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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월경민
수년 전 중국에서 특이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료녕성 개주시 진둥향 박가촌(朴家村) 의 주민 277명, 료녕성 본계현 산성자향 박보촌의 구재곡, 회피 등의 주민 1,234명, 하북성 청룡현의 팔도자향 탑구촌과 대장향 맹가움집촌의 박씨 성을 가진 350여 명이 자기들의 선조가 350년 전 한국에서 이주해 온 한국인이고, 자기들은 한국인의 후예이기에 조선적으로 옮겨달라는 청원을 한 것이다. 원래 중국에는 박씨 성이 없기에 이들 박씨 성을 가진 청원 자들은 1958년 조선 적을 회복했었다. 이에 봉성현 일대에 거주하는 문씨, 김씨, 백씨들도 한국인을 증명하는 족보를 갖고 있어, 이들 또한 조선 적 회복을 신청했다.
조선 적을 회복한 사람들은 명말청초에 중국으로 이주한 사람들로 당시 이들 수백 명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이주했다. 기록에 의하면 청초만이 아니라 명나라 초기, 원 나라시대, 당나라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했다. 이에 학자들간에 중국조선족 천입사(遷入史)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의 하나가 토착민족설이다. 말하자면 현재 만주지역은 옛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기에 이곳 주민들은 처음부터 조선이었다는 설이다. 이에 대해 고영일은 요동반도에 거주하는 1만여 명이 고려인이었다는 것을 기반으로 원말명초설을 주장한다. 한편 박씨촌의 현지조사를 근거로 박창욱은 명말청초설을 주장한다. 이들은 모두 장구한 세월 중국인으로 동화되어 족보와 같은 문헌 외에는 근거가 없어 이들에 관한 이민사는 별도로 취급해야 할 문제이며, 이곳에서는 현재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을 갖는 사람, 따라서 1860년대 이후에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족을 문제시하겠다.
현재 조선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북3성 특히 두만강과 압록강 대안지역은 양 강으로부터 이북 1천 리를 청나라 태조의 발상지라 하여 강희 7년인 1668년 사람들의 입주를 금하는 봉금령이 내려져 있었다. 따라서 이 곳에 조선족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봉금령이 해제되는 1875년이지만, 1860년 이후 한인들은 압록강과 두만강 대안에 아침에 들어가 일하고 저녁에 귀가하는 조경귀가 또는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가서 추수해 오는 춘경추수의 형식으로 출입을 했다.
조선족이 본격적으로 월경하기 시작한 것은 1869년의 기사년 재해 이후의 일이다. 3년간 계속된 흉년에 평안북도에서 압록강을 월경한 사람이 약 6만 명이고, 함경북도에서 두만강을 월경한 사람이 약 2만 6,000명이 되었다.
조선족 이주가 급증하자 한족과의 마찰을 우려한 회령부사 홍남주는 두만강 대안지역이 한국과 중국 사이의 공지라는 의미에서 간도(間島)라 했고, 월강한 조선족들이 농사를 짓는 땅을 간도라 하더니, 이것이 지명이 되었다. 간도란 말하자면 백두산 동북지방으로 원(原) 간도라고도 하며, 백두산의 서북지방을 서간도라 하는데 이것과 구별하기 위해 간도를 북간도라고도 한다. 한편 압록강 대안에 이주한 조선족을 보호하기 위해 강계군수가 서간도 일대를 28개 면으로 나누고 평안북도의 행정구역을 연장해 7개 면은 강계군에, 9개 면은 자성군에, 8개 면은 초산군에, 4개 면은 후창군에 편입시키고, 이곳에 서변계관리사를 파견했다.
청나라는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1883년 길림조선상민무역지방규약을 체결하고 화룡욕, 광제욕, 서보강 등지에 통상국 검사소를 건립해 교역을 장려했다. 한편 청나라는 1885년 두만강 이북의 길이 350km 넓이 25km의 지역을 조선족 개간구역으로 정하고, 통상국 검사소를 월간국으로 개칭해 조선족 개척민의 사무를 겸하게 했다. 이로써 많은 조선족이 간도로 이주하게 된다.
