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갈렙을 이야기 할 때 믿음의 사람이라 말합니다. 그는 어떻에 믿음의 사람이 되었을까? 처음부터 그가 믿음의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랐던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는 갈렙을 소개하면서 "그나스(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갈렙이 유다 지파인데 동시에 그나스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유다지파라는 말과 그나스 사람이라는 말은 조화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나스 족속은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의 자손으로 이루어진 에돔 족속의 선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런 관계로 본다면 분명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하나님이 택한 선민이 아닙니다. 그는 그나스(그니스)족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유다지파에 속할 수 있었을까요?
역대상에서 흰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여분네의 아들이 아니고 헤스론의 아들로 되어 있습니다(2:18, 46, 48-50). 그러면 그는 아버지가 둘이든지 아니면 이방인에서 유다지파로 사람으로 개종을 하면서 디모데처럼 영적 아비를 자신의 아버지로 인정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원래는 헤스론의 아들었으나 후에는 여분네의 영적 아들이 되어 살게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자세히 기록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방인으로 함께 애굽에서 살 때에 여분네라는 유대인에게서 하나님에 대해 들었을 것이고 믿음이 자라 하나님의 백성을 살기 작정하여 유다지파에 편입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육신의 아비는 그를 개로 불렀습니다. 아비도 버리고 조상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는 갈렙을 그 아비는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분네는 그 개같은 이방인의 아들 로 태어나 하나님의 축복의 백성에서 밀려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지만,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 인생도 축복의 인생이 될 수 있고 개가 아닌 용맹한 사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를 유다지파의 족장으로 성장시켰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는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처럼 갈렙의 어린 시절은 굉장히 불행했습니다. 저는 갈렙을 연구하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혼가정의 홀어머니 밑에서 둘째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젖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고 자라야만 했습니다. 어머님은 저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새벽부터 머리에 생선다라를 이고 경기도 일대를 걸어다니며 팔아 저녁이면 쌀 한봉다리를 사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때에만 하더라도 이혼은 큰 죄악이었고우리들은 아비없는 후레자식이라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가난이 죄라, 리어커 하나에 모든 짐일 실릴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늘 그렇게 이사를 다녔습니다. 어머니는 운전하시고 우리는 뒤에서 밀고 이집에서 저집으로 저집에서 이집으로 떠돌이와 같은 삶이었습니다. 외가가 모인곳에서나 이웃들 속에서 심지어 교회안에서도 우리는 늘 소외된 사람들었습니다. 교회 모임이 있어도 어머님은 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주일을 성수하는 것조차 힘겨웠습니다. 이방인 같은 저희 집이었습니다. 가난이 우리를 그렇게 살게 했습니다.
그런 저희 가정에서 목사가 되겠다고 형제가 신학교를 갔을 때에 동네사람들이나 가족들, 그리고 교회사람들까지 비웃었습니다. 개가 사자되겠다고 말입니다. 그래도 저희를 끝까지 믿어주시고 후원해 주신 여분네 같은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저의 어머님 정인월 권사님이십니다.
개만도 못해 버림받았던 우리 형제였는데 이제 목회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렙이 아마도 우리 형제와 같은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가끔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재미있는 다시말씀 드리면 유머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렙과 유다지파의 만남...
유다지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지파로써 장차 메시아를 이땅에 오게 할 지파로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지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을 보십시오. 메시아는커녕 믿음의 지파인지 의심이 갈 정도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경솔한 결혼과 그 결과 불신자인 이방인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의 소개로 수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결과 유다의 3아들 중에 엘과 오난이 비명에 죽었다. 유다의 불행한 결과는 다말을 통한 잉태였고 정말 개같은 집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뻔뻔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개과에서도 제일 우수한 사자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왔습니다.
여러분은 유다지파가 사자의 지파임을 혹시 알고 계십니까? 유다지파 사람들은 사자처럼 용맹한 지파가 되고자 자신들을 지파를 상징하는 동물로 사자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말만 사자였지 사실은 개만도 못한 인생이었습니다. 개와 사자는 같은 과의 동물입니다. 고양이와 호랑이가 같은 과입니다. 개과의 동물중 가장 보잘 것 없는 동물이 개이고, 가장 우수한 동물이 사자입니다. 그런데 그 둘이 만난 것입니다.
