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들에게는 부처님(붓다 Buddha)이 신행(信行)의 목적이고 살림살이의 중심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자(佛子) 혹은 불교도(佛敎徒) 또는 불교신자(佛敎信者) 라는 명칭은, 부처님의 아들딸이나 제자 즉, 부처님을 부모나 스승처럼 여기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현대사회에서 보통 누구라도 불교공동체의 일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불자의 신분을 평가받는 객관적 근거로서는, 불교계의 율사(律師) 또는 법사(法師)로부터 최소한 삼귀의계 (三歸依戒) 내지 오계(五戒)를 받거나 보살계(十重四十八戒)를 받은 재가자로서 신행생활을 하거나, 나아가 출가하여 사미(니) 십계(十戒) 내지 비구(니) 이백오십계(二百 五十戒) 등을 받고 수행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기본적인 소양은 삼귀의 즉, 부처님(佛)과 그 가르침(法) 및 그 제자공동체(僧)에 돌아가 의지(歸依)하며 기본윤리인 계행을 지키고, 그 가르침을 배우며 실행하려는 의지를 갖고 살아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자격과 임무는 각자 수계 등으로 정해진 분한에 맞추어 역할과 책임이 분담되어 있는 바, 각자의 수행과 공동체 및 세상에 합당한 기여를 할 것이 기대하는데, 재가불자들은 세속에 머물러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불교적 세계관과 가치관 및 생활관을 갖고 계행과 자선을 베풀어서 스스로의 수행 및 공덕성취와 불법수호하기에 힘쓰며, 출가자들은 계율 실천과 교법공부 및 참선 수행 등에 전념하여 개인적 성취는 물론, 재가불자 및 세인들에게 모범이 되어 이끌고 가르치는 책임도 질것이 요청됩니다. 불자 모두 각자의 분한에 맞는 처신과 수행 및 공동체를 위한 내적인 자각과 수행이 필요하며, 외적으로 그 의지와 수행결과의 나눔 및 불교계와 일반사회에서 불교인다움으로 솔선수법이 되어야 할 줄 압니다. 여기서 불교인 각자의 공부와 수행으로 지혜를 성취하고 인격을 실현함이 본체적이고 내면적이라면, 그 내공이 자비로 표현되어 불교 공동체와 사회인들에게 이익과 평안을 실현함은 방편 응용적이고 외면적인 것으로, 이 둘은 표리관계 즉 겉과 속의 인연과 기능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안으로 본체가 충실하면 밖으로 나타나는 것도 충실하고, 그와 반대로 속이 부실하면 겉으로도 실없이 보일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에 속이 부실하면서도 겉으로 그렇지 않게 보이려 한다면, 그는 부자연스럽게 보일 것이고, 이른바 실상을 은폐하고 단순히 남을 현혹하려는 쇼를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대승불교의 주요경전인 <<화엉경>>의 요지를 시적으로 표현한 의상스님의 <법성게> 가운데에. “이사명연부분멸(理事冥然無分別)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사(理事)는 도리 또는 원리(原理)와 사상(事相)을 가리키며, 이는 내면적 본체와 외면적 응용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안과 밖, 겉과 속이 나눌 수 없는 하나임을 가리키며, 속 마음이 몸 행동으로 나타나니, 그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하나 또는 연속이나 연장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理)와 사(事의) 원만한 성취를 내적으로 십불 즉 여러 부처님들의 지혜 및 원력성취와 외적으로 보현 즉 여러 어질고 자비스러운 보살행으로서, 큰사람의 훌륭한 인격으로 표상한 줄 압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이나 속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뜻과 다르게 말과 행동이 벌어졌다면 그는 시스템 난조의 사고로서 착란 변괴라고 하겠지요. 아니면 누군가 그 인과상황을 교활하게 조작했거나 속이려고 했을 것입니다. 불교인이라고 하면서도 불교인다운 용심과 언행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한 불교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고, 불교인이 아니라고 하지만 불교인다운 언행을 한다면, 그는 익명의 불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근래에 적극적으로 신행생활을 하는 재가불자들이 비록 삭발까지는 않고도 법복(法服) 즉, 탈속한 옷으로서 이른바 전통적인 ‘먹물옷’을 입고 사찰에 출입하거나 법회에 참석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 분들은 신심과 정성으로 언행을 삼가하고 조심하며 불자로서의 성실한 태도를 보이려 한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출가 수행자들은 당연히 삭발염의하고, 분한에 맞는 가사와 법복을 착용하며 여법한 위의를 갖추려 하겠지요. 그러나 분한에 합당한 공부와 수행 즉 내공이 충분히 쌓이지 않았으면 그 언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도 어쩔 수 없는 실정이지요.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모두다 분한에 맞는 또는 그 이상의 계율을 지키고 불교공부와 수행을 하여, 자신의 언행과 삶으로서 본분을 올바로 표현하고 불교인의 정체성과 사명을 실현해야 할 줄 압니다. 근자에 불교관련 법인이나 종단에서 불교인답지 않은 행태로 불교의 이미지를 해치고, 기대를 저버리는 언행으로 세상을 실망시키는 소식들을 들을 때마다, 공동체의 한사람으로서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느끼곤 합니다. 과거 세존께서, 말세에 마군들이 당신의 제자처럼 가사를 입고 불법을 훼방하리라고 경고하셨다는 말이 절집안과 세상에 돌며, “진승은 하산하고 가승이 입산한다.” 즉, 참된 승려는 절을 떠나고 가짜 사이비 승려가 절에 들어간다는 부조리한 현실을 개탄하는 소리도 들려옴에, 몸 둘 곳을 찾기 힘든 지경입니다.
