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성창론
지성미와 진실, 저항의 서사시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 문학언어치료학 교수
I.
수필은 일상을 소재로 해서 정서와 그를 통해 획득되는 깨달음을 유감없이 기술할 수 있는 본격문학이다. 수필의 이러한 고유 영역과 특성을 제대로 살렸을 때 그 글은 향기를 지닐 수 있다. 황성창 수필을 인간학과 서사시라 부르는 소이는 수필의 내용이 인간애와 인생탐구라는 주제지향성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흔히 수필은 자신의 심적 나상이라고도 하고 독백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황성창의 수필은 진정 자조적이면서도 인생사 속 인연에서 수필적 소재로 취택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현대는 삶에서 여유가 사라진 단절과 소외의 시대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수필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학이 문학만을 위한 작업에만 충실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자기 정서의 표출이라는 자기 구원만으로 수필가의 사명을 완수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수필가가 그려내야 할 수필적 주제는 잃어버린 순수를 되찾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수필집은 이를 구현하고 있다.
황성창의 수필세계가 사모와 사향 그리고 인정과 지성의 추구에 푹 빠져들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견고한 인성과 강한 반성적 성찰이라는 인생원리가 창작과정에 원천적으로 작용한 때문이라고 하겠다. 황성창의 <그리운 내 어머니>에는 요즘 보기 드문 진실의 서사시가 펼쳐져 있고, 훈훈한 인정과 그리움의 세계는 물론 작가정신이 담겨 있어 감동을 준다. 서정과 지성의 오솔길을 걷게 한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글이다. 이 작품집은 인간이면 가져야 할 인간적인 자세가 어떤 것임을 엿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수필집을 받아들고 차분히 정독해 가면, 황성창은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인정과 지성, 그리고 그리움과 순수를 수필이라는 우물에서 길어 올리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비운의 아버지, 어머니를 둔 인생사 속에서도 성실하게 자기를 바르게 세우는 일에 정진하는 구도자적인 신사다. 황성창은 등단하여 문인이 되었지만 문단활동보다는 인격도야와 애향사업에 전심을 바쳐오고 있는 우리 시대 보기 드문 분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예의바르며 겸손한 시인이자 수필가다. 그의 시가 사물의 허상과 진상 사이를 탐색하는 인식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의 수필은 서정과 지성 사이를 넘나들며 정감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잃어버린 원시의 정을 되살리는 것, 바로 인간미의 보고요 수필의 향기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향기가 없으면 생명이 없는 조화나 다름없다. 꽃도 향기를 갖고 있고, 사람도 그 나름의 향기를 낸다. 수필에 있어서 문장이 매력적 요소라면, 향기는 절대적 요소다. 이 논리를 전제로 할 때, 황성창은 풍성한 의식과 조용한 열정으로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인간미를 충분하게 그리고 보름달처럼 풍성하게 수필 속에 수놓고 있는 사람이라 하겠다. 몸 속에 해맑은 수액이 흐르고 있는 작가임이 분명하다. 그의 글은 사부와 사모의 정을 청량한 눈과 마음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눈동자와 가슴을 촉촉하게 젖게 한다. “어머니 돌아가신 날 아들은 식어가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대성통공, 울고 울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불효자식은 어머니의 방에서 가슴에 맺힌 한이 너무 많아 어머니 영정을 끌어안고 또 울었습니다. 어머니 손길이 닿은 곳마다 더듬고 냄새 맡으며 어미 잃은 짐승새끼처럼 방구석을 뻥뻥 돌았습니다.”라는 표제글의 고백적 진술은 작가가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지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 수필집의 주제적 지향성은 크게 네 범주로 나뉜다. 첫째 범주는 황성창 수필의 거대한 물줄기로써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부부애와 가족애를 담고 있는 글이다. <보헤미안>, <그리운 내 어머니>, <아내는 하늘이라고>, <초야>, <잊지 않으마>, <가슴에 묻은 슬픔>, <윤달 든 해를 기다려서>, <서러운 유월> 등의 작품이며, 두 번째 부류는 인간에 대한 정과 고향에 대한 추억 그리고 진한 토포필리아를 담고 있는 글들로 <그래 알았다>, <소나무>, <워낭소리>, <느티나무 그늘>, <어쩌다 그 사람이>, <인각사의 풍경소리>, <봄날의 단상>, <가을 문학기행을 다녀와서>, <뿌리>,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를 찾아서>, <법주사를 다녀와서>등이며, 세 번째 군으로 묶을 수 있는 것으로는 자조적인 이야기와 진실한 서정의 노래다. <명함이 사라졌다>, <참, 어렵다>, <난향사시>, <술 이야기>, <주목처럼 천년을>, <결실 겨울단상> 등의 작품은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질주하고 있는 변화를 반성적 성찰로 그려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보이는 황성창의 수필적 특성은 작가정신의 실천과 노블레스 오불리제라고 할 수 있다. <천의 얼굴>, <역병>, <조선의 지식인 매천>, <용의 눈물(1) (2)>, <이게 나라인가>, <아무나 하나>, <개성공단 사태>, <세월도 멈췄다>, <아름다운 한글문화> 등의 작품은 참여와 저항과 관련된 일화를 소재로 쓴 수필들이다.
II
1. 사모와 사부를 근간으로 한 가족애의 숨결
황성창은 순수한 동심의 빛살로 가득 찬 인정의 세계를 가진 작가다. 황성창 수필을 이루는 또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근원적 뿌리에 대한 본능적 편향성, 부모님으로의 지향성이다. 그 애타는 그리움의 귀착지는 자신의 실패로 병을 얻어 황망하게 숨을 거둔 어머니다. 작품 하나하나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정서가 없는 게 없다. 수필집의 제목을 <그리운 내 어머니>라고 정한 것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한마디로 절절한 사모곡이자 사부곡이다. 이는 그만의 독특한 정서라기보다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수필들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직조되고 있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 지극한 정성, 가족애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작품 <그리운 내 어머니>와 <보헤미안> 이 입증한다. <그래 알겠다>에는 건강을 위해 금연하면 좋겠다는 아들의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애로운 아버지 모습이 드러나 있다. 눈에 드러나는 현란함은 한때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완전한 행복의 실체는 아니다. 물질만으로는 생명을 틔울 수 없고,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황성창의 수필에서 가장 빛나는 정서는 아들의 재기와 성공을 위해 눈을 감지 못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인간적 향기라 하겠다.
