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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을사조약] 을사조약 무효 - 을사순국오열사 (을사순국충혈지사)
문대식 추천 0 조회 410 17.11.19 16: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을사조약] 을사조약 무효

 

- 을사순국오열사 (을사순국충혈지사) -

 

 

 

 

 

 

독립운동가

 

 

 

 

 

 

@ 을사순국오열사(가칭)

@ 밝혀진 순국충혈지사들

@ 이 달의 독립운동가 리스트

 

 

 

 

 

 

 

 

 

 

 

 

 

 

@ 을사순국오열사(가칭)

 

홍만식 (한말 문신)  [洪萬植] 1842(헌종 8)~1905. 11. 28.

민영환 (조선 문신)  [閔泳煥] 1861(철종 12) 서울~1905(광무 9).11.29

조병세 (한말 문신)  [趙秉世] 1827(순조 27)~1905.11.30

김봉학 평양대(平壤隊) 일등병[金奉學] 1871(고종 8)∼1905(광무 9).12.2

이상철 (한말 순국열사)  [李相哲] 1876(고종 13)~1905. 12. 3.

 

 

 

@ 밝혀진 순국충혈지사들

 

송병선(宋秉璿:1836~1905).12.30

공임(恭任) 의비(義婢)

이준 (한말 순국열사·애국계몽운동가)  [李儁]

박승환 (한말 순국지사)  [朴昇煥]

정동식 (한말 순국열사)  [鄭東植]

이중언 (한말 순절열사)  [李中彦]
이학순 (한말 열사)  [李學純]
이현섭 (한말 열사)  [李鉉燮]
홍범식 (한말 문신)  [洪範植]
유도발 (한말 순국지사)  [柳道發]
반하경 (한말 순국지사)  [潘夏慶]
송병순 (조선 순국지사)  [宋秉珣]
이석용 (한말 의병장)  [李錫庸]
 
 
 
@ 이달의 독립운동가 리스트.
 
독립운동가 이재명(李在明)
 
 

 

 

 

 

 

 

@ 을사순국오열사 

 

 

충정공(忠貞公) 홍만식 (한말 문신)  [洪萬植]

 

1842(헌종 8)~1905. 11. 28.
한말의 애국지사.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백헌(伯憲), 호는 호운(湖雲). 아버지는 영의정 순목(淳穆)이며, 동생이 갑신정변의 주모자 영식(英植)이다. 교관(敎官) 순경(淳敬)에게 입양되었다. 1866년(고종 3)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검열·수찬·집의·동부승지·여주목사·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884년 아버지가 사복에 착수의(窄袖衣), 관복에 흑단령(黑團領)을 착용하게 하는 의복제도의 개정을 반대하다가 삭탈관직되자 그도 사직했다. 그해 10월 동생 영식이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살해되자 아버지는 자살했고 그도 자살을 기도했으나 출계(出系)한 사람은 연좌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여 여주관아에 자수했다. 1894년 개화파정권이 들어선 뒤 관작이 복구되었다. 1895년 춘천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해 8월 일제가 민비를 학살하고 친일 개화파정권이 단발령을 내리자 음독자결을 하려 했으나 단발령이 취소되고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그만두었다. 1904년 해주관찰사·의정부찬정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사직상소에 직함을 쓰지 않고 미사신(未死臣)이라고 써 죄인임을 자처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처사(處士)의 예로 장사지낼 것을 당부하고 음독자결했다. 이는 을사조약 이후 최초의 자결이었다. 참정대신(參政大臣)에 추증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최초의 을사순국충혈지사

 

 

 

충정공(忠正公) 민영환 (조선 문신)  [閔泳煥]

 

1861(철종 12) 서울~1905(광무 9).11.29
한말의 정치가.
 
민영환 (閔泳煥)
 
민씨정권의 세도 속에서 관직에 진출했고, 2차례의 해외여행으로 견문을 넓혀 왕에게 개혁정책을 권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운명이 기울자 자결로 일제에 항거했다. 본관은 여흥.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출신 및 초기 관직생활
 
아버지는 선혜청당상을 지낸 겸호(謙鎬)이며, 뒤에 큰아버지인 태호(台鎬)에게 입양되었다.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이 되었고, 이듬해 정시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정자·검열·수찬·장령 등을 거쳐, 1881년(고종 18)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대사성과 도승지를 지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생부 겸호가 피살되자 벼슬을 내놓고 3년상을 치렀다. 그뒤 도승지·이조참판·한성우윤·예조판서·형조판서·한성부윤·독판내무부사 등을 지냈다. 1895년 8월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민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부임하지 못했다. 친러파가 축출되고 친일적 경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낙향해 두문불출했다.

 
외교활동
 
1896년 특명전권대사로 학부대신 윤치호(尹致昊), 2등서기관 김득련(金得鍊), 3등서기관 김도일(金道一) 등과 함께 4월 1일 인천을 출발해 상하이·나가사키·도쿄·밴쿠버·뉴욕 등을 거쳐 유럽 대륙의 신문명을 보고 5월 20일 모스크바에 도착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뒤 약 3개월 동안 러시아 각지를 둘러보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10월 21일 귀국했는데, 그의 여행은 독립신문에 그 내용이 소개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1897년(광무 1) 1월에는 다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가 되어 3등서기관 이기(李琦), 서기 김조현(金祚鉉)·김병옥(金秉玉)·손병균(孫炳均) 등과 함께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했다. 도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들러 니콜라이 황제에게 국서와 고종의 밀서를 전달했다. 2차례에 걸친 해외여행을 통해 유럽의 제도를 모방해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을 신장해 국가의 근본을 공고히 할 것을 여러 번 고종에게 건의했는데, 그중 군제에 관한 건의가 받아들여져 원수부(元帥府)에 의한 육군통솔이 이루어졌다. 그뒤 서재필 등이 조직한 독립협회를 측면에서 후원하다 원로대신들의 무고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참정대신·탁지부대신·장례원경·헌병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며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太極章)을 받기도 했다. 1904년 이후 내부·학부 대신을 역임했으나, 일제의 침략을 맹렬히 반대하다가 시종무관장이라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1905년에는 참정·외부 대신을 역임했으나 다시 시종무관장이 되어 순국할 때까지 그 직위에 머물렀다.

