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림촌과 연통라자
량병대에서 약 20리쯤 북쪽으로 들어가면 동명촌이고 동명촌에서 6리쯤 더 들어가면 감장촌, 감장촌에서 또 6리쯤 더 들어가면 청림촌이 있다. 청림촌의 동북쪽에는 하발령(哈尔巴岭)이 동남쪽으로 흘러내린 산줄기, 뚱따띵즈(东大顶子)가 있다. 해발이 900메터되는 뚱따띵즈의 서북쪽에는 삼층짜리 집만큼 큰 벼랑이 있다. 당지에서는 연통라자라고 한다.
연통라자의 동쪽에 높이 2메터 너비 1메터되는 마치 문같이 생긴 동굴이 있었는데 지금은 왠지 보이지 않는다. 옛날 로인들의 말에 따르면 이 동굴을 두고 호랑이와 구렁이가 늘 패권쟁탈을 했다고 한다. 1939년에 연통라자촌(오늘의 청림촌)의 한 로인이 노루잡으러 동굴 부근에 갔는데 마침 굵기가 한 아름되는 긴 구렁이가 지나가는것을 보았다. 구렁이가 지나간 자리를 보니 마치 통나무를 끌고 지나간 자리처럼 깊숙이 패였다. 1944년에 할빈에서 온 러시어 사람6명이 머리는 사자같고 몸은 승냥이같은 사냥개 13마리를 끌고 연통라자에 올라가서 동굴입구 숲에 불을 지른다음 놀라서 뛰쳐나온 호랑이를 총으로 쏘았다. 그런데 한 놈만 잡고 한 놈은 날쌔기 도망을 했다. 하여간 연통라자부근에는 호랑이와 곰, 멧돼지. 노루가 많았다. 그래서 농민들이 농사를 하면 수확을 하기전에 거의 절반을 멧돼지와 곰이 먹어버렸다. 농민들이 밤에 나가서 밭을 지키려고해도 일본놈들은 “비적(유격대)”과 내통한다고 나가지 못하게 했다. 3년을 농사를 지어도 헛수고를 하자 농민들이 집단적으로 들구일어났다. 그제야 일본인들은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래서 농민들은 밤에 퉁재를 두드리고 불을 놓고 소리를 지르면서 곰과 멧돼지를 쫓았다.
연통라자촌은 1938년에 경산도의 진주, 이녕에서 온 개척민들이 세운 마을이다. 이들이 왔을 때 연통라자일대는 숲이 무성했다. 첫 해는 감장촌에 림시거주를 하면서 나무를 베여내고 숲에 불을 달아 집을 짓고 밭을 일구었다. 집은 규정에 따라 크기와 모양을 통일했으나 밭은 로동력이 많은 집들에서 더 많이 일구었다. 그러나 곰과 멧돼지가 4-5할을 축내고 남은 절반은 만척에서 가져가 농민들은 일년내내 농사를 해도 가을에 가서는 쌀을 꾸어다 먹었다. 만척에서 꾸어준 쌀을 석탄가루가 있는 수수쌀 아니면 겨가 섞인 좁쌀, 뜬 강냉이가루였다. 그리고는 햇쌀을 배로 받아갔다.
그때 연통라자촌의 어린이들은 감장촌에 있는 학교에 다녔는데 1-2학년이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고 3-4학년이 한 교실에서 공부했다. 애들은 집이 멀리에 있기에 모두 도시락을 쌌다. 도시락을 보면 도토리가루떡 언감자떡 누릉지나물밥 겨떡 등이였다. 오후에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배가 너무 고파 밀밭에 들어가 생밀을 씹어먹었고 여물지 않은 콩을 구워먹기도 했다. 연통라자의 아이들은 어른이 되도록 사탕과자를 먹어보지 못했는데 그나마 감장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딱 한번 사탕을 먹어보았다.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했다는 기념으로 학생들에게 사탕 4알씩 주었던것이다. 사탕을 받아쥔 아이들은 너무 좋아서 “이다다끼마쓰(잘 먹겠습니다.)”하고 천황께 인사를 했다. 아이들을 한알만 먹고 남은 사탕을 동생에게 주려고 허리춤에 넣었다. 그리고는 다 먹은것처럼 고찌소사마(맛있게 먹었습니다.)”를 했다. 어떤 아이들은 중국집에서 강아지에게 주는 쉰 옥수수떡을 주어먹고는 배탈이 나 학교에도 나오지 못했다. 명절 때 중국인들은 출입문 앞에다 관운장의 그림을 붙이고는 그 앞에 떡을 공양했다. 조선족아이들을 늘 떡을 도둑질 했는데 공교롭게도 중국집들에서는 모두 개를 길렀다. 개가 기를 쓰고 쫓아올 때면 큰 마음을 먹고 떡 한개를 던져주어야 그 놈의 개가 쫓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이 입는 옷은 삼베실로 짠 베천이다. 베천도 넉넉치 못해서 바지는 반바지이고 웃옷은 등지개였다. 베로 만든 옷은 비를 맞으면 축 늘어져 기다랗게 되다가도 해가 나면 댕댕 감겨올라가 배꼽이 다 보였다. 반바지도 당겨올라가서 거시기가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남학생들은 하루내내 웃옷과 반바지를 아래로 잡아당기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신발도 없었다 생활형편이 좋은 애들은 그래도 삼과 마른 우랄초 그리고 피나무껍질을 찢어 삶아 만든 신발을 만들었다. 또 마른 우랄초를 방망이로 잘 두드린 다음 마대천우에 골고루 펴고 그걸로 발을 감싼다. 그리고는 노끈으로 발을 동여맨다. 이런 신발은 눈이 오면 눈이 스며들어 발이 더욱 시리다. 불을 쬐이면 젖어들고 불과 멀리하면 인차 얼어들어 발이 꼬장꼬장 해난다. 그래서 신발을 벗어 겨드랑이에 끼고 맨발로 다니기도 했다. 추은 겨울에 발이 시리면 아이들은 모여서 서로 발바닥을 마주 부빈다. 그러면서도 “해야, 해야, 물먹고 장구치며 나오너라.”고 노래를 불렀다. 얼마나 추웠으면 해가 나오라고 노래를 불렀을가.
