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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이 충남 공주의 풀꽃문학관 안에서 풀꽃이 핀 뒤뜰을 쳐다보고 있다. 나태주 시인 제공
가난한 집안, 또래보다 작은 키에 잘하는 것 하나 없다고 자신을 낮추던 소년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자조하곤 했다. 시간이 지나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그는 ‘있었지만 내가 몰랐던 것일 뿐’이라고 자신했다. 그런 결핍의 시절을 겪었기에 그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시로 풀꽃처럼 작은 이 세상 모든 이를 위로할 수 있었다고 감사했다. 그러면서 여러 사람 마음에 꼭 박혀서 뭉근하게 따스함을 전한 자신의 문장들은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선물이라고 겸양했다. 최근 충남 공주 풀꽃문학관에서 만난 나태주(79) 시인이 전한 이야기다.
자전거로 출근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최근 휴관 중에 풀꽃문학관을 찾은 한 무리의 관광객과 담소를 나누는 나 시인 모습. 신은정 기자
나 시인을 공주에서 만난 평일은 그가 설립한 풀꽃문학관이 쉬는 날이었다. 고택에서 운영되는 풀꽃문학관은 바로 옆 현대식 건물을 추가로 짓는 동안 주말에만 문을 열고 있다. 그러나 공주의 명소답게 휴관이었지만 많은 이들이 찾았다. 이날도 중년 관광객 무리가 들렀다. 나 시인은 한동안 밖으로 나와 그들이 붙이는 말에 살갑게 답하며 마당에 심긴 풀꽃에 관해 설명했다. “풀꽃은 사람이 심어놓은 곳에는 살지 않고 자기가 살고 싶은 곳에서만 핀다”는 나 시인 말에 중년 여성은 소녀가 된 듯 두 손을 모으고 감탄했다.
옆집 할아버지처럼 소탈한 그는 엄연한 베스트셀러 작가다. 시집과 수필을 포함해 지금까지 200권 넘게 출간했는데 서점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책이 상당하다. 그러나 나 시인은 ‘가난한 사람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날도 낡은 베레모에 빛바랜 재킷을 입고 책이 가득 담긴 배낭을 멘 채 자전거를 타고 풀꽃문학관엘 왔다. 서울 등 다른 지역으로 출장 갈 땐 여전히 버스를 탄다고 했다.
그는 과거보다 여유로워진 주머니 덕에 주변에 나눌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는 “축의금 20만원 할 것을 조금 더 할 수 있는 것처럼 지인에게 후하게 베풀 수 있어 좋다”고 했다. 특별히 문학계를 위한 지원에도 힘쓰고 있다. 풀꽃문학상 공주문학상 신석초문학상 해외풀꽃시인상 등 그가 운영비와 상금 등으로 관여하는 문학상만 5개다. 나 시인은 “나도 타고 싶었던 상을 남에게도 주고 싶었다”며 “반대로 내가 받고 싶은 마음을 남에게 주면서 달래는 것”이라며 웃었다.
‘콤플렉스’ 인생이 건네는 위로
나 시인은 여든이 다 된 요즘에도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나 시인이 지난겨울 자전거를 탄 모습. 나태주 시인 제공
나 시인은 곧 여든이 된다. 그의 표현대로 “엔트로피(무질서도)가 80%”에 가까운 나이다. 인생을 돌아보며 쉬어가는 시기로 해석되지만, 그는 현역 못지않게 왕성하게 활동한다. 그의 스마트폰 일정표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강연이나 인터뷰 등 일정이 빼곡했다.
그를 이토록 바쁘게 만든 시는 단연 ‘풀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 시인은 “풀꽃이 유명해진 것은 세상과 협동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세상 사람들에게 (그런 위로가) 필요했고, 그 시가 유용했던 것”이라고 부연했다.
학창시절 나 시인은 콤플렉스가 많았다. 키도 또래보다 작았고 집도 가난했다.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없다고 여겼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우등생도 아니었고 눈에 띄는 학생도 아니었어요. 그래서인지 나는 사랑받지 못한 아이라고 늘 생각했지요. 그런데 돌아보니 나를 사랑하는 선생님이 어딘가에 있었는데 다만 내가 몰랐던 것이었더라고요.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며 울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너는 절대 혼자 사는 게 아니다”는 말을 이 시대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너의 뒤에서 네 부족함과 잘못, 악덕까지도 눈감아 주는 그 누군가가 있었기에 네가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청년 시절 자신에게도 해주고 싶은 이야기라고 했다.