 
을사조약과 순국
 
당시 국내정세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대한제국정부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고, 그해 8월에는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해 재무·외교 부문에 고문정치를 시작했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한국에서의 정치·경제·군사 상의 우월권을 인정받은 상태에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이 체결되자 원임의정대신(原任議政大臣)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조약에 찬동한 5적을 성토하고 조약의 파기를 주장했으나 조병세의 체포로 실패했다. 이어 2차 상소를 전개했으나 나라의 운이 이미 다했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해 국민을 각성시킬 목적으로 그해 11월 13일 오전 6시경 2,000만 동포와 고종 및 주한 외국사절에게 보내는 3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그의 자결 소식이 알려지자 조병세·김봉학(金奉學)·홍만식(洪萬植)·이상철(李相喆) 등이 그의 뒤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했다. 저서로는 〈민충정공유고 閔忠正公遺稿〉·〈해천추범 海天秋帆〉·〈사구속초 使歐續草〉·〈천일책 千一策〉 등이 있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두번째 을사순국충혈지사
 
 
 
충정공(忠正公) 조병세 (한말 문신)  [趙秉世]
 
1827(순조 27)~1905.11.30
한말의 문신·순국열사.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 아버지는 홍천현감 유순(有淳)이다.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에 급제, 사관(史官)이 되어 1864년(고종 1) 실록청 도청낭청(都廳郎廳)으로서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874년 함경도암행어사, 1877년 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호조참판에 임명되고 동지사은부사(冬至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한성부좌윤을 거쳐 승지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의주부윤, 다시 대사헌을 지냈다. 1887년 공조판서를 거쳐 1889년 우의정에 오르고 1893년 2월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후 정치적 변동이 크게 일어나자 잠시 정계를 떠나 가평에 은퇴했다. 1896년에는 총호사(摠護使)가 되었고 민비 국장 때 만장제술관(輓章製述官)으로 참여했으며 뒤에 다시 원로대신으로서 중추원의장과 의정부의정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으로 활동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하여 79세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상경하여, 을사5적의 처형을 주청(奏請)하려고 했으나 처음부터 일본군의 방해로 고종과의 면담이 거절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1월 26일 심상훈(沈相薰)·민영환(閔泳煥)·이근명(李根命) 등과 함께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와 5적을 처형하고 새로 충량(忠良)한 사람을 뽑아서 외부대신에 임명하고 각국 공사와 협의하여 5조약을 파기할 것을 상소했다. 또한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 및 5개국 공사에게 각각 글을 보내어 독립과 영토보존의 원조를 요청하고 조약의 부당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각국 공사들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종도 듣지 않고 다만 물러가라고 하자 다시 대한문(大韓門) 앞에서 고종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궁중을 물러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거적을 깔고 계속해서 을사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 일본헌병에 강제연행되었다. 이후 민영환이 대신 소두(疏頭)가 되었으나 민영환도 잡혀 평리원(平理院)에 연금되었다가 특명으로 풀려난 뒤 비분을 참지 못해 29일 자결했다. 가평 향제(鄕第)에 강제 추방되었으나 30일 다시 서울로 돌아와 표훈원(表勳院)에서 여러 사람과 다시 상소했다. 또다시 일본군이 가마에 태워서 강제 추방하자 가마 안에서 음독하여 조카 민희(民熙)의 집에 당도하여 죽었다. 이때 각국 공사관에 독립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도록 요청하는 투서와 함께 국민들에게는 충의로서 독립의 기초를 다질 것을 촉구하는 유서를 남겼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세번째 을사순국충혈지사
 
 
 
김봉학(金奉學)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출처:네이트 
김봉학(金奉學)
【생몰년】 1871(
고종 8)∼1905(광무 9).12.2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항일우국지사

1871(
고종 8)∼1905(광무 9). 대한제국의 육군 상등병으로 항일우국지사이며 황해도 황주출신이다.
1895년
김하락(金河洛) 휘하의 경기도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군에 입대, 평양 진위대의 상등병으로 복무 중 부대가 서울로 복귀하자 시위대 제3대대 제2중대에 배속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하여 동지를 규합,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이 누설되어 실패하게 되자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비서원 수(煉書院丞)에 추증되고,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져 그 충절을 기렸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韓國痛史

 
출처:야후 오픈사전 
작성자 : moonhyeyeon l 2004-03-09 11:35 작성 김봉학(金奉學) 1871.∼1905. 12. 2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청룡면(靑龍面)에서 태어났다.
1895년 10월 일제의 명성황후시해 만행이 일어나자 김하락(金河洛)이 경기도에서도 의병을 일으켰는데 김봉학은 그 휘하의 제2대 십장으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그 후 군대에 입대하여 평양진위대에서 근무하다가 뒤에 부대가 서울로 불려 올라오자 시위대 제3대대 2중대 3소대의 상등병(上等兵)으로 서울에 주둔하고 있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해서 국권을 침탈하고 이에 항거하던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 등이 로써 이에 항의하니 김봉학은 흐느껴 울면서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던 신하로서 순국함은 당연하다. 나 또한 군인으로써 6년이나 지내면서 나라를 지키지 못했으니 원수인 일제 무리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하였다. 김봉학은 동지들과 함께 한국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을 처단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일이 누설되어 실패하게 되었으므로 1905년 12월 2일 오후 5시경에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김봉학의 자결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보도 되어 국민들을 감격시켰으며, 분기케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126.
註ㆍ騎驢隨筆 70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1卷 586面
출처:독립기념관(http://www.independence.or.kr)
 
네번째 을사순국충혈지사
 
 
 
이상철 (한말 순국열사)  [李相哲]
 
1876(고종 13)~1905. 12. 3.
한말의 순국열사.
 
대한제국 학부주사(學部主事)로 있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전·현직 관료들과 함께 을사조약반대상소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상소운동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 등이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주장하면서 자결하자, 그도 30세의 나이로 자결했다. 고종은 "충성의 울분이 격동하여 강개(慷慨)하게 생명을 버리니 그 뜻이 민망스럽고 그 절개가 가상하다"는 내용의 조서를 내리고, 학부협판(學部協辦)의 관직을 추증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상철(李相哲) 1876.∼1905. 12. 3

학부주사(主事)로 봉직하고 있던 중,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을사조약 반대운동이 실효가 없음을 보고 국민의 분기를 촉발하기 위하여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 등이 자결하여 순국하자 통분을 금하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12월 3일 독약을 마시고 〈자결〉로써 을사조약에 항의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겨우 30세 밖에 되지 않았다. 이상철이 순국할 때 노모(老母)가 계셨다고 하나 남은 자손이 없어서 지금은 그의 출생과 이력에 대하여 아무것도 밝히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당시 그의 자결소식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보도되어 국민들에게 충격과 분발을 주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193.