세상사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죽음인 것 같습니다. 실로 죽음만큼 정직하고 평등하며 절대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을 것 같습니다. 자식이 있고 일가친척이 아무리 많다한들 어머니 죽음을 대신할 수 있으며, 또 누가 어머니 죽음 길에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는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라는 것은 “신은 어제나 어디서나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유대교의 격언처럼 어머니의 사랑이 신을 대신할 만큼 위대한 것을 나는 한없이 느끼며 살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서럽게도 헤어진 지 어언 삼심 년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거처를 옮겨 가신 저승이 얼마나 좋으신지 연락 한 번 없으시니 불효했던 아들이, 어머님 앞에 엎드려 글을 올립니다. 어머니 시력을 잃게 한 아들의 실패한 사업은 어머니 떠나실 때 알고 계신 만큼의 손실금액은 다 회수하진 못했으나 어느 정도는 회복하였습니다. 어머니, 이제 아들 걱정은 내려놓으셔도 되겠습니다. 만사형통하고 온 집안 대수가 화평한 건 모두가 어머니의 음덕으로 생각합니다. 어머님 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 <그리운 내 어머니>에서 -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삶의 의지다.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자각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엄숙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씀에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삶을 원망하고 현실에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삶의 질이 어느 한 순간에 돌변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수필은 작가가 자신의 사업실패로 인해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애타게 가슴 속으로 불러들임으로써 불효자의 변으로 읽힌다. 일상사의 사소함에서 출발된 인간사가 노정된 이 글은 인간적 삶의 소중한 경험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임을 잘 보여준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 끈끈한 사모의 정이라는 것을 이 수필의 마지막 한 중이 증명하고 있다. 향기 나는 사모의 정보다 더 가치롭고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어머니의 사랑이 신을 대신할 만큼 위대한 것을 나는 한없이 느끼며 살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는 멘트가 살짝 가슴을 찌르면서, 여운의 맛을 준다. 이런 맛이 있어 문학성이 생겨나고 공감도가 형성되는 게 아닐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말이 생각난다. 아버지의 친구께서 “도모다상, 당신은 복이 많은 사람이야. 한 평생을 편히 살다 죽을 지경에 이르니 처자식이 당신을 모셔가니 당신은 복도 많은 사람이야. 한국에 가서 꼭 나아야 해”하시며 눈물 젖은 얼굴에도 몹시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거류민단 간부도 눈시울을 붉히면서 나를 보고 “당신 아버지는 진짜 멋쟁이 한량이야.”하시며 내 등을 쓰다듬으며 어떻게든 낫기를 바란다며 쾌유를 빌어줬다. 많은 분들의 고마운 전송을 받으며 아버지 평생을 몸담았던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지극 정성을 다 하지 못한 탓인지 귀국하신 지 석 달 만에 아버지는 애석하게도 영면하시고 말았다.
오십여 년 전 망부의 모습이 아스라하게 떠오른다. 핼쓱한 얼굴에 반백의 머리카락은 윤기가 다 바져 모래사막의 풀처럼 파삭 말라 퍼석퍼석했다. 가쁜 숨결에도 아버지는 가실 날을 아셨는지 결심이라도 하신 듯 며칠 곡기마저 끊으셨다. 평생을 보헤미안처럼 방랑하셨던 인생의 종착역은 죽음의 깊은 계곡인지 아버지가 운명하신 순간, 실바람에 흔들리는 붉은 동백 한 송이도 함께 뚝 떨어졌다. 옛 경전에 “아버지와 자식 사이는 서로 친함이 있어야 하고, 자식은 아버지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아버지 모고 싶습니다.
- <보헤미안>에서 -
이 수필의 읽는 묘미는 아버지에 대한 추모를 통해 작가가 아버지의 영혼을 달랠 해법을 찾아가는 곳으로 눈으로 가슴으로 따라가는 데 있다. 평생을 일본에서 살면서 수십 년 만에 그리운 아버지를 만났지만 서먹서먹함에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했는데, 그런 아버지를 작가가 다시 만나게 될 때는 이미 아버지는 말기 암환자였다. 눈물보다 끈적한 사부의 향기와 그리움의 미학이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사부의 미학을 주제로 하는 수필은 질곡의 현대사를 겪은 실버세대 수필에서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작가의 자부심은 아버지를 한국으로 모시고 올 때 일본의 아버지 친구들의 말로 대신한다. 자식의 존재는 아버지의 존재이유다.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부성성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라는 위치가 이 수필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가정의 임무는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그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사회적 통념을 의미한다. 작가는 다른 사람의 말을 빌려서 아버지의 인품을 드높이고, 옛 경전의 말을 빌려, 혹여 들었거나 자신이 알고 있었을 아버지의 허물은 덮어버리고자 한다. 허물이 없는 인간이 어디 있으랴. 감히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허물을 어찌 말하랴.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실바람에 흔들리는 붉은 동백 한 송이도 함께 뚝 떨어졌다’는 표현은 황성창의 문학적 실력을 증명한다고 하겠다. 간접화의 원리에 의해 문학성이 생성되는 법이다. 문학적 성취가 빛나는 대목이라 하겠다.
외롭고 고도한 시련을 견뎌내면서 용케 절제력 하나로 재기의 꿈과 희망을 한시도 놓치지를 않았다. 고통이 할퀴고 간 내 인생에 믿기 어렵지만 기적은 끝내 일어났다. 두껍게 뒤집어 쓴 흙더미를 비집고 싹튼 새파란 잎줄기에 희망의 들꽃을 피운 인동초가 아니었던가 싶다. 잃어버린 세월 속에서 소금 꽃 피워 나도 뒤돌아 볼 여유를 조금은 가지게 되었다. 이젠 내가 아내에게 진 억만금 빚을 갚고도 죽을 때까지 아내를 위해 정을 주고 아내를 위해 마음을 모을 것이다. 나는 여름부터 붉게 피는 능소화를 좋아한다. 한여름 태양빛이 불타게 내리쬐든,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든, 가는 허리 휘청거리면서도 바닥에 스러지지 않고 위만 바라보는 꽃잎 모습이 아내의 눈동자와 닮은 것 같아서다. 힘들어도 언젠가는 찾아올 행복을 믿고 일편단심 기다리는 능소화처럼 아내의 고운 마음을 느끼며 살고 있다. 지금은 주야장천, 아내와 눈을 맞추며 꾸벅꾸벅 살고 있다.
<아내는 하늘이라고>에서-
사모곡와 사부곡에 이어 나오는 작가의 아내 사랑도 눈길을 끈다.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의미있고 소중한 것이 부부의 인연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사연이다. 특히 부부의 연으로 이어진 관계 속의 그 절절한 사랑은 무엇에 비교할 수 없다. 황성창 수필은 주로 자신이 살아오는 과정에서 느낀 감동적 사연이 형상화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부부애를 축으로 하는 <아내는 하늘이라고>라는 수필에서, 그는 삶의 영역에서 갖는 사랑과 행복, 만남과 인연의 가치를 ‘나는 여름부터 붉게 피는 능소화를 좋아한다.’라는 문장으로 치환하여 아내에 대한 사랑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여 감동이라는 고지로까지 잘 끌어올리고 있다. 사업실패로부터 ‘재기’와 ‘희망’을 갖기까지의 과정을 ‘두껍게 뒤집어 쓴 흙더미를 비집고 싹튼 새파란 잎줄기에 희망의 들꽃을 피운 인동초’로 전이시킴으로써 보이지 않는 추상을 구체화하는 능력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주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한여름 태양빛이 불타게 내리쬐든,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든, 가는 허리 휘청거리면서도 바닥에 스러지지 않고 위만 바라보는 ‘능소화의 꽃잎’이라는 어휘를 끌어와 보이지 않는 사랑을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수필미학’의 진수가 빛난다 하겠다. 사업실패에도 묵묵히 참고 지켜봐준 아내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고 요즘은 노골적으로 ‘주야정천’ 아내만 보고 산다고 고백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애처가든 공처가든 공식적인 관계에서 사랑을 합법적으로 나눈다는 데 누가 뭐라 하랴. 이처럼 작가는 살아가면서 있었던 부부간의 갈등과 고뇌의 단면을 반성적 성찰을 통해 빛나는 사랑의 가치로 부부애로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부부의 연을 성찰을 통해 운명적으로 엮어가려는 순수한 사랑의 정신적 가치는 높이 평가된다고 하겠다.