살고 싶은 삶 사려면…
나 시인이 앞뜰에서 자라는 풀꽃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장면. 나태주 시인 제공
마이너의 삶을 살았기에 그는 같은 처지인 사람들을 위로할 축복을 받았다고 했다. 나 시인은 “우리는 모두 메이저로 가는 길을 산다”고 강조했다.
그렇기에 청년들에게 ‘너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싶다고 했다. 나 시인은 “키 작은 내가 농구를 시작해 잘해 보겠다는 건 안 될 말이지만, 가능한 재능을 가지고 10년만 투자해보면 안 될 게 없다”고 강조했다.
그를 국민시인 반열에 올려준 ‘풀꽃’은 그가 60대에 쓴 것이다. 시는 그가 70대 들어 세상에 알려졌다. 15살 무렵부터 70세가 넘도록 이름도 빛도 없이 작품 활동을 이어갔던 그이기에 할 수 있는 조언이다.
지치지 않고 오랜 기간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던 것은 “잘한 게 아니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잘하면 누군가와 비교해 1등하고 싶어진다”면서 “대신 좋아하는 건 최상의 상태가 아니어도 다시 또 하면 되니까 스트레스를 받지도,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어 “살아보니 재능과 배경이 전부가 아닌 경우가 많더라. 부족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나 시인은 시를 쓰고 싶어 43년간 교편을 잡았다. 보람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그 직업은 부친이 원했던 삶이었다. 교사로 일하면서 ‘내 마음을 내 마음처럼 표현하는 일’을 놓지 않았다. 나 시인은 “그래야 살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 시인은 우리의 인생을 배터리에 비유했다. ‘살고 싶은 삶’을 위해 ‘살아야 하는 삶’으로 충전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을 병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배터리를 쓰기만 할 순 없다. 배터리 충전을 지겹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몰랐던 때도 날 사랑하던 하나님” 고백
무당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와 먼 삶을 살던 그는 요즘, 교회 가는 낙을 누린다고 했다. 나 시인은 “주일은 일부러 아침을 안 먹는다”며 “교회 국수 먹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 설교를 통해 일주일을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고도 했다. 무언가를 배우길 좋아하는 그는 설교 말씀을 모두 받아적곤 한단다.
기독교인인 아내와 결혼한 그는 배우자의 신앙생활을 막진 않았지만 교회에 가진 않았다. 그러나 2007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크게 아파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다. 나 시인은 “인생의 때마다 예비된 ‘여호와 이레’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기독교를 믿지 않던 나 시인의 부모도 아들의 기적적 회복 후 교회에 나왔다. 나 시인은 “투병하며 임사 체험 후 한동안 지지부진하며 낫지 않았지만 ‘내가 죽지 않겠다’는 안도감과 평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울면서 아내와 불렀던 찬양을 여전히 좋아한다.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로 시작하는 찬양 ‘주여 이 죄인이’다.
그는 죽음을 이겨낸 고통을 통해 ‘고난 유익’을 얻었다고 했다. 나 시인은 “‘네가 나를 모를 때도 나는 너를 알고 있었다. 네가 엉뚱한 곳을 바라볼 때도 그랬다’는 마음을 주셨다”며 “마치 내가 어릴 적 나를 사랑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단지 몰랐던 것과 같은 이치다. 내가 하나님을 몰랐을 뿐이지 하나님이 그때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고 했다.
그는 최근 자전거를 타고 가다 넘어지거나 높은 화단에서 떨어지는 등 아찔한 사고를 겪을 때마다 ‘하나님이 당신의 손으로 나를 받아주시는구나’ 하며 다치면서도 기쁜 마음이 든다고 했다. “마음속에 모닥불이 확 피어나듯 가슴이 후끈하다. 이것이 나의 희망”이라며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공주=신은정 기자 sej@kmib.co.kr
출처 : 더미션(https://www.themissi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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