註ㆍ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17面
ㆍ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212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3卷 491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1卷 565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1卷 330·361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7卷 130面

[출처:독립기념관(http://www.independence.or.kr)]
 
다섯번째 을사순국충혈지사
 
 
               

@ 밝혀진 순국충혈지사들

 
 송병선(宋秉璿:1836~1905).12.30
 
이미지
제목 : 송병선 영정 원본보기
설명 : 1836(헌종 2)-1905. 조선 말기의 문인.순국지사.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을사오적의 처형, 을사조약의 파기 및 의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겨놓고 자결하였다. 영정은 거청군 주상면 소장.
출처 : Copyright ? 한국민족문화대
 

1836(헌종 2)∼1905.12.30 조선 말기의 문인·순국지사.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 대전시 회덕(懷德) 출생.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면수(勉洙)의 장자로, 참의 달수(達洙)와 근수(近洙)의 종질이며, 병순(秉珣)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달수에게서 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달수가 죽은 뒤 집안의 학문이 기울어질 것을 염려해 학문에 더욱 힘썼으며, 근수와 외삼촌 이세연(李世淵)의 지도를 받았다. 독서하는 틈틈이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 등 대선비의 문집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서, ≪근사록 近思錄≫과 같은 범례를 좇아 책을 지어 ≪근사속록 近思續錄≫이라 하였다.

1883년과 1884년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다만 1884년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극력 반대하는 소를 두 차례 올렸다. 그러나 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하자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닦는 데 힘을 쏟았으며, 이듬해에는 무주 설천면 구천동 산 속 물가에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도학을 강론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가의(嘉義)로 승품하였으나 역시 응하지 않고 다만 사교(邪敎)를 금지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4년 명헌태후(明憲太后) 홍씨와 황태자비 순명비(純明妃)가 죽자 그 복상(服喪)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 請討凶賊疏〉를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답이 없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을사오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납치되어 대전으로 호송되었다.

그 해 음력 12월 30일 국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통분으로,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 놓고 세 차레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 을사오적 처형, 을사조약 파기 및 의(義)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가 자결하자 시비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서 의비(義婢)라고 칭송하였다. 죽은 뒤 의정(議政)에 추증되었다.

1914년 왕명으로 영동에 문충사(文忠祠)를 지어 동생 병순과 함께 배향했으며, 1965년에 충청남도 대전 보문산으로 이전하였다. 1966년 전국 유림들이 뜻을 모아 대전시 용운동에 용동서원(龍洞書院)을 짓고 이곳에 문충사를 이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淵齋集
≪참고문헌≫ 高宗實錄
≪참고문헌≫ 梅泉野錄
≪참고문헌≫ 續陰晴史
≪참고문헌≫ 大韓季年史
≪참고문헌≫ 騎驢隨筆
≪참고문헌≫ 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54)
≪참고문헌≫ 獨立有功者功勳錄(國家報勳處, 1986)
≪참고문헌≫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백과사전 카테고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인물 > 문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인물 > 국가유공자

 
무계만집 (송병선 문집) [武溪輓輯]
1887년(고종 24) 중국의 삼황오제가 주장한 치도(治道)·치법(治法)·치교(治敎)의 대강을 모아 엮은 책.
6권 3책. 목활자본. 한말 외세의 침투와 서구문물의 유입이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정통 유학자의 입장에서 왕도의 확립과 정학(正學)의 회복을 통한 국체(國體) 안정을 추구한 책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요순시대(堯舜時代)에는 덕화(德化)가 골고루 미쳤는데, 한(漢)·당(唐)나라 이후와 한국에서 오랫동안 왕도정치를 표방하면서도 실효를 거두지 못한 이유는 기강이 해이하여 치도·치법·치교의 3대 기본목표가 올바로 시행되지 못한 데 있다고 했다. 저자는 3대 기본강령을 〈대학〉의 3강령과 같은 목차로 하여 권마다 항목을 나누어 설명했다. 권1은 치도편으로 무수신(懋修身)·논정가(論正家)·변왕패(辨王覇), 권2는 치법편으로 입기강(立紀綱)·논법령(論法令)·제전부(制田賦)·정관록(定官祿), 권3~6은 치교편으로 흥학교(興學校)·정사전(正祀典)·숭검덕(崇儉德)·장명절(奬名節)등이다.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연재집 (송병선 시문집)  [淵齋集]
53권 24책. 목판본. 자제와 문인들이 1906년에 편집·간행했다. 서문·발문은 없다. 시·부·봉사(封事)·소차·서계(書啓)·사실(事實)·논·기 등이 실렸다. 그중 봉사는 주로 시정(時政)에 관한 진언으로 성학(聖學)에 힘쓸 것, 언로(言路)개방, 세자에 대한 보도(輔導), 명기(名器)를 중히 여길 것, 검소한 덕을 밝힐 것, 신상필벌을 기할 것, 진공(進貢)을 정지할 것 등의 7개 항목을 건의해 왕도정치를 진언한 글이다. 서(書)는 주로 현재의 국가문제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것이 많다. 또한 잡저 중에서 〈벽사설 闢邪說〉은 유교에 대한 이단으로서 도교, 중국의 양묵(楊墨), 불교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퍼져나가던 야소교(그리스도교)까지 지적하고 이를 배격해야 한다는 글이다. 그리고 〈계개론 繼開論〉은 천지의 도가 성인·현인으로 인해 계승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글로 도통론(道統論)을 주장했다. 〈무계만집 武溪?輯〉은 왕의 치도에 관해 〈대학〉을 본떠 3편, 8목의 체제하에 우리나라 선현의 설을 채록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조선 말기 집권층의 위기감을 대변한 것으로 그 위기를 성리학적 질서의 재구축으로 극복하려 했던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1981년 〈만제편 挽祭編〉·〈무계만집〉·〈근사속록〉·〈패동연원록 浿東淵源錄〉·〈청파일기 靑巴日記〉·〈계산연원록 溪山淵源錄〉 등을 합해 2책으로 영인되었다. 영인본 말미에는 박효수(朴孝秀)와 증손 충호의 발문이 있다. 규장각·국립중앙도서관·고려대학교·충남대학교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의비(義婢) 공임(恭任)
 
