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백헌(伯憲), 호는 호운(湖雲). 아버지는 영의정 순목(淳穆)이며, 동생이 갑신정변의 주모자 영식(英植)이다. 교관(敎官) 순경(淳敬)에게 입양되었다. 1866년(고종 3)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검열·수찬·집의·동부승지·여주목사·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884년 아버지가 사복에 착수의(窄袖衣), 관복에 흑단령(黑團領)을 착용하게 하는 의복제도의 개정을 반대하다가 삭탈관직되자 그도 사직했다. 그해 10월 동생 영식이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살해되자 아버지는 자살했고 그도 자살을 기도했으나 출계(出系)한 사람은 연좌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여 여주관아에 자수했다. 1894년 개화파정권이 들어선 뒤 관작이 복구되었다. 1895년 춘천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해 8월 일제가 민비를 학살하고 친일 개화파정권이 단발령을 내리자 음독자결을 하려 했으나 단발령이 취소되고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그만두었다. 1904년 해주관찰사·의정부찬정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사직상소에 직함을 쓰지 않고 미사신(未死臣)이라고 써 죄인임을 자처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처사(處士)의 예로 장사지낼 것을 당부하고 음독자결했다. 이는 을사조약 이후 최초의 자결이었다. 참정대신(參政大臣)에 추증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최초의 을사순국충혈지사
충정공(忠正公) 민영환 (조선 문신) [閔泳煥]
1861(철종 12) 서울~1905(광무 9).11.29
한말의 정치가.
민영환 (閔泳煥)
민씨정권의 세도 속에서 관직에 진출했고, 2차례의 해외여행으로 견문을 넓혀 왕에게 개혁정책을 권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운명이 기울자 자결로 일제에 항거했다. 본관은 여흥.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출신 및 초기 관직생활
아버지는 선혜청당상을 지낸 겸호(謙鎬)이며, 뒤에 큰아버지인 태호(台鎬)에게 입양되었다.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이 되었고, 이듬해 정시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정자·검열·수찬·장령 등을 거쳐, 1881년(고종 18)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대사성과 도승지를 지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생부 겸호가 피살되자 벼슬을 내놓고 3년상을 치렀다. 그뒤 도승지·이조참판·한성우윤·예조판서·형조판서·한성부윤·독판내무부사 등을 지냈다. 1895년 8월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민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부임하지 못했다. 친러파가 축출되고 친일적 경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낙향해 두문불출했다.
외교활동
1896년 특명전권대사로 학부대신 윤치호(尹致昊), 2등서기관 김득련(金得鍊), 3등서기관 김도일(金道一) 등과 함께 4월 1일 인천을 출발해 상하이·나가사키·도쿄·밴쿠버·뉴욕 등을 거쳐 유럽 대륙의 신문명을 보고 5월 20일 모스크바에 도착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뒤 약 3개월 동안 러시아 각지를 둘러보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10월 21일 귀국했는데, 그의 여행은 독립신문에 그 내용이 소개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1897년(광무 1) 1월에는 다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가 되어 3등서기관 이기(李琦), 서기 김조현(金祚鉉)·김병옥(金秉玉)·손병균(孫炳均) 등과 함께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했다. 도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들러 니콜라이 황제에게 국서와 고종의 밀서를 전달했다. 2차례에 걸친 해외여행을 통해 유럽의 제도를 모방해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을 신장해 국가의 근본을 공고히 할 것을 여러 번 고종에게 건의했는데, 그중 군제에 관한 건의가 받아들여져 원수부(元帥府)에 의한 육군통솔이 이루어졌다. 그뒤 서재필 등이 조직한 독립협회를 측면에서 후원하다 원로대신들의 무고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참정대신·탁지부대신·장례원경·헌병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며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太極章)을 받기도 했다. 1904년 이후 내부·학부 대신을 역임했으나, 일제의 침략을 맹렬히 반대하다가 시종무관장이라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1905년에는 참정·외부 대신을 역임했으나 다시 시종무관장이 되어 순국할 때까지 그 직위에 머물렀다.
당시 국내정세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대한제국정부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고, 그해 8월에는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해 재무·외교 부문에 고문정치를 시작했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한국에서의 정치·경제·군사 상의 우월권을 인정받은 상태에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이 체결되자 원임의정대신(原任議政大臣)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조약에 찬동한 5적을 성토하고 조약의 파기를 주장했으나 조병세의 체포로 실패했다. 이어 2차 상소를 전개했으나 나라의 운이 이미 다했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해 국민을 각성시킬 목적으로 그해 11월 13일 오전 6시경 2,000만 동포와 고종 및 주한 외국사절에게 보내는 3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그의 자결 소식이 알려지자 조병세·김봉학(金奉學)·홍만식(洪萬植)·이상철(李相喆) 등이 그의 뒤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했다. 저서로는 〈민충정공유고 閔忠正公遺稿〉·〈해천추범 海天秋帆〉·〈사구속초 使歐續草〉·〈천일책 千一策〉 등이 있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두번째 을사순국충혈지사
충정공(忠正公) 조병세 (한말 문신) [趙秉世]
1827(순조 27)~1905.11.30
한말의 문신·순국열사.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 아버지는 홍천현감 유순(有淳)이다.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에 급제, 사관(史官)이 되어 1864년(고종 1) 실록청 도청낭청(都廳郎廳)으로서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874년 함경도암행어사, 1877년 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호조참판에 임명되고 동지사은부사(冬至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한성부좌윤을 거쳐 승지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의주부윤, 다시 대사헌을 지냈다. 1887년 공조판서를 거쳐 1889년 우의정에 오르고 1893년 2월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후 정치적 변동이 크게 일어나자 잠시 정계를 떠나 가평에 은퇴했다. 1896년에는 총호사(摠護使)가 되었고 민비 국장 때 만장제술관(輓章製述官)으로 참여했으며 뒤에 다시 원로대신으로서 중추원의장과 의정부의정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으로 활동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하여 79세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상경하여, 을사5적의 처형을 주청(奏請)하려고 했으나 처음부터 일본군의 방해로 고종과의 면담이 거절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1월 26일 심상훈(沈相薰)·민영환(閔泳煥)·이근명(李根命) 등과 함께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와 5적을 처형하고 새로 충량(忠良)한 사람을 뽑아서 외부대신에 임명하고 각국 공사와 협의하여 5조약을 파기할 것을 상소했다. 또한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 및 5개국 공사에게 각각 글을 보내어 독립과 영토보존의 원조를 요청하고 조약의 부당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각국 공사들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종도 듣지 않고 다만 물러가라고 하자 다시 대한문(大韓門) 앞에서 고종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궁중을 물러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거적을 깔고 계속해서 을사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 일본헌병에 강제연행되었다. 이후 민영환이 대신 소두(疏頭)가 되었으나 민영환도 잡혀 평리원(平理院)에 연금되었다가 특명으로 풀려난 뒤 비분을 참지 못해 29일 자결했다. 가평 향제(鄕第)에 강제 추방되었으나 30일 다시 서울로 돌아와 표훈원(表勳院)에서 여러 사람과 다시 상소했다. 또다시 일본군이 가마에 태워서 강제 추방하자 가마 안에서 음독하여 조카 민희(民熙)의 집에 당도하여 죽었다. 이때 각국 공사관에 독립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도록 요청하는 투서와 함께 국민들에게는 충의로서 독립의 기초를 다질 것을 촉구하는 유서를 남겼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세번째 을사순국충혈지사
