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길/靑石 전 성훈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歸天)/천상병.
수락골 먹자골목인줄만 알았는데 故 천상병 시인을 기리는 숲길이란다. 그동안 이곳을 한두 번 지나간 것도 아닌데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그만큼 무심했나 보다. 내가 몸담아 사는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 우리 시대의 깊은 한과 슬픔을 노래하던 ‘귀천(歸天)’의 천상병 시인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조용히 귀천을 읊조리며 10월 어느 토요일 숲길을 걸어본다. 가을이 익어가는 숲에는 구름처럼 인연이 생기고 낙엽처럼 쌓이다가 바람결에 사라진다. 어느 프랑스 시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사람은 잊혀진 여인이라고 했지만, 육신은 떠나도 영혼이 남은 곳에는 후세를 부르는 몸짓이 여기저기에 펄럭인다. 수락산을 찾는 사람들의 환한 웃음 속에 사뿐히 내딛는 발걸음 소리가 귓속으로 스며든다. 소리도 없이 발밑으로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니 이제 계절도 저 깊은 가을의 품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숲 계곡을 따라서 5분 정도 걸으면 천상병 시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노원구청에서 시인의 작품을 나무판에 새기고 그림을 그려서 숲길 좌우 양편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아담하게 세워놓았다. 먹고 살기에 허덕거리며 메말라가는 사람들의 감정을 일깨워주려는 듯이, 고요한 숲길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아름다운 시를 읽고 마음을 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인의 길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감성이 살아 움직여야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이 촉촉해지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대할 때 조금이나마 상대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생길 것 같다.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계곡에 마련된 작은 광장에 자리를 잡는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플래카드를 걸어놓은 도봉문인협회 임원진에게 감사의 말을 드린다. 떡, 과일, 커피 등 간식거리와 음료를 앞에 두고 나무 바닥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 바로 뒤편에는 ‘가을빛 가족사랑’이라는 주제로 어느 단체에서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숲 체험놀이’를 하고 있다. 연세가 구순이 넘으신 노익장 선배를 위시하여 팔순이 넘는 할머니 선배님까지 여러분이 모여서 문학탐방을 즐기신다.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라고 노래했던 박인환 시인처럼, 수락산의 시인 천상병도, 당신이 떠난 자리에 후배 문인들을 불러 모은다. 마음을 활짝 열고 나뭇가지 사이로 스미는 따사로운 햇살을 듬뿍 받으며 수락산의 가을향기에 취해본다. 계곡 작은 못에는 어린물고기들이 사이좋게 놀고 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구순의 노시인께서 후배들에게 문인의 길에 대하여 한 말씀 해주신다. 천상병 시인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에 있지만, 이곳 수락골에는 막걸리를 즐기시던 시인의 영혼이 지금도 훨훨 날아다니고 있는 듯하다. 시인은 “바람에도 길이 있다”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 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 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옷자락을 스치는 바람에도 길이 있고, 하늘에서 제멋대로 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구름도 길이 있다는데, 나는 온전히 내 길을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나의 길이 어떤 길인지 조차 모른 채 지금껏 살아온 것 같다. 가을도 깊어가고 떠나야 할 길도 가까이 다가와 언제 저 문턱 너머에서 누군가 손을 내밀지도 모른다. 가만히 두 손을 가슴에 얹은 채 조용히 눈을 감고 마음을 열면 나의 길이 보일까? 가야할 길을 몰라서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서성대고 있다면 그 길이 나의 길인지도 모른다. 바람은 그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2022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