때는 1905년 11월 우리 나라는 민족 역사상 수치를 맛보게 되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을사 조약의 체결이었습니다. 외부 대신 박재순(朴齎純)을 비롯한 을사 오적(乙巳五賊))들은 일본 공사 임권조(林權助)와 더불어 오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이 나라는 외교권을 상실했고 통감부를 설치하기에 이르른 것입니다.
이 무렵 군부 대신(軍部大臣)으로 있던 이근택은 그 죄상이 오적 중에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친일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일찍이 젊었을 때는 역적 모의를 했다가 제주도로 귀양을 간 적도 있던 이근택은 일본의 제국주의가 상륙한 난세(亂世)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력을 잡으려고 결심을 했습니다.
이근택은 끝내 구한국 군대에 투신해서 육군 참장(陸軍參長)을 지내게 되었고 을사조약 전후에는 군부 대신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은 이근택은 의기 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날 밤, 이근택의 집안에서는 웃음소리가 만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보고 내 일생의 부귀 영화는 이제 떼어놓은 당상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떠들어대는 그의 얼굴에서는 부끄러운 기색이란 전연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때 그 집의 부엌에서 찬을 만들고 있던 하녀가 그 말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칼로 도마를 내리치면서,
"네가 그토록 흉악 무도한 줄을 내 미처 모르고 여러 해를 섬겼으니, 그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노라!"
고 소리질렀습니다.
그 당시의 신분 질서로 볼 때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이와 같은 무례한(?) 행동에 너무도 어이가 없던 이근택의 부자(父子)는 잠시 후 정신을 차려 그녀를 잡으려 하자 그 계집종은 대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역적의 대문 앞에 모인 군중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동리 사람들은 내 말을 들어 보시오. 소위 상전이라는 자가 저토록 흉악해서 내가 나무랐더니, 나를 치려 합니다. 나를 구해 주시오."
이근택의 부자는 종년을 잡으려고 대문을 뛰쳐나왔다가 노도(怒濤)같은 동리 사람들을 보는 순간 크게 부끄러움을 느끼고서는 허겁지겁 대문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조금 있다가 그 집안의 침모(寢母)가 또한 보따리를 싸가지고 나오면서 역적놈의 종노릇은 하지 않겠노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소문이 서울 시내에 널리 퍼지자 역적 집안의 종으로서 집안을 뛰쳐나오는 의로운 계집종들이 많이 생겨났고 대사헌 송병선(宋秉璿)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하자 그의 비복이었던 공임(恭任)이라는 사람 또한 그 상전을 따라 자살했는데 그 때 그의 나이 27살이었다고 합니다.
을사 오적 이근택(李根澤)과 순국지사 송병선의 의로운 계집종의 행적을 보면서 우리는 조국을 위하는 데 어찌 상하 귀천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조국은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자주 정신을 다시금 다짐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처:수치스런 역사와 의로운 사람들 http://blog.empas.com/dhlee103/8656079
 
 
 

이준 (한말 순국열사·애국계몽운동가)  [李儁]

 
1859(철종 10) 함남 북청~1907(광무 11) 네덜란드 헤이그.
순국열사·애국계몽운동가.
 
이준의 묘 /이준의 묘, 서울 강북구 ...
 
헤이그 /헤이그에 파견된 3명의 특사(왼쪽부터 ...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다가 순국했다(→ 헤이그 밀사사건).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성재(性在)·여천(汝天)·선재(璿在). 자는 순칠(舜七), 호는 일성(一醒)·해사(海史)·청하(靑霞)·해옥(海玉). 아버지는 병관(秉瓘)이며, 어머니는 청주이씨(淸州李氏)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 명섭(命燮)과 숙부 병하(秉夏)에게서 양육되었다. 1887년(고종 24) 북청의 초시(初試)에 합격하고 인재양성을 위해 고향에 경학원(經學院)을 설립했다. 1894년 함흥의 순릉참봉이 되었으며 이듬해 법관양성소에 입학, 1896년 2월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되었다.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장박(張博)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한 후 귀국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협회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그해 11월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계몽활동에 앞장섰다. 1902년에는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개혁당을 조직하여 정치개혁운동을 전개했다.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항하여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를 조직, 총무를 맡아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대한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자, 다시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맡아 결국 일본의 요구를 저지시켰다. 또한 같은 해 12월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하여 공진회(共進會)가 조직되자, 회장을 맡아 반일투쟁을 주도하다가 황해도 철도(鐵島)에 6개월간 유배당했다. 1905년 윤효정(尹孝定)·양한묵(梁漢默) 등과 같이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했으며, 11월 일제가 강압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조약폐기를 요구하는 상소문을 지어 동지들과 함께 상소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하여 운니동에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설립했으며 함경도의 유지들을 규합하여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발기하여 유학생들의 장학사업에 힘썼다. 그해 평리원(平理院)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활약했다. 그러나 상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재판에 임해 결국 법부대신과 알력을 빚어 취임 8개월 만에 파직당했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 국채보상연합회를 설립하고 회장이 되어 모금운동을 주도했다.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3월 하순 극비리에 고종을 만나 세계각국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것이므로 무효임을 선언하는 한편, 한국의 독립에 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하고 고종의 밀서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헤이그 특사단의 부사(副使)가 되어 4월 22일 서울을 출발,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정사 이상설과 합류했으며 다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이위종(李瑋鍾)과 합류했다. 그곳에 만국평화회의의 주창자이며 의장국인 러시아 정부의 지지와 후원을 기대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6월 25일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들은 곧 만국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고 공식적인 한국대표로서 회의 참석을 요청했으나 한국은 이미 일본의 보호국이므로 1국을 대표하여 참석할 자격이 없다 하여 거부되었다. 이에 세 특사는 일제의 침략을 폭로·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하여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한편, 언론기관을 통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회의 참석의 길이 막히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곳에서 순국(殉國)했다. 시신은 헤이그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63년 헤이그에서 유해를 옮겨와 국민장으로 서울특별시 수유리에 안장했으며, 1964년 장충단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박승환 (한말 순국지사)  [朴昇煥]
 
1869(고종 6) 서울~1907(융희 1).
순국지사.
 