김봉학(金奉學)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출처:네이트
김봉학(金奉學) 【생몰년】 1871(고종 8)∼1905(광무 9).12.2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항일우국지사
1871(고종 8)∼1905(광무 9). 대한제국의 육군 상등병으로 항일우국지사이며 황해도 황주출신이다. 1895년 김하락(金河洛) 휘하의 경기도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군에 입대, 평양 진위대의 상등병으로 복무 중 부대가 서울로 복귀하자 시위대 제3대대 제2중대에 배속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하여 동지를 규합,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이 누설되어 실패하게 되자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비서원 수(煉書院丞)에 추증되고,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져 그 충절을 기렸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韓國痛史
출처:야후 오픈사전
작성자 : moonhyeyeon l 2004-03-09 11:35 작성 김봉학(金奉學) 1871.∼1905. 12. 2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청룡면(靑龍面)에서 태어났다. 1895년 10월 일제의 명성황후시해 만행이 일어나자 김하락(金河洛)이 경기도에서도 의병을 일으켰는데 김봉학은 그 휘하의 제2대 십장으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그 후 군대에 입대하여 평양진위대에서 근무하다가 뒤에 부대가 서울로 불려 올라오자 시위대 제3대대 2중대 3소대의 상등병(上等兵)으로 서울에 주둔하고 있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해서 국권을 침탈하고 이에 항거하던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 등이 로써 이에 항의하니 김봉학은 흐느껴 울면서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던 신하로서 순국함은 당연하다. 나 또한 군인으로써 6년이나 지내면서 나라를 지키지 못했으니 원수인 일제 무리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하였다. 김봉학은 동지들과 함께 한국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을 처단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일이 누설되어 실패하게 되었으므로 1905년 12월 2일 오후 5시경에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김봉학의 자결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보도 되어 국민들을 감격시켰으며, 분기케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126. 註ㆍ騎驢隨筆 70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1卷 586面 출처:독립기념관(http://www.independence.or.kr)
네번째 을사순국충혈지사
이상철 (한말 순국열사) [李相哲]
1876(고종 13)~1905. 12. 3.
한말의 순국열사.
대한제국 학부주사(學部主事)로 있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전·현직 관료들과 함께 을사조약반대상소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상소운동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 등이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주장하면서 자결하자, 그도 30세의 나이로 자결했다. 고종은 "충성의 울분이 격동하여 강개(慷慨)하게 생명을 버리니 그 뜻이 민망스럽고 그 절개가 가상하다"는 내용의 조서를 내리고, 학부협판(學部協辦)의 관직을 추증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상철(李相哲) 1876.∼1905. 12. 3
학부주사(主事)로 봉직하고 있던 중,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을사조약 반대운동이 실효가 없음을 보고 국민의 분기를 촉발하기 위하여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 등이 자결하여 순국하자 통분을 금하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12월 3일 독약을 마시고 〈자결〉로써 을사조약에 항의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겨우 30세 밖에 되지 않았다. 이상철이 순국할 때 노모(老母)가 계셨다고 하나 남은 자손이 없어서 지금은 그의 출생과 이력에 대하여 아무것도 밝히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당시 그의 자결소식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보도되어 국민들에게 충격과 분발을 주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중관(中寬)·문석(文錫), 호는 동은(東隱). 1879년(고종 16) 문과에 급제한 후,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을 거쳐 다음해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관직을 사퇴하고 봉화의 임당산(林塘山)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의 시행으로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안동·영양 등지를 중심으로 창의(倡義)한 김도현(金道鉉) 의진에 가담해 전방장으로 활약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처단을 촉구하는 상소문을 제출했다. 1910년 한일합병 소식을 듣자, "내가 을사 이후 지금까지 한가닥의 목숨을 구차하게 연장했으나 그도 본의가 아니었는데 지금 종사가 필경에 이 꼴이 되었으니 내 어찌 목숨을 유지해 감히 사람이로다 자처하겠는가"라 하고, 집밖에 좁다랗게 방 1칸을 마련해 그 안에서 생활했다. 그러던 중 이만도(李萬燾)의 순국 소식을 듣자, 선조의 사당과 묘에 참배한 후, 순국을 결심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일본경찰 4, 5명이 가족들에게 강제로 식사를 하도록 협박하자, "빨리 저놈들을 쫓아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나가서 찔러 죽이겠다"고 호령을 한 다음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한 후 그 자리에 앉아서 절명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중언(李中彦) 1850(철종 1)∼1910.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중관(仲寬)·소자(小字)·문석(文錫), 호는 동은(東隱). 경상북도 안동출신. 1879년(고종 16)문과에 급제한 뒤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1880년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1882년 정국이 혼란하자 봉화의 임당산(林塘山)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1895년 8월 일제에 의하여 명성황후시해가 자행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김도현(金道鉉)이 안동·영양 등지를 중심으로 창의하자 이에 가담하여 전방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하였으나 간신배들에 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집 밖에 좁다란 방 한칸을 마련하고 외부와 접촉을 끊고 때때로 을사조약 체결 때 상소하였던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고, 선조의 사당과 묘를 참배한 뒤 수십일 식음을 전폐하였다. 이무렵 일본경찰 몇명이 와서 음식을 먹도록 권하라고 식구들을 협박하자, 때마침 베개를 의지하고 졸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벼락 같은 호령을 하고 나서,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똑바로 앉아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자는 경실(敬實), 호는 회천(晦泉). 성품이 호협(豪俠)하지만, 학문에 전념하는 청렴한 선비로서, 전라북도 논산군 한양촌에 은거하고 있었다. 1910년 8월 한일합병이 되자, 일제가 일본 왕 메이지[明治]의 '은사금'(恩賜金)을 보내어 온갖 협박과 회유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방안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이학순은 조선의 일민(逸民)이다. 불행히도 병들고 늙은 나이에 나라가 망하고 인군이 욕을 보시는데, 한 번 싸우는 모계를 내지 못하고 또 한 번 죽는 절개를 세워보지 못했으니 그 죄 만 번 죽어 마땅하다. 의리상 원수 나라의 불의의 물건을 받지 못하겠다. 다시 나에게 강요하면 서산(西山)으로 들어가든가 동해로 나가겠다"고 완강히 거절했다. 여러 차례의 회유와 협박에 실패한 일제 헌병대는 그를 투옥시키고, 헌병대장이 그의 아들 내수(內修)·내준(來俊)에게 은사금을 받아가라고 달래자, 내준은 "내 머리로 일본 왕 머리를 바꾼다면 그것은 허락하겠지만, 돈을 받는 일은 할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이학순은 병보석으로 잠깐 석방된 기회를 이용하여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학순(李學純) 1843(헌종 9)∼1910. 한말의 순국지사.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실(敬實), 호는 회천(晦泉). 충청남도 논산출신.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고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恩賜金)을 보내자 온갖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대가 투옥시켰는데, 병보석으로 잠깐 석방된 기회를 이용, 음독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愼鏞廈〉
출처:엠파스>역사와인물>한국의인물
이현섭 (한말 열사) [李鉉燮]
1844. 10. 26 경북 안동~1910. 10. 25.
