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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5-21
별명이 붙는 믿음 / 김창인 목사
오늘 여호수아 6장 15절에서 21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별명이 붙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도저히 별명을 붙일 수 없는 믿음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살 때 그 별명이 붙는 사람이 있고 전혀 별명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별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별명은 자기 자신이 짓는 것이 아니라 남이 지어주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지을 별명이 없습니다. 어떤 부분에 대해서 좋다든지 훌륭하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주 나쁘든지 하게 되면 그것을 이유로 해서 별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도 좋은 별명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하면 좋지 않은 별명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별명으로 지어졌는데 나중에는 좋은 별명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더라'고 하는 말의 뜻은 본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좋은 의미로 지어준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들은 예수께 속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패거리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리스도인 이라 하면 얼마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쓰여지는 좋은 별명인지 모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별명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에도 별명이 붙는 믿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평범하다보면 붙일 별명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라 믿음에 어떤 별명이 붙었으면 좋겠는가를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순종이라는 별명 (15-16)
교인 중에는 매사에 주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을 믿은지 30년이 되었다고 하면서도 전혀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별명을 지어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순종이라는 별명이 붙는 믿음이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후에 사사시대가 지나가고 왕정시대가 됩니다. 왕정시대의 첫번째 왕이 사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 족속을 치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내어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가 정착하기 까지 아말렉 사람들이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떠나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정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는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스라엘을 훼방하고 제동을 걸고 괴롭힌다는 것은 하나님을 괴롭히고 하나님께 훼방을 놓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아말렉 사람들이 한 행동을 그냥 넘길 수가 없고 반드시 짚고 넘어 가야겠으니 그 아말렉을 너희가 진멸하라. 아말렉을 치는데 숨쉬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진멸시켜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씨를 말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울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아말렉을 쉽게 이겼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탐이 났습니다. 그 살찐 송아지와 양들을 죽이는 것이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좋지 않은 것들만 죽이고 좋은 양이나 송아지는 다 끌고 왔습니다.
그 때 그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저 양과 소의 우는 소리가 무엇입니까?"라고 사울에게 묻자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제물로 쓸려고 살려 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못들은 척하고 거역하는 이 거역이 무엇인지 하십니까? 거역은 사술의 죄와 같고 아무리 제사가 좋다 할지라도 순종보다 더 좋을 수는 없고 순종이 오히려 제사 보다 낫고 순종 없는 제사는 우상에게 절하는 우상숭배와 똑 같은 것이니이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그 자리에서 버리십니다. 얼마나 심각한 문제이기에 사울이 그것 때문에 버림을 받았겠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일주일 동안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주일마다 목사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지난 주일에 설교의 제목이 생활의 제목이요, 기도의 제목입니다. 그런데 제목조차 잊어버리고 일주일 동안 제 멋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알 바가 아닌 것처럼 살다가 주일에 나와서 한 시간 예배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복을 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내 믿음생활은 이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드리는 예배가 우상에게 절하면서 복을 비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우상에 대하여 나 몰라라 하고 살다가 우상에게 제물을 차려놓고 빌면서 복이란 복은 다 달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순종이 없는 제사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신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당만 밟고 왔다 갔다 할 뿐입니다. 순종이 없는 제사를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십니다. 순종이 그렇게 귀한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순종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고 순종에서만 믿음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순종은 믿음의 별명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을 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깊은 진리입니까? 여기에서 행함이라는 말을 순종으로 바꾸어도 좋습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은 순종과 함께 일하고 순종함으로 믿음이 온전해 진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전부 순종할 수는 없어도 하나씩 하나씩 순종해 나가면 믿음이 온전해 집니다. 순종을 빼고 나면 쭉정이가 되고 껍데기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 빈 껍데기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순종은 믿음의 좋은 별명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5절에서 16절을 보면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번 도니 성을 일곱번 돌기는 그 날 뿐이었더라 일곱번째 돌고 난 후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광야 생활을 끝내고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넜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보니 앞에는 철옹성 같은 여리고 성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마 어마한 이 성을 점령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 성을 그대로 놓아두고는 가나안을 점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너희들이 7동안 여리고 성을 돌되 첫째 날에 한바퀴 돌고, 둘째 날도 한바퀴 돌고, 여섯째 날까지 여리고 성을 한바퀴씩 돌아라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일곱번을 돌라"고 하셨습니다. 