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分數)의 교훈
임병식 rbs1144@daum.net
분수를 생각하다가 문득 ‘야서지혼(野鼠之婚)’이 떠오른다. 이 이야기는 흔히 유유상종의 예로 읽히기도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분수를 지키라’는 뜻이 더 또렷하게 다가온다.
조선 후기 문인 홍만종이 『순오지』에 기록한 이 이야기는 이렇다.
땅속에 사는 두더지가 자식만은 어둠이 아닌 밝은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하늘을 찾아가 혼인을 청했지만, 하늘은 스스로를 낮춘다. 해와 달 앞에서는 자신도 미미한 존재라는 것이다.
두더지는 다시 해와 달을 찾았으나, 그들 또한 구름을 두려워했다. 구름은 바람을, 바람은 바위를 가리켰다. 그렇게 가장 강한 존재를 찾아가는 여정은 끝없이 이어지는 듯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뜻밖의 말이 돌아온다.
바위는 말했다. 자신은 단단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밑을 파고드는 두더지 앞에서는 버티지 못한다고. 균형이 무너지면 결국 쓰러질 수밖에 없다고.
결국 두더지는 가장 멀리 돌아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온 셈이었다.
이 이야기가 들려주는 것은 단순하다. 세상에는 저마다 감당할 수 있는 자리와 몫이 있다는 사실이다. 높고 강해 보이는 것들도 저마다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그 한계를 넘어선 욕망은 끝내 스스로를 허문다.
우리의 옛말도 같은 뜻을 전한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바라보지 말라는 말이나,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속담은 모두 지나친 욕심이 부르는 파국을 경계한다.
돌아보면, 사람은 종종 자신의 무게를 잊는다. 손에 쥘 수 없는 것을 쥐려 하고, 감당할 수 없는 자리를 탐한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속이기도 하고, 타인의 경고를 흘려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무게를 넘어서면 결국 중심이 흔들린다. 버티고 있는 줄 알았던 자리도 한순간에 무너진다.
생각해 보면, ‘강하다’는 것은 남을 이기는 힘이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를 아는 데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설 수 있는 자리와 물러설 자리를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오래 버티는 힘일 것이다.
두더지가 끝내 돌아온 곳은 처음의 자리였다. 그 여정이 헛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 길 위에서 이미 알았어야 할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을 뿐이다.
분수를 안다는 것은 체념이 아니라 균형이다. 그리고 그 균형을 잃는 순간, 삶은 조용히 기울기 시작한다.
(2025)
첫댓글 제 분수를 못 지킨 윤석열에 대한 아주 시의 적절한 명문입니다. 민주정치가 가장 잘 된 미국 '버지니아주 깃발'에는 《Sic Semper tyrannis》글귀가 적혀 있습니다.폭군을 쓰러뜨리고 밟은 모습, 즉 "폭군은 언제나 이렇게 되리라"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임선생님께서 홍만종의 《野鼠之婚》 '순오지' 두더지를 제 때 읽으시어 민주 법치국가가 방황하고 있는 이 즈음에 아주 일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조선말에 매천, 만해가 떠 오릅니다. 국난 있을 때 작가는 글로 국민에게 채찍의 울림을 보여 줘야합니다. 정상적인 나라 없이 온전한 문학활동이 되겠습니까! 좋은 작품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홍만종의 《野鼠之婚》'순오지' 에 실린 두더지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교훈을 주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통찰의 혜안이 참으로 기가막힙니다.
그렇게도 두더지 이야기를 통하여 분수를 지킬것을 일렀건만, 오늘날 우리는 제 분수를 지키지 못한 통치자때문에 불멸의
밤을 보내며 식사를 해도 소화가 되지 않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주의 깃발에 새겨졌다는 문구가 새삼 강력한 메시지를 줍니다.
애초에 함량미달인 자를 후보로 추대하고 온갖 유언비어와 모함으로 국민의 눈을 흐리게 하여 유능한 야당 후보를 밀뜨려 결과적으로 나라를 파탄내고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만든 망국 세력은 이 순간에도 치졸하고 비열한 준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두더지의 교훈이 압권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눈에는 오직 탐욕만 가득하군요 차제에 썩은 환부를 여지없이 도려내야겠습니다
사람을 잘못 뽑은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옛부터 사람은 자기에 맞은 그릇을 타고 나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화를 입은다고 했는데
그 실례를 보여주는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의미에서 300년전 홍만종선생이 경계의 말로서 野鼠之婚를 써서 후대에 전한 것은
가슴이 뜨끔해 지는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댓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동감입니다.^^
박래녀선생님 , 공감을 표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