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0월 23일,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피살
백범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1917-1996)는 1996년 10월 23일에 ‘민족 정기’라는 대의 명분을 내건 버스
기사 박기서씨가 휘두른 몽둥이에 의해 인천시 신흥동 자택에서 최후를 맞이 하였다. 안두희에게는 1965년
12월 21일 곽태영(1936-2008)에게 강원도 양구에서 첫 테러를 당한 이래 31년이라는 긴 세월을 시달리던
끝에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위 왼쪽)“결단코 의로운 일을 했다”: ‘정의봉’을 휘둘러 안두희씨를 살해한 박기서씨는 지난 6월
백범 추모제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안씨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위 오른쪽)“진상만 밝혔으면 목숨 건졌을 것”: 십 수 년간 안두희씨 뒤를 쫓으며 백범 암살 진상
규명에 노력했던 권중희씨는 안씨의 죽음에 대해 ‘인생이 불쌍할 뿐’이라고 말했다.
(아래)“박씨의 행동은 진실로 장한 거사”: 65년 12월 안두희씨에게 최초로 응징을 가했던
곽태영씨가 ‘의거비’가 서 있는 강원도 양구 현장에서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정오 경에 경교장에 찾아가 총으로 김구를 암살하였다.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석 달 뒤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
(1950년 6월 27일)을 받고 포병 장교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1951년 잔형을 면제받고 대위로 전역
하였으며,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되었다.
이후 안두희는 군납공장 등을 운영하면서 엄청남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잇단 테러의 위협 때문에
이사를 자주다녔고 미국 이민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김구 선생은 당시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에 의해 인중과 배에 1발씩, 목 아래에 2발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
백범 김구 암살범 당시 안두희 소위
1992년 안두희는 범행 직전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고, 김창룡으로부터 김구 살해를 지시 받았다고
증언했다.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았던 안두희는 공소시효 등을 이유로 법의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안두희씨 응징 드라마의 출발점 역시 백범이 피살된 1949년 6월2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에 분노하여
가장 먼저 응징을 다짐하고 이를 행동에 옮긴 사람은 곽태영씨이다. 곽씨가 백범 암살범을 응징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그의 나이 19세 때였다. 곽씨는 “고향인 김제에서 서울로 올라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효창공원에 있는 백범 묘소에 참배를 갔다. 그 때 나는 ‘10년 안에 어떤 일이 있어도 암살의 진상을
밝히고 안두희를 처치해 한을 풀어드리겠다’고 선생님께 다짐했다”라고 그 때를 회상했다.
곽씨가 응징 의지를 실천에 옮긴 때는, 안씨를 처단하겠다고 맹세했던 ‘10년 기한’의 마지막 해인
1965년 12월이었다. 당시 안씨는 강원도 양구에서 신의기업사라는 군납 회사를 운영해 도내 납세 실적
1~2위를 다툴 정도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행상을 가장해 양구에 잠입한 곽씨는 며칠 동안 안씨집
주변을 배회하며 치밀하게 준비한 끝에 그 달 22일 ‘거사’를 결행했다. 아침 9시쯤 안씨 집에 침입하여
세수하던 안씨와 격투를 벌인 끝에, 그의 목덜미를 칼로 찌르고 마당에 있던 돌로 머리를 내리쳤다.
안씨는 이 사건으로 뇌수술을 세 번이나 한 끝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듬해 2월 곽씨는 춘천지법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1심에서 5년 실형을 언도 받았다가 2심에서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1966년
7월30일 풀려났다. 곽씨는 풀려나자마자 백범기념사업회에 들어가 일하면서 같은 해 조직된 진상규명
위원회(위원장 조경환)에서 활동했고, 1992년 광복회 원로 이강훈씨를 위원장으로 하여
재건된 진상규명위원회에 참여해 활동했다.