모두 13번 아닙니까? 일주일 동안에 그 큰 성읍을 돌고 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뙤약볕 속에서 성읍을 돌아갑니다. 그러면 성읍이 무너진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소가 웃다가 망태가 터질 일입니다. 망태가 무엇인지 모르실 것입니다. 시골에서 소를 먹일 때 그 소를 이 끌고 곡식 밭 곁을 지나가면 소가 자꾸 곡식을 뜯어먹기 때문에 망태를 씌워 놓습니다. 소가 너무 우스워서 입을 크게 벌리다 보니 망태가 터졌다는 말입니다. 엉터리 소리를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세상에 그런 성이 몇 바퀴씩 돈다고 어떻게 무너지겠습니까? 맹랑한 소리 같고 엉터리 소리 같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왜 그 성을 그렇게 돌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돌라하셨으니 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니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순종은 이스라엘이 하였고 순종하고 난 뒤의 일은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순종은 우리가 할 일이요,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렇게 이틀을 돌고 삼일을 돌았습니다. 어떤 징조가 있었습니까?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네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다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열세바퀴를 돌기까지 즉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믿고 그대로 순종했더니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순종은 제사 보다 낫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반드시 순종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순종하게 되면 거기에 기적이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이미 믿음이 아닙니다. 혹시 이것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써먹지 못할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별명은 오직 순종뿐입니다.
멕시코에 가면 쿠이케텍이라고 하는 인디안 족속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선교사가 파송되어 갔습니다. 카나다나 미국이나 남쪽 멕시코에는 인디안 족속들이 한두 족속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족속이 이곳 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원래는 한 족속이었지만 오랜 기간 동안 나누어져서 살다 보니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선교사가 그 곳에서 전도를 하려고 하면 말을 배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가능하면 성경을 번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날 이상한 낱말을 발견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내가 너를 믿는다고 하는 믿음이라는 말과 추장이 명령하면 순종한다라고 하는 말이 똑같은 단어로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즉 믿음과 순종이 같은 단어였습니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 순종한다는 말로 쓰고 또는 믿는다는 말로 썼습니다. 그 선교사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하고 물어봤습니다. "우리가 믿으니까 순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순종한다면 벌써 믿는다는 증거가 아닙니까?"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거기에서 선교사가 큰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신약성경을 쓴 원문이 되는 헬라말도 '믿는다'와 '충성한다'는 말의 어근이 똑같습니다. 그 뿌리를 찾으면 똑같은 말인데 믿는다와 충성한다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충성은 절대 따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믿으면 반드시 충성하게 되어 있고 충성한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꼭 마찬가지로 순종한다는 것은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믿음은 반드시 순종으로 표현이 되고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이 거기에 나타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일주일 동안 오늘의 본문을 생활의 제목으로 삼으시고 철저하게 순종하시고 여러분들의 생활 속에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이 꽃피어 열매 맺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구원이라는 별명 (17)
믿음은 반드시 구원으로 나타납니다. 믿는데 구원을 못 받았다고 하다면 믿음이 잘 못 되었거나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순종으로 나타나는 것과 똑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오게 되면 몇 마디의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그 사람들은 분명히 문제가 있어서 나왔습니다.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이 병원을 찾아다니면서 치료를 받느라 고생을 하였고 있는 돈을 모두 허비하고 증세는 더 심해져서 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나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더니 예수님의 옷자락을 통해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향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믿음이 구원한 것입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이 여인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즉 믿음이 구원했습니다. 또 가버나움의 죄 많은 여인은 비록 병이 들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죄 때문에 고민을 했습니까? 그럴 때 예수님 앞에 나와 꿇어 엎드리고 눈물로 회개했더니 마지막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병자에게도 죄인에게도 똑 같은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소경으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소경으로 살아왔던 바디매오라고 하는 소경도 예수님의 앞에 나왔더니 똑같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믿음과 구원은 하나입니다. 결코 둘이 아닙니다. 