유다지파가 갈렙을 만나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자신들이 개만도 못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갈렙은 자신도 개과에서 가장 우수한 사자를 닮아보고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개인 갈렙이 사자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족장으로 선출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낮은 자의 모습에서 시작하여야 합니다. 유다지파 사람들은 교만을 꺽고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바로 유다지파가 새로워질 수 있는 길이 여기 있었습니다.
유다지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말로만 사자임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개요, 이방인이요, 축복의 백성은 아니지만 잠자는 사자보다는 힘차게 달리 수 있는 개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최근 베스 벨렛의 발굴에서 개의 작은 상이 발견되므로서 남부 유다가 「개」인 갈렙을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였으며, 사자가 아닌 개로 주님을 섬기기 원했는가 알 수가 있습니다.
이때부터 유다지파는 달라졌습니다. 한사람, 개 한마리가 말입니다. 삿 1:1-10에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하고 여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각 지파에 분배된 땅을 완전히 정복하는 일에 유다지파가 가장 먼저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다지파는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지파 승리의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갈렙입니다.
4절에도 보면,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유다지파는 승리를 거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그들은 70명의 왕을 굴복시켰던 그 대단한 아도니 베섹조차도 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악의 깊은 잠을 자는 유다지파는 잠자는 사자처럼 힘이 없는 지파였으나, 이제 깨어나 가나안 정복 때에 선봉장이되어 승리를 거두는 지파가 되었습니다. 믿음의 최선봉장이 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갈렙은 대채 어떤 사람이었길래 자신의 인생도 바꾸고 유다지파 사람들을 바꾸어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였을까요?
한마디로 요약하면 충직하고 주인을 알아보는 개였습니다. 개는 주인을 물지 않는 법이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이 조금만 바뀌어도 그 주인인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대항아며 물었지만 그때에도 갈렙은 주인을 물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와 같이 자신과 자신의 족속이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겠노라 고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신 1:36)."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고 이제 취한 가나안 땅을 각 지파에게 분배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기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유다 지파 중에서 갈렙이 나와서 기업을 분배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나에게 기업을 더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기업을 분배할 때 방법은 제비뽑기입니다. 14: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뽑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제비를 뽑아서 기업을 분배하라고 하신 것은 분배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분배의 주관자가 하나님일 수밖에 없는 것은 가나안 땅을 얻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비를 뽑아라는 것은, 내 것을 내가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대로 받으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이 모두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좋은 땅이 있으면 좋지 않은 땅도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서로 좋은 땅을 차지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제비를 뽑는다면 좋은 땅이 걸린 지파는 좋아하겠지만 좋지 않은 땅이 걸린 지파는 투덜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땅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본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은 더 좋은 땅을 생각하고 있을 때에 갈렙은 땅이 아닌 하나님을 생각하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갈렙은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기업을 얻을 땅을 지목을 하는 것입니다. 제비를 뽑아서 분배해야 할 땅을 제비뽑기를 하지 않고 스스로 지목하여 취한다는 것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반발을 살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전혀 반발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갈렙이 지목한 땅이 이스라엘이 보기에 전혀 욕심을 일으킬만한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2절에 보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고 말씀합니다.