슬프다! 말세 현상 심각하구나. 불법을 말할만한 사람 없구나 (深嗟末法實悲傷 佛法無人得主張) 공부도 안하고서 설법을 하고, 수행도 못했는데 법상에 앉네 (未解讀文先坐講 不曾行脚便陞堂) 돈 들고 절 구하니 미친 개 같고, 빈속의 높은 마음 짐승과 같네 (將錢討院如狂狗 空腹高心似啞羊) 엎드려 권하노니, 뒷사람들아! 이러한 작태 접고 지옥 면하라! (奉勸後賢休繼此 免敎地獄苦時長). 필자가 한글로 번역한 영지원조(靈芝元照, 1048~1116) 율사가 진정한 주지 노릇에 힘쓰기[勉住持]를 바라면서 경계한 게송입니다. 여기서 주지란 요즘과 같은 의미의 사찰행정책임자 사판 주지가 아닙니다. 바른 법(正法)에 머물러(住) 그를 가지고(持) 교화하는 정신적 법사를 가리깁니다. 근래에 보이는바, 크고 작은 많은 절의 주지들이 자질과 소양이 부족하면서도, 세속적 자본주의에 물들어 금전적 뒷거래를 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자리를 차지하여, 포교 전법 교화의 본분보다 사리사욕 추구에 혈안이 됨을 수백 년 전에 내다보고 걱정을 읊었는지 모르겠네요. 차제에 불교인 모두 함께 참회하고 성찰하며 청정 정법교단을 이루는데 탁마와 협조를 다짐하고, 안거 정진하여 내공을 쌓는데 힘씁시다. 그래야 자신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누릴 수 있고, 밖으로 훌륭한 불교인다움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념과 사업이 둘이 아니니, 불교적 지혜와 자비 이념을 생활 속에 구현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연기와 중도의 이치를 깨치고 터득하여 임제선사가 가르치신 “수처작주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즉, 각자 처한 입장에서 주인처럼 책임감을 갖고 모든 일을 다 참되고 올바르게 처리하는 인물이 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불자로서 그 이름에 걸 맞는 인물이 되어, 겉과 속이 모두 충실하고, 배움과 삶, 말과 행동이 일치하며, 신뢰와 존경을 받는 불자가 되기를 서원하고 정진여야 하겠습니다. 속이 허약하여 열등의식이나 유치한 우월감을 갖고 밖으로 허세를 부리며 개인적 명리를 쫒고, 불법의 대의를 저버리며 악업을 짓는 사이비 불자들을 연민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수행으로 인격향상과 도덕 함양에 집중하여, 맑고 향기로운 삶으로 이웃들에게 불교적 감화를 줄 수 있도록 합시다. 불자 도반 여러분들 모두, 밖의 온갖 헛바람에 흔들림 없이, 안으로 본래의 성품을 보고 성스러움이 속으로 영글어가는 보람 크기 바라며, 이 여름을 건강하게, 성숙과 안정의 기회로 삼아. 알차고 시원하게 지내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무 본사 석가모니불! 제존보살 마하살! 마하반야바라밀! 가숭산 고성 아란야에서, 비구 진월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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