2. 농경민
간도로 이주한 조선족은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중국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으며, 특히 논을 일구어 벼농사를 지었다. 원래 중국에서는 양자강 이남에서만 벼농사가 가능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벼농사가 불가능하리라는 만주벌에 조선족이 수전(水田)을 일구고 벼농사에 성공한 것이다. 조선족이 최초로 농사를 시작한 곳은 1845년 벌목을 하는 초산 일대의 조선족 80여 호 농민에 의해 훈강 유역의 관전현 하루차 태평소 지구에서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1861년 중국의 단동지구 삼도랑두에 조선족 농민이 강물을 끌어들여 수전을 일구었다고 한다.
보다 확실한 것은 1875년 통화현 상전자 마을에서 벼재배에 성공, 훈강에서 시작된 벼농사가 압록강을 따라 흥경, 류하, 환인, 집안, 통화 등지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북간도지역은 1890년 룡정현 관개향 광소 일대에서 벼재배가 시작되어 해란강 양안인 평강벌과 세전벌, 부르하통하 하류의 가야하 하류 등지로 급속히 전파돼 갔다.
그러나 당시 조선족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고 점산호(占山戶)라 일컫는 한족이나 만주족 지주에게 개간지를 빼앗기고 소작인이 되어 높은 소작료를 지불하는 외에 각종 세금에 시달려야 했다. 한족에게 토지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중국적으로 입적하면 되지만, 당시 조선족은 고생이 되더라도 중국 입적을 꺼렸으며, 특히 입적의 조건인 중국식 머리와 중국복을 착용하라는 치발역복(雉髮易服)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렵게 생활하는 조선족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에서는 1902년 간도에 통감부 간도출장소를 설치하고 이범윤을 간도 관찰사로 임명해 조선족을 보호하게 했다.
중국조선족의 중국이민은 농민이 주류를 이루는 농업이민이다. 당시는 오늘과 같은 여권이나 사증, 그리고 이민허가서 등을 갖춘 정식 이민이 아니고 단순한 월경민, 과경민(跨境民)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이민이라기보다 유민 혹은 난민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명칭이야 어떠하든 한국에서 많은 유민들이 유입국의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중구으로 유입돼 갔다. 무엇보다 중국조선족은 벼농사를 중국 동북지방에 전파한 큰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3. 우국지사 활동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한국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많은 우국지사들이 만주로 이주해 갔다. 이들은 무엇보다 민족교육을 통한 애국정신 함양이 급선무라 생각해 만주 일대에 많은 학교를 건립했다. 제일 먼저 세워진 학교가 이상설, 이동녕, 여준 등이 용정에 건립한 서전의숙(瑞甸義塾)이다. 이 학교는 신학문을 통해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함양해 후일 독립운동을 도모하기 위해 세워진 학교이다. 당시 이 학교에는 초등과 중등을 합해 70명의 학생이 있었다. 학교를 설립한 다음에 이상설은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됐다. 이로 인해 일본은 서전의숙을 폐쇄시킨다.
서전의숙이 폐교당한 후 오히려 각지에서 우후죽순처럼 조선족을 위한 학교가 건립된다. 1908년 와룡동에 창동학교가 세워지고, 소영자에 광성학교, 명동촌에 명동학교, 화룡현 광대사에 정동학교, 연길에 연길여학교, 연길현 구수하에 봉명학교가 건립된다. 한편 한족으로 귀화한 이동춘은 중국어학교인 양정서숙을 세우고,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이동휘는 용정, 연길, 화룡 등에 초등학교와 중학 등을 세운다. 종교를 배경으로 하는 학교도 건립되었으니, 기독교계의 은진서숙과 해동서숙, 대종교 계통의 대성학교, 천도교 계통의 청일학교, 불교 계통의 동흥학교 등이 세워진다.