한말 육군참령을 지냈고, 일본 통감에 의한 군대 해산에 분개하여 자결했다. 일명 성환(星煥). 육군참령을 지냈으며,을미사변, 을사조약, 고종 강제 퇴위 등의 일제 만행에 대해 보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일본은 1907년 한일신협약으로 한국의 내정을 통감부를 통해 장악하면서 이후 병합의 최대장애가 될 한국 군대를 해산시킬 것을 순종에게 강요했다. 결국 7월 31일 군대 해산의 칙령이 내려졌으며, 8월 1일에는 군대 해산식이 강행되고 무기가 압수되었다. 이때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으로 있던 그는 병을 핑계로 해산식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군대해산의 명을 듣고 분개하여 "군인이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애석함이 없다"(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는 내용의 유서를 쓰고 '대한제국만세'를 외친 후 자결했다. 그의 자결이 알려지자 부대 장병들은 무기를 꺼내 들고 일본군과 육박전을 벌여 일본군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이 전투가 끝난 후에도 약 1개월에 걸친 지방 진위대(鎭衛隊)의 해산과정에서 원주 진위대와 강화 분견대(分遣隊) 등이 집단적으로 항쟁을 벌여 많은 군인이 의병으로 전환하여 의병투쟁의 무력(武力)이 강화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박승환(朴昇煥)
1869(고종 6)∼1907(융희 1). 순국지사. 일명 성환(星煥). 서울출신.
어려서부터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 군대에 복무한 지 10여년에 육군참령이 되었다.
1895년 10월 일제의 명성황후시해사건의 만행이 자행되자, 통분하여 일본인에 보복하고자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1907년 7월 일제가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양위시킬 때, 궁중에서 거사하여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화가 황제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중단하였다.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으로 있을 때인 1907년 8월 1일, 일제가 대한제국군대의 해산통고를 하려고 새벽에 대대장 이상의 장교를 일제통감의 관저인 대관정(大觀亭)에 집합시켰는데, 병을 핑계로 불참하였다.
오전 10시 일제가 군대해산식을 강행하자 크게 분개하여, “군인은 국가를 위하여 경비함이 직책이어늘 이제 외국이 침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군대를 해산하니, 이는 황제의 뜻이 아니요 적신이 황명을 위조함이니 내 죽을지언정 명을 받을 수 없다.” 하고 대대장실에서 몇 자의 유서를 쓰고 “대한제국 만세!”를 외친 다음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유서에는 “군인이 능히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능히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라고 썼다. 이를 보고 있던 장병들이 그의 자결을 모든 부대에 전하니 부대장병들이 분격하여 탄약고를 부수고 탄환을 꺼내어 무장봉기하였다.
제1연대 제1대대의 봉기소식을 듣고 제2연대 제1대대도 이에 호응하여 봉기하였다. 장병들은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며 전투에 들어가고, 또한 전투가 끝난 뒤에는 상당수의 군인이 의병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의 자결은 대한제국군대 최후의 진면목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군대의 봉기에 의한 의병운동의 무력강화를 가져와 의병운동이 의병전투로 전환하는 기틀이 되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大韓季年史, 韓國痛史(朴殷植, 大同編譯局, 1915)
韓國獨立運動之血史(朴殷植, 維新社, 1920)
韓國獨立運動史 1(國史編纂委員會, 1965). 〈愼鏞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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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식 (한말 순국열사)  [鄭東植]
 
1850. 3. 4 전북 익산~1910.
한말의 순국열사.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경필(敬必), 호는 모은거사(慕隱居士). 1876년 무과에 급제하여 친군별 영초관 겸 선전관(親軍別營哨官兼宣傳官), 충무위좌부장(忠武衛左部將)·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 등을 지냈다. 일본의 침략 및 관리의 부패에 통탄하여 사직했다. 1910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 포고문과 토적문 등을 지어 전라관찰사 이두황(李斗璜)에게 보내고 공북루(拱北樓)에 올라 목매어 자결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정동식(鄭東植)
1850(철종 1)∼1910. 조선 말기의 무신·순국지사.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경필(敬必). 전라북도 익산출신. 사헌부지평 제호(濟鎬)의 아들이다.
1876년 무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친군별영초관 겸 선전관(親軍別營哨官兼宣傳官)에 임명되었다가 충무위좌랑(忠武衛左郎)으로 옮겨졌다.
그뒤 훈련원주부 및 수주부(首主簿)로 승진하였다가 어모장군(禦侮將軍)훈련원첨정이 되었다.
이때 조정군신들의 일제와의 강화 및 관리들의 부패를 통탄하여 사직하였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통곡하며 포고문(布告文)과 토적문(討賊文), 자제들에게 주는 글 및 종족들에게 주는 글을 써놓고 완산부로 떠났다.
안찰사 이두황(李斗璜)에게 토역문(討逆文)을 제시하면서 “내가 힘이 부족하여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그 부끄러움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죽어 귀신이 되어 왜적을 섬멸, 우리 선왕의 원수를 갚겠다.”라고 하고 공북루(拱北樓)에 올라가 의관을 정제한 다음 목매어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愼鏞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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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언 (한말 순절열사)  [李中彦]
 
1850. 3. 13 경북 안동~1910.
한말 순절열사.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중관(中寬)·문석(文錫), 호는 동은(東隱). 1879년(고종 16) 문과에 급제한 후,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을 거쳐 다음해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관직을 사퇴하고 봉화의 임당산(林塘山)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의 시행으로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안동·영양 등지를 중심으로 창의(倡義)한 김도현(金道鉉) 의진에 가담해 전방장으로 활약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처단을 촉구하는 상소문을 제출했다. 1910년 한일합병 소식을 듣자, "내가 을사 이후 지금까지 한가닥의 목숨을 구차하게 연장했으나 그도 본의가 아니었는데 지금 종사가 필경에 이 꼴이 되었으니 내 어찌 목숨을 유지해 감히 사람이로다 자처하겠는가"라 하고, 집밖에 좁다랗게 방 1칸을 마련해 그 안에서 생활했다. 그러던 중 이만도(李萬燾)의 순국 소식을 듣자, 선조의 사당과 묘에 참배한 후, 순국을 결심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일본경찰 4, 5명이 가족들에게 강제로 식사를 하도록 협박하자, "빨리 저놈들을 쫓아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나가서 찔러 죽이겠다"고 호령을 한 다음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한 후 그 자리에 앉아서 절명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중언(李中彦)
1850(철종 1)∼1910.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중관(仲寬)·소자(小字)·문석(文錫), 호는 동은(東隱). 경상북도 안동출신.
1879년(고종 16)문과에 급제한 뒤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1880년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1882년 정국이 혼란하자 봉화의 임당산(林塘山)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1895년 8월 일제에 의하여 명성황후시해가 자행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김도현(金道鉉)이 안동·영양 등지를 중심으로 창의하자 이에 가담하여 전방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하였으나 간신배들에 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집 밖에 좁다란 방 한칸을 마련하고 외부와 접촉을 끊고 때때로 을사조약 체결 때 상소하였던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고, 선조의 사당과 묘를 참배한 뒤 수십일 식음을 전폐하였다.
이무렵 일본경찰 몇명이 와서 음식을 먹도록 권하라고 식구들을 협박하자, 때마침 베개를 의지하고 졸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벼락 같은 호령을 하고 나서,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똑바로 앉아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3)
碧山先生倡義顚末(독립운동사자료집 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丁原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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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순 (한말 열사)  [李學純]
 
1843(헌종 9) 전북 완산~1910. 12. 7.
한말의 순절열사.
 