곽태영 선생
이 사건이 잊혀갈 무렵, 백범 암살에 대한 진상 규명 문제를 다시 사회적 관심사로 끌어올리며 ‘민족 반역자’
응징 드라마의 속편을 연출한 이는 권중희씨(1936-2007)다. 1987년 3월 서울 마포에서 각목으로
안두희를 구타한 사건 (1987년 7월에는 당시 27세인 노송구씨도 자고 있는 안두희를 각목으로 폭행에
병원에 입원시킴), 1992년 2월 안씨를 강제로 백범 묘소에 참배케 한 사건, 같은 해 9월 안씨를 납치해
경기도 가평의 한 농장에 감금해 놓고 암살 진상에 대해 증언케 한 사건 등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주인공이 바로 권중희씨이다.
권중희씨와 안씨의 질기디 질긴 악연은, 안씨가 미국으로 도피하기 위해 은밀히 여권을 발급 받았다는
신문 기사가 보도된 1981년 12월 즈음에 시작되었다. ‘중학교 때 존경하던 백범 선생 암살범이 안두희라는
소리를 듣고 마음 한구석에 응징의 칼을 갈아왔다’는 권씨는, 이 소식을 듣자 안두희씨를 붙잡아 암살의
진상을 자백하게 하고, 그에게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된 사죄를 받아내겠다고 다짐했다.
권씨의 추적 및 응징 작업은, 안씨가 부인과 자녀를 모두 미국에 보내고 서울 가락동의 한 아파트에서
외롭게 숨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1983년 본격화하여, 안씨가 박기서씨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은 최근까지 계속되어 왔다.
그는 1987년 3월부터 시작하여 안두희에게 죄값을 물었고 1997년 9월에는 안두희를 경기도 가평의 한
농가에 감금시켜 놓고 동아일보 기자와 함께 사건진상을 캐물었다. 이때 안두희는 중대한 고백을 한다.
"백범 암살 6일 전인 6월 20일에 경무대(현재의 청와대) 집무실로 불려가 이 대통령으로부터
'신성모 국방부장관한테 얘기 많이 들었다. 높은 사람들이 시키는대로 잘하라'는 격려를 받았다"
권중희씨의 징벌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 안두희(좌)와 권중희씨와 동아일보 기자가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의 진실을 요구하고 있는 장면(우)
역사의 심판은 박기서(1950-)씨에게로 넘어갔다. 박기서씨는 사건이 있기 전 권씨를 두 번 만난 적이
있으며, 권씨의 책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를 읽고 크게 감명 받았다고 한다.
그는 1996년 10월 23일 아침 등산복 차림으로 집을 나선 뒤 곧장 안두희씨를 찾아가 준비해간
‘정의봉’으로 안씨의 머리를 내리쳐 죽였다. 안씨를 살해한 직후 박씨는 가쁜 숨을 달래며 그가 평소
존경해온 또 한 명의 안두희 추적자 권중희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저…박기서…지금…안두희
집에…” 박씨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한학을 공부하여 한때 훈장 노릇도 했던 부친 박승봉씨(작고)의 5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가
친척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씨는 효성이 극진하고 욕설 한 번 입에 담지 않은 성격이었다.
넉넉지 못한 살림이었으나 박씨 가족은 단란했다. 박씨는 그저 성실하게 사는 보통 가장이었다.
박씨에게는 한 가지 남과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남산에 세운 안중근 의사비의 비문을 베껴 품속에
지니고 다녔으며, 틈 나는 대로 〈백범일지〉를 탐독하는 등 애국 지사와 독립운동가를 따르는
일에 유달리 열심이었다.
박씨가 언론에 밝힌 안두희씨 살인 동기는 순전히 애국심과 백범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그는 경찰에
자수한 직후 “의로운 일을 했다”라며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기자들에게 “나는 비록 배운 것은
없으나, 최소한 민족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인간쓰레기 하나를 처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당시 형사는 그런 그의 어깨를 두드리면 “수고하셨다”라고 하며 수갑과 줄을 매려는 부하들을
제지하며 당당하게 호송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박씨로부터 고백 성사를 받은 부천시 천주교 심곡본동 성당 이준희 신부(51)는 “고백 성사하는 그의
모습은 정의감에 불타고 있었으며 매우 침착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착잡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으나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 (안두희와 같은) 민족 반역자를 내버려둔 것은 국민의 수치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3년 형을 선고 받았으나 각계의 도움으로 1년 3개월 만인 1998년 3월 1일에 특별사면으로 출소하였다.
출소 후 박기서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