간도에 이어 압록강 대안인 서간도에도 1914년에서 1919년 사이에 많은 학교가 건립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흥경현과 삼원보 등에 세워진 신성학교, 삼광학교, 삼성학교, 사양학교, 삼성여학교 등이다. 이들 학교에서 특이한 것은 이상용, 이시영, 이회영, 이동녕 등이 유하현에 세운 경학사(耕學社)이다. 이것은 교육과 산업, 그리고 무력을 동시에 함양하려는 목적에서 건립한 회사의 일종이며, 경학사 부설로 건립한 것이 신흥강습소이다. 신흥강습소가 1919년 신흥무관학교가 된다. 당시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은 이천민, 교감은 윤기섭이었는데, 교관인 이청천, 이범석, 성준용, 원병상, 이장섭, 김성로, 계용보 등이 후일 항일운동에 공헌을 하게 된다. 간도에서 교육활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 이곳에서 활약하는 교육자들이 간민교육회를 결성한다.
이 시기 신흥무관학교와 유사한 무관학교가 왕청현 나자구에 건립되고, 한편 이동휘는 밀산에 무관학교를 건립해 1,500여 명의 젊은이를 훈련시켰다. 이들 학교를 종합하면 1910년대 간도 일대에 설립된 학교가 72개교였으며, 이것이 1926년에는 191개교로 증가했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합방당하자 많은 우국지사들이 중국의 간도와 러시아의 연해주로 대거 이주한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의 민족운동은 교육운동에서 독립군운동으로의 성격전환을 가져온다. 독립군 활동의 단위가 되는 독립군 부대는 대부분 1911년에서 1914년 사이에 조직된다. 그 대표적인 것을 들면 1911년 서일이 왕청현에 중광단을 조직한 것을 필두로, 1912년 이동휘가 화룡현 명동에서 간도국민회를 조직하고, 1913년 국자가에 간민회가 설립되며, 1914년 연변, 국자가, 용정에 청년친목회와 대동협신회 등이 조직된다. 이외에도 이범윤이 조직한 대한광복단, 방우룡의 의민단, 안도현의 대한정의군정서, 훈춘지방의 신대한청년회, 연길시 팔도구의 대한청년단, 훈춘지방 공교회원들이 조직한 복황당 등이 있었다.
1910년 한일합방 당시 독립운동의 중심지는 러시아의 연해주에 있는 신한촌(新韓村)이었다. 중국에서는 손문의 신해혁명에 자극받아 전에 조직되었던 독립군 단체들이 통합해 새로운 독립군 군단을 조직한다. 특히 3·1운동을 맞이해 간도의 독립운동은 활발해진다.
4. 3·13운동
중국에서 발생한 보다 큰 사건은 서울에서 야기된 3·1운동의 여파로 발생한 3·13사건이다.
이에 앞서 일본은 1907년 8월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는 용정에 한국통감부 간도 임시파출소를 설립하고 조선인을 감시하기 위한 행정수단으로 이른바 '도사장제'를 수립하자, 항일인사들은 '간민자치회'를 조직해 반일의사를 표시했다. 1909년 일본은 중국과 간도협약을 맺고 만주진출과 조선인탄압을 노골화해갔다. 이에 러시아 연해주와 만주 일대의 유지인사 39명이 모임을 갖고 1918년 11월에 "무오독립선언"을 제정, 항일운동을 일층 강화했다.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 소식이 중국에 전해지고 3월 7일 "대한독립선언문"이 간도지구 독립운동가에 전달되자, 간도 일대의 학생들이 동요하고 유명무실하던 간도간민회 등이 활기를 띠게 되어 국민회정의단, 한족회, 사우계 등이 합세해 장날인 3월 13일 용정의 명동학교 교정에서 군중집회를 갖기로 했다. 그 날 연길, 대랍자, 두도구 등 먼 곳에서 새벽부터 대열을 지어 용정에 있는 명동학교 교정에 3만여 명이 모여들었다. 12시, 회장 부근의 교회에서 종을 울리는 것을 신호로 대회장에서는 애국가 봉창이 있었고 이어 대회장 대표 김명학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으며, 이어 여성대표들이 연단에 올라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호소했다. 한편 학생들이 손에 쥐고 있던 선전삐라를 배포하고 학생들의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이어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운 시위대가 명동학교를 나와 가두시위로 돌입했다. 시위대가 일제가 경영하는 간도보통학교 앞을 지나자 200여 명의 이곳 학생까지 시위에 참가해 시위대는 점점 증가했다. 시위대가 시가를 돌고 일본영사관으로 가는 길로 진입하자, 무장군경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시위대는 13명의 사망자와 24명의 부상자를 내고 해산하고 말았다.