자는 경실(敬實), 호는 회천(晦泉). 성품이 호협(豪俠)하지만, 학문에 전념하는 청렴한 선비로서, 전라북도 논산군 한양촌에 은거하고 있었다. 1910년 8월 한일합병이 되자, 일제가 일본 왕 메이지[明治]의 '은사금'(恩賜金)을 보내어 온갖 협박과 회유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방안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이학순은 조선의 일민(逸民)이다. 불행히도 병들고 늙은 나이에 나라가 망하고 인군이 욕을 보시는데, 한 번 싸우는 모계를 내지 못하고 또 한 번 죽는 절개를 세워보지 못했으니 그 죄 만 번 죽어 마땅하다. 의리상 원수 나라의 불의의 물건을 받지 못하겠다. 다시 나에게 강요하면 서산(西山)으로 들어가든가 동해로 나가겠다"고 완강히 거절했다. 여러 차례의 회유와 협박에 실패한 일제 헌병대는 그를 투옥시키고, 헌병대장이 그의 아들 내수(內修)·내준(來俊)에게 은사금을 받아가라고 달래자, 내준은 "내 머리로 일본 왕 머리를 바꾼다면 그것은 허락하겠지만, 돈을 받는 일은 할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이학순은 병보석으로 잠깐 석방된 기회를 이용하여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학순(李學純)
1843(헌종 9)∼1910. 한말의 순국지사.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실(敬實), 호는 회천(晦泉). 충청남도 논산출신.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고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恩賜金)을 보내자 온갖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대가 투옥시켰는데, 병보석으로 잠깐 석방된 기회를 이용, 음독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愼鏞廈〉

출처:엠파스>역사와인물>한국의인물

 
 
 
 
이현섭 (한말 열사)  [李鉉燮]
 
1844. 10. 26 경북 안동~1910. 10. 25.
한말의 순절열사.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서규(瑞圭), 호는 우헌(愚軒). 1885년(고종 22) 성균관 진사시험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1895년 10월 일제가 명성황후를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하자, 통분을 금치 못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안동군 예안면(禮安面) 양평리(良平里)에 은거했다. 1910년 한일합병의 소식을 접한 10월 5일부터 식음을 전폐하자, 일제 군경이 와서 여러 가지로 힐난했다. 이에 "우리나라가 너희 나라에 무슨 원수가 있기에 임진년 병난에 화가 두 능에 미치고 갑오년 변에 국모를 시해하기까지 한 것이냐…… 내가 혼자서 천일(天日)을 돌리지는 못했지만, 어찌 차마 몸을 굽혀 욕을 보며 한 하늘 아래에서 살 것이냐"라고 꾸짖으니, 일제 군경이 '범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물러갔다. 며칠 후 울분을 이기지 못해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유저(遺著)로 〈우헌실기 愚軒實記〉 2권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현섭(李鉉燮)
1844(헌종 10)∼1910. 조선 말기의 순국지사.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서규(瑞圭), 호는 우헌(愚軒). 경상북도 군위출신. 진(軫)의 후손이다.
1885년(고종 22) 성균생원으로 관직에 나아갔다가, 1895년 일제가 민비를 시해하는 만행을 자행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여 관직을 사임, 안동군 예안면 양평리에 은거하였다.
1910년 국치의 소식을 듣고 음독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3). 〈愼鏞廈〉
출처:엠파스>역사와인물>한국의인물
 
 
 
 
홍범식 (한말 문신)  [洪範植]
 
1871(고종 8) 충북 괴산~1910.
한말의 문신·순절열사.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우길(祐吉)이며, 아버지는 참판 승목(承穆)이다. 1888년(고종 25) 진사가 되었으며, 이후 내부주사·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했다. 1907년 태인군수로 있을 때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다른 군수들과 달리 적극적인 의병 보호책을 펴 선치자(善治者)로 도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했을 때, 군민들이 전(前) 군수 김우식(金宇植)이 강제로 국유화시킨 개간지들을 돌려달라고 탄원하자 토지를 반환해주어 군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910년 8월 25일 한일합병의 비보를 듣고 선산에 올라가 자결했다. 아들 명희(命熹)도 일제강점기에 민족운동가·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홍범식(洪範植)
1871(고종 8)∼1910.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 충청북도 괴산출생. 참판(參判) 승목(承穆)의 아들이다.
1888년(고종 25) 진사가 되었으며 1902년 내부주사(內部主事)·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였고 1907년 전라북도 태인군수에 부임하였다. 당시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하여 치열한 항일전투를 전개하고 있던 때로서 적극적으로 의병 보호에 힘써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게 하였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선산에 올라가 목매어 자결하였다. 그가 남긴 유서 5통은 일본경찰이 압수함으로써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韓國痛史, 韓國獨立運動史 2(國史編纂委員會, 1966)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申載洪, 韓國民族運動硏究所, 1971). 〈申載洪〉
출처:엠파스>역사와인물>한국의인물

 

 

 
 
유도발 (한말 순국지사)  [柳道發]
 
1832(순조 32) 경북 안동~1910.
순국지사.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승수(承?), 호는 회은(晦隱). 아버지는 세자시강원부수 진휘(進徽)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고, 동정심이 많아 불쌍한 사람을 보면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주었다고 한다. 중년에 여러 번 이사를 한 뒤 비안의 덕암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1910년 한일합병 소식을 듣자, 고향으로 가 여러 친척과 친지들을 찾아 작별을 고하고 선영에 배알한 뒤 집에 와 마당에 자리를 마련하고, 북쪽을 향해 4번 절한 뒤 단식으로 자결했다. 1911년 2월 22일에 장례를 지냈으며, 1951년 안동의 유지들이 사회장을 지내고 화산(花山)에 이장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유도발(柳道發)
1832(순조 32)∼1910. 순국지사.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승수(承?), 호는 회은(晦隱). 경상북도 안동출신.
세자시강원부수(世子侍講院副率) 진휘(進徽)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숨은 일화도 많이 남겼다.
중년에 여러 번 이사를 하였는데, 마침내 군위군 비안의 덕암리에 이사하자 스스로 회은이라 하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 중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의 옛집으로 돌아와 있다가, 9월에 전패(殿牌)를 헐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상의 묘를 배별하고 여러 친척들을 비롯하여 자손·친지들에게 작별을 알린 뒤, 집에 돌아와 마당에 자리를 마련하고 북쪽을 향하여 네번 절한 다음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자결하였다.
단식을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자지(自誌)·자명(自銘) 등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1951년 안동유지들이 사회장을 지내고 화산(花山)에 이장하였으며, 진안의 이산묘(餌山廟)에 모셨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3). 〈愼鏞廈〉
출처:엠파스>역사와인물>한국의인물
 
 
 
 
반하경 (한말 순국지사)  [潘夏慶]
 
?~1910.
순국지사.
 