한말의 순절열사.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서규(瑞圭), 호는 우헌(愚軒). 1885년(고종 22) 성균관 진사시험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1895년 10월 일제가 명성황후를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하자, 통분을 금치 못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안동군 예안면(禮安面) 양평리(良平里)에 은거했다. 1910년 한일합병의 소식을 접한 10월 5일부터 식음을 전폐하자, 일제 군경이 와서 여러 가지로 힐난했다. 이에 "우리나라가 너희 나라에 무슨 원수가 있기에 임진년 병난에 화가 두 능에 미치고 갑오년 변에 국모를 시해하기까지 한 것이냐…… 내가 혼자서 천일(天日)을 돌리지는 못했지만, 어찌 차마 몸을 굽혀 욕을 보며 한 하늘 아래에서 살 것이냐"라고 꾸짖으니, 일제 군경이 '범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물러갔다. 며칠 후 울분을 이기지 못해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유저(遺著)로 〈우헌실기 愚軒實記〉 2권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현섭(李鉉燮) 1844(헌종 10)∼1910. 조선 말기의 순국지사.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서규(瑞圭), 호는 우헌(愚軒). 경상북도 군위출신. 진(軫)의 후손이다. 1885년(고종 22) 성균생원으로 관직에 나아갔다가, 1895년 일제가 민비를 시해하는 만행을 자행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여 관직을 사임, 안동군 예안면 양평리에 은거하였다. 1910년 국치의 소식을 듣고 음독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3). 〈愼鏞廈〉
출처:엠파스>역사와인물>한국의인물
홍범식 (한말 문신) [洪範植]
1871(고종 8) 충북 괴산~1910.
한말의 문신·순절열사.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우길(祐吉)이며, 아버지는 참판 승목(承穆)이다. 1888년(고종 25) 진사가 되었으며, 이후 내부주사·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했다. 1907년 태인군수로 있을 때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다른 군수들과 달리 적극적인 의병 보호책을 펴 선치자(善治者)로 도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했을 때, 군민들이 전(前) 군수 김우식(金宇植)이 강제로 국유화시킨 개간지들을 돌려달라고 탄원하자 토지를 반환해주어 군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910년 8월 25일 한일합병의 비보를 듣고 선산에 올라가 자결했다. 아들 명희(命熹)도 일제강점기에 민족운동가·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홍범식(洪範植) 1871(고종 8)∼1910.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 충청북도 괴산출생. 참판(參判) 승목(承穆)의 아들이다. 1888년(고종 25) 진사가 되었으며 1902년 내부주사(內部主事)·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였고 1907년 전라북도 태인군수에 부임하였다. 당시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하여 치열한 항일전투를 전개하고 있던 때로서 적극적으로 의병 보호에 힘써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게 하였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선산에 올라가 목매어 자결하였다. 그가 남긴 유서 5통은 일본경찰이 압수함으로써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승수(承?), 호는 회은(晦隱). 아버지는 세자시강원부수 진휘(進徽)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고, 동정심이 많아 불쌍한 사람을 보면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주었다고 한다. 중년에 여러 번 이사를 한 뒤 비안의 덕암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1910년 한일합병 소식을 듣자, 고향으로 가 여러 친척과 친지들을 찾아 작별을 고하고 선영에 배알한 뒤 집에 와 마당에 자리를 마련하고, 북쪽을 향해 4번 절한 뒤 단식으로 자결했다. 1911년 2월 22일에 장례를 지냈으며, 1951년 안동의 유지들이 사회장을 지내고 화산(花山)에 이장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유도발(柳道發) 1832(순조 32)∼1910. 순국지사.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승수(承?), 호는 회은(晦隱). 경상북도 안동출신. 세자시강원부수(世子侍講院副率) 진휘(進徽)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숨은 일화도 많이 남겼다. 중년에 여러 번 이사를 하였는데, 마침내 군위군 비안의 덕암리에 이사하자 스스로 회은이라 하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 중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의 옛집으로 돌아와 있다가, 9월에 전패(殿牌)를 헐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상의 묘를 배별하고 여러 친척들을 비롯하여 자손·친지들에게 작별을 알린 뒤, 집에 돌아와 마당에 자리를 마련하고 북쪽을 향하여 네번 절한 다음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자결하였다. 단식을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자지(自誌)·자명(自銘) 등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1951년 안동유지들이 사회장을 지내고 화산(花山)에 이장하였으며, 진안의 이산묘(餌山廟)에 모셨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3). 〈愼鏞廈〉
출처:엠파스>역사와인물>한국의인물
반하경 (한말 순국지사) [潘夏慶]
?~1910.
순국지사.
내시(內侍)로 승전색(承傳色)을 지냈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항의하여 사임하고 경기도 파주 교하면에 은거했다. 1910년 8월 한일합병에 분개하여 순국할 뜻을 적은 글을 품안에 간직하고 숙부인 홍지사(洪知事)를 찾아가 결별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품안에 간직했던 글을 노상에 펼쳐놓고 "내시와 외관(外官)이 귀함과 천함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역시 임금의 은혜를 받아 이미 수십 년을 살아 왔으며 이제 임금이 하정(下庭)했는데 내 어찌 따뜻한 방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하며 할복하여 순절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반하경(潘夏慶) ?∼1910. 순국지사. 고종 때의 내시(內侍)로서 승전색(承傳色)을 지내다가,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항의하여 사임하고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에 은거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통분을 누르지 못하여 남몰래 순국할 뜻을 써서 품안에 간직하고 작은아버지를 찾아가 결별을 고하고 돌아오다가 품안에 간직하였던 글을 펼쳐놓고 “내시와 외관(外官)이 천함과 귀함이 다르기는 하지만 나 역시 임금의 은혜를 받아 이미 수십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임금이 하정(下庭)하였으니 내 어찌 감히 따뜻한 방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 반문하면서 대로에서 할복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心石).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순절한 병선(秉璿)의 동생이다. 병선과 함께 큰아버지인 달수(達洙)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그뒤에는 근수(近洙)와 외할아버지에게 배웠다. 1888년(고종 25) 의정부의 천거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903년(광무 7) 고종이 홍문관서연관으로 임명했으나 친일파의 반대로 등용되지 못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해 11월 〈토오적문 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1906년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건립하여 많은 문인들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뒤 두문불출했다. 1912년 일본 헌병이 은사금(恩謝金)을 가져왔으나 거절했고, 일제가 경학원(經學院) 강사로 천거하자 거절한 뒤 일제를 규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저서에 〈학문삼요 學問三要〉·〈사례축식 四禮祝式〉·〈용학보의 庸學補疑〉 등이 있다. 1914년 영동 문충사(文忠祠)에 제향되었다. 