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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선희 목사
H.G. 웰스라고하는 작가의 '대 주교의 죽음' 이라고 하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서 설명해주는 아주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대 주교는 날마다 습관처럼 대성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꼭같은 말로 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오늘 내게 말씀하소서." 이것이 그의 기도 첫 문장입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오늘 내게 말씀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한평생 수십 년을 기도를 드렸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오냐, 무슨 일이냐?" 이 소리를 듣고 그는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이여 말씀하소서" 하면서도,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실까?" 그 많은 시간 기도하면서도, "정말 기도가 응답되는 걸까?" 어쩌면 기도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자기 감정을 순응하는 이 정도에 그치는, 소위 말하면 추상적이고 감상적 신앙이라 말입니다. 여러분 예배하고 기도하고 믿고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얼마나 현실적입니까? 얼마나 내 생활 속에 확실하게 응답된다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기다린다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깊은 아주 깊은 오묘한 말씀이올시다. 하나님이 기다리신다. 그는 능력이 많고 그는 지혜가 많습니다. 그런데 왜 기다리는 겁니까? 그는 창조주입니다. 그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왜 기다림이라고 하는 고통을 택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자 보세요. 가지고 싶지만은 지금 갖지 못하니까 돈을 벌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내가 무능해서 할 수가 없으니까 기다려야지요.
우리는 기다려야 됩니다.
부득불 기다릴 수밖에 없는 그런 나약함, 그런 불가피적 상황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거든요. 능력이 많으세요. 하시고 싶은 일은 해요. 언제나 하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 섭리자 하나님, 도대체 무엇을 기다린단 말입니까? 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얼마동안이나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 뜻을 자제하시고 그 행사 속에서 왜 그 많은 시간 기다리고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 그의 편지 디모데후서 3장 8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그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죽기에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 일을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기다림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년 같이"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릴 때는 하루가 천년 같아요, 어떨 때는 천년이 하루 같아요. 이런 시간 그 관념을 초월해서 완전하게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왜 이 기다림의 고통을 선택하셨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을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주 쓸모없는 자로, 아주 구제불능한 자로, 아주 끝난 그런 존재로 대하지 않고 아직도 가능성을 두고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죠.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다고, 있는 존재라고 인정해 주시는 거 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여러분 결혼생활하고 뭐 이렇게 시작하고 가만히 보면 어떤 분들은 한 삼십년을 참았다가 이젠 더 못 참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왜요? 기다릴게 없으니까 이제는. 기다려 봤자 뭐 이제 싹이 노란데 뭐. 그렇게 생각하고, 절망하고, 실망하려고 그러는데, 그건 참으로 인격에 대한 최고의 모독입니다.
저는 늘 얘기합니다. 신랑, 신부들에게 늘 얘기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실망이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절망이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그건 마지막 말 이라고. 아직도 나는 너를 기다린다.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얼마나 위대한 사랑입니까?
얼마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겁니까?
기다림!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고통을 스스로 감수하시면서 우리를 기다려 주십니다. 심판을 멈추시고 다음 때를 기다립니다. 다음 시간을 기다립니다. 오래오래 천년이 하루같이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건 곧 은혜입니다. 성숙하게 되기를 기다립니다. 깨닫고 성장해서 어느 수준에 도달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큰 회사에서 그 신입사원 모집하는데 아주 지혜를 냈다고 합니다. 요새 회사 직원하나 잘못 쓰면 회사 거덜나거든요. 보통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을 채용한다는 거. 아 그래서 "사람을 자 써야 되겠는데, 어떻게 좋은 사람을 고를까. 성적표대로 되는 건 아니요, 물론 IQ도 아니요. 사람됨을 어떻게 바로 심사 할 수 있을까?" 하던 중에 그 시험을 보러온 사람들, 마지막 시험을 보러 온 사람들, 아주 우수한 사람들을 한 방에 놓고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인터뷰 몇 시부터 합니다." 해 놨거든요,
그리고 한 시간을 두었어요. 그러니까 한시간 동안 처음에는 조용히 있다가 "왜 시간이 늦지?" "왜 말이 없지?" "왜 이거 뭘 하는 거지?" "아 이거이거 왜들 이러는 거야?" 하고 하나씩 둘씩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초조해서 어떤 사람은 몸을 동동 구르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고, 손가락을 만지고. 서로가 이러는 시간에 한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 동안에 그 기다리는 시간을 전부 녹화를 해 뒀습니다. 한 시간 후에 "인터뷰 끝났습니다" 거기서 사람됨을 충분히 고를 수가 있었어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어떻게 기다려야 합니까? 어떤 모습입니까?