내시(內侍)로 승전색(承傳色)을 지냈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항의하여 사임하고 경기도 파주 교하면에 은거했다. 1910년 8월 한일합병에 분개하여 순국할 뜻을 적은 글을 품안에 간직하고 숙부인 홍지사(洪知事)를 찾아가 결별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품안에 간직했던 글을 노상에 펼쳐놓고 "내시와 외관(外官)이 귀함과 천함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역시 임금의 은혜를 받아 이미 수십 년을 살아 왔으며 이제 임금이 하정(下庭)했는데 내 어찌 따뜻한 방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하며 할복하여 순절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반하경(潘夏慶)
?∼1910. 순국지사. 고종 때의 내시(內侍)로서 승전색(承傳色)을 지내다가,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항의하여 사임하고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에 은거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통분을 누르지 못하여 남몰래 순국할 뜻을 써서 품안에 간직하고 작은아버지를 찾아가 결별을 고하고 돌아오다가 품안에 간직하였던 글을 펼쳐놓고 “내시와 외관(外官)이 천함과 귀함이 다르기는 하지만 나 역시 임금의 은혜를 받아 이미 수십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임금이 하정(下庭)하였으니 내 어찌 감히 따뜻한 방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 반문하면서 대로에서 할복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韓國獨立運動史 1(國史編纂委員會, 1971)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光復出版社, 1983). 〈愼鏞廈〉
출처:엠파스>역사와인물>한국의인물
 
 
 
 
송병순 (조선 순국지사)  [宋秉珣]
 
1839. 4. 10 충남 회덕~1912. 2. 4.
순국지사.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心石).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순절한 병선(秉璿)의 동생이다. 병선과 함께 큰아버지인 달수(達洙)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그뒤에는 근수(近洙)와 외할아버지에게 배웠다. 1888년(고종 25) 의정부의 천거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903년(광무 7) 고종이 홍문관서연관으로 임명했으나 친일파의 반대로 등용되지 못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해 11월 〈토오적문 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1906년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건립하여 많은 문인들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뒤 두문불출했다. 1912년 일본 헌병이 은사금(恩謝金)을 가져왔으나 거절했고, 일제가 경학원(經學院) 강사로 천거하자 거절한 뒤 일제를 규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저서에 〈학문삼요 學問三要〉·〈사례축식 四禮祝式〉·〈용학보의 庸學補疑〉 등이 있다. 1914년 영동 문충사(文忠祠)에 제향되었다. 1973년 대전역 앞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송병순(宋秉珣)
1839(헌종 5)∼1912. 순국지사.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心石). 충청남도 회덕출신.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참의 달수(達洙)와 근수(近洙)의 종질이며,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순절한 병선(秉璿)의 아우이다. 종형인 병선과 함께 큰아버지인 달수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하였으며, 달수의 사후에는 근수와 외할아버지의 지도를 받았다.
1888년(고종 25) 묘당의 천거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903년 학행이 뛰어나고 중망(衆望)을 지니고 있음을 듣고 고종이 홍문관서연관(弘文館書筵官)에 임명하였으나 친일파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뒤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세우고 많은 문인들을 지도, 계발하여 천리를 밝히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정력을 기울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송병선이 이의 파기를 위하여 활동하다가 순국하였음을 듣고, 옳은 길을 지켜 죽을 때라 하고 “은산철벽에 불타 버리지 않는 것은 오직 옥(玉)이다.” 하며 구국활동을 결심하였다.
그해 11월에 〈토오적문 討五賊文〉을 지어 전국유림에게 선포하여 민족정기의 앙양과 국권회복을 호소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나라를 위하는 충성과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순국하는 길밖에 없다.” 하고 그해 9월 5일 강당 뒤 서산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투신자결하고자 할 때 문인 김용호(金龍浩)가 뒤에서 껴안아 미수에 그치자 그뒤 두문불출하고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이때 영동군 양산의 일본 헌병대가 은사금을 가져오자 이를 질책하여 거절하였다.
1912년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강사에 임명하자 이를 거절하고, 대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결심,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였다.
1968년에 대통령표창,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15권의 문집과 《학문삼요 學問三要》·《사례축식 四禮祝式》·《용학보의 庸學補疑》 등이 있다.
1914년 병선의 사당인 영동의 문충사(文忠祠)에 병향되었으며, 1970년 문충사는 대전광역시 용운동으로 이전되었는데, 일명 용동서원(龍洞書院)이라고도 한다.
1973년에 대전역 앞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愛國同志援護會, 1956)
韓國獨立史(金承學, 獨立文化社, 1965)
忠淸北道誌(忠淸北道誌編纂委員會, 1975). 〈愼鏞廈〉
출처:엠파스>역사와인물>한국의인물
 
 
 
 
이석용 (한말 의병장)  [李錫庸]
 