1973년 대전역 앞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송병순(宋秉珣) 1839(헌종 5)∼1912. 순국지사.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心石). 충청남도 회덕출신.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참의 달수(達洙)와 근수(近洙)의 종질이며,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순절한 병선(秉璿)의 아우이다. 종형인 병선과 함께 큰아버지인 달수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하였으며, 달수의 사후에는 근수와 외할아버지의 지도를 받았다. 1888년(고종 25) 묘당의 천거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903년 학행이 뛰어나고 중망(衆望)을 지니고 있음을 듣고 고종이 홍문관서연관(弘文館書筵官)에 임명하였으나 친일파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뒤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세우고 많은 문인들을 지도, 계발하여 천리를 밝히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정력을 기울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송병선이 이의 파기를 위하여 활동하다가 순국하였음을 듣고, 옳은 길을 지켜 죽을 때라 하고 “은산철벽에 불타 버리지 않는 것은 오직 옥(玉)이다.” 하며 구국활동을 결심하였다. 그해 11월에 〈토오적문 討五賊文〉을 지어 전국유림에게 선포하여 민족정기의 앙양과 국권회복을 호소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나라를 위하는 충성과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순국하는 길밖에 없다.” 하고 그해 9월 5일 강당 뒤 서산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투신자결하고자 할 때 문인 김용호(金龍浩)가 뒤에서 껴안아 미수에 그치자 그뒤 두문불출하고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이때 영동군 양산의 일본 헌병대가 은사금을 가져오자 이를 질책하여 거절하였다. 1912년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강사에 임명하자 이를 거절하고, 대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결심,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였다. 1968년에 대통령표창,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15권의 문집과 《학문삼요 學問三要》·《사례축식 四禮祝式》·《용학보의 庸學補疑》 등이 있다. 1914년 병선의 사당인 영동의 문충사(文忠祠)에 병향되었으며, 1970년 문충사는 대전광역시 용운동으로 이전되었는데, 일명 용동서원(龍洞書院)이라고도 한다. 1973년에 대전역 앞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본관은 전주. 초명은 갑술(甲戌).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재(靜齋). 아버지는 봉선(鳳善)이다. 김관술(金觀述)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898년 남한산성·촉석루·황산대첩비 등 구국항전의 기상이 서린 유적지를 답사하고, 송병선(宋秉璿)·기우만(奇宇萬)·전우(田愚)·최익현(崔益鉉)·곽종석(郭鍾錫)·허유(許愈) 등을 방문했다. 그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입장에서 반개화·반일의식을 더욱 확고하게 견지했으며,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해낼 것을 결심했다.
1907년 8월 26일 임실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장성에서 기의(起義)한 기삼연(奇參衍) 의진과 통합하여 영광의 수록산에서 호남창의진(湖南倡義陣)을 편성했다. 기삼연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서석구(徐錫球)·김익중(金翼中)·전수용(全垂鏞)과 함께 종사(從事)로 활약했다. 그해 9월 고창의 일본병참기지를 습격하고, 진안의 우편취급소를 파괴한 뒤 용담 심원사(深源寺)로 퇴각했다. 이어 전라도와 경상도의 접경지대에서 활약하던 김동신(金東臣) 의진과 연합했으나 일본 군경의 내습을 받고 패하게 되자, 지리산 실상사 백장암으로 들어가 일단 의병을 해산한 뒤 광주로 내려가 기우만에게 몸을 잠시 의지했다. 1908년 1월 호남창의대장 기삼연이 순창의 복흥산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순국하자, 대장으로 추대되어 남원·전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접전하여 많은 타격을 주었다. 그뒤 의진을 재정비하여 진안읍을 점령했으나, 백마산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참패당했다. 그뒤에도 장수군청을 습격하는 등 항일전을 계속했지만,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1908년 임실에서 패하여 의진을 해산했다. 1911년 4월 밀사를 은밀히 일본으로 파견, 일왕을 주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 겨울 정찬석(鄭贊錫)·최제학(崔濟學)·이규진(李圭鎭)·안자정(安子精) 등 호남지역 지사들과 밀맹단(密盟團)을 조직했다. 1913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이듬해 순국했다. 의병활동중 남긴 진중일기가 〈정재선생호남창의일록〉으로 간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석용(李錫庸) 1878(고종 15)∼1914.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갑술(甲戌),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암(靜庵). 전라북도 임실출신. 승문박사(承文博士) 태환(泰煥)의 손자이며, 봉선(鳳善)의 아들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우리나라의 재정간섭을 강화하자, 1906년 임실·장수·진안·남원·함양·순창·곡성 등지에서 동지를 얻고 조정을 비롯하여 전국의 동포, 그리고 일본정부와 세계열강들에게 격문·통고문·규탄문·건의문 등을 선포하면서 민족의 주권확립에 노력하였다. 1907년 8월 우리나라 군대가 강제해산당하자, 같은 고향의 전해산(全海山)이 서신을 보내 함께 거의토적(擧義討賊)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때 기삼연(奇參衍)이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石水僧庵)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전해산과 더불어 종사 중 1인이 되었다. 그러나 기삼연의 의진에 입진하지 않고 독자적인 의진구축이 필요함을 절감, 뒤에 연합할 것을 기약하고 8월 26일 고향으로 가 상이암(上耳庵)과 황사현에서 재차 동지들과 창의계획을 숙의하였다. 이에 의진을 ‘의병창의동맹’이라 명명하고, 진용을 정비하여 선봉·중군·후군·참모·총지휘·연락·도로부장·보급·운량 등의 부서를 정한 뒤 9월 4일 진안 석전리에서 거병,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전해산을 참모에 기용하고, 박만화(朴萬華)·여운서(呂雲瑞)·김공실(金公實)들의 용장들을 각 부서에 임용하였다. 1907년 9월 12일 마이산(馬耳山)남쪽기슭의 용암(龍巖) 위에 설단제천(設壇祭天)하여 오로지 “왜인을 이 땅에서 몰아내라.”고 외쳤다. 13일에는 진안읍을 기습하여 적장에게 총상를 입혀 패주시킨 뒤 그들의 복장·양총·비단·문부(文簿) 등을 노획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또한, 우편소를 습격, 파괴하여 우편물을 소각하고, 전선을 모조리 끊었다. 16일에는 내원사(內源寺)골짜기에서 적병 10여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0월 8일 화암리 후방산(後方山)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일본군과의 병력 차이로 많은 의병을 잃고, 진안·용담·정천·임실·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남원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고, 11월 14일 성수산(聖壽山)에서 의진을 재편하였다.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하였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武戌村)에서 적 2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3월 5일 진안 시동(矢洞), 3월 14일 마근현(麻根峴), 3월 17일 수류산(殊流山), 3월 27일 관촌역(館村驛), 4월 30일 가수리(嘉水里)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휘하의 봉수·덕홍 등 승려와 박철규·허천석 등 소년의병이 전사하였다. 1909년 9월 의진해산 뒤 잠행 유랑하던 중 1912년 성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혀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의병활동에 관한 진중일기를 남겨 《정재선생호남창의일록 靜齋先生湖南脹義日錄》이 간행되었다.