아비의 소원을 알았는지 아들이 결혼하겠다고 나선다. 아들이 혼인할 예쁜 규수가 통영에 있다니 좋기는 한데, 맏딸부터 혼인을 시켜야 될 것 같아 좋은 신랑감을 맞춰보자고 가족끼리 의논했다. 그러던 참에 맏딸이 나서서 혼사문제를 풀어줬다. 짝이 있는 아들을 먼저 장가보내고 뒤따라 시집을 가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아들 혼인날을 서둘러 그해 성탄절에 맞춰 결혼식을 가졌다. 이태 후 맏이도 예비 신랑 될 청년과 함께 내가 입원하고 있는 병실로 인사차 문병을 왔다. 첫눈에 봐서 단정하고 핸섬한 천연이었다. 고향이 경북 예천, 선비의 고장이라 더욱 맘에 들어 쾌히 결혼을 승낙하고 그해 팔월 좋은 날에 백년해로를 가졌다. 아들딸 좋은 인연을 만나 일생에 가장 빛나는 혼인을 하는데 아비가 건강한 몸으로 하객을 맞이하여야 함에도 그러질 못해 내 가슴 속은 까맣게 멍이 맺혔다. 자식들이 부모의 도움없이 홀로 힘든 인생을 살아가면 이 죄를 어찌 해야 하나 두렵기만 했다. 그러나 질곡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아들딸이 그 어려운 환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꾹 참아준 인고의 세월이 오죽이나 힘들었겠나 싶어 생각만 해도 내 오금이 저려온다.
<잊지 않으마>에서-
이 작품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정, 부모를 향한 자식의 정이 어떠한가를 교차적으로 제시해주는 수필이다. 부모의 도리를 다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교훈적이다. 자녀를 결혼시켜야 하는 것은 부모의 도리 중 가장 큰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다. 아무리 황금만능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 간은 물질이 전부일 수 없다. 황성창은 이런 진리를 ‘잊지 않으마’라는 제재를 통해 잘 보여준다. 자신이 병석에 있을 대, 자녀들이 결혼식이라는 선물을 아버지에게 안겨주려 서로 나서고, 양보하면서 배려하는 등 동기간의 우정을 그려내어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자녀들이 배려를 잊지 않으려고 자식들에게 다짐하고 있다. 아버지와 자식간에 오고가는 사랑의 화음이 큰 감동을 안겨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아버지의 소원이 무엇인지 간파하고 결혼식을 서두르는 데서 뭉클한 감동이 드는 것은 부자지간, 부녀지간의 애정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혈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정이 예전 같지 않은 요즘이라 이런 글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황성창 수필세계가 보여주는 또 다른 한 모습에는 부성의 따스함이 스며나고 있으며, 진솔한 고백이 순진무구한 인정의 미학이 구축되어 있다. 수필 문학이 지닌 특징 중의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가공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소재가 특별해서라기보다 작가의 진솔함이 인정에 뿌리내려 있어서일 경우가 많다. 황성창 수필의 최대 강점은 체험의 진실성이요, 진한 부성의 표백에 있다. 이것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으로서의 가치와 문학성을 담보해 준다고 하겠다.
위에서 소개한 수필들은 가족간의 사랑과 운명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을 확보한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추모하거나 아내를 외조하며 삶의 보람을 찾아가는 작가의 가슴에 피어나는 행복은 이 수필 속에서 ‘능소화’나 ‘인동초’로 이미지화되고 있어 문학적 감동을 준다고 하겠다.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주어진 운명에 굴복하고 나자빠지는 것이 아니라 도전을 통해서 헤어 나오려는 몸짓이다. 바로 자연의 섭리에는 순응만 있는 게 아니다. 이겨내라는 ‘도전’에 따르는 것도 삶에 대한 순리다. 그가 이들 수필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도전’요, ‘의지’다. 위의 작품들은 인정이 메말라 가는 단절의 시대, 가족간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큰 울림을 준다고 하겠다. <가슴에 묻은 슬픔>은 딸을 보내고 아파하고 그리워하는 아비의 마음을 ‘단장지애’로 표현되어 깊은 감동을 준다.
산다는 것은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려는 원심력과 그것과 대치되는 구심력의 절묘한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줄다리기의 위험한 연속행위와 갈등 속에서 오랜 시달림과 방황 끝에 마침내 구심력을 향해서 돌아오는 동작구조, 그 회귀행위의 근저에는 스스로 낮추고 한없이 겸허해진 자아가 자리 잡게 된다. 그 겸허한 모습은 자신의 모습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진수이며 삶의 영롱한 에센스가 될 것이다. 사업의 실패에서 재기하고 병마에서 회복한 데에는 무한한 원심적 탄력 속에서 가까이 존재하는 일상의 그것과는 다른 특별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삶의 영역이며 작가의 지친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이들 수필을 읽고 나면, 우리의 영혼이 가장 낮은 자제로 임하게 되는 지점이 있는데, 바로 옛 경전의 ‘부자유친’임을 알 수 있다.
2. 사향과 인정을 근간으로 한 향토애의 서정
황성창의 수필은 두 번째 특징은 한마디로 그리움이 있고, 인정이 있고, 구원이 있는 토포필리아의 공간에서 출발한다. 어딘가에 부드러운 곡선의 안식처가 있을 것 같은 작가다. 그래서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의 유년시절에 머문다. 과거는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향을 제재로 하는 수필들은 주로 자신의 심중에서 여울치는 물결의 무늬를 그려낸다. 그의 문학적 그림자 형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애향심의 향기’라 할 수 있다. 작가적 현실 세계가 삶의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보편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키를 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향토성의 서정이라는 지점에서 문학적 향기를 발한다. 좋은 수필이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체험과 세련된 정신세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감할 수 있는’의 성질은 문학의 보편성을, 가치 있는 체험은 구체성을, 세련된 정신세계는 날선 인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학적인 형상화는 활어로 디자인된 감각적 표현을 뜻한다. 아마도 문학적 성취를 이룬 글이라면 이런 기준을 충족시켜야 마땅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삶의 창조적 내포를 담고 있는 인정의 정서가 작품 속에 넘실거려야 한다는 점이다.
요즘도 고향을 가끔씩 찾아간다. 지금은 흙담에 초가지붕을 이고 있는 집은 거의 볼 수가 없다. 예전에 낯익은 얼굴은 보기가 드물고 낮선 사람만 많아 마주치는 사람들이 나를 나그네로 대할 대나 혼자 서먹하고 쓸쓸해진다. 망향은 원초적 그리움인가 싶다. 옛말에 “수고천척 낙엽귀근”이란 말이 있다. “나무가 아무리 높고 커도 잎이 떨어지면 뿌리로 간다.”는 뜻이 아닌가. 사람의 인성은 태어났던, 자라났던 고향으로 향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난 지금도 고향 선후배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스스럼없이 어울려 놀기를 좋아한다. 독일이 시인 프리 드리어 뤼케르트는 “진실은 술 속에 있고, 진실을 이야기할 기분이 되기 위해서는 취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애주가처럼 술을 마신다.
