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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27일(주일) 주일설교 마태복음 26:69~75 '베드로의 부인과 통곡' 새찬송가 272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들어가는 말) 내 존재를 감추고 싶었는데, 누군가 아는 척해서 곤란했던 적이 있습니까? 저도 목회자로서 사회에서 일을 하다보면 일반인에게 내가 목회자라고 밝히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알았는지 ‘혹시 목사님 아니세요?’라고 물을 때 좀 당황스럽고 곤란했던 적이 좀 있습니다. 물론 떳떳하게 밝히고 당당하게 말하면 좋은 데, 세상의 시선이 그렇게 곱지 못하니 좀 숨기는 경우가 좀 있습니다. 그런데 곧 밝혀지게 되고, 알게 되고 그렇게 되더라구요. 그러니 그 후로부터는 말이나 행동에 더 조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그런 경우가 있었는가요? 오늘 본문의 베드로가 그런 곤란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체포당하셨습니다. 안나스에게 심문을 당하시고 가야바에게도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체포되어 끌려가신 예수님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따라갔습니다. 그 때는 추웠습니다. 사람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로 함께 불을 쬐었습니다. 그런데 바깥 뜰에 앉아 있던 베드로에게 한 여종이 다가와 알아봅니다.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이에 그 자리를 피해 앞문까지 나아간 베드로를 또 다른 여종이 알아보고 같은 말을 하자 베드로는 또다시 예수님을 부인하며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저주까지 하며 자신은 아니라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 때 닭이 울자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며 웁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베드로 통곡교회’라는 곳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심문 받고 또 베드로가 예수님은 세 번 부인했던 장소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베드로 통곡교회라는 교회 명칭도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중앙 돔 위의 장식은 더 베드로의 통곡을 와닿게 합니다. 보통 교회의 가장 높은 돔 위에는 십자가가 장식되지만, 이 곳 돔에는 십자가 위에 황금판의 닭모양 장식을 올려놓았습니다. 바람이 불련 이 닭장식이 빙빙 도는 데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사건을 다시 연상시키는 듯 합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일면 ‘닭울음교회’라고도 불립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사건인데요. 이 사건은 단지 애절한 에피소드로 끝날 사건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대한 죄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죄였습니다. 재판정에서 나는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하면 살고, 끝까지 예수 믿는 믿음을 지키면 재산도 몰수되고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교회가 박해받을 때 교회에서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를 ‘배교자’라고 불렀고, 구원을 받지 못할 자로 간주했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소설 속에서도 단지 예수와 마리아의 초상을 밟으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모진 고문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밀물 때에 바닷에 묶여 밀려오는 바닷물에 수장되 순교를 당하게 되는 장면은 참으로 아름다울 정도로 애절합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의 죄는 중대한 죄이지만, 베드로는 솔직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솔직함은 다윗왕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불륜을 저지르고 살인교사죄를 저지른 것을 과감하게 폭로하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당시 최고의 권력을 쥔 왕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무마하고 덮을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과감히 폭료로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초대교회에서 기둥 같은 사도였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죄를 덮거니 미화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베드로 자신도, 복음서 기자도 베드로의 죄악을 드러내는 게 담대해보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시퍼렇게 살아계시기 때문에 죄를 감추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베드로의 부인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라는 것을 부인하는 오늘 본문의 베드로를 보면서 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을까?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베드로의 부인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현재 모습에 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살펴보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유는 예수님과 같이 무시당하기 싫어서 입니다(69~70절).
예수님이 잡혀가시자 베드로는 주님을 멀찍이 따라가다가 바깥 뜰에 앉아 있을 때 한 여종이 다가와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지 못하겠노라”며 발뺌을 합니다. 이 때 여종이 말한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당시 갈릴리는 사람들에게 무시받는 동네였습니다. 1990년대에 ‘화성’ 하면 사람들에게 ‘연쇄살인사건’이 떠오를 정도로 그렇게 각인되었던 지명이었습니다. 갈릴리도 그렇게 일반 사람들에게 무시되던 변방의 도시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여종에 베드로에게 갈릴리 사람 예수라고 한 것은 예수님을 무시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무시받기 싫어서 주님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따라가지 못하고 멀찌기 따라가다가 대제사장의 바깥뜰에 앉아 구경하고 있던 베드로, 심문당하는 예수님 곁에 있지 않고 사람들 틈에 껴서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모닥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가 예수님처럼 무시당하기 싫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왜 사람들은 고난받는 예수님을 따라가기 싫어할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십자가 복음이 아니라 성공복음을 좇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복된 소식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인간에게 가장 좋은 소식이고, 성경 전체가 다 복음입니다. 복음은 인간이 고안해내거나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면 그 복음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중심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구약성경은 장차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고 신약은 약속대로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전체가 바로 예수님에 관한 복음입니다. 그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의 배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와 여러분들과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영생을 얻게 될 것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십자가 때문에 내가 구원받고, 내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내가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내가 산 소망이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 복음을 믿는 자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갑니다. 예수님과 같이 고난을 받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멸시도 천대도 달게 받습니다. 그런데 성공복음을 좇아가는 자는 반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국민일보의 한 목회칼럼에서 서모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예배행위를 마치 복의 수단으로 여기는 샤머니즘적 사고에 머물러 있다는 데 있다”면서 “예수를 팔아 자기 유익을 챙기기 급급한 신앙관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서 “또 다른 잘못된 신앙은 예수 믿고 근검, 청렴해야 한다는 윤리·도덕적인 가치관”이라면서 “겉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이런 인본주의적 신앙을 지니면 내가 마치 의로운 자, 거룩한 자라는 착각에 빠지고 그 기준으로 남을 정죄하다가 결국엔 하나님 자리에 올라간다”고 꼬집었습니다. 서 목사님은 “확실한 사실은 교회가 윤리·도덕을 가르치는 종교기관, 인격개조의 기관이 아니라는 것”이라면서 “교회는 인간이 죄인이며, 예수 믿고 천국을 가서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도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적용) 나는 성공복음을 따르는 자입니까? 십자가의 복음을 따르는 자입니까?