내가 30년 동안 예수를 믿고도 구원의 확신이 없다, 혹은 구원을 못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기 까닭에 예수를 믿어도 기쁨이 없고 예수를 믿어도 감사를 못하고 충성을 하지 못하고 '너도 나처럼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증거를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얻었다는 확신이 있을 때 '너도 나처럼 예수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증거 할 수 있고 감사하고 충성하고 헌금하면서도 즐거워 할 수 있고 예배 시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믿음은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믿음의 별명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7절을 보면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23절을 보면 '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내어 그들을 이스라엘 진밖에 두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설명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돌고 돌기 이전의 일입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하려고 하게 되면 여리고 성에 대해서 샅샅이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일을 해도 알 것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변장을 시켜서 여리고 성안에 들여보냈습니다. 그 정탐꾼들이 샅샅이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간첩이 나타났다고 신고가 들어갔습니다. 군병들이 정탐꾼의 뒤를 좇습니다. 그 정탐꾼들은 도망을 하여 성벽 위에 있는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기생 라합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 라합은 이스라엘의 첩자인줄 벌써 알고 "우리는 당신들을 인해서 간담이 녹았습니다. 지금 겁에 질려서 야단이 났습니다. 당신들의 하나님이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였고 광야를 지나오면서 당신들을 대적한 족속들이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을 다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당신들에게 준다는 것도 나는 알고 믿습니다. 당신의 그 하나님이 분명히 당신들에게 가나안 땅을 줄 것입니다. 나는 확실히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 때 정탐꾼이 "그러면 우리를 숨겨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라합은 정탐꾼을 지붕 꼭대기에 숨겨 주었습니다. 즉 믿는대로 행동했습니다. 군병이 쫓아왔습니다. 라합은 "그런 사람들이 왔었는데 벌써 성문을 통해서 나아갔습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군병들은 정탐꾼이 도망했다는 곳으로 쫓아간 다음에 저녁이 되자 성문이 닫혔습니다. 붉은 줄을 달아매어 그 성벽에서 두 정탐꾼들을 내려보내면서 "산에 가서 숨었다가 저 사람들이 찾다가 찾지 못해서 돌아가거든 그 때 가십시오" 그 때 정탐꾼은 라합에게 "우리가 이 성을 점령하고 들어올 텐데 우리를 달아 내려준 이 붉은 줄을 반드시 창문에 매어 놓으십시오. 누구든지 이 집안에 들어 와 있으면 삶을 얻고 누가 잘못하여 당신의 생명을 해친다면 그 사람이 당신의 생명을 대신할 겁니다. 만약에 집을 벗어난다면 우리는 책임을 지지 못합니다"라고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정탐들이 돌아가 성을 7일 동안 돌고 성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고 침공하려고 할 때 여호수아가 하는 말이 1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은 기생 라합의 집안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손을 대지 말라. 그 나머지는 완전히 쓸어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붉은 줄을 맨 집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피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피의 십자가를 믿고 거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믿고 교회 생활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리고 성에 들어가서 진멸 할 때 기생 라합을 비롯해서 부모형제 친족까지 전부 구원을 얻지 않았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진리 그대로가 아닙니까? 그리고 기생 라합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을 영접했고 믿음으로 구원 얻은 기생 라합은 다윗의 고조모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할머니의 할머니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다윗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돈을 준다고 그 자리가 얻어지는 것입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철저하게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구원과 아울러 생각에 넘치는 축복을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믿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요,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틀림이 없습니다. 구원도 내가 받는다면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기 까닭에 확실합니다.
그랜드캐니언이라는 미국의 유명한 관광지가 있습니다. 끝이 안보이는 평야 같은 고원 지대에 땅이 몇백 미터씩 푹 꺼져 있습니다. 그 아래로는 콜로라도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거기에 인디안들이 살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지진이 크게 일어났을 때 지반이 약한 곳의 땅이 꺼져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반이 강한 즉 바위가 있는 곳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관경이 겹겹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광객 하나가 관광을 갔다가 실족하여 몇백 미터 벼랑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떨어지다가 정신차리고 무엇인가를 꽉 붙잡았는데 나뭇가지를 하나 붙잡았습니다. 쳐다보니 못 올라가겠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떨어지면 뼈는 가루가 되어 찾을 재간이 없게 됩니다. 위를 쳐다보고 "거기에 누구 없소 사람 살려 주시오"하고 소리를 질러 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내가 여기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내가 믿습니다. 주일날 교회도 나갔고 새벽 기도회도 이따금 나갔습니다. 성가대도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래서 그렇지 성가대 봉사도 했습니다. 헌금도 좀 하곤 했습니다" "네가 진정으로 나를 믿느냐?" "믿습니다. 저를 살려 주십시오" "그래, 그러면 네가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는 손을 놓아라" 여러분이라면 놓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놓으라고 하시는데 '믿습니다'했으면 놓아야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이 "그 위에 하나님 말고 또 다른 사람 없소?"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꾸며낸 이야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주는 교훈이 너무 큰 것입니다. 믿는 것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놓으라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난 박살이 날텐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맡기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뒷 책임을 지겠으니 놓으라고 하시는 것이지 뒤의 일에 책임을 못 지는데 놓으라고 하시겠습니까? 구원까지 내가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십시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나의 한계를 넘어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어디까지 공로를 세워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내 대신 죽었다고 하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뒤처리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고 구원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까닭에 구원은 믿음의 별명입니다.