1909년12월 22일서울의 종현천주교회당(鍾峴天主敎會堂, 현 명동성당)에서 그달 17일에 사망한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 추도식이 열렸다. 이재명은 교회당 앞길에 변장을 하고 잠입한 뒤 이 자리에 참석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10년 사형 선고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당했으며, 이 사건으로 이동수, 조창호, 김정익 등 11명의 관련자들도 중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백헌(伯憲), 호는 호운(湖雲). 아버지는 영의정 순목(淳穆)이며, 동생이 갑신정변의 주모자 영식(英植)이다. 교관(敎官) 순경(淳敬)에게 입양되었다. 1866년(고종 3)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검열·수찬·집의·동부승지·여주목사·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884년 아버지가 사복에 착수의(窄袖衣), 관복에 흑단령(黑團領)을 착용하게 하는 의복제도의 개정을 반대하다가 삭탈관직되자 그도 사직했다. 그해 10월 동생 영식이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살해되자 아버지는 자살했고 그도 자살을 기도했으나 출계(出系)한 사람은 연좌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여 여주관아에 자수했다. 1894년 개화파정권이 들어선 뒤 관작이 복구되었다. 1895년 춘천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해 8월 일제가 민비를 학살하고 친일 개화파정권이 단발령을 내리자 음독자결을 하려 했으나 단발령이 취소되고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그만두었다. 1904년 해주관찰사·의정부찬정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사직상소에 직함을 쓰지 않고 미사신(未死臣)이라고 써 죄인임을 자처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처사(處士)의 예로 장사지낼 것을 당부하고 음독자결했다. 이는 을사조약 이후 최초의 자결이었다. 참정대신(參政大臣)에 추증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최초의 을사순국충혈지사
충정공(忠正公) 민영환 (조선 문신) [閔泳煥]
1861(철종 12) 서울~1905(광무 9).11.29
한말의 정치가.
민영환 (閔泳煥)
민씨정권의 세도 속에서 관직에 진출했고, 2차례의 해외여행으로 견문을 넓혀 왕에게 개혁정책을 권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운명이 기울자 자결로 일제에 항거했다. 본관은 여흥.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출신 및 초기 관직생활
아버지는 선혜청당상을 지낸 겸호(謙鎬)이며, 뒤에 큰아버지인 태호(台鎬)에게 입양되었다.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이 되었고, 이듬해 정시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정자·검열·수찬·장령 등을 거쳐, 1881년(고종 18)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대사성과 도승지를 지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생부 겸호가 피살되자 벼슬을 내놓고 3년상을 치렀다. 그뒤 도승지·이조참판·한성우윤·예조판서·형조판서·한성부윤·독판내무부사 등을 지냈다. 1895년 8월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민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부임하지 못했다. 친러파가 축출되고 친일적 경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낙향해 두문불출했다.
외교활동
1896년 특명전권대사로 학부대신 윤치호(尹致昊), 2등서기관 김득련(金得鍊), 3등서기관 김도일(金道一) 등과 함께 4월 1일 인천을 출발해 상하이·나가사키·도쿄·밴쿠버·뉴욕 등을 거쳐 유럽 대륙의 신문명을 보고 5월 20일 모스크바에 도착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뒤 약 3개월 동안 러시아 각지를 둘러보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10월 21일 귀국했는데, 그의 여행은 독립신문에 그 내용이 소개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1897년(광무 1) 1월에는 다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가 되어 3등서기관 이기(李琦), 서기 김조현(金祚鉉)·김병옥(金秉玉)·손병균(孫炳均) 등과 함께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했다. 도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들러 니콜라이 황제에게 국서와 고종의 밀서를 전달했다. 2차례에 걸친 해외여행을 통해 유럽의 제도를 모방해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을 신장해 국가의 근본을 공고히 할 것을 여러 번 고종에게 건의했는데, 그중 군제에 관한 건의가 받아들여져 원수부(元帥府)에 의한 육군통솔이 이루어졌다. 그뒤 서재필 등이 조직한 독립협회를 측면에서 후원하다 원로대신들의 무고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참정대신·탁지부대신·장례원경·헌병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며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太極章)을 받기도 했다. 1904년 이후 내부·학부 대신을 역임했으나, 일제의 침략을 맹렬히 반대하다가 시종무관장이라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1905년에는 참정·외부 대신을 역임했으나 다시 시종무관장이 되어 순국할 때까지 그 직위에 머물렀다.
당시 국내정세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대한제국정부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고, 그해 8월에는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해 재무·외교 부문에 고문정치를 시작했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한국에서의 정치·경제·군사 상의 우월권을 인정받은 상태에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이 체결되자 원임의정대신(原任議政大臣)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조약에 찬동한 5적을 성토하고 조약의 파기를 주장했으나 조병세의 체포로 실패했다. 이어 2차 상소를 전개했으나 나라의 운이 이미 다했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해 국민을 각성시킬 목적으로 그해 11월 13일 오전 6시경 2,000만 동포와 고종 및 주한 외국사절에게 보내는 3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그의 자결 소식이 알려지자 조병세·김봉학(金奉學)·홍만식(洪萬植)·이상철(李相喆) 등이 그의 뒤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했다. 저서로는 〈민충정공유고 閔忠正公遺稿〉·〈해천추범 海天秋帆〉·〈사구속초 使歐續草〉·〈천일책 千一策〉 등이 있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두번째 을사순국충혈지사
충정공(忠正公) 조병세 (한말 문신) [趙秉世]
1827(순조 27)~1905.11.30
한말의 문신·순국열사.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 아버지는 홍천현감 유순(有淳)이다.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에 급제, 사관(史官)이 되어 1864년(고종 1) 실록청 도청낭청(都廳郎廳)으로서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874년 함경도암행어사, 1877년 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호조참판에 임명되고 동지사은부사(冬至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한성부좌윤을 거쳐 승지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의주부윤, 다시 대사헌을 지냈다. 1887년 공조판서를 거쳐 1889년 우의정에 오르고 1893년 2월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후 정치적 변동이 크게 일어나자 잠시 정계를 떠나 가평에 은퇴했다. 1896년에는 총호사(摠護使)가 되었고 민비 국장 때 만장제술관(輓章製述官)으로 참여했으며 뒤에 다시 원로대신으로서 중추원의장과 의정부의정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으로 활동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하여 79세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상경하여, 을사5적의 처형을 주청(奏請)하려고 했으나 처음부터 일본군의 방해로 고종과의 면담이 거절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1월 26일 심상훈(沈相薰)·민영환(閔泳煥)·이근명(李根命) 등과 함께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와 5적을 처형하고 새로 충량(忠良)한 사람을 뽑아서 외부대신에 임명하고 각국 공사와 협의하여 5조약을 파기할 것을 상소했다. 또한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 및 5개국 공사에게 각각 글을 보내어 독립과 영토보존의 원조를 요청하고 조약의 부당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각국 공사들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종도 듣지 않고 다만 물러가라고 하자 다시 대한문(大韓門) 앞에서 고종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궁중을 물러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거적을 깔고 계속해서 을사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 일본헌병에 강제연행되었다. 이후 민영환이 대신 소두(疏頭)가 되었으나 민영환도 잡혀 평리원(平理院)에 연금되었다가 특명으로 풀려난 뒤 비분을 참지 못해 29일 자결했다. 가평 향제(鄕第)에 강제 추방되었으나 30일 다시 서울로 돌아와 표훈원(表勳院)에서 여러 사람과 다시 상소했다. 또다시 일본군이 가마에 태워서 강제 추방하자 가마 안에서 음독하여 조카 민희(民熙)의 집에 당도하여 죽었다. 이때 각국 공사관에 독립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도록 요청하는 투서와 함께 국민들에게는 충의로서 독립의 기초를 다질 것을 촉구하는 유서를 남겼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세번째 을사순국충혈지사