<워낭소리>에서-
이 수필의 결말부에서, 작가는 고향에 가고 싶고 고향이 그리워지는 날에는 가슴에 별 하나 품고 고운 꽃 피워내는 고향 시를 쓰고 싶어 하고, 삼국유사의 산실, 인각사도 다시 찾아 깐깐한 기행수필도 맛깔나게 쓰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래서인지 난 지금도 고향 선후배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스스럼없이 어울려 놀기를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고향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며 술잔을 기울이는 것을 좋아한다는 데.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는가. 수필은 이런 그의 애향심을 표백하고 있는 글이라고 하겠다. 그의 글은 그가 살아가면서 남긴 흔적과 체온이며, 그것이 정서화되어 한 편의 드라마처럼 리얼하게 펼쳐진 삶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소설적인 감동을 주며,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을 여운을 남기게 될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황성창은 향토적 서정의 작가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작품을 직접 살펴보면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사향의 길에서 만난 문학성을 옛말과 독일 시인의 말을 빌려 비유적으로 해서, 어떻게든 사향의 향기를 문학적으로 구체화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문학적 기량은 높이 평가된다. 문학은 어느 의미에서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인간 행위의 기록이다. 그 안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삶을 보다 견고히 구축해 나가려는 의지와 그 실천자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문학은 단순한 자기애의 표현 수단이 아니다. 수필이 갖추어야 할 요건 중의 하나가 인식이다. 인식은 작가의 사회적 의식이요, 문학적인 힘이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문학 속에 내재하는 강력한 에너지다. ‘워낭소리’는 가장 적절한 고향의 상징으로써 기능한다. 인간의 근원적인 가치와 본질을 규명하려는 운명론적 자세에 깃들어 있는 설득적 지성이 바로 문학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어서 감동을 준다고 하겠다.
소중한 만큼 인연의 꽃을 곱게 피우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성싶다. 그러나 각자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역지사지할 수만 있다면 불꽃같은 인연의 꽃을 활짝 피울 성싶다.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싸잡아 남을 험담하고 배앓이하는 고향사람을 가끔 볼 때, 환멸을 느끼다 못해 자괴감에 빠진 적도 가끔은 있었다.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는 시구가 퍼뜩 떠오른다. 설혹 마뜩잖은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것이 인생을, 특히 고향사람과의 교우를 빛나게 해주는 지혜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느티나무 그늘>에서 -
황성창의 수필을 관통하는 한 사상은 인간의 문화, 신체적 지각, 개체적으로 독특함이 인간 주변의 세계를 지각하는 데 영향을 미치며, 그리고 그러한 인식에 기반한 지각이 인간의 환경에 대한 선호와 이상향, 더 나아가서는 공간을 조직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바로 환경-인간 사이의 관계와 미학론인 토포필리아적 경향은 황성창 수필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수필 <느티나무 그늘>이란 작품은 작가가 삶의 뿌리를 내렸던 곳이며, 성장했던 텃밭이며, 어머니의 젖가슴 같이 포근한 곳인 고향을 ‘느티나무 그늘’과 결부시켜 의미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수필의 문학화에 성공하고 있다. 문학은 절실함에서 비롯되고, 그를 자양분으로 해서 커나가는 것이기에 그리움이 있어야 결실의 조건이 충족된다.
이 작품은 고향의 추억을 그리는 작가의 진지한 안목이 ‘느티나무 그늘’이란 제재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황성창의 창작적 특징은 여러 다른 수필에서도 볼 수 있지만, 자신의 메시지를 설득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인용 글들을 도입하는 측면에서 도드라진다고 하겠다. ‘나는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주제의식의 전달을 위해 고시는 물론 가요, 속담 그리고 현대시도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아무나 잘 할 수 있는 기법이 아니라는 데서 황성창의 문학적 기량을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고 봐도 되겠다. 물론 ‘느티나무’나 ‘그늘’도 모두 상징으로써 고향의 포근함을 함축하는 것이다.
입원한 그를 보면 볼수록 측은해져 한 달에 두어 번 시간을 내어 병원을 들러본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관계의 틀 속에 짜여 더불어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는 인간사회다. 사람은 사람마다 타고난 복의 정도가 크게 다른가 싶은 생각이 든다. 휠체어에 의지해 움직이는 그를 볼 때, 산다는 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죽지 못해 사는 것은 삶이 마치 인생의 재앙으로 비춰 보인다. 병원을 드나들며 느낀 건 가족끼리 최초의 뒤틀림이 무엇 때문에 이 지경가지 왔는지 궁금해 물어볼까하다 상처난 마음을 아프게 할까싶어 묻기를 닫아버렸다.
<어쩌다 그 사람이>에서 -
이 수필을 통과하는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는 토포필리아로서 산업화가 우리 삶과 사람의 감수성의 형태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그리고 산업화 이후 어떤 삶의 전략이 가능한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데 있다. 산업화는 ‘사회 따위는 없다. 있는 것은 개인뿐이다’는 슬로건 아래 사람이 다른 사람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와 감수성을 통째로 바꾸어 낸 삶의 양식이다. 소위 말하는 ‘인간의 죽음과 속물화/동물화’의 경향이 스펙타클 사회와 맞물려 어떻게 진행되었고, 그 결과 통째로 우리가 어떻게 ‘일체의 질서 없음’의 상태, 폭력과 야만의 사회로 진입하였으며, 이 이후 삶의 양식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같이 고민해 보려고 하는 데에서 이 수필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 우리는 그에게 얼마나 인간들에 대한 따듯한 연민의 정서가 녹아있지를 알 수 있다.
어느 날 작가에게로 걸려온 전화 한 통화는 수십 년간 소식이 없었던 먼 친척의 변고에 관한 기별이었다. 이혼한 처에게서도 자식에게도 버림받은 어느 뇌졸중 환자를 돌보게 되는 사연이 감동을 준다. 비정한 전처와 자식들을 원망하며 내뱉는 황성창의 “하물며 사람이 썩어 그름이 되어주는 낙엽보다 못해서야 말이 되나”는 우리 사회의 비정한 세태를 잘 보여줌과 동시에 작가의 따스한 인간애를 관통하고 있다고 하겠다. 인생을 멋지게 살고 있는 참다운 이의 깨달음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산다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타자에 대한 측은지심을 다져 가는 일이다. 인간의 일상적 삶은 여기에 그 거점을 정하고 방향을 잡아가는 하나의 흐름이다. 이 수필에서 읽히는 또 하나는 자신의 존재적 인식을 교정하는 활달함이다. 인간이 어려운 자를 도울 수 있을 때, 진정한 인간이 아니겠는가.