둘째,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유는 수치의 현장에서 회개하지 않고 회피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71~74절상반절).
이제 베드로는 수치의 현장을 벗어나 대제사장 집의 앞문까지 나아갑니다. 그때 다른 여종이 그를 알아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그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71절). 이에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며 예수님을 또 한 번 부인합니다(72절). 잠시 후 곁에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소리를 듣고 예수와 한패라고 하자 베드로는 저주까지 하며 예수님을 세번째로 부인합니다(74절a). 일반적으로 수치의 현장에서 회개하지 않고 회피하려고 하면 더 크게 넘어집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거짓말이 더 큰 거짓말을 낳는다’ 거짓말을 할수록 쭉 길어지는 ‘피노키오의 코’를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어느 순간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수준의 거짓말 천지에 빠지고 맙니다. 그 과학적 근거가 실험을 통해서 밝혀졌습니다. 거짓말은 하면 할수록 늘고 갈수록 그 범위와 대상도 더 커진다는 게 뇌과학적 연구 결과로 입증되었습니다. 2026년 10월 26일 학술지 ‘네이처 신경과학’에는 탤리 샤롯 영국 런던대 심리학과 교수팀의 실험 결과 논문이 게재됐는데요, 인간의 뇌에는 부정직한 행동을 하면 이를 꺼리게 하는 일종의 제동장치 역할을 하는 부위가 있는데 거짓말을 반복할 수록 그 제동력이 줄어든다는 점이 뇌 자기공명 영상(fMRI) 촬영을 통해 확인됐다고 합니다. 성경도 죄를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면 결국 사망에 이른다고 말씀합니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 구절은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계속 쌓이면 결국 멸망을 받아 죽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구요, 이 구절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욕심은 곧 죄이며, 죄가 장성하면 사망하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적용) 베드로의 죄처럼 우리도 회개치 않고 계속 회피하면 쌓아두는 죄는 무엇입니까? 죄와 수치의 현장에서 나는 벗어나고자 회피합니까? 회개합니까? 나도 예수님처럼 비천한 나사렛임을 인정하고, 나도 예수님처럼 무시받는 것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2. 베드로의 통곡
이제 베드로는 결국 심하게 통곡합니다.
심하게 통곡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주님의 시선과 자신에게 주신 주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74b~75절).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자 곧 닭이 웁니다(74절b). 이 때 주님이 돌이켜 베드로를 보십니다(눅 22: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그 시선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부인할 수 밖에 없지만, 그 때마다 주님이 나를 돌이켜 바라보십니다. 이런 주님의 시선이 느껴지고 체험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킨 사건이 바로 ‘네가 혹시 지옥갈자가 아니냐?’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또한 베드로처럼 우리도 그 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야 합니다. 이전에 들은 말씀, 이전에 은혜받은 말씀이 생각나야 합니다. 말씀이 생각나도록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쌓아두어야 합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 초신자 때 그 때 늘 마음속에서 생각하던 말씀이 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었습니다. 그 날은 학교 교정에 자전거를 타고 가던 일에 길가에 정차되었던 택시 뒤를 부딪히는 사고를 당하게 되었는데, 이 때 이 말씀이 생각나서 수업시작중에 들어가 교수님께 말씀드리고 병원에서 약간 치료를 받은 후에 교회에 가서 회개기도하던 기억이 납니다. 사고당시 갑자기 정차한 택시 운전기사에 대한 원망과 부서진 자전거와 터진 입술보다 ‘안목의 정욕’이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한참을 교회에 가서 회개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이 생각나게 하는 것도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베드로를 회개의 자리로, 저와 여러분들을 회개의 자리로 이끌 줄 믿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초자연적인 음성이 우리의 삶을 주님을 부인하고 죄를 향해, 지옥을 행해 질주하던 곳에서 이제는 주님을 인정하고 삶에서 U턴하여 천국을 행해 나아가는 삶으로 변화시켜 줄 줄 믿습니다(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또
적용) 내가 넘어진 현장에서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을 느끼며 내게 주신 주의 말씀이 생각났습니까? 내 죄 때문에 심히 통곡함으로 남들의 아픔에 공감하게 되었습니까?
큐티인간증 ‘예수님을 두 번 부인한 나’ 김보성님.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의 부인과 통곡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고, 지난 주 살펴본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한번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로 쓰임받은 베드로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는 평가를 받은 가룟 유다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고, 베드로는 약해서 넘어졌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한 일도 물론 잘못된 일이지만, 육신이 연약함으로 스스로 넘어진 것입니다. 연약하기에 두렵고 겁이 나서 넘어졌던 것입니다. 유다가 자신의 길을 가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기는 배신과는 다른 것이지요. 바라기는 저희들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하는 유다의 배신의 길을 보면서, 우리도 유다보다 더 악해질 수 있고, 또한 베드로와 같이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수 도 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며, 일생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면서 주님을 배신하지도 않고, 또한 부인하지도 않고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기는 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