김봉학(金奉學)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출처:네이트
김봉학(金奉學) 【생몰년】 1871(고종 8)∼1905(광무 9).12.2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항일우국지사
1871(고종 8)∼1905(광무 9). 대한제국의 육군 상등병으로 항일우국지사이며 황해도 황주출신이다. 1895년 김하락(金河洛) 휘하의 경기도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군에 입대, 평양 진위대의 상등병으로 복무 중 부대가 서울로 복귀하자 시위대 제3대대 제2중대에 배속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하여 동지를 규합,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이 누설되어 실패하게 되자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비서원 수(煉書院丞)에 추증되고,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져 그 충절을 기렸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韓國痛史
출처:야후 오픈사전
작성자 : moonhyeyeon l 2004-03-09 11:35 작성 김봉학(金奉學) 1871.∼1905. 12. 2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청룡면(靑龍面)에서 태어났다. 1895년 10월 일제의 명성황후시해 만행이 일어나자 김하락(金河洛)이 경기도에서도 의병을 일으켰는데 김봉학은 그 휘하의 제2대 십장으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그 후 군대에 입대하여 평양진위대에서 근무하다가 뒤에 부대가 서울로 불려 올라오자 시위대 제3대대 2중대 3소대의 상등병(上等兵)으로 서울에 주둔하고 있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해서 국권을 침탈하고 이에 항거하던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 등이 로써 이에 항의하니 김봉학은 흐느껴 울면서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던 신하로서 순국함은 당연하다. 나 또한 군인으로써 6년이나 지내면서 나라를 지키지 못했으니 원수인 일제 무리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하였다. 김봉학은 동지들과 함께 한국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을 처단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일이 누설되어 실패하게 되었으므로 1905년 12월 2일 오후 5시경에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김봉학의 자결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보도 되어 국민들을 감격시켰으며, 분기케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126. 註ㆍ騎驢隨筆 70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1卷 586面 출처:독립기념관(http://www.independence.or.kr)
네번째 을사순국충혈지사
이상철 (한말 순국열사) [李相哲]
1876(고종 13)~1905. 12. 3.
한말의 순국열사.
대한제국 학부주사(學部主事)로 있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전·현직 관료들과 함께 을사조약반대상소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상소운동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 등이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주장하면서 자결하자, 그도 30세의 나이로 자결했다. 고종은 "충성의 울분이 격동하여 강개(慷慨)하게 생명을 버리니 그 뜻이 민망스럽고 그 절개가 가상하다"는 내용의 조서를 내리고, 학부협판(學部協辦)의 관직을 추증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상철(李相哲) 1876.∼1905. 12. 3
학부주사(主事)로 봉직하고 있던 중,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을사조약 반대운동이 실효가 없음을 보고 국민의 분기를 촉발하기 위하여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 등이 자결하여 순국하자 통분을 금하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12월 3일 독약을 마시고 〈자결〉로써 을사조약에 항의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겨우 30세 밖에 되지 않았다. 이상철이 순국할 때 노모(老母)가 계셨다고 하나 남은 자손이 없어서 지금은 그의 출생과 이력에 대하여 아무것도 밝히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당시 그의 자결소식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보도되어 국민들에게 충격과 분발을 주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중관(中寬)·문석(文錫), 호는 동은(東隱). 1879년(고종 16) 문과에 급제한 후,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을 거쳐 다음해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관직을 사퇴하고 봉화의 임당산(林塘山)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의 시행으로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안동·영양 등지를 중심으로 창의(倡義)한 김도현(金道鉉) 의진에 가담해 전방장으로 활약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처단을 촉구하는 상소문을 제출했다. 1910년 한일합병 소식을 듣자, "내가 을사 이후 지금까지 한가닥의 목숨을 구차하게 연장했으나 그도 본의가 아니었는데 지금 종사가 필경에 이 꼴이 되었으니 내 어찌 목숨을 유지해 감히 사람이로다 자처하겠는가"라 하고, 집밖에 좁다랗게 방 1칸을 마련해 그 안에서 생활했다. 그러던 중 이만도(李萬燾)의 순국 소식을 듣자, 선조의 사당과 묘에 참배한 후, 순국을 결심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일본경찰 4, 5명이 가족들에게 강제로 식사를 하도록 협박하자, "빨리 저놈들을 쫓아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나가서 찔러 죽이겠다"고 호령을 한 다음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한 후 그 자리에 앉아서 절명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중언(李中彦) 1850(철종 1)∼1910.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중관(仲寬)·소자(小字)·문석(文錫), 호는 동은(東隱). 경상북도 안동출신. 1879년(고종 16)문과에 급제한 뒤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1880년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1882년 정국이 혼란하자 봉화의 임당산(林塘山)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1895년 8월 일제에 의하여 명성황후시해가 자행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김도현(金道鉉)이 안동·영양 등지를 중심으로 창의하자 이에 가담하여 전방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하였으나 간신배들에 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집 밖에 좁다란 방 한칸을 마련하고 외부와 접촉을 끊고 때때로 을사조약 체결 때 상소하였던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고, 선조의 사당과 묘를 참배한 뒤 수십일 식음을 전폐하였다. 이무렵 일본경찰 몇명이 와서 음식을 먹도록 권하라고 식구들을 협박하자, 때마침 베개를 의지하고 졸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벼락 같은 호령을 하고 나서,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똑바로 앉아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자는 경실(敬實), 호는 회천(晦泉). 성품이 호협(豪俠)하지만, 학문에 전념하는 청렴한 선비로서, 전라북도 논산군 한양촌에 은거하고 있었다. 1910년 8월 한일합병이 되자, 일제가 일본 왕 메이지[明治]의 '은사금'(恩賜金)을 보내어 온갖 협박과 회유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방안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이학순은 조선의 일민(逸民)이다. 불행히도 병들고 늙은 나이에 나라가 망하고 인군이 욕을 보시는데, 한 번 싸우는 모계를 내지 못하고 또 한 번 죽는 절개를 세워보지 못했으니 그 죄 만 번 죽어 마땅하다. 의리상 원수 나라의 불의의 물건을 받지 못하겠다. 다시 나에게 강요하면 서산(西山)으로 들어가든가 동해로 나가겠다"고 완강히 거절했다. 여러 차례의 회유와 협박에 실패한 일제 헌병대는 그를 투옥시키고, 헌병대장이 그의 아들 내수(內修)·내준(來俊)에게 은사금을 받아가라고 달래자, 내준은 "내 머리로 일본 왕 머리를 바꾼다면 그것은 허락하겠지만, 돈을 받는 일은 할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이학순은 병보석으로 잠깐 석방된 기회를 이용하여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학순(李學純) 1843(헌종 9)∼1910. 한말의 순국지사.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실(敬實), 호는 회천(晦泉). 충청남도 논산출신.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고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恩賜金)을 보내자 온갖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대가 투옥시켰는데, 병보석으로 잠깐 석방된 기회를 이용, 음독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愼鏞廈〉
출처:엠파스>역사와인물>한국의인물
이현섭 (한말 열사) [李鉉燮]
1844. 10. 26 경북 안동~1910. 10. 25.