그에게 있어 ‘고향’은 운명적 공간으로 각인되어 있어, 자연친화적이고 향토적인 작가의 마음속에 지금도 마음의 본향으로 우뚝 자리 잡고 있다.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를 찾아서>, <법주사를 다녀와서> 등의 수필에는 인각사와 일연선사 그리고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진하게 녹아 있다. 위의 인용 수필들은 삶의 지혜와 인정. 향토 찬가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으로서, 비인간화된 인간과 순수를 잃어버린 우리네 삶의 지향성을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점철된 소망의 결과물로 판단된다. 주제 지향성적인 측면에서 인생론적 또는 향토예찬론적인 관점을 동시에 터치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작가는 인간의 이상적 삶을 현실과 격리해 두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학은 집착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 집착의 대상이 무엇이고, 그것을 통해 행위의 주체가 무엇을 획득하고 상실했느냐에 따라 삶의 윤기와 습기, 평가는 달라질 수 있지만, 삶 자체가 집착의 결과이듯 문학도 같은 것이다. 그리움의 텃밭은 언제나 시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기억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무한한 삶의 의욕을 느끼게 되고, 생활의 지혜도 만날 수 있다. <뿌리>는 작가의 전통문화에 대한 생각과 온고이지신철학이 녹아 있는 수필이다. 황성창에게 있어서 인성의 틀을 짜고, 정서를 가다듬고 꿈을 꿨던 아늑한 보금자리로 상징되는 경북 군위, 그리고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가문은 향토적인 작가 황성창의 선비정신과 전통사상이 녹아 있는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겠다.
3. 성찰과 고백을 바탕으로 한 서정성의 미학
공자는 문학을 한마디로 ‘사무사’라 했다. 또한 위렌은 문학의 본질은 진실과 아름다움에 있다고 했다. 사악함이 없고 진실된 것은 모든 문학예술의 본질이지만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도 수필은 자기체험의 고백을 본령으로 한다고 하겠다. 수필은 바로 그 사람이 주인공이다. 자기가 역사적 자아로서 화자가 되어 자신의 나상을 만인 앞에 드러냄으로써 위선도 가식도 술수도 없는 진실과 순수 그것으로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감동을 주는 문학이다. 황성창 수필의 세 번째 군으로 묶을 수 있는 특성으로는 자조적인 이야기의 고백성이라 하겠다. <초야>에 드러난 작가의 결혼식 해프닝은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결혼식 하루 전날 상가에 다녀와서 혼수상태에 빠졌으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처럼 황성창은 과거의 현재화를 통해 숨김없이 자신의 과거사를 솔직하게 드러내어 감동을 안겨준다. <명함이 사라졌다>, <참, 어렵다>, <난향사시>, <술 이야기>, <주목처럼 천년을>, <결실 겨울단상>, <초야> 등의 작품은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치부와 허물을 과감하게 폭로하고 보여줌으로써 매사를 진실로 승부하고자 하는 작가적 근성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하겠다.
좋은 늙은이로 나이 들어가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좋은 늙은이가 알려주는 인생지도는 젊은이들에게 경전과도 같을 성싶다. 소설가 이청준은 “곱게 늙는다는 것 자체가 인생경험의 총화라고 하지 않았던가. 곱게 늙어가는 모습을 젊은이들에게 보여 희망이 될 수 있도록 깊은 주름 속에 담긴 연륜에서 풍겨 나오는 ”아우라“에 젊은이들이 어찌 감탄하지 않겠나.
반면에 늙어서 추한 짓을 보고 노추라 해서 옛날부터 경계한 것 같다. 몇 해 전 국회의장까지 지낸 일흔이 넘은 원로 정치인이 손가락 끝으로 여성 캐디의 가슴을 한 번 툭 찔렀는데 그걸 어떻게 만졌다고 뭘 그러느냐고 능청까지 부렸다. 라운딩 도중 골프장 여성 캐디를 성추행했다는 논란으로 한때 시끄러운 때가 있었다. 그게 갑질이고 진짜 노추다. 하지만 추한 것이 왜 늙은이에게만 있었겠는가. 나이가 어려도 마음이 추할 수가 있고, 청장년도 얼마든지 행동거지가 추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주위를 보면 후안무취한 사람, 추할 대로 추한 사람을 많이 보기도 한다. 나도 항상 언행을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참, 어렵다>에서 -
그의 수필을 읽으면, 곳곳에서 흘러넘치는 성찰의 물결을 느낄 수 있다. 물질만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인생은 오히려 정직하게 땀 흘리며 살아가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기에, 평범하고 자만하지 않고 죽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며 정직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다. 정신적인 풍요로움이 물질적인 만족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만, 권력에 편승해 갑질을 일삼는 추한 사람의 삽화를 글 속에 넣음으로써 읽는 재미와 교훈적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다. 문학이란 시대와 사회의 구체적인 표출이어야 하고 그런 사회 속에서 인간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은 고대에도 있었지만 근대에 이르러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문학은 인생의 표현이요, 사회의 거울이라고 하는 것도 작품이 보여주는 내용이 작가의 주관으로 들어온 경험의 여과된 재현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소재로 하는 수필만큼 강한 힘을 발휘하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그 자체가 부분이지만 종합된 하나의 ‘세계’이며 ‘시대’이고 ‘사회사’이자 ‘인간사’이기 때문이다. <명함이 사라졌다>에는 남은 세월이라도 문학에 정진하여 괜찮은 작품,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는 작가가 되는 인생 후반부의 절심한 소망이 담겨 있다. 인생 후반부에 가서 추할 대로 추한 후안무취의 노인들이 많은 이때, 깊은 주름 속에 담긴 연륜을 젊은이들에게 보여주며 ‘폼나게 살고, 폼나게 죽고 싶다’고 하는 작가의 의지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의 성찰, 자신과의 약속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술로 인해 가정이 파탄난 사람, 자기 목숨뿐 아니라 남의 목숨까지 앗아간 어이없는 사람, 공들여 쌓아왔던 부와 명예를 송두리째 날려 버린 사람, 여기 열거한 사람들은 우리 주위를 돌아보거나 고위 공직자 인사청문회 장소에서 부적격자로 낙마하는 인사들을 티브이 뉴스를 통해 많이도 봤다. 술이 시름을 잊게 해 주기보다 때론 산더미 같은 걱정을 만들어 탈일 때도 많을 성싶다. 나도 지난 날 음주운전하다 된통 걸린 적 있다. 운전면허 취소처분에다 벌과금 백만 원까지 납부해야 했으니 우리 마눌님 속을 태워 얼굴 살펴보랴 한참 동안 속 쓰린 적도 있었다. 그보다 평소 순리와 원칙을 늘 주장해 오던 내가 그것도 음주운전으로 법을 위반했으니 꼴이 뭐가 됐겠나. 지인들, 자식들 보기 창피하고 민망해 여러 해 유구무언 속죄하고, 멀뚱멀뚱하게 바보처럼 지냈다. 술로 인해 망신은 당했으나 폐가까지 이르진 않아 천마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술 이야기>에서 -
수필은 자아와 그리움을 찾아 나서는 작업이다. 현재는 과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자신의 과거를 잃고 현재에 묻힐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회상을 하는 가운데서 자신을 찾아 바로 세우는 일이 바로 수필적 생활이다. 오기로 가득 찬 의식의 산실이었던 청년기 흑백 사진처럼 아련한 실수였던 허물을 그는 과감하게 밝힌다. 음주운전에 대한 고백이 그것이다. 다소 솔직한 공간에서 황성창이 마주하는 사건의 애환을 담은 실수담은 비난이나 원망보다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설익은 과거의 모습이 이해로 다가오는 것은 고백은 언제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수필이라고 하는 것에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백’이다. 인간이 가면을 벗고 진실의 세계로 나오고자 한다면, 인간이 지향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욕심이 없어지고 편안해질 것이며 평화로와질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백은 편안함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끝으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정서를 대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고해성사의 진실 속에서 황성창의 문학은 잉태된다고 하니 얼마나 멋진가.
