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냥년(還鄕女)과 호로(胡虜)새끼
일제(日帝) 일본군 성 노리개 조선 여인들 / 몽골 공녀 / 제국대장공주 / 기(奇)황후
고려의 역사를 잠시 되짚어보면 제23대 고종 때(AD 1232)때 강화로 피신하여 몽골(元)에 항전했으나 제24대 원종 때(AD 1270년) 항서(降書)를 쓰게 되고 34대 공양왕(恭讓王 AD 1392년)에 이르러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공양왕이 폐위(廢位)되면서 고려(高麗)는 결국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이것이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이성계(李成桂)가 정권을 잡기까지 120여 년간, 고려는 열 명의 왕이 대를 이어 가지만 원나라의 사위 나라라는 부마국(駙馬國)으로 격하(格下)되고 해마다 엄청난 공물(貢物)을 바치는 수모를 당한다. 또, 충렬(忠烈)왕, 충선(忠善)왕, 충숙(忠肅)왕 등....
모든 고려의 왕들은 원(元)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앞에 충성 충(忠) 자를 붙여야만 했다.
고려 25대 충렬(忠烈)왕은 세자(世子)시절이던 25세 때 고려 신종(申宗)의 증손녀 왕씨(훗날 정화궁주<貞和宮主>)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있었으나 39세가 되던 해 몽골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元)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 칸의 딸인 16세의 쿠틀룩 켈미쉬(훗날 제국대장공주:장목왕후<莊穆王后>)와 강제로 결혼하게 된다. 충렬(忠烈)왕은 이듬해 아버지 원종(元宗)이 죽자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정실부인인 정부(貞婦)인 정화궁주를 밀어내고 몽골 쿠빌라이 칸의 딸 제국대장공주가 제1비(장목황후), 정화궁주가 제2비가 되고, 나중에 낳은 제국대장공주의 아들이 왕위(忠宣王)에 오르게 되었으니 정화궁주의 원한은 얼마나 사무쳤을까....
고려는 원나라에 매년 엄청난 공물(貢物)을 바쳐야 했는데 특히 가슴 아픈 일은 처녀는 물론 부녀자를 포함하여 엄청난 수의 여인들(貢女)을 바쳐야 했다. 고려에서 원나라에 포로(捕虜)로 끌려가거나 공녀로 바쳐진 사람들이 총 60만이나 되었다는데 그중에서 여성이 50만이었다고 한다.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간 여인들은 하녀(下女), 첩살이, 궁중의 시녀(侍女) 등으로 그야말로 온갖 수모(受侮)를 겪게 되는데 그 고려의 공녀 중에는 궁중의 시녀로 들어가 황제의 아들을 낳아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른 기황후(奇皇后)도 있다.
공녀(貢女)로 간 고려의 여인들은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기회를 잡아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환향녀(還鄕女)-이른바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원나라에 공녀로 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은 사실 여부를 가리지도 않고 몽땅 싸잡아 오랑캐(몽골인)들의 성(性) 노리개 노릇을 하다가 왔다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결혼도 할 수 없었고 부녀자의 몸으로 끌려갔다가 갖은 고생 끝에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시집에서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고 내쫓는 것은 물론, 친정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인조(仁祖)는 고향으로 돌아온 환향녀(還鄕女)들은 홍제원 냇물(현 연신내)에서 목욕을 하면 몸이 깨끗한 여인으로 간주하고 만일 그런 여인들을 보고 정조(貞操) 운운하면 엄벌(嚴罰)에 처한다고 공포(公布)까지 하였다니 웃지 못할 슬픈 우리의 역사이다.
기황후가 원(元)의 황후가 된 이후 고려의 공녀제도가 없어졌다니 기황후의 업적이라 하겠지만 기황후의 오빠 두 명이 고려에서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다 결국 공민왕에 이르러 제거되는데 그 연유로 기황후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중국 역사에서는 위대한 황후 중 한 명으로 꼽힌다고 한다.
그때 몽골에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이 환향녀(還鄕女), 바로 ‘화냥년’의 어원(語源)이다.
그리고 그 환향녀들이 낳은 자식들은 호로(胡虜)새끼 - 즉 ‘되(胡)놈들한테 포로(虜)로 잡혀갔던 사람의 자식’이라는 의미인데 변하여 ‘호래자식’, ‘후레자식’이 되었고,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는, 너무나 아픈 우리나라의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