 김정태 친구, 순수 회화 공부 꾸준히 하지 않은 것이 반성되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느데이, 대머리 총각시절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 이것은 정말 길이 남겨 둬야 할 훌륭한 자서전적 자료임에 틀림 없다고 생각하네. 우리 남동완의 자서전과 김정태의 넉두리식 자서전, 그리고 우리 안사 11회 동기생들의 짤막하면서도 교직인생사 한토막씩 모두 모은다면 제법 예쁜 책이 될거네. 모아보세 그려....김정태 교직 인생사, 정말 멋스럽고 감명깊은 말씀일세.
자네도 그 좋아하는 "매실" 재배에 쏟은 정력, 그리고 성공담, 실패담 등 우리 친구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충분히 있을 법 한데 한 번 청해 들을 수 없을가? 기대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