낭만적으로 살다보면 나도, 너도, 우리는 곱게 늙어갈 성싶다. 인생이 뭔지, 행복이 뭔지 알 시기가 나도 칠십 후반이 되어서부터 겨우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부턴 흐트러지려는 정신력을 끊임없이 다잡기 위해 단정한 외모도 가꾸는 편이다. 그게 마음가짐의 표현, 상대를 귀하게 배려하는 현실적 수단이다. 나는 가까운 분들과 정을 주고받기를 좋아해 틈만 나면 전화로 문안을 자주 묻는 편이다. 나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항상 진심을 담은 말을 주고받으려 무던히 애쓴다. 미움받지 않을 사람으로 산다는 게 그리 쉽진 않지만, 원로문인처럼 연륜에 맞게 미소를 지으면서 곱게 늙어가는 모습을 닮고 싶어 한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남경희로覽鏡喜老란 시구에서 “늙지 않았더라면 요절했을 터/요절하지 않았으니 늙은 것을/살아서 늙는 게 요절보다 나은 것이라는 /이 이치는 의심 할 나위 없다네.”라고 했듯이 백발도 치부가 아닐 진데 거울보고 늙음을 기뻐하듯, 백발 또한 치부가 아니다. 옛말에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했더니, 백발이 저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는 탄로가嘆老歌를 읊어 보면서 삶의 철학을 또 한 번 짚어 보자. 나는 늙는 게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다. 사는 것이 별거더냐, 천년을 사는 주목처럼 청정하게, 곧게만 살 수 있다면 청춘은 영원할 텐데, 뭘 또 바라겠나.
<주목처럼 천년을>에서 -
그는 낭만적으로 살면 곱게 늙어갈 수 있다고 믿는 작가다. 주목은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산다고 한다. 작가가 살면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진실한 소통이다. 그의 수필에서 가장 두드러진 그림자 형상은 상대를 귀하게 배려하는 예의를 품고 있음으로써 나오는 존재에 대한 청정한 기운과 가시지 않을 짙은 인간애의 향기다. 모든 원로들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겠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유독 그에게는 강하다. 그러기에 그는 곧게 살며 낭만적으로 살기를 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표현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그의 대다수 작품들은 반성적 성찰과 깨달음으로 생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진실의 온도를 통해 영원한 청춘의 기적을 만나려는 작가다.
수필을 씀에 있어서, 황성창은 수필이 소시민적 생활의 애환을 그리든, 병든 사회에의 저항과 분노를 나타내든 간에, ‘문학성’ 속에 그 대상을 용해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생의 진리를 담고 있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남경희로’와 ‘탄로가’ 를 적재적소에 놓을 때까지 그는 문학적 감각의 촉수를 갈고 닦았으리라 본다. 문학성이란 말이 상당히 막연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주제와 구성 그리고 표현의 공감도를 의미한다. 수필은 반드시 향기를 지녀야 한다. 그 향기는 솔직함에서 나오지 않는가. 또한 작품과 작가는 일치해야 한다. 수필적 삶의 진실이 그대로 자신의 수필 속에 투영될 때, 향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삶의 진실과 수필의 진실이 같다. 일상을 조탁하는 정서의 힘이 멋을 한껏 우려낸 결과라 하겠다.
여름 내내 청산을 이루어 녹색을 함께 해오던 나무들도 가을이 되고 결실의 계절이 되면 제 각각의 모습으로 구별되기 시작하는 것 같다. 붉게 물드는 단풍나무, 끝까지 녹색을 고집하는 나무를 보며 전성기의 화려함을 아쉬워하고 현재의 초췌한 모습에 서글픔을 느낄 것 같기도 한데---. 한 때는 싱싱한 초록이 아닐 리 없었으나 가을이 오면 저마다 지난날들의 자신을 간추려 보는 까닭은 머지않아 다가올 겨울바람의 매서움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달빛도 점점 차가워지는 하늘 구만리에 기러기 줄지어 울어대는 초겨울이 오기 전에 나도 추수라도 하듯이 한 해 동안 키워온 생각들을 거두어 보는 버릇이 있다. 금년 가을도 손에 잡히는 게 별로 없다. 공허한 마음은 뼈만 앙상히 남아 돌아온 “바다의 노인”같은 생각이 든다. 빈약한 추수가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 위에 정직한 최선을 다하지 못한 후회까지 더한다면 올 한해는 문 걸어 잠그고 새 봄을 맞이할 때까지 겨울이 더 길고 추운 계절로 채워질 것 같아 설렁하고 휑한 느낌이 든다. 겨울이 벌써 두렵다. 결실의 계절, 겉모습은 초라할지언정 다만 한 해를 버틴 생명의 경이로움 정도만이라도 읽어낼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 <결실 가을 단상>에서 -
이 수필은 그가 살아왔던 시간들 중에서도 가장 짙은 결실을 동반하고 있는 작품이다. 자연의 순리가 인향이 서려 있던 시간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 공감을 자아낸다. 수필의 특성 중 하나가 자조적 성격이다. 수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는 거와 같다. 작가는 열매의 결실과 잎 색깔의 변화를 보면서 생의 변주곡에 사유의 초점을 둔다. 그러면서 평온했던 자신의 처지를 동일선상에 놓는다. ‘생명의 경이로움 정도만이라도 읽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고백하는 작가는 이 수필에서 자연의 순리 앞에 숙연해지면서 자신의 삶을 성찰의 끈으로 묶는다.그 운명의 사슬이나 속성에 탐닉하며 작은 소망을 드러낸다. ‘공허한 마음은 뼈만 앙상히 남아 돌아온 “바다의 노인”같은 생각이 든다.’는 작가의 독백은 분주한 현대적 삶 속에서 반성적 성찰을 의미한다. 작가는 결실의 계절 가을에다 인간사를 투영하고, 자신의 삶까지도 포갠다. ’바다 같은 노인‘이란 투사를 통해 짙은 외로움의 여운을 보여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바다의 노인은 자기 존재를 스스로의 눈으로 응시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따라서 이 수필은 자기 응시의 경로를 통해 견뎌온 삶의 향취를 풍긴다고 하겠다.
4. 비판과 참여를 근간으로 한 저항성의 발현
작가의 사회적 책무는 그릇된 현실타파를 외치고, 진실하고 정의로운 삶을 호소하는 것이다. 황성창은 지식인으로서 작가라는 공인으로서 수필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세태에 대해 간접적인 저항을 표시하고,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횡포에 대해 소극적이나마 비판하려 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말한 그대로 작가는 불완전한 사회에 대한 긍정적이면서도 따뜻한 시각을 유지하는 일에도 결코 소홀함이 없다. 작가는 글로써 지켜야 할 진실이 있다. 이런 차원에서 그는 소수자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언제나 정의 편에 서고, 약자의 편에 서고, 서민의 편에 서고, 지배집단의 반대편에 서 있다. 모든 권력에는 항상 오류가 있기 마련이다. 오염된 권력을 겨냥하고 부패한 정권을 정조준하는 그의 글을 읽으면 가슴이 서늘해져 옴을 느낀다. 문학인에게는 이런 지배층의 오류를 감시 감독해야 하고, 그늘진 곳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사회적인 책무가 있다. 그는 문학의 멋과 맛을 살리기 위해 직설적인 비난 대신 세련된 지성으로 수필에 저항적인 메시지를 담아 삶의 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어 자랑스럽다. <서러운 유월>이란 작품을 보면, 정말 분통이 터질 이야기가 나온다. 국가가 전사자의 위패를 보안해 놓고 오십 년 동안 유족에게 알려주지도 않았다니,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게 나라인가’하는 탄식이 나올 만하다.
