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分數)의 교훈
임병식 rbs1144@daum.net
분수를 생각하다가 문득 <야서지혼(野鼠之婚>을 떠올린다. 이 말은 더러 유유상종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지은이의 의도를 더듬어 보면 ‘분수를 지키라’라는 뜻에 더 가깝다. 글을 쓴 이는 숙종과 영조연간을 산 홍만종(洪萬宗1643-1722) 선생이다. 순오지(旬五志)에다 ‘두더지’ 혼인 이야기를 썼다.
우선, 야생동물을 등장시킨게 흥미를 끈다. 이야기 즉슨, 땅속에서만 사는 두더지가 자기 자식만은 어두운 곳에 살지 않고 햇빛이 드는 광명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었다. 궁리끝에 하늘을 찾아갔다. “제 아들과 혼인을 해주십시오.” 그런데 정중히 거절한다. 자기가 높은 곳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해와 달에 비해서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해와 달에게 찾아가라고 한다.
해와 달에게 찾아가 부탁하니 역시 거절을 한다. 자기보다 힘이 센 건 구름이라면서 구름앞에서는 어쩔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구름을 찾아가니 그 역시 자기는 바람 앞에서는 무력하다고 바람을 소개한다.
그 역시도 자기는 아닌 것 같다며 자기가 이기지 못하는 바위를 소개한다.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여러곳을 거쳤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여기고 바위를 찾아간다. 한데 난색을 표한다. 자기는 아니라면서 비록 자기가 한곳에 굳건히 서있긴 하지만 땅을 파는 두더지 앞에서는 맥을 못춘다는 것이다. 한쪽을 허물어 내리면 어쩔 수 없이 균형을 잃고 쓰러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니 자기는 두더지를 이기지 못한다고 한다.
이 예화를 두고 생각해 본다. 말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일까. 허황된 생각을 말고 분수를 지키라는 따끔한 충고가 아닐까. 살면서 수분(守分)을 하라는 것이 아닐까.
또 다른 예시로서 전래되어오는 속담에도 이 분수에 대해 이르는 말이 더러 있다. 예건대,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 ‘송충이는 솔잎만 먹어야지 갈잎을 먹으며 죽는다’. ‘누울자리 보고 발 뻗어라’.’ ‘문자도 모르는 놈이 인(印) 위조한다.’ ‘뱁새가 활새 걸음 쫓아가면 가랑이 찢어진다.’ 등등.
분명,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작금에 우리는 통치자가 벌려놓은 내란의 후유증때문에 미증류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 바람에 다른 나라는 자국의 부국강병을 위해 불철주야 매진을 하는데 우리만 그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고 있다.
이런 사태를 두고 외국의 호사가들은 가십을 쏟아내고 있다. 게 중에는 진정어린 충언도 섞여 있긴 하지만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몇 마디씩 쏟아 놓는다. 이런 상황을 두고 안타까움을 표시해주는 건 좋은데 서로 경쟁하는 처지에 그런 말들이 마냥 좋게만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어쨌든 우리가 감수해야할 몫이다. 애초에 선택을 잘못한 것이니까. 수년 전을 회상해볼 때, 한갓 군소리로 하나마나한 말지만 당시 선택을 당최 잘못한 업보가 아닌가 한다. 오늘날 국격을 크게 손상시키고 나라경제를 파탄으로 내 몬 통치자가 후보시절 열차 의자에 신발을 신은 채로 발을 올려놓은 걸 보았을 때, 알아보았어야 했다.
그때 놓쳤다면 인수위시절 국책사업으로 이미 확정된 양평 고속도로를 느닷없이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어 놓을 때도 경고를 줄 기회는 있었다. 그러는 한편, 국민을 하찮게 보고서 전일에 과음한 탓에 제시간에 출근을 못하자 빈차를 내보내 출근한양 위장할 때 도 정신 차리게 할 기회는 있었다. 그런데, 관대하여 별일없는 양 넘기고 말았다.
이 정도면 관용이 지나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아무일 없는양 넘긴 것은 둘 중 하나다. 한번 함양미달의 대통령을 뽑았기 때문에 자포자기를 한 것이 아니면, 국민의 하해와 같은 야량 때문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국민적 강력한 경고가 있어야 했다. 그것을 못한 바람에 업보로서 가당치 않는 계엄선포를 하도록 만들어 국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불면증과 소화불량으로 나날을 지샌다.
이 엄동설한에 젊은 청년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차가운 아스팔트 도로에서 날밤을 세우고 있어 안타깝다. 근간에는 혹한이 극심하게 몰아쳐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데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얉은 은박지를 뒤집어쓰고 무언의 시위 중이다. 이 무슨 생고생이며 눈물나는 광경인가.