한말의 순절열사.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서규(瑞圭), 호는 우헌(愚軒). 1885년(고종 22) 성균관 진사시험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1895년 10월 일제가 명성황후를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하자, 통분을 금치 못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안동군 예안면(禮安面) 양평리(良平里)에 은거했다. 1910년 한일합병의 소식을 접한 10월 5일부터 식음을 전폐하자, 일제 군경이 와서 여러 가지로 힐난했다. 이에 "우리나라가 너희 나라에 무슨 원수가 있기에 임진년 병난에 화가 두 능에 미치고 갑오년 변에 국모를 시해하기까지 한 것이냐…… 내가 혼자서 천일(天日)을 돌리지는 못했지만, 어찌 차마 몸을 굽혀 욕을 보며 한 하늘 아래에서 살 것이냐"라고 꾸짖으니, 일제 군경이 '범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물러갔다. 며칠 후 울분을 이기지 못해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유저(遺著)로 〈우헌실기 愚軒實記〉 2권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현섭(李鉉燮) 1844(헌종 10)∼1910. 조선 말기의 순국지사.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서규(瑞圭), 호는 우헌(愚軒). 경상북도 군위출신. 진(軫)의 후손이다. 1885년(고종 22) 성균생원으로 관직에 나아갔다가, 1895년 일제가 민비를 시해하는 만행을 자행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여 관직을 사임, 안동군 예안면 양평리에 은거하였다. 1910년 국치의 소식을 듣고 음독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3). 〈愼鏞廈〉
출처:엠파스>역사와인물>한국의인물
홍범식 (한말 문신) [洪範植]
1871(고종 8) 충북 괴산~1910.
한말의 문신·순절열사.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우길(祐吉)이며, 아버지는 참판 승목(承穆)이다. 1888년(고종 25) 진사가 되었으며, 이후 내부주사·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했다. 1907년 태인군수로 있을 때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다른 군수들과 달리 적극적인 의병 보호책을 펴 선치자(善治者)로 도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했을 때, 군민들이 전(前) 군수 김우식(金宇植)이 강제로 국유화시킨 개간지들을 돌려달라고 탄원하자 토지를 반환해주어 군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910년 8월 25일 한일합병의 비보를 듣고 선산에 올라가 자결했다. 아들 명희(命熹)도 일제강점기에 민족운동가·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홍범식(洪範植) 1871(고종 8)∼1910.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 충청북도 괴산출생. 참판(參判) 승목(承穆)의 아들이다. 1888년(고종 25) 진사가 되었으며 1902년 내부주사(內部主事)·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였고 1907년 전라북도 태인군수에 부임하였다. 당시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하여 치열한 항일전투를 전개하고 있던 때로서 적극적으로 의병 보호에 힘써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게 하였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선산에 올라가 목매어 자결하였다. 그가 남긴 유서 5통은 일본경찰이 압수함으로써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승수(承?), 호는 회은(晦隱). 아버지는 세자시강원부수 진휘(進徽)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고, 동정심이 많아 불쌍한 사람을 보면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주었다고 한다. 중년에 여러 번 이사를 한 뒤 비안의 덕암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1910년 한일합병 소식을 듣자, 고향으로 가 여러 친척과 친지들을 찾아 작별을 고하고 선영에 배알한 뒤 집에 와 마당에 자리를 마련하고, 북쪽을 향해 4번 절한 뒤 단식으로 자결했다. 1911년 2월 22일에 장례를 지냈으며, 1951년 안동의 유지들이 사회장을 지내고 화산(花山)에 이장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유도발(柳道發) 1832(순조 32)∼1910. 순국지사.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승수(承?), 호는 회은(晦隱). 경상북도 안동출신. 세자시강원부수(世子侍講院副率) 진휘(進徽)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숨은 일화도 많이 남겼다. 중년에 여러 번 이사를 하였는데, 마침내 군위군 비안의 덕암리에 이사하자 스스로 회은이라 하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 중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의 옛집으로 돌아와 있다가, 9월에 전패(殿牌)를 헐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상의 묘를 배별하고 여러 친척들을 비롯하여 자손·친지들에게 작별을 알린 뒤, 집에 돌아와 마당에 자리를 마련하고 북쪽을 향하여 네번 절한 다음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자결하였다. 단식을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자지(自誌)·자명(自銘) 등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1951년 안동유지들이 사회장을 지내고 화산(花山)에 이장하였으며, 진안의 이산묘(餌山廟)에 모셨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3). 〈愼鏞廈〉
출처:엠파스>역사와인물>한국의인물
반하경 (한말 순국지사) [潘夏慶]
?~1910.
순국지사.
내시(內侍)로 승전색(承傳色)을 지냈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항의하여 사임하고 경기도 파주 교하면에 은거했다. 1910년 8월 한일합병에 분개하여 순국할 뜻을 적은 글을 품안에 간직하고 숙부인 홍지사(洪知事)를 찾아가 결별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품안에 간직했던 글을 노상에 펼쳐놓고 "내시와 외관(外官)이 귀함과 천함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역시 임금의 은혜를 받아 이미 수십 년을 살아 왔으며 이제 임금이 하정(下庭)했는데 내 어찌 따뜻한 방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하며 할복하여 순절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반하경(潘夏慶) ?∼1910. 순국지사. 고종 때의 내시(內侍)로서 승전색(承傳色)을 지내다가,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항의하여 사임하고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에 은거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통분을 누르지 못하여 남몰래 순국할 뜻을 써서 품안에 간직하고 작은아버지를 찾아가 결별을 고하고 돌아오다가 품안에 간직하였던 글을 펼쳐놓고 “내시와 외관(外官)이 천함과 귀함이 다르기는 하지만 나 역시 임금의 은혜를 받아 이미 수십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임금이 하정(下庭)하였으니 내 어찌 감히 따뜻한 방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 반문하면서 대로에서 할복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心石).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순절한 병선(秉璿)의 동생이다. 병선과 함께 큰아버지인 달수(達洙)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그뒤에는 근수(近洙)와 외할아버지에게 배웠다. 1888년(고종 25) 의정부의 천거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903년(광무 7) 고종이 홍문관서연관으로 임명했으나 친일파의 반대로 등용되지 못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해 11월 〈토오적문 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1906년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건립하여 많은 문인들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뒤 두문불출했다. 1912년 일본 헌병이 은사금(恩謝金)을 가져왔으나 거절했고, 일제가 경학원(經學院) 강사로 천거하자 거절한 뒤 일제를 규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저서에 〈학문삼요 學問三要〉·〈사례축식 四禮祝式〉·〈용학보의 庸學補疑〉 등이 있다. 1914년 영동 문충사(文忠祠)에 제향되었다. 1973년 대전역 앞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송병순(宋秉珣) 1839(헌종 5)∼1912. 순국지사.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心石). 