나도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당사자다. 열여덟에 입대한 맏형은 강원도 철원지역 전투에서 포로가 돼 지금까지 귀환하지 못하고 있다. 살아 계신다면 올해 여든일곱이다. 그후 어머니는 자식의 생사를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막막할 뿐이었다. 어디에도 전해주는 소식이 없으니 하늘이 무너지듯 캄캄 하셨을 것이다. 우리 속담에 “어머니 품속에 밤이슬 내린다.”는 말이 있다. 꿈에서도 자식 생각하며 눈물, 정성, 사랑을 이슬처럼 쏟는다는 얘기다. 어머니는 가끔 울먹이시며 “통일이여! 어서 통일이라도 돼봐라”고 간절함을 애절하게 소망했지만 상봉의 꿈을 못 이른 채 평생 구곡간장 다 녹이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한국전쟁의 원흉 김일성이나 모택동 그리고 스탈린 같은 인간들을 원수로 삼고 살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생각에 추호도 변함이 없을 것 같다.
<이게 나라인가>에서 -
오늘날 우리는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다. 과거와 비교해 오늘의 현대만큼 혼돈과 무질서의 시대도 없었던 것 같다. 도처의 여러 요인들이 이러한 대격변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사회의 모순된 제도와 위장된 주의와 부패한 정치가 활개치고 왜곡된 정의와 타락한 윤리가 만연하고 있다. 이 수필은 이런 문제를 정조준하고 있어 시원함을 안겨준다. 분단의 현실 속에서 안보를 두고 진보와 보수파가 서로의 가치를 내세워 싸우느라 우리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다. 한마디로 현대는 격동과 시련에 직면하고 있으므로 미래가 불투명하여 변천의 방향을 예상할 수 없게 한다. 이 수필은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판독할 수 있는 시대적 좌표를 제시한다는 데서 커다란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통일이 어디 이산가족만의 염원이고 소망이던가. 온 민족의 소원이 아닌가. 그는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당사자로서 작금의 안보불감증에 깊은 우려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사드배치문제를 두고 시위자들에 의해 경찰이 포위당하고, 검문당하는 등의 불법적 사태를 지켜보면서 나라가 나라다운 품격을 잃었다고 작가는 정부에 직격탄을 날린다. 이러한 때 오늘날 문학의 위치와 작가의 임무, 나아가서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작가가 단순히 이상의 세계를 그리는 창작에만 몰두하기에는 오늘의 가치관 혼란이 우리에게 주는 가속과 중압감은 너무나 크다. 그러기에 작가는 작가정신을 기반으로 미래를 응시하고 자기 자신과 겨레와 인류의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글은 저항적인 글의 모델이 아닌가 싶다.
이렇듯 세계로 퍼져가는 우리말이 열풍처럼 후끈거리고, 우뚝 선 한글은 밤거리 네온처럼 빤짝이고 있는데, 요즘 우리 청소년들이 쓰는 경박한 언어가 심상치 않다. 특히 스마트폰 등장이후 출처불명의 은어들이 카톡 문자로 손가락 몇 번 까닥하면 온갖 괴담들이 세상을 담방 덮어 버린다.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선생님 보다 매스컴이 더 직접적 영향을 끼치면서 우리 사회의 언어 질서가 무너진 듯도 하다. 텔레비전의 개그콘서트나 드라마 대사가 전투적으로 거칠고, 폭력적인 위계질서의 파괴 등에서 오는 원인이기도 한 것 같다. 티브이나 라디오에 출연해 싸가지 없는 어투를 막 쏟아내는 저질스러운 연예인을 볼 때도 아슬아슬하기 그지없다. 또 이를 예사롭게 보도하는 언론의 책임도 크다. 대중적인 영향력을 지닌 언론만큼은 바른 언어를 써야 옳을 것 같다.
<아름다운 한글문화>에서 -
황성창 수필이 거처하는 또 하나의 공간은 비판적 성찰이다. 그는 나는 현실의 모순을 보고 있을 수만 없다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언제나 기대어 현실을 투시하고자 한다. 작가로서 자신의 역할을 저항의 영토에서 힘껏 발휘하는 작가다. 모든 수필이 지녀야 하는 공통적 요건 중에 하나가 대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저항성이다. 저항성이란 화려하거나 현란한 언어 구사와 거창한 주제와 경이로운 소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필 작품을 통해 이르는 효과에 중요한 조건이 되지만, 보이지 않는 현실과 사물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자리하며,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유발할 때, 문학적 미학은 완성된다.
수필은 어떤 문학보다 작가정신을 요구하는 글이므로 수필가는 지성이 풍부한 사람이라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물상을 사랑하는 데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객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가능한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민족적 차원에서 한글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수필의 국어순화의 중요성을 논하면서 방송의 바른 역할을 주문하고 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우리 모든 국민은 누구나 말 속에 존재하고 산다. 바른 용법으로 말과 글을 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국민의 의무다. 정신의 표현인 말을 바르게 쓰도록 변화시키는 것은 문인의 역할이다. 언어의 변화는 곧 그 사람 정신의 변화요, 정신의 표현이다. 잘못된 한글의 쓰임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을 표하여 그런 노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잊을 만하면 곪아 터지는 재벌들의 잦은 분쟁을 보면 맞갖잖은 짜증이 삼복 강더위에 열불이 타오른다. 몇 해 전 삼성이 형님 아우가 한 판 붙었다가 화해로 끝났으나 몸살 앓는 소리가 꽤 시끄러웠다. 현대그룹의 2000년에 벌어진 왕자의 난은 골육상쟁의 대표적 사례다. 두산도 비자금 폭로전을 벌이다 벌인 쪽의 오너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불행한 일도 있었다. 또 부모 자녀가, 이복형제가 갈등과 불화로 멱살잡이로 물고 뜯는 꼴사나운 투전판 싸움도 수두룩이 보아왔다. 기업경영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원칙의 싸움이 아니라 돈의 쟁탈전이다. 돈이 너무 좋아 한 푼이라도 더 갖겠다고 명분도 서지 않는 일에 이빨을 갈며 몰골사납게 싸운다. 법화경에 “황금비를 내린 다 해도 욕망을 다 채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돈에 무한 집착하는 이들을 빗대어 말한 것 같다.