갈렙이 요구한 땅은 헤브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헤브론 땅은 이스라엘이 정복한 땅이 아닙니다. 헤브론에는 아직 아낙 자손들이 있습니다. 아낙 자손은 체구가 거대한 족속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누가 과연 이 땅을 차지하고자 하겠습니까? 제비뽑기를 해도 그 땅이 자기들에게 걸릴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갈렙은 그 땅을 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갈렙이 왜 굳이 헤브론 땅을 원하는 것입니까? 아낙 자손과 싸우기를 좋아해서입니까? 이것은 과거 가나안 땅을 정탐했을 때의 사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갈렙은 바로 그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나와서 가데스바데아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합니다. 9절에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과거 열 두 영의 정탐꾼이 가나안을 정탐했을 때 열 명의 사람들은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에 어떤 사람들이 있든 상관없이 가나안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기 때문에 들어가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가나안 땅의 족속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고 가나안 족속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던 갈렙에 대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14:24)고 합니다. 즉 갈렙은 이미 자신이 기업으로 얻을 땅을 약속 받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제비 뽑을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갈렙이 정탐한 땅은 헤브론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브론을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에 그 땅이 곧 내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갈렙은 주인의 성급을 바라보았습니다. 명견을 주인이 주는 음식이 아니면 절대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똥개는 아무거나 주는대로 먹습니다. 비록 독이 있을 지라도 개는 주인이 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먹습니다. 갈렙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대로 헤브론 땅에는 건장한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결국 헤브론 땅을 취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전쟁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만약 갈렙이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하나님이 자신에게 약속한 땅이라고 해도 가만히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차라리 제비를 뽑아서 저 땅을 기피하고 싶은 것이 인간 본연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나와서 아주 당당하게 하나님이 나에게 약속하신 땅을 내게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건장한 아낙 자손과 싸워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이 없습니다. 45년 전에 모든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모세를 원망하던 것과는 달리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14:9)고 외쳤던 갈렙의 믿음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가나안의 상황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갈렙의 믿음이 45년이 지나서 85세의 나이가 된 지금에서도 여전히 갈렙에 의해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10-11절을 보면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 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라고 말합니다. 갈렙이 가나안을 정탐한 때가 40세입니다. 그리고 45년이 지난 85세가 되어서 오늘 본문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85세면 이미 늙은 나이입니다. 기력이 다 떨어진 나이에 건장한 아낙자손들이 있는 헤브론을 달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렙에게는 아낙자손들이 건장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만 위대하게 보일 뿐입니다. 아낙자손들의 체구가 얼마나 크든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으면 저 땅은 우리 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갈렙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갈렙에 대해서 여호수아가 어떻게 합니까? 13절에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라고 말합니다. 갈렙을 위해 축복했다는 것은 갈렙이 힘을 얻어서 아낙 자손을 이기기를 기원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갈렙과 같은 그런 믿음이 곧 축복 안에 살아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축복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은 보이는 것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살아가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늘의 것을 바라고 하늘의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복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의 복의 상태는 세상이 보기에는 복이 아니라 오히려 난처하고 어려운 상황에 빠진 것입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복이란 손쉽게 세상의 것이 자기의 손에 주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갈렙을 기다린 것은 건장한 아낙자손입니다. 더군다나 아낙 사람가운데서도 가장큰 아르바 사람들이 갈렙을 기다립니다. 갈렙은 그들과 전투를 해야 할 상황인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갈렙이 가고자 한 길은 자신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죽이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복이라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든 편한 길로 가기를 애를 쓰는 것이 사람인데, 오히려 고생이 되는 길로 가겠다고 나서는 갈렙이 정상으로 보여지겠습니까?
하나님이 갈렙에게 남겨 놓으신 길은 편한 길이 아니라 힘든 길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남겨 놓으신 신앙의 길이기도 합니다. 신앙의 길은 절대로 편한 길이 아닙니다. 개처럼 살아가야 할찌도 모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개처럼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 넣기도 하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할 때 하나님이 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후원으로 신학교를 거쳐 대학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나와 처음 개척이라는 것을 했을 때 저는 개처럼 살았습니다. 리어커를 몰고 야채를 사다 어머니와 함께 팔아도 보았고, 가장을 들고 다니며, 이집 저집 과외를 다니기도 했으며, 동사무소 아르바이트, 박스를 주어 팔기도 했으며, 공공근로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산다는 것은 보이는 것을 힘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 갈렙의 삶이었습니다. 사자는 눈으로 먹이를 보고 쫓아가지만 개는 눈이 좋지 않아 잘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삶은 개와 같은 삶입니다. 보이지 않는 약속을 쫓아 돈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인 되신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 밤에도 주님의 집을 지키기 위해 개들을 귀를 세우고 잠들 것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결코 그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오직 주인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충직한 삶으로 우리 곁에 있듯이 우리도 주님곁을 지켜 이시대의 갈렙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중요한것은 아니지만,,,사자는 고양이과 동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