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숨결로 빚은 사발
김미옥
햇살이 바람에 부딪쳐 아래로 떨어진다.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에 위치한 상주옹기장에 들어서면 발끝에 닿는 흙 마다 생동감이 느껴진다. 이곳은 백년의 시간을 넘어 전통적인 방법으로 옹기를 제작하고 있다. 무형문화재 상주옹기장 정대희 선생은 6대째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옹기 이외에 차(茶) 도구에도 관심을 갖고 찻사발의 작품마다 이름을 붙여 생명을 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호기심에 이끌렸다.
상주옹기장에 들어서자 황금빛을 띤 황옹이 아낙의 치마폭처럼 펼쳐져 있다. 옹기마다 인간의 손으로 빚어낸 오묘한 자태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여기저기 움틀 거리는 흙을 딛고 나무 장작이 겹겹이 쌓여있다. 길 가장자리로 깨진 사발이 바닥을 딛고 있는 모습도 눈에 띈다. 문득 일상에 지쳐 느슨해진 마음에 뜨거운 기운이 전해온다. 삶의 희로애락은 사발을 빚는 과정과 같으리라. 눈길 닿는 곳마다 지나온 시간이 겹쳐 떠오른다.
그냥 이뤄지는 게 없었다. 마음 속 뜨거운 열기를 담고 한걸음씩 나아가야만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기까지 과정은 어렵고 힘들었다. 하나의 완성은 삶의 일부에 불과했다. 삶 속에서 마음을 의지할 동반자를 만나고 함께하는 열기 속에 자식도 태어났다. 겨우 백일 된 아이를 맡기고 경력을 쌓으러 홀로 먼 길을 떠났다. 무시무시한 외로움의 무게가 나를 덮쳤다. 삶은 고독 속에 끊임없는 인내를 요구했다. 아이가 첫돌이 되기 전 병원에 입원시키면서까지 구직의 몸부림은 치열했다. 그때 내 인생의 사발은 조각난 덩어리를 붙여서 만든 것처럼 초조하고 불안했다. 어설픈 엄마와 아내 역할에도 삶은 모난 것을 두들겨 맞추며 이어가게 했다. 때로는 일의 높은 완성도와 가족의 요구가 맞물리면 관계는 틀어지고 지쳐만 갔다. 깨진 사발마냥 엉성하게 구겨진 모습으로 얼마나 울었던가.
바람이 나를 휘감아 시선을 이끈다. 흙을 반죽한 덩어리가 눈에 띈다. 사람 몸피보다 큰 뭉치가 비닐에 덮여 있다. 또 다른 한쪽에는 모양을 갖춘 사발이 헐벗은 본연의 자태로 바람을 쐬고 있다. 힘들고 긴 여정을 앞두고 숨고르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나의 지나온 시간들을 헐벗은 사발에 반추해 본다. 인내를 익히며 서두르는 법이 없이 한걸음씩 나아가는 모습이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처음의 무거운 마음은 오간데 없고 호기심과 열정으로 가득해진다.
사발은 도공을 닮았다. 고즈넉한 차실에 앉아 도공이 손수 만든 사발에 차를 격불(擊拂)하여 건네준다. 그 모습을 바라보니 윤곽 있는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동자의 광채가 사발의 깊은 그곳을 닮아있다. 중심을 잡고 펼쳐진 콧날개는 흙의 기운을 떠받치는 형상이다. 흰 수염 아래 묻힌 입매는 옹골차다. 차를 건네는 투박한 손은 오십년 세월 한결같이 흙을 빚었음을 알 수 있다. 흙을 만지는 것을 천직으로 여기며 자식을 탄생시키듯 모든 사발마다 ‘호(好)사발’이란 이름을 붙인다고 한다. 토지(土智) 호사발, 잠용(潛龍) 호사발, 다선(茶仙) 호사발 등. 어느새 차 한 모금에 호사발의 일부가 되어 그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발은 좋은 나무를 태운 잿물로 흙을 감싸 생명을 부여받는다. 생기를 불어넣는 과정은 손과 발을 부지런히 움직여 숨이 차오를 때까지 계속된다. 흙과 물이 따로 뭉쳐있지 않도록 빈틈없이 치대어 반죽에 공기가 스며들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고운 모양과 반듯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힘든 작업이 계속된다. 각고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반죽은 부드러우며 찰지다. 흡족하게 반죽이 완성되면 허리를 펴고 달을 쳐다본다는 도공의 눈빛이 비장하다. 계속된 도전과 실패 이후의 성취감 같은 심정이리라. 삶을 이끄는 자세는 온갖 정성으로 반죽을 빚어내는 마음과 같다. 이야기 속에서 내가 도공이 되어 인생의 사발을 빚는 생각에 잠긴다.
달 밝은 밤에 염원을 담아 물레를 잡는다. 찰진 반죽이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를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사발을 빚으려고 물레를 잡았지만 세상 심보가 파고든다. 순간 형태가 일그러지고 잘 돌던 물레가 멈춘다. 다시 물레를 잡고 힘주어 매만진다. 손끝이 보드라운 살결을 만지듯 떨린다. 물레를 움직여 손으로 모양새를 잡아간다. 잘록하고 둥글게 채울 곳과 비울 곳을 살피며 어루만진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콧등을 타고 내려와 손등에 떨어진다. 이미 눈빛은 사발과 일체가 되어 있다. 물레를 돌리고 돌려 맘 속 깊은 꿈을 사발에 각인한다.
사발에 담긴 소망이 바람과 만나면 생명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과하거나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거칠고 강한 바람에 말리면 갈라지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실금이 생긴다. 너무 부드러워도 원하는 작품을 얻지 못한다. 결과는 과정의 흔적이다. 살아가면서 일이든 가족이든 한 쪽에 치우치면 다른 쪽이 나를 두들긴다. 수많은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며 한걸음씩 나아가지 않았던가. 일상의 지쳐있던 마음에 뜨거운 열기가 번진다.
머리에서 심장으로 자연의 숨결이 전해진다. 이제는 온전히 헐벗은 자태로 불의 혼을 담아 뜨거워질 차례다. 가마에 사발을 넣고 불을 지핀다. 바람과의 조화를 잘 이루도록 두루두루 살펴보아야 한다. 화기와 사발의 상태는 물론 공기의 흐름까지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화신의 품에 안긴 사발은 모든 것을 초월한 의연한 자태로 불의 혼을 휘감는다. 한걸음씩 나아가며 기다릴 뿐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마음에 초조함은 없다.
사발에 담긴 그윽한 차향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도공의 이야기는 고통과 인내의 끝에 경험하는 환희를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을 갖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되살아났다. 뭉클한 마음에 눈을 들어 방안을 둘러보니 호사발에 눈길이 닿는다. 붉은 숨결이 그대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생명력을 느낀다. ‘쿵쿵’ 내 가슴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생명이 깃든 사발은 숨을 쉰다. 사발에 자연의 혼을 담아내는 한국 장인의 모습은 아름답다. 온몸으로 땀을 흘려 전통의 숨결로 빚은 사발은 마치 삶의 그릇처럼 마음을 담은 형태로 빚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