<천의 얼굴>에서 -
그러고 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사회지도층의 행동철학이 되었다. 물론 세상이 변하면서 사회지도층의 의미도 달라져 왔고 그들의 책무도 달라졌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명실상부한 귀족의 존재가 사라진 지금 노블레스의 자리는 권력을 가진 정치가나 재력을 소유한 자본가에 의해 채워지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귀족이나 왕족의 책무가 아니라 '가진 사람'들의 책무인 것이다. 그러나 사회지도층 스스로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내세우기는 쉽지 않다. 언명과 실천이 함께 가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수필에서 법화경에 “황금비를 내린 다 해도 욕망을 다 채울 수 없다.”는 말로 돈에 무한 집착하는 재벌들을 빗대어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이런 사례를 통해 자기 교만의 이기심을 경계해야 함을 지적한다. 작가는 돈지상주의를 쩐의 전쟁이라 하였다. 지금은 따뜻한 자본주의 4.0시대다. 승자독식의 카지노 경제, 피도 눈물도 없는 샤일록 경제 사회는 더 이상 발을 붙일 수가 없는 시대다. 이런 시대적 요구와 요청에 부응하는 글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적 발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매천은 한양생활 구년 만인 서른에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하지만 당시 조정의 가렴주구와 부정부패가 극심한 정치현실에 개탄하며 정치인을 “귀신같은 나라, 정신 나간 사람”이라 질타한 후 벼슬길을 단념하고 낙향해 학문에 전념 평생 초야에 묻혀 지냈다. 한양의 친구들이 서찰을 보내 은거를 책망할 때마다 그는 “자네는 어찌하여 나로 하여금 도깨비 나라, 미친 사람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서 도깨비, 미치광이가 되게 하려는가?”라고 되묻곤 했다. 당시 조정의 사정이 어떠했기에 매천이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 고종임금 친정 이래 날마다 유흥을 일삼아 매일 밤 연회를 열고 질탕하게 놀았다. 초시도 매매하고 진사는 금 석 돈이면 살 수 있다고 한다. 일등 수령 자리는 오만 냥이고, 관찰사 자리는 10만 냥 내지 20만 냥으로 거래되었다. 매관매직이 횡행한다는 이야기다. “사람마다 주사요, 집집이 참봉”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문란했던 과거제도다. “이러고도 나라가 안 망하면 사실 이상한 것이다.”매천이 과거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 글이다. 그가 벼슬길을 단념하고 향리에 은둔 결정을 이해할 수 있는 매천야록의 글 중 일부에서 볼 수 있다.
<조선의 지식인 매천>에서 -
황성창의 사회참여 수필 십여 편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그림자 형상으로 투영되어져 나온다. 공자가 ‘지미’知味를 통해 중용의 실천을 강조했듯이 작가는 무엇보다도 사회 지도층은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설파하고, 대부분 수필에는 특권을 향유하는 것에 상응하는 도덕적 임무를 다해야 한다는 뜻을 담았다. '사회지도층의 책무', 즉 부나 권력 또는 명예를 갖고 있는 지도층의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것은 황성창 수필을 관통하는 핵이다. 이 작품 외에도 많은 작품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강조한다. 작가는 조선조 최고의 지성 매천의 낙향과 자결 그리고 고종조의 매관매직 현실을 그리면서 맑은 영혼을 가질 때만 욕망의 모든 집착에서 해방되어, 그야말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은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용의눈물(1)(2)>은 자기만 살겠다고 의리 없이 주군을 배신하는 정치인들에 따끔한 질책을 보내는 글이다. 지도층에게는 높은 도덕성과 함께 남다른 의무가 지워진다. 이처럼 지도자가 특권을 양보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솔선수범하면서 부를 사회에 환원할 때 존경받을 수 있다는 것이 황성창 수필이 내세우는 핵심 가치다. <아무나 하나>라는 수필은 목민관의 조건과 유권자의 의식을 강조하는 글이다. 작가는 글로 말한다. 그는 그런 작가의식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다는 데서 우리 시대의 스승이라 하겠다.
황성창의 사회수필은 무엇보다도 푹 찌르는 맛이 있고, 톡 쏘는 맛이 있다. <역병>이란 수필은 메르스사태에 갈팡질팡한 정부와 불안증에 덜덜 떠는 국민의식을 꼬집고 있다. 정보적 가치가 있고, 지적 욕구도 충족시켜 준다. 많은 사람에게 읽혀져야 할 요건을 갖고 있는 점도 크나큰 장점이다. 위에서 언급된 수필은 사회수필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어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뜨겁게 하는 진지한 성찰의 시간을 준다. 그의 수필에 나타나 있는 메시지는 현실에 대한 강한 직시와 적발의 모습을 띠고 있다. 특히 다양한 일화는 시사하는 바가 너무 많아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받아 내리라 확신한다. <소나무>란 수필에는 소나무처럼 곧고 당당하고 초연하게 살아가려는 작가의 다짐이 담겨있다. 이 책의 출간 효과는 설득이나 감동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은 수필가나 고급독자들에게 충격을 주는 것도 포함된다. 작가는 글을 통해서 부조리한 시정을 파헤치나 자신의 철학을 독자들에게 주입시키려하지 않는다. 설득하려 들거나 강요하지도 않는다. 지성적 에세이에 문학적 향기가 느껴지는 것은 그의 인격이 주는 영향이라 하겠다. 어떤 수필가에게서 이처럼 치열한 작가정신을 찾을 수 있었던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따가운 비판이 칼날과도 같이 번쩍임을 볼 수 있어 다행스럽다.
III.
황성창 수필집은 ‘작가는 글로 말하고 인간성으로 평가 받는다’는 명제에 답하고 있어 성공적이다. 이 수필집의 작품적 소재들은 정말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 가슴 깊이 담아두어야 할 가치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수필이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와 이에 대처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다. 수필은 총체적이고 추상적인 현실을 보다 심미적 가치를 지닌 삶을 실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가슴이 서늘하거나 후끈한 인간미가 배어 나오지 않는 글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황성창은 영원한 어머니의 십자성이 빛나는 세상을 추구한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차원에서, 보다 인간적인 향기로 이 세상의 매듭을 만들며, 풀어나가고자 하는 황성창 수필은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수필의 본령은 인간 구원에 있다는 허드슨의 정의처럼 황성창은 득실거리는 사회의 군중 속에서 무엇보다도 인간의 정을 추출해 내어서 렌즈 밑에 정착시키고 그것을 멋스럽게 확대시키고 있는 점에서 멋져 보인다. 무엇보다도 여러 권위 있는 글을 따와 인용함으로써 주제의식의 구체화를 도왔다는 것이 문학적 성취에 빛났다. 언어의 활용면에서 비유의 멋을 한껏 우려내고 있어 재미도 주었다. 네 부류로 나누어지는 수필적 특성이지만 가장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이 사모곡이었다. 어머니는 존재의 시원이다. 기억해 놓는 일만 해도 가치로운 일이다. 그런 어머니의 삶을 통해서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기도 하고, 그 가운데 자신을 반성하기도 하고,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독자에게 일러두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지 황성창은 인간적인 유대가 확인되는 따뜻한 심성의 작가라 하겠다. 그의 따뜻한 마음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것으로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주었다고 하겠다. 그가 추구하는 길은 자기실현과 인격완성이니 만큼 더욱 더 멋진 작가로 성장해서 더 좋은 수필을 써내리라 확신해 본다. 부산문단의 신사작가로서 충분히 글로 말하고 인간성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