'그럴 일이 있겠지. 뭐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겠지' 하고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그 자세, 대단히 중요한 것이에요. 이게 바로 EQ지수가 높은 거예요. 자 여러분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저는 박학전 목사님 이라고 하는 저희 목사님, 제가 인천에서 목회 할 때 협동 목사님 이셨어요, 나이 많으신 어른인데 그렇게 목회를 많이 간접적으로 도와주셨는데, 가끔 그 집에 이렇게 초대받아서, 방문했을 때 보면 목사님이 연세가 높으시고 아주 참 귀한 어른인데 너무 외롭고 그래서 손자 하나를 데려다 키웠는데, 아 이놈이 말이죠, 밖에 나가 놀다 들어와선 버릇이 없어요. 자기 할아버지를 발길로 차면서 "이 새끼, 이놈" 별소릴 다 해요. 그래도 할아버지는 좋다고 끌어 안아줘요. 난 이 장면을 너무너무 아름답게 봤어요. 그래 제가 한마디하죠, "아니 천하의 저렇게 무례한 놈, 할아버지를 발길로 차는 놈을 왜 사랑합니까?" 그랬더니, "그건 몰라서 그러는 건데, 애가 지금 이놈소리가 무슨 소린지, 님 소린지 놈 소린지 그건 알 바 아니요. 자기 딴에는 이거 내가 웃어주니깐 좋아하는 줄 알고 더 좋아 한대요." 그러면 자 이제 남는 일은 무엇입니까? 얘가 그 뜻을 다 알 때까지, 철이 날 때까지 기다려 줄 수밖에요. 이걸 즉각적으로 심판을 해야 되겠습니까? 기다려 주는 거죠, 그것이 사랑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예요. 기다려 주는 거. 딜레이(Delay) 라고 하는 거, 사실 우리가 지연된다는 건 참 괴로운 것이에요. 약속이 지연되고, 무슨 일이 자꾸 늦어지는 것 참 어렵지만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려 주실 때, 그 지연됨, 이 속에는 위대한 사랑이 계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걸 모르면 원망과 불평에 치우치게 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지극히 사랑했던 나사로의 집이 있습니다. 오빠와 누이동생 둘, 이렇게 사는 가정으로서 어쩌면 예수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가정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저들도 예수님을 제일 많이 사랑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빠되는 그 집의 기둥입니다. 오빠가 병들었습니다. 누이동생들이 사람을 보내서 좀 빨리 와서 저희 오빠를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안 갔습니다. 안 가시고 죽을 병이 아니다 그러고 안 갔습니다. 지연됩니다. 나흘이 지연되는 가운데 오빠는 죽었습니다. 장례까지 치렀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저들은 마음에 지금 불만이 많습니다. '왜 오라고 할 때 오시기 않았습니까? 왜 내가 구하는 그 시간에 오시지 않았습니까? 장례가 끝나서 냄새가 나는데 지금 오시면 뭐하러 오셨습니까?' 복잡합니다 생각이.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일찍 이 자리에 오지 아니 한 것을 기뻐하노라" 왜요? 병상에서 일으키질 않았고 무덤에까지 들어간 자를 뒤에 끌어냈습니다.
어느 쪽이 더 큰 은혜입니까? 어느 쪽이 더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런고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지연 작전을 씁니다.
이 기다림,요 기간을 못 참아서 마르다가 주님 앞에 실수하는 걸 볼 수가 있어요.