그런데도 정치권, 반대파와 추종자들은 그런 사정에는 애써 외면하면서 대통령을 지킨다며 목소리을 높이고 있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 행동인지 묻고 싶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생각해 본다. 300년 전 살다간 ‘두더지’ 글을 쓴 홍만종선생은 오늘의 상황을 예견한 것일까. 그리하여 미리 경고를 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 소름마저 돋는다. 선생이 이를 지켜본다면 무어라 할까. 혹시 이런 말을 하면서 질책하지 않을까.
“내가 뭐라 했는가. 직접적으로 분수를 지키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알아듣게 이르지 않았느냐.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턱없이 욕심내지 말고 자기 위치에서 감당할 만한 것을 선택하라고.” 그러면서 과욕을 부리더니 “꼴 한번 좋다” 하지 않을까.
사람에게는 자기가 짊어 질만한 합당한 짐이 있다. 그 무게를 넘어서면 쓰러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의 통치자는 애초에 감당하지 못할 직을 탐낸 것이 아닌가 한다. 한 때 눈치 보지 않고 부정비리를 척결하면서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결기를 보여주어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나, 돌이켜 보면 그 말은 한낫 가식이었던가. 한때의 지지를 등에 업고 도취한 나머지 과욕을 부린 것이 아닌가.
역사를 더듬어 보면 자고로 분에 넘친 과욕을 부리다가 화를 불러온 경우가 많았다. 많은 왕족들이 임금 자리를 탐하다가 죽어갔으며, 신하 또한 나서지 않을 일에 나섰다가 목숨을 부지 않지 못했다. 역모에 휘말린 왕자들이 그러하고 자리를 탐한 많은 척신들이 그러했다.
이번 사태도 권욕력에 취한 자들의 감언이설에 놀아났다는 의견이 많다. 올바른 충언을 한 사람도 많았다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말을 듣지 않고 귀를 막고 외면했다고 한다. 이는 한 개인의 불행일 뿐 아니라 나라의 불행이다. 이런 시점에 ‘야서지혼’이 새삼 떠오른 것은 왜일까.
미리서 오래전에 경계했거늘 간과한 아쉬움이 크다. 세월이 흘렀지만 이 교훈은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에게 분수를 깨우치는 말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여전히 깊은 통찰을 하게 하지 않나 생각한다. (2025)
첫댓글 제 분수를 못 지킨 윤석열에 대한 아주 시의 적절한 명문입니다. 민주정치가 가장 잘 된 미국 '버지니아주 깃발'에는 《Sic Semper tyrannis》글귀가 적혀 있습니다.폭군을 쓰러뜨리고 밟은 모습, 즉 "폭군은 언제나 이렇게 되리라"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임선생님께서 홍만종의 《野鼠之婚》 '순오지' 두더지를 제 때 읽으시어 민주 법치국가가 방황하고 있는 이 즈음에 아주 일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조선말에 매천, 만해가 떠 오릅니다. 국난 있을 때 작가는 글로 국민에게 채찍의 울림을 보여 줘야합니다. 정상적인 나라 없이 온전한 문학활동이 되겠습니까! 좋은 작품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홍만종의 《野鼠之婚》'순오지' 에 실린 두더지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교훈을 주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통찰의 혜안이 참으로 기가막힙니다.
그렇게도 두더지 이야기를 통하여 분수를 지킬것을 일렀건만, 오늘날 우리는 제 분수를 지키지 못한 통치자때문에 불멸의
밤을 보내며 식사를 해도 소화가 되지 않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주의 깃발에 새겨졌다는 문구가 새삼 강력한 메시지를 줍니다.
애초에 함량미달인 자를 후보로 추대하고 온갖 유언비어와 모함으로 국민의 눈을 흐리게 하여 유능한 야당 후보를 밀뜨려 결과적으로 나라를 파탄내고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만든 망국 세력은 이 순간에도 치졸하고 비열한 준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두더지의 교훈이 압권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눈에는 오직 탐욕만 가득하군요 차제에 썩은 환부를 여지없이 도려내야겠습니다
사람을 잘못 뽑은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옛부터 사람은 자기에 맞은 그릇을 타고 나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화를 입은다고 했는데
그 실례를 보여주는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의미에서 300년전 홍만종선생이 경계의 말로서 野鼠之婚를 써서 후대에 전한 것은
가슴이 뜨끔해 지는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댓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동감입니다.^^
박래녀선생님 , 공감을 표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