승리라는 별명 (18-21)
우리의 믿음은 승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8절에서 21절을 보면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남녀, 노유 심지어는 양의 새끼까지 몽땅 진멸하셨습니다. 완전한 승리입니다. 백성들이 일곱 바퀴를 돌고 난 다음에 제사장이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 나팔소리를 신호로 하여 크게 외쳤습니다. 뭐라고 소리를 질렀는지는 모르지만 크게 소리를 질렀더니 그렇게 철옹성 같던 성벽이 와르르 다 무너졌습니다. 이쯤 되면 그 안에 아무리 정예군이 있다고 할지라도 간담이 녹아서 싸우지를 못합니다. 사기가 떨어져서 손을 들고 맙니다. 총을 들고도 몽둥이를 든 사람 앞에서 손을 들고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깨끗이 승리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힘이 강해서 혹은 전술 전략이 훌륭해서 이겼습니까? 현대적인 무기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이겼습니까? 100%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완전한 승리를 안겨준 것입니다. 우리도 정말 엄청난 일, 이것은 안된다 싶은 일도 하나님이 하라하시면 하는데 까지는 내가 할 일이요, 그 다음에 뒤따라 오는 승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요한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4-5)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대장 예수님께서 이기면 나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 예수님과 함께 이기는 것입니다.
블레셋 대장 골리앗과 이스라엘 대장 다윗이 일대 일로 싸워 다윗이 승리하지 않았습니까? 그 광경을 지켜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리 지르고 따라만 가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입니다. 대장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세상을 이겼습니다. 이기신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과 함께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6일 중동 전쟁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엿새 동안의 전쟁으로 시나이 반도, 요단강 서안, 골란 고원을 몽땅 다 빼앗지 않았습니까? 엄청난 것입니다. 그 때 국방 장관이 모세 다얀 장군이었습니다. 주위의 아랍족 3억 인구가 으르렁거리며 이스라엘을 지중해에 쓸어 넣겠다고 달려들 때 다얀 장군이 최첨단 과학의 상징인 컴퓨터를 가지고 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컴퓨터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컴퓨터에게 물어봤습니다. "저 아랍 족속은 3억이요, 우리는 3백만인데 싸우면 누가 이기겠는가?" 컴퓨터 가라사대 "이스라엘이 못 이긴다" 그 다음에는 자기네 이스라엘은 가만히 놔두고 아랍 족속만 절반으로 깎아 "1억 5천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컴퓨터 왈 "이스라엘이 못 이긴다. 싸우지 말아라" 거기에 또 절반을 깎아 "7천 5백만이면 우리가 이기겠는가?" "아니다, 못 이긴다"라는 대답이 나옵니다. 과학이 싸워서 절대로 못 이긴다고 했습니다. 그 때 모세 다얀 장군이 컴퓨터를 내동댕이치고는 "우리는 과학으로 싸우지 않는다 믿음으로 싸운다"라고 선언한 후에 안식일이 지난 주일날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안식일이 돌아오기 전에 그 싸움을 마치고 안식일을 지킨다고 했습니다. 엿새만에 그 엄청난 아랍 족속의 땅을 점령하고 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여러분 첨단 과학 하지 못한다는 것도 믿음으로 하니까 승리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이 이겼기 까닭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믿음은 좋은 별명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먼저 순종이라는 별명이 붙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은 순종과 함께 일하고 순종으로 그 믿음이 온전해 지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구원이라는 별명이 붙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이 예수님의 죽음, 부활,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완전한 구원을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승리라는 별명을 붙는 믿음이어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점령하고 이긴 것은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기 까닭에 예수로 말미암아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