3월 17일 용정에서 수난열사들을 위한 추모식을 가졌다. 1만여 명의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듯 추모식장에 모여 장례식에 참가했고, 3,000여 명이 영구를 멘 사람들을 따라 묘지로 향했다. 열사들의 묘지는 삼합촌에서 용정에 이르는 합성리에 정해 지나는 사람들이 우러러보게 했다. 이날의 추모제와 장례는 아무 사고없이 무사히 끝났다.
3·13운동의 여파는 그 후 넓은 지역으로 확산돼 갔다. 연길현에서는 용정, 수산리, 화전자 등 10여 개 진과 향촌에서 수십 차례의 시위가 있었고, 화룡현에서는 두도구, 3도구, 7도구, 토산진, 항산리, 평강 등지에서 시위가 있었으며, 왕청현에서는 백초구, 수분대전자, 석평, 소동구 등 9개 향촌에서 시위가 있었고, 훈춘현에서는 상진과 향촌 등지에서 47차의 크고 작은 시위가 있었으며, 안도현, 흥경현, 동녕현 등지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3·1운동의 여파로 중국에서 이루어진 가장 큰 성과는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1919년 4월 13일 전국 13도의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선포했다. 의정원은 9월 6일 대통령중심제의 헌법을 제정해 초대 대통령에 미국에서 활약하는 이승만을, 국무총리에는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이동휘를 추대했다. 그후 1927년 임시정부는 국무위원제로 개편하고 김구를 주석으로 추대한다. 상해임시정부는 서간도에 서로군정서를 두고 북간도에 북로군정서를 두어 항일전쟁을 실시케한다.
5. 독립군 부대
3·13운동 이후 만주 여러 곳에서 독립군 부대가 강화된다. 3월 15일 유하현 삼원보에 한인조직인 보약사, 향약계, 유림수뇌, 포수단 등의 대표들이 모여 대한독립단을 결성하고 홍범도를 단장으로 추대한다. 한편 이 지역 일대의 대표자 이상룡, 여준, 김동삼, 이청천 등이 모여 부민단, 자신계, 교육회 등을 통합해 군단을 조직하니 이것이 서로군정서(西路軍政暑)이다. 서로군정서는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격상시켜 군대양성을 목적으로 했다.
왕청현 춘명사에 있던 서일의 중광단은 3·13운동 이후 김좌진과 이범석을 맞아 군정부로 개칭했다. 상해임정에서는 1919년 12월 이를 북로군정서라 개칭하고 사관강습소를 설치케 했다.
구 한국군인들이 3·13운동 이후 만주에서 이규를 추대하고 대한정의단 림시정의군정부를 조직했다. 이것은 상해임정의 권유로 1919년 10월 대한정의군전사로 개칭했다가 후일 이청천 장군 부대와 합류해 대한의용군으로 개편된다.
만주 동부에 흩어진 독립군들이 1919년 4월 왕청현 춘명사 북삼차구에 모여 조직한 부대를 의군부라 했다가 후일 조선독립군으로 개칭한다. 한편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학생들이 만주에서 조직한 것이 대한독립청년단이다. 이것은 후일 대한청년단련합회로 발족한다. 이러한 단체, 말하자면 대한의용군사의회, 한족회, 기원독립단, 민국독립단, 청년단련합회 등의 대표들이 모여 1920년 2월에 조직한 것이 광복군이다.
이외에도 안무가 연길현 의관구에서 조직한 국민회 국민군, 최동진의 군무도독부, 안도현의 정의군정서, 흑룡강성의 혈성당, 훈춘현의 청년당, 장백현 십칠도수의 독립군비단 등이 있었다.
미국 하와이와 같이 만주에도 국민회가 조직된다. 서울의 3·1운동에 참가했던 기독교 신자들이 1920년 5월 연길현 의관구에 모여 구춘선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국민회를 조직하니 이것을 동간도 국민회라 한다. 동간도 국민회는 간도 일대에 5개 구회와 52개 지회를 두고 정규 사관학교를 설립한다. 한편 동간도 국민회는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을 직속군단으로 하고, 최진동의 대한군무도독부독립군을 국민회의 제2군단으로 하며, 훈춘지방국민회 기독교 회원으로 구성된 독립군을 국민회 제3군단으로 했다.