"환란의 떡과 고생을 물을 마시며"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환란의 떡과 고난의 물을 마시게 하면서 기다립니다. 여러분 너무나 잘 아는 탕자의 비유도 보십시다. 저는 탕자의 비유를 볼 때 몇 가지를 생각합니다. 제일 궁금한 것은 그 아들을, 왜 가출을 아버지가 도와줬나 하는 겁니다. 그 못된 아들. 성경에는 간단하게 '유산을 받아 가지고 갔다.' 이렇게 돼있지만은, 그렇게 까지 되기까지에는 오죽이나 못되게 놀았겠어요. 그냥 용돈 있는 대로 써 버리고 써 버리고, 많은 사건이…… 마지막에 "아버지 죽을 때에 네게 줄 유산 미리 주세요." 이 말까지 아버지는 들어주었습니다. "그래 어차피 네 거니까 가져가라." 그 재산을 떼 주는 삼분의 일을 잘라주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 보세요. 이게 기다림입니다. 시간적으로만이 아니고, 그의 인간됨을 기다리는 것이에요. 아버진 뭘 생각합니까? "이 재산 다 날려도 좋으니까, 부디 내가 바라는 좋은 착한 아들이 되어 다오. 아들이 되어서 아버지 소리 좀 하고 돌아와 다오." 그거 아닙니까? 그날을 기다리며 아버지는 여기에 엄청난 것을 투자했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계시된 것이에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은 과원지기가 무화과를 심어놓고 열매 열리기를 기다렸다. 삼년을 기다렸다 하는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해하길 되기를 특별히 아주 겸손해져서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에요. 여러분, 은혜 입었다고 은혜가 됩니까? 내가 겸손할 때만이 은혜가 은혜 됩니다. 내가 온유한 마음, 참으로 착한 마음이 되기까지는 어떤 은혜도 내게 은혜 될 수 없는 것이에요.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되기를 회개하고 믿음에 서서 모든 정욕을 버리고 아주 빈 마음으로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게 되기를 그리고 그 깊은 사랑의 뜻을 깨닫고 감사 감격하게 되기를 하나님은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은혜 베푸시기 위함이요. 심판을 위해 기다리는 게 아니요, 두고보자. 잘못되면 다 진멸하리라. 그 날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은혜 베풀기 위하여 은혜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비라고 하는 건 참 좋은 거 아닙니까?
비가 와야죠. 그러나 폭우가 쏟아지면 이건 망하는 겁니다. 조용하게 땅이 흡수할 만큼 봄비처럼 이렇게이렇게 비가 와야지 그대로 장대비가 막 쏟아지면은 다 무너지고 마는 거예요. 비는 중요합니다 만은 정도에 맞게 와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시냇물이란 언제나 아름다운 게 아닙니까? 그러나 물이 범람해서 홍수가 되면 다 쓸어버리고 마는 거지요.
아무리 하나님의 귀한 은혜라고 하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때는 절대로 은혜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감당할 그날을 주님은 기다린단 말입니다. 이제 생각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기다림을 알고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다림을 함께 기다리고 하나님을 우리의 대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기다리는 것과 나의 기다림의 초점을 맞춰야 되요. 그가 내 인격의 성숙을 기다린다면 나도 그날을 기다려야죠. 부자 되기를 기다려선 안돼요. 잘 살게 되기를 기다려서는 안돼요. 그는 우리가 진실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교만하기를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성공을 기다린다는 말이 이거는 하나님 앞에는 별 관심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기다림, 그 뜻을 똑바로 알고 마음과 마음이 하나로 통해야 됩니다. 소망과 약속! 그날을 기다리는 겁니다. 은혜의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에 그가 종종 출석하던 워싱턴D.C. 의 뉴욕 에비뉴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의 조셉 C. G.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가 어떤 기간에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펴놓은 성경을 옆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 낡은 성경에 그리고 그 성경을 여러 번 손으로 짚어서 그 손자국이 많이 나고 눈물자국이 있는 성경 한 페이지를 눈여겨 볼 수 있었답니다. 그것은 시편 37편 7절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그것을 수없이 읽고 명상했다는 흔적을 그의 성경에서 읽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끝까지 참아 기다릴 것입니다.