연통라자촌에서 고기를 먹어본 사람들이 적다. 기껏해야 가끔식 잡아오는 노루고기와 꿩고기 쥐고기다. 만척에서 준 소가 있었지만 소값을 치르려면 몇년을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해도 값지 못한다. 그러니 잡아먹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소가 생명줄이였다. 한번은 리할머니네 소가 병으로 죽었다. 마을의 장순사는 전염병이 돈다고 소를 깊숙히 파묻어라고 호통쳤다. 리할머니는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다 소를 그냥 버리는것이 너무 아까워 밤중에 몰래 파가지고 다리를 떼왔다. 이튼날 장순사가 마을을 순시하는데 마침 리할머니네 문앞을 지날 때 구수한 소고기국냄새가 코를 찔렀다. 장순사는 문을 차고들어가 리할머니를 끌어냈다. 그리고는 소고기국을 담은 함지를 머리에 이고 큼직한 소고기덩이를 입에 물게한 다음 하루종이 마을 복판에 세워놓고 벌을 주었다. 리할머니네 아들도 고기를 입에 물고 벌을 받았다.
해방이 나자 연통라자 사람들은 맨먼저 달려간 곳이 남구촌에 있던 일본인 거주지다. 그때 일본의 가난한 백성들도 개척민으로 왔었다. 그러나 일본개척민들은 1등 국민이여서 사탕가루와 입쌀, 밀가루를 먹었다. 일본사람들은 일본인들은 “닛께이”, 조선인들은 “센께이”, 중국인들은 ”지나징” 혹은 “만께이”라고 불렀다. 조선사람은 2등국민이기에 좁쌀과 수수쌀을 배급했다. 중국인은 3등국민이여서 뜬 강냉이가루를 주었다. 광복이 나자 연통라자촌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이 지금의 남구촌이다. 남구촌에는 일본인들이 30호가 살고있었는데 그들의 생활이 퍽 좋다보니 뭘 가져올것이 없나해서 찾아갔다. 남구에 가서 보니 일부 일본인들은 짐을 꾸려가지고 이미 도망을 갔다. 하지만 어떤 집들에서는 온가족이 모두 배를 가르고 집단자살을 했다. 그 참상을 차마 눈뜨고 볼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말거나 사람들은 먹을만하고 돈이 될만한 것들을 모두 짊어지고 왔다. 그때 연통라자 사람들은 처음 사탕가루를 맛보았고 밀가루음식을 먹어보았다.
지금의 연통라자에는 조선족이 단 한집도 없다. 광복이 나면서 반은 고향으로 가고 일부는 량병태와 명월구에 이사갔다. 후에 한면두명씩 계속 빠져나가 지금은 없다. 개척민들이 피땀으로 일군 땅이 고스란히 중국인들의 소유로 되였다.
첫댓글 또 하나의 중국조선족이민력사의 한페지를 읽고 갑니다.
결실의 이가을,항상 풍족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서로를 다독일수 있는 넉넉함으로 살아갈게요.
시내산님두 행복한 목요일 보내세요.
고맙습니다. 아름다운 꿈도 아름다운 꿈을 꾸세요
우리민족의 력사이야기를 알게되였네요.좋은글 즐감하고 가요.
고맙습니다.
재밋게 엮은 력사이야기네요.즐감하였어요.
고맙습니다
잘 보고 가내요 지난 선조들의 삶의 애환을 그대로 느껴보았습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