6. 봉오동 전투
조선독립군의 항일운동이 치열해지자 일본은 1920년 1월 1일을 기해 여단규모의 병력을 두만강 대안인 북간도로 파견하니 이것을 '간도출병'이라 한다. 1920년 1월에서 6월까지 6개월간 우리 독립군과 일본군이 충돌한 것만도 32건이 된다. 당시 활발히 저항한 독립군이 7개였으며 특히 서일 장군이 이끄는 부대, 안무 부대, 최명록 부대, 홍범도 부대가 유명했다. 그리고 유명한 전투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였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 장군이 연합군을 편성해 일본군을 무찌른 대전투였다. 홍범도 장군의 부대가 최명록 장군의 부대와 함께 군무도독부를 형성했고, 이곳에 신민단, 군정서, 광복단, 의군단, 국민회 등 6개 단체가 합세했고, 안무가 이끄는 간도국민회군이 합세해 봉오동에 집결했다.
1920년 6월 4일 삼툰자에 기지를 둔 아군이 두만강을 건너 조선 종성군 강양동 국경초소를 습격해 일본군 1개 소대를 격파하고 돌아왔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 1개 중대가 강을 건너 삼툰자로 진격했다. 이곳에 매복하고 있던 항일부대는 일본군을 유인해 기습으로 일본군을 무찌르니 일본군은 수십 구의 시체를 내버려둔 채 삼툰자 남쪽으로 퇴각했다. 이것을 '삼툰자전투'라 한다.
급보를 접한 일본군은 1개 대대 병력을 증원해 조선독립군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6월 7일 조선에 가서 의연물품을 구해 오는 신민단 소속 전사 13명을 후안산 5호 동네에서 목격한 일본군은 이들을 추격해 후안산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일본군 1명, 아군 1명, 민간인 여성 1명이 사망했는데, 이것을 '후안산전투'라고 한다.
도문시 서북쪽으로 15km 떨어진 북 봉오동 동북향으로 약 20리 되는 갈지자 모양의 계곡에 10여 개의 크고 작은 조선족 마을이 있으니 이곳이 봉오동 계곡이다. 홍범도 장군의 작전지휘를 받는 400여 명의 아군이 사방으로 매복하고 있는 골짜기로 300여 명의 일본군을 유인해 맹공격을 가했다. 유리한 지형에서 아군은 일본군을 4면에서 포위하고 치열한 격전을 3-4시간 벌였는데 일본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것을 '봉오동전투'라고 한다.
아침에 쾌청하던 날씨가 봉오동전투가 끝날 무렵인 저녁이 되면서 구름이 몰려와 장대 같은 소나기를 퍼부었다. 이 틈을 타 홍범도 장군은 전군을 철수시켰다. 그날 밤 봉오동에서 철수하던 일본군이 비파골에 이르러 자기들을 후원하러 오는 일본군을 조선군으로 착각하고 서로 사격을 가해 크게 손실을 보았으니 이것을 '비파골전투'라고 한다.
삼툰자, 후안산, 봉오동, 비파골 등의 전투를 통칭 봉오동전투라고 한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0여 명이 전사하고 수십 명이 부상했으며 항일연합군은 8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했으니 아군이 승리한 첫 대첩이라 하겠다.
봉오동 전투의 보복으로 일분군 19사단 병력과 경찰 등 도합 2만여 명의 일본군이 동원되어 10월 9일부터 30일까지 훈춘, 왕청, 용정, 도문 등 4개 지역의 조선족 마을을 습격해 방화하고 살인을 일삼았으니, 이 토벌에 희생된 조선족이 3,469명에 달하고, 2,500여 채의 가옥이 소실되었으며, 4,500여 석의 식량이 소각되어 총 피해액수는 10,878,600원에 달했다고 한다.