그가 은혜 베푸실 때까지, 또 나는 은혜 베푸심을 받을 수 있는 그 수준에까지 도달하도록 기다리겠다. 하나님의 기다림의 뜻을 알고 충분히 이해하고 나면 나의 기다림은 아주 쉽게 됩니다.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안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릴 것입니다. 저 앞에 있는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그의 그 거룩하신 시나리오 속에 오늘 내가 있어요. 오늘의 내 사건이 있어요. 이건 절대로 우연이 아니요, 그런고로 조용히 그날을, 그 시간을 기다릴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한번 교육학적인 그런 책을 조금 읽다가 한마디 뜻을 찾고 제가 아이들을 키울 때 그렇게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진작 이렇게 했으면 참 좋았을 것인데' 하고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지금은 손자, 손녀들에게 그 방법을 그대로 하려고 이렇게 애를 쓰고 또 어머니들에게 부탁을 해 봅니다. 그게 뭐냐면 기다림의 훈련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도 가르쳐야 됩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닙니다. 기다리는 자세, 그것을 훈련시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뭘 달라고 하면 말입니다. 대체로 즉시 주는 것도 있지만은 중요한 것들은 절대로 바로 주지 말라는 거지요. 뭘 달라고 하면은 "내일 준다" 그래요.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고 "한 밤 자고 나면 내일 아침에 준다." 이렇게 딱 한마디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아무리 울어도 주면 안돼요. 하고 하룻밤 자고 난 다음에 "아이들은 다 잊어버렸지 벌써?" "너 어제 나하고 약속했지?" 하고 이것을 줍니다. 그 다음에 얼마 있다가는 또 두 밤 자면 준다, 그 다음엔 세 밤 자면 준다, 일년 후에 준다 이렇게 약속해서 약속을 기다리고, 그 성취의 날을 맞는 그런 기쁨을 가르쳐야 되요. 그런데 우리는 약속 했다가도 지금 안 된다고 했다가도 발버둥치고 울면 "옜다 가져라 모르겠다" 완전히 버리는 거래요. 울면 되더라, 발버둥치면 되더라, 이거는 무서운 거예요. 이게 바로 오늘과 같은 무서운 세상을 만든 거예요. 폭력이 통하지 않습니까? 폭력은 안 통해야 되요. 잘못된 소원은 절대로 이루어져선 안돼는 거예요. 아버지가 안 된다면 안돼는 거예요. 이걸 가르쳐야 되는데 되는 것과 안돼는 것이 있는데 안돼는 것이 있다는 걸 가르쳐야 되는데 이걸 못 했어요. 그건 약속으로 대체하는 거예요. 이걸 못 가르쳤던 거예요. 이걸 훈련을 받아야 되요. 그래서 이 훈련이 되면 보세요. 외국 가서 보면 무슨 일을 하나 줄서잖아요. 줄 서놓고서 거기서 서둔다고 되는 겁니까? 가만히 기다리잖아요. 마냥 기다려요.
사실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은 미국서 공부 할 때, 뭐 '조스' 라고 하는 영화 있지요. 그 영화를 보러 간다고 미국 학생들이 야단을 하더라고요. 그래 저녁에 공부 마치고 11시에 가자고. 아 그래 도서관에서 공부마치고 나오는데 하도 가자고들 그래 나도 따라나서 봤지요. 이 사람들 금요일 날 저녁에 영화구경 가는걸 알기 때문에 따라가 봤는데요,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나 줄을 길게 섰는지 표를 사지도 못하고 서있는 거예요. 보세요. 다 보고 나온 다음에 또 기다리고 기다렸어요. 제가 3시에 봤어요 영화를. 그런데 돌아가는 사람도 없어요. 밤중에 그 영화간 앞에서 3시간 4시간이죠 11시부터. 그리고 아침에 돌아왔습니다. 나는 어디 어떡하나 보자 하고 끝까지 기다려보고 아주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대단한 사람들이라고요. 아 별것도 아닌 영화 하나 보겠다고요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기다려서 보고 나오면서 나는 영화는 생각이 안나요. 기다리던 생각만 나요. 그겁니다. 바로 우리가 이것이 없어요. 조급해서 그저 욕을 하고 저주하고 폭동을 하고 미치고 왜 이 모양이 된 겁니까 이게? 기다리는 훈련이 없어요, 기다리는 성품이 없어요, 또 기다림에 대한 믿음이 없어요. 미래 지향적인 약속을 놓고 그리고 오늘을 살아갑니다. 여러분 얼마나 중요합니까. 기도 응답은 세 가지로 온다고 합니다.
첫째는 "그래라" 하는 응답이 있고요, 즉각적으로 응답하시는 게 있고.
또 하나는 "버려라! 네 소원 잘못됐으니 생각을 고쳐" 이게 응답이에요.
세번째 응답은 "기다려, 때가 될 때까지. 그 어느 때까지 기다려라"
그러면 그것도 응답이에요. 기다림 그 자체가 응답이라는 걸 알아야 되요. 그것이 행복이어야 되요. 그것이 즐거움이어야 되요. 기다린다는 것이 그 자체가 내게는 큰 행복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이니까요. 사랑이니까요. 사랑에 대한 진실한 응답이니까요. 여호수아 7장 13절에 "스스로 성결케하고 내일을 기다려라."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