충청남도 회덕출신.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참의 달수(達洙)와 근수(近洙)의 종질이며,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순절한 병선(秉璿)의 아우이다. 종형인 병선과 함께 큰아버지인 달수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하였으며, 달수의 사후에는 근수와 외할아버지의 지도를 받았다. 1888년(고종 25) 묘당의 천거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903년 학행이 뛰어나고 중망(衆望)을 지니고 있음을 듣고 고종이 홍문관서연관(弘文館書筵官)에 임명하였으나 친일파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뒤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세우고 많은 문인들을 지도, 계발하여 천리를 밝히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정력을 기울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송병선이 이의 파기를 위하여 활동하다가 순국하였음을 듣고, 옳은 길을 지켜 죽을 때라 하고 “은산철벽에 불타 버리지 않는 것은 오직 옥(玉)이다.” 하며 구국활동을 결심하였다. 그해 11월에 〈토오적문 討五賊文〉을 지어 전국유림에게 선포하여 민족정기의 앙양과 국권회복을 호소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나라를 위하는 충성과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순국하는 길밖에 없다.” 하고 그해 9월 5일 강당 뒤 서산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투신자결하고자 할 때 문인 김용호(金龍浩)가 뒤에서 껴안아 미수에 그치자 그뒤 두문불출하고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이때 영동군 양산의 일본 헌병대가 은사금을 가져오자 이를 질책하여 거절하였다. 1912년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강사에 임명하자 이를 거절하고, 대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결심,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였다. 1968년에 대통령표창,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15권의 문집과 《학문삼요 學問三要》·《사례축식 四禮祝式》·《용학보의 庸學補疑》 등이 있다. 1914년 병선의 사당인 영동의 문충사(文忠祠)에 병향되었으며, 1970년 문충사는 대전광역시 용운동으로 이전되었는데, 일명 용동서원(龍洞書院)이라고도 한다. 1973년에 대전역 앞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본관은 전주. 초명은 갑술(甲戌).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재(靜齋). 아버지는 봉선(鳳善)이다. 김관술(金觀述)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898년 남한산성·촉석루·황산대첩비 등 구국항전의 기상이 서린 유적지를 답사하고, 송병선(宋秉璿)·기우만(奇宇萬)·전우(田愚)·최익현(崔益鉉)·곽종석(郭鍾錫)·허유(許愈) 등을 방문했다. 그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입장에서 반개화·반일의식을 더욱 확고하게 견지했으며,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해낼 것을 결심했다.
1907년 8월 26일 임실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장성에서 기의(起義)한 기삼연(奇參衍) 의진과 통합하여 영광의 수록산에서 호남창의진(湖南倡義陣)을 편성했다. 기삼연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서석구(徐錫球)·김익중(金翼中)·전수용(全垂鏞)과 함께 종사(從事)로 활약했다. 그해 9월 고창의 일본병참기지를 습격하고, 진안의 우편취급소를 파괴한 뒤 용담 심원사(深源寺)로 퇴각했다. 이어 전라도와 경상도의 접경지대에서 활약하던 김동신(金東臣) 의진과 연합했으나 일본 군경의 내습을 받고 패하게 되자, 지리산 실상사 백장암으로 들어가 일단 의병을 해산한 뒤 광주로 내려가 기우만에게 몸을 잠시 의지했다. 1908년 1월 호남창의대장 기삼연이 순창의 복흥산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순국하자, 대장으로 추대되어 남원·전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접전하여 많은 타격을 주었다. 그뒤 의진을 재정비하여 진안읍을 점령했으나, 백마산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참패당했다. 그뒤에도 장수군청을 습격하는 등 항일전을 계속했지만,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1908년 임실에서 패하여 의진을 해산했다. 1911년 4월 밀사를 은밀히 일본으로 파견, 일왕을 주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 겨울 정찬석(鄭贊錫)·최제학(崔濟學)·이규진(李圭鎭)·안자정(安子精) 등 호남지역 지사들과 밀맹단(密盟團)을 조직했다. 1913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이듬해 순국했다. 의병활동중 남긴 진중일기가 〈정재선생호남창의일록〉으로 간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석용(李錫庸) 1878(고종 15)∼1914.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갑술(甲戌),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암(靜庵). 전라북도 임실출신. 승문박사(承文博士) 태환(泰煥)의 손자이며, 봉선(鳳善)의 아들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우리나라의 재정간섭을 강화하자, 1906년 임실·장수·진안·남원·함양·순창·곡성 등지에서 동지를 얻고 조정을 비롯하여 전국의 동포, 그리고 일본정부와 세계열강들에게 격문·통고문·규탄문·건의문 등을 선포하면서 민족의 주권확립에 노력하였다. 1907년 8월 우리나라 군대가 강제해산당하자, 같은 고향의 전해산(全海山)이 서신을 보내 함께 거의토적(擧義討賊)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때 기삼연(奇參衍)이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石水僧庵)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전해산과 더불어 종사 중 1인이 되었다. 그러나 기삼연의 의진에 입진하지 않고 독자적인 의진구축이 필요함을 절감, 뒤에 연합할 것을 기약하고 8월 26일 고향으로 가 상이암(上耳庵)과 황사현에서 재차 동지들과 창의계획을 숙의하였다. 이에 의진을 ‘의병창의동맹’이라 명명하고, 진용을 정비하여 선봉·중군·후군·참모·총지휘·연락·도로부장·보급·운량 등의 부서를 정한 뒤 9월 4일 진안 석전리에서 거병,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전해산을 참모에 기용하고, 박만화(朴萬華)·여운서(呂雲瑞)·김공실(金公實)들의 용장들을 각 부서에 임용하였다. 1907년 9월 12일 마이산(馬耳山)남쪽기슭의 용암(龍巖) 위에 설단제천(設壇祭天)하여 오로지 “왜인을 이 땅에서 몰아내라.”고 외쳤다. 13일에는 진안읍을 기습하여 적장에게 총상를 입혀 패주시킨 뒤 그들의 복장·양총·비단·문부(文簿) 등을 노획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또한, 우편소를 습격, 파괴하여 우편물을 소각하고, 전선을 모조리 끊었다. 16일에는 내원사(內源寺)골짜기에서 적병 10여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0월 8일 화암리 후방산(後方山)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일본군과의 병력 차이로 많은 의병을 잃고, 진안·용담·정천·임실·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남원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고, 11월 14일 성수산(聖壽山)에서 의진을 재편하였다.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하였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武戌村)에서 적 2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3월 5일 진안 시동(矢洞), 3월 14일 마근현(麻根峴), 3월 17일 수류산(殊流山), 3월 27일 관촌역(館村驛), 4월 30일 가수리(嘉水里)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휘하의 봉수·덕홍 등 승려와 박철규·허천석 등 소년의병이 전사하였다. 1909년 9월 의진해산 뒤 잠행 유랑하던 중 1912년 성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혀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의병활동에 관한 진중일기를 남겨 《정재선생호남창의일록 靜齋先生湖南脹義日錄》이 간행되었다.
1909년12월 22일서울의 종현천주교회당(鍾峴天主敎會堂, 현 명동성당)에서 그달 17일에 사망한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 추도식이 열렸다. 이재명은 교회당 앞길에 변장을 하고 잠입한 뒤 이 자리에 참석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10년 사형 선고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당했으며, 이 사건으로 이동수, 조창호, 김정익 등 11명의 관련자들도 중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