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41] 김기영 (金基榮) - 나의 삶을 돌아보며 5. 6·25 발발과 중·고등학교 시절 - 2
12 서울이 환도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3일 동안 걸어서 서울 말죽거리에 도착했는데 한강 도강이 허락되지 않아 밤에 안내원을 사서 안내원의 도움으로 온 식구가 맨몸으로 도강하였다.
13 전쟁 때 빠진 탱크들 위에 발 디딜 정도 넓이의 철판을 연결해 놓은 지점을 알고 있는 안내원을 따라 앞뒤 사람이 쭉 손을 잡고 철판만을 디디면서 강을 걸어가는 아슬아슬한 장면이었다. 14 환도 후에는 생활 대책이 전무하던 터라 학교에 간다는 것은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1, 2년이 지난 후 동부훈육소(서울의 흩어져 있는 학생을 동서남북 4군데에 모은 서울시가 운영한 임시학교)라는 학교에 입학하였다.
15 남녀공학에 각 학년은 한 반씩이었으며 책걸상도 없이 맨바닥에 방석 한 개 놓은 것이 학생의 자리였다. 그때 나의 출석번호가 100번이었는데 시험 점수를 발표할 때마다 100번 100점이어서 모두의 관심을 모았다. 16 그러다가 부산에서 환도해 올라온 진명여중 본교에 가게 되었다. 어느 날 반장을 정하는데 모든 아이들이 나를 추천하는 바람에 등 떠밀려 반장을 하기 시작하여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반장이었다.
17 특별한 이유보다는 잘난 척 안 하고 성실해 보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대로 무사히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도 진명여고에 원서를 내어 합격하였다.
18 겉으로는 공부도 잘하고 학도호국단 진명 연대장으로서 학교 대표로 서울시 행사에 나가기도 하며 진명 퀸인 정건상을 수상하기도 하고, 학교 대표로서 청와대에 가서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를 하기도 하며 학교를 잘 다니는 것 같았다. 19 그러나 사춘기여서인지 나의 마음속은 늘 우울하고 세상이 염세적으로 보이며 공부해서 뭐하나 하는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20 그래서 숙제도 하지 않고 시험공부도 게을리하고 선생님들도 꼴 보기 싫어져 대학에 진학할 시기에는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까지 생각했다. 속으로는 반항적인 심사를 어떻게 해결할 줄 몰라 힘들어했었다.
21 나를 아끼는 선생님은 집에서 진학을 허락하지 않는 줄 알고 가정방문까지 오셔서 아버지를 설득하셨으며, 그 선생님께서 직접 이화여대 국어국문과에 입학원서를 내도록 하여 등 떠밀려 이대생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