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하느님 사랑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시나이산 아래 집결하였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당신은 그들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당신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약 유지에 필요한 율법도 주셨습니다. 다만 과거 아브라함과의 계약 때는 이런 율법을 주시지 않았는데, 이스라엘에겐 왜 율법을 주시고 그 준수를 명령하셨을까요?
이는, 아브라함의 경우 일종의 선행상처럼 하느님 앞에서 증명한 충심에 대한 상급으로 계약이 내려진 것(창세 15,6; 느헤 9,8)인 데 비해, 이스라엘은 무상으로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원받아 하느님과 계약을 체결한 까닭에 이후 자신들의 충심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주신 여러 율법을 준수하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이때 주어진 율법 가운데 으뜸은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신명 6,5)이고, 그 다음은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레위 19,18)입니다.
이렇게 구약, 특히 신명기에서는 사랑을 율법으로 규정하지만, 사실 사랑은 내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지요. 예를 들어, 층간소음으로 피해를 주는 윗집 가족을 이제부터 사랑하기로 굳게 다짐한다고 해서 그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사랑을 즉각적인 감정 이상의 ‘함양해 갈 수 있는 것’으로 본 듯합니다. 레위 19,17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이는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랑 역시 노력으로 키워 나가야 한다는 뜻일 터입니다. 그런데 이웃은 눈에 보이므로 어려울 때 서로 도우며 사랑을 키울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증명하려고 오경의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 애썼고,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안식일에 불을 피우지 말라는 규정을 지키려고 요리도 하지 않고 전기 스위치도 쓰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영적 의미를 우선시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유다인들의 행동이 단지 몸에 밴 관습처럼 비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율법이 제정된 고대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이 점을 이해하는 데는 이집트의 아마르나(Amarna) 유적지가 도움을 줍니다. 아마르나에서는 옛 이집트와 가나안 사이를 오간 서신이 다수 출토되었는데요, 이에 따르면 가나안의 봉신 국가들은 ‘주군 파라오를 사랑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 임금 에사르 하똔과 관련된 기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거기서 에사르 하똔은 봉신 국가들에게 황태자인 아슈르바니팔을 ‘사랑하라’고 명합니다. 말하자면, 고대 근동에서 사랑은 ‘충성’을 뜻하는 일종의 관용어였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사랑의 의미도 분명해집니다. 이는 하느님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품으라는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해 한결같은 충심을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계약의 율법을 더 구체적으로 준수할 수 있습니다.
* 김명숙 소피아 -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박사, 광주가톨릭대학교 구약학 교수, 전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저서 「에제키엘서」 「예레미야서 1-25장」 「예레미야서 26-52장」 「구세사 산책: 에덴에서 약속의 땅까지」
[2024년 11월 3일(나해) 연중 제31주일 의정부주보 2면, 김명숙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