7. 청산리대첩
봉오동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본은 간도지방의 항일운동을 근절하기 위해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세우고 일본군을 훈춘, 왕청, 용정지구에 파견했다. 또 러시아 연해주에서 철수하는 일본군 제 14사단을 남하시키고 요동지구에 출병했던 관동군부대를 동진시켜 연변지구를 포위했다. 이들 일본군의 총병력은 총 2만 5천여 명에 달했다.
일전을 각오한 조선 항일부대들도 1920년 10월 화룡현 서북 산간지대로 집결했으니 이들의 병력은 홍범도의 독립군이 약 300명, 안무의 국민회가 약 250명, 한민회 약 200명, 의민단 약 100명, 신민단 약 200명, 광복단 약 200명,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부대가 약 1,800명이었다. 북로군정서 부대에는 가족과 비전투원 1,20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사관학교 졸업생 200명과 신병 270명이 합세했다.
청산리는 두만강 대안의 무산에서 100리 떨어진 산골짜기로 서·남북은 험한 산으로 둘러 싸이고 동남부만 벌어진 긴 골짜기이다. 골짜기 입구인 충신장에서 동서로 60리를 길게 뻗은 골짜기에는 대진창, 송리평, 평양촌, 싸리밭촌 등의 마을이 줄지어 있다. 청산리 북쪽의 골짜기를 이도구라 한다. 이쪽에서 100리를 가면 용정이 나온다. 이도구 골짜기에는 어랑촌, 봉미촌, 갑산촌, 천수동, 만록구 등의 마을이 있다. 일본군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해 독립군을 섬멸하려 한 것이다.
10월 20일 김좌진 장군의 제1제대는 청산리를 거쳐 백운평 북쪽 닭볏바위 위에 은폐해 있었고, 이범석 장군의 제2제대는 해란강 상류 직소라는 곳에 잠복해 있었다. 10월 21일 아침 해뜰 무렵 일본군 보병 73연대 선두부대 200명이 경계심 없이 종대를 지어 북로군과 제2제대가 매복하고 있는 권내에 이르러 아군의 사격을 받아 30분 사이에 선두부대가 전멸당했다. 이것이 청산리전투의 첫 승리였다.
이날 오후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어랑촌 부근 북와록구에서 일본군 주력부대와 격전을 벌인다. 홍범도 부대의 위치를 모르는 일본군은 독립군이 매복해 있으리라 생각되는 곳에 불을 지르고 연합부대가 진을 치고 있는 남북 와록구를 따라 진공하고 있었다. 이에 홍범도 장군은 예비대를 중앙고지에 배치해 항전케 하고, 자기는 주력부대를 인솔하고 측면고지에 매복했다. 중앙고지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던 예비대가 중앙고지를 떠나자 일본군이 중앙고지를 점령했다. 자리바꿈을 한 연합부대 주력은 정면반격을, 연합부대 예비대는 측면공격을, 그리고 거기에 다른 일본군 부대가 중앙고지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해 중앙고지에 있는 일본군은 4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참패했다.
백운평 직소전투를 끝낸 북로군과 제2제대는 80리 길을 밤새워 걸어 20일 새벽 2시에 와룡구 갑산촌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30리도 안 되는 천수평에 일본군 기병 1개 소대가 숙영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제2제대가 이를 습격해 기병 4명만이 도망치고 전멸을 당했다. 천수평의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야지골에서 아군을 맞아 싸웠다. 이 소식을 들은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가세해 전세는 아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된 격전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해질 무렵 계산촌과 어랑촌 일대로 철수하고 아군도 사격을 중지한다.
10월 24일과 25일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 부대 300명과 북로군부대 잔병 30여 명을 이끌고 천보산 남쪽 협곡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해 큰 전승을 올리고 25일 저녁 오도양차 부근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 수색대의 의도를 안 홍범도 장군은 숙영지 부군에 병력을 매복, 적을 유도해 적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것이 청산리전투의 마지막 전투이다.
6일간 계속된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은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해 병사 1,254명이 전사했고 부상자 200여 명을 냈다. 그리고 아군 전사자는 약 200명이라 한다. 청산리전투에서 아군이 노획한 적의 군수물자는 중기관총 2정, 보총 수백 정, 군복 700여 벌, 권총 500여 자루, 그리고 탄약 등이었다. 청산리대첩은 당시 서울의 동아일보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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