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백색(칸트를 공부하고 와서 옛날에 쓴 글이 떠올라서 옮김)
사유가 깊어지면 본질을 보려는 욕망이 꿈틀거린다.
본질은 무엇인가? 사유의 마지막 종착지이며 더 이상의 의심이 닿지 않는 곳, 이데아, 최고 선(善), 무소부재하고 전지전능하며 무오하고 완전한 것, 모든 인식의 결과물들을 참인지 그릇 된 것인지 판정을 내릴 수 있는 단하나의 본질은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
본질이 오직 하나라면 인간들이 뱉어 놓는 사유의 산물들은 죄다 허접스런 쓰레기들이다. 본질의 세계가 현상의 세계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실존의 세계라면 선험자인 우리는 본질의 세계로 건너가는 길을 보여 주어야 한다. 또 쉬운 길을 마련하여 누구나 그 길을 오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바라보는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의 경험에서 형성된 자기만의 틀로서 인식 된다. 그러니까 십인십색일 수밖에 없다. 소통이 어렵다. 아니 예초부터 소통이란 불가하다. 억지로 소통을 시키려는 데서 인간사의 모든 문제가 발생된다.
종교는 본질이 실존의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의심을 불허하고 오직 믿음만을 강조한다. 기도만이 허용되고 기도만이 본질의 세계로 가는 수단이 된다. 아쉽게도 모든 종교, 종파마다 주장하는 본질이 서로 다르니 이미 종교가 본질 일 수는 없다. 종교는 자기가 신앙하는 본질을 확산시키고자 전도를 지상명령으로 삼는다. 본질을 위해 죽는 것을 거룩한 순교로 추앙한다. 종교전쟁은 그래서 일어나고 빛이 되어야 할 종교가 암흑세계를 만든다.
본질을 수호하다 죽는 것과 본질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더란 말인가. 본질이 누군가가 침해한다고 침해되는 것이고 누군가가 수호해야만 수호되는 것이라면 종교는 이미 본질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종교에 빠져드는 것은 그곳에는 위로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불안을 달래주는 한없는 위로가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본질은 관념의 세계라며 우리가 본질인 줄 알고 믿고 있는 지고의 선이란 것들에 대해서 끝없이 의심을 하고 사유하고자 한다. 아무리 의심을 해보아도 본질에 이르지를 못한다. 결국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일 수밖에 없으니 본질을 보려는 노력이 헛수고임을 실토한다. 그 심각했던 고민과 사색이 몽땅 헛수고라고 하기가 난감하니 나름으로 가설을 세우고는 그것이 본질이라고 말한다. 수많은 가설들이 난무하고 수많은 사상들이 태어난다. 사상은 사상일 뿐이지 본질은 아니다. 사상은 현란한 수사를 칼처럼 휘두른다. 멋있어 보인다. 사상에 목을 매는 어리석음은 수사가 주는 겉멋에 우리 인간들이 도취되는 때문이다. 종교마저도 사상이 만든 현란한 드레스를 입고 싶어 한다. 철학의 힘을 빌려서 자기가 믿고 섬기는 본질을 공고히 하고자 하나, 오로지 의심을 해야 하는 철학자는 오직 믿어야만 하는 성직자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정치는 자신에게 힘을 주면 아예 자신도 모르는 본질의 세계를 구현하겠다며 선동한다. 종교든 철학이든 모든 정신세계를 동원시켜서 원한다면 신(神)까지 만들어 줄수 있다고 떠든다. 정치가 잘한 게 있다면 종교로부터 칼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은 일이고, 철학으로 하여금 권력에의 의지를 포기토록 한 일이다. 모든 종교들이, 그 많은 사상들이, 자기가 내세우는 본질을 오로지 옳다고 믿고 이 땅에 구현하고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본질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자신을 미완이라 여기는데서 출발한다. 인간의 오욕칠정이 극으로 치닫는 이유는 완성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스스로를 미완이라 여기고 어딘가 따로 존재하는 완성을 찾으려는 몽매함에서 발현한다. 무언가를 믿어야 하고 그 믿는 하나를 절대진리로 신앙하고 그걸 향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려는 욕구는 결국 유한성을 자각한 인간의 완성을 향한 욕구이다. 그 욕구 때문에 인간은 힘을 모으고 그 모은 힘 때문에 파멸한다.
새들은 짐승들은 자신을 미완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만족한다. 완성된 것은 이미 더 이상의 힘을 필요치 않는다. 힘을 모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거기에 있다. 전체를 하나로 모아 획일화 시키면 세상은 숨도 쉴 수 없는 암흑천지가 된다. 그래도 사람들은 마음을 모으고 힘을 모으고자 한다. 그 모은 마음을 누구에게 맡기고 어떻게 통제할지는 생각조차도 않은 채-.
세숫대야에다 비누를 풀고 보릿대를 담가 살살 불면 방울방울 수만큼 많은 세상들이 바람에 둥둥 떠서 날아간다. 무지갯빛 영롱한 방울을 타고 내려다보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비눗방울 속의 세상은 또 얼마나 포근할까. 비눗방울 속의 세상과 비눗방울 밖의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니 그 얇은 막을 벽이라 하기도 하고, 길 없는 길이라 하기도 하고, 천만 길의 단애라고도 한다. 경험의 세계에서 사유의 세계로 그리고 더욱 깊어지면 마지막에는 관념의 세계로 그러다가 문뜩 깨어나 다시 경험의 세계로, 얇은 그 막이 터지면 역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보이는 그대로가 진리) 일 뿐인 것을-
본질은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라 근원을 모르는 곳으로부터 생성된 방울방울들이 바로 본질이란 생각이 든다. 하나는 전부를 또 전부는 하나를 포용하면서 쉼 없이 변화해 나가는 것이 본질이고 지고선이란 생각이 든다. 수필가에게서의 사색은 오직 하나로 귀의해야 만 할 본질을 궁구하는 데 있지 않고 자기가 본 자기만의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수필은 소통의 문학이라기 보다 이해의 문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각자가 인식한 세상을 서로가 경탄하면서 그 보드라운 막이 터지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보호해 주면서 함께 꿈을 꾸어나가야 본질의 세상을 볼 수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오늘도 나는 내가 본 세상을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를 고민하며 수필에 빠져 있는데 나는 일인이면서도 백색이다.(원고분량 200자 원고지 13.9매. 2008. 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