1878. 11. 29 전북 임실~1914. 4. 4.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전주. 초명은 갑술(甲戌).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재(靜齋). 아버지는 봉선(鳳善)이다. 김관술(金觀述)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898년 남한산성·촉석루·황산대첩비 등 구국항전의 기상이 서린 유적지를 답사하고, 송병선(宋秉璿)·기우만(奇宇萬)·전우(田愚)·최익현(崔益鉉)·곽종석(郭鍾錫)·허유(許愈) 등을 방문했다. 그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입장에서 반개화·반일의식을 더욱 확고하게 견지했으며,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해낼 것을 결심했다.
1907년 8월 26일 임실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장성에서 기의(起義)한 기삼연(奇參衍) 의진과 통합하여 영광의 수록산에서 호남창의진(湖南倡義陣)을 편성했다. 기삼연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서석구(徐錫球)·김익중(金翼中)·전수용(全垂鏞)과 함께 종사(從事)로 활약했다. 그해 9월 고창의 일본병참기지를 습격하고, 진안의 우편취급소를 파괴한 뒤 용담 심원사(深源寺)로 퇴각했다. 이어 전라도와 경상도의 접경지대에서 활약하던 김동신(金東臣) 의진과 연합했으나 일본 군경의 내습을 받고 패하게 되자, 지리산 실상사 백장암으로 들어가 일단 의병을 해산한 뒤 광주로 내려가 기우만에게 몸을 잠시 의지했다. 1908년 1월 호남창의대장 기삼연이 순창의 복흥산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순국하자, 대장으로 추대되어 남원·전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접전하여 많은 타격을 주었다. 그뒤 의진을 재정비하여 진안읍을 점령했으나, 백마산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참패당했다. 그뒤에도 장수군청을 습격하는 등 항일전을 계속했지만,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1908년 임실에서 패하여 의진을 해산했다. 1911년 4월 밀사를 은밀히 일본으로 파견, 일왕을 주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 겨울 정찬석(鄭贊錫)·최제학(崔濟學)·이규진(李圭鎭)·안자정(安子精) 등 호남지역 지사들과 밀맹단(密盟團)을 조직했다. 1913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이듬해 순국했다. 의병활동중 남긴 진중일기가 〈정재선생호남창의일록〉으로 간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석용(李錫庸)
1878(고종 15)∼1914.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갑술(甲戌),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암(靜庵). 전라북도 임실출신. 승문박사(承文博士) 태환(泰煥)의 손자이며, 봉선(鳳善)의 아들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우리나라의 재정간섭을 강화하자, 1906년 임실·장수·진안·남원·함양·순창·곡성 등지에서 동지를 얻고 조정을 비롯하여 전국의 동포, 그리고 일본정부와 세계열강들에게 격문·통고문·규탄문·건의문 등을 선포하면서 민족의 주권확립에 노력하였다.
1907년 8월 우리나라 군대가 강제해산당하자, 같은 고향의 전해산(全海山)이 서신을 보내 함께 거의토적(擧義討賊)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때 기삼연(奇參衍)이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石水僧庵)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전해산과 더불어 종사 중 1인이 되었다.
그러나 기삼연의 의진에 입진하지 않고 독자적인 의진구축이 필요함을 절감, 뒤에 연합할 것을 기약하고 8월 26일 고향으로 가 상이암(上耳庵)과 황사현에서 재차 동지들과 창의계획을 숙의하였다.
이에 의진을 ‘의병창의동맹’이라 명명하고, 진용을 정비하여 선봉·중군·후군·참모·총지휘·연락·도로부장·보급·운량 등의 부서를 정한 뒤 9월 4일 진안 석전리에서 거병,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전해산을 참모에 기용하고, 박만화(朴萬華)·여운서(呂雲瑞)·김공실(金公實)들의 용장들을 각 부서에 임용하였다.
1907년 9월 12일 마이산(馬耳山)남쪽기슭의 용암(龍巖) 위에 설단제천(設壇祭天)하여 오로지 “왜인을 이 땅에서 몰아내라.”고 외쳤다.
13일에는 진안읍을 기습하여 적장에게 총상를 입혀 패주시킨 뒤 그들의 복장·양총·비단·문부(文簿) 등을 노획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또한, 우편소를 습격, 파괴하여 우편물을 소각하고, 전선을 모조리 끊었다.
16일에는 내원사(內源寺)골짜기에서 적병 10여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0월 8일 화암리 후방산(後方山)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일본군과의 병력 차이로 많은 의병을 잃고, 진안·용담·정천·임실·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남원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고, 11월 14일 성수산(聖壽山)에서 의진을 재편하였다.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하였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武戌村)에서 적 2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3월 5일 진안 시동(矢洞), 3월 14일 마근현(麻根峴), 3월 17일 수류산(殊流山), 3월 27일 관촌역(館村驛), 4월 30일 가수리(嘉水里)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휘하의 봉수·덕홍 등 승려와 박철규·허천석 등 소년의병이 전사하였다.
1909년 9월 의진해산 뒤 잠행 유랑하던 중 1912년 성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혀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의병활동에 관한 진중일기를 남겨 《정재선생호남창의일록 靜齋先生湖南脹義日錄》이 간행되었다.

참고문헌
靜齋先生湖南倡義日錄, 湖南義兵略傳,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독립운동사자료집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抗日義兵將列傳(金義煥, 正音社, 1975)
의병들의 항쟁(조동걸, 민족문화협회, 1980). 〈崔根茂〉

출처:엠파스>역사와인물>한국의인물

 

 

 

 

@이달의 독립운동가 리스트

 

 

이 달의 독립 운동가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선정하여 발표하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명단이다.

국가보훈처는 1992년부터 매년 열두 명의 독립 운동가를 각 월별로 지정하여 발표하고, 이들의 공훈을 선양하기 위해 추모 행사와 전시회 등의 기념 사업을 벌이고 있다.

[명단]

[바깥 고리]

 

 

이재명(李在明)
 

이재명(李在明, 1890년1910년 9월 13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다른 이름은 이수길(李秀吉). 1886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평안북도 선천 출생으로 어릴때 평양으로 이주하여 기독교 계열인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했다.

1904년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났으나, 을사조약정미7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1907년 일본을 거쳐 귀국하여 이토 히로부미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 친일 인사들의 암살을 계획했다.

1909년 12월 22일 서울의 종현천주교회당(鍾峴天主敎會堂, 현 명동성당)에서 그달 17일에 사망한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 추도식이 열렸다. 이재명은 교회당 앞길에 변장을 하고 잠입한 뒤 이 자리에 참석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10년 사형 선고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당했으며, 이 사건으로 이동수, 조창호, 김정익 등 11명의 관련자들도 중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고, 2001년 12월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 의해 이 달의 독립 운동가로 선정되었다. 명동성당 입구 쪽에 의거터가 표석으로 표시되어 있다.

박상우의 장편소설 《칼》[1]이 이재명과 그의 의거를 소재로 한 것이다.

[편집] 참고자료

[편집] 주석

  1. 박상우 (2005년 9월 24일). 《칼》. 서울: 창해. ISBN 9788979196955.

 

 

 

 

 

 

 

 

출처:위키백과 

 

 

을사오적은 시험문제 잘나옵니다.  

유명하죠.

정작 유명해야할 충신의혈지사들은

인기없죠.

 

왜그래야 할까요?

 

우리도 의식 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지않나요?

 

우리의 이런 의식수준... 일본의 세뇌공작 덕분일까?

 

이런 의식수준 고치려면 100년은 연구하고 계몽해야 합니다.

 

100년간 세뇌되었으니,

 

적어도 100년은 연구하고 세뇌뿌리 뽑아서 고쳐야죠.

 

이거 못고쳐서 조상의 얼굴들 보기 민망하지 않게 노력합시다.

 

오늘도 낚시 ㅎㅎ 

 

 

 

 

출처:다음 브리태니커

출처:네이버 엠파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계속 증보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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