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
이광소
어둠이 내릴 무렵
저기, 마을로 들어오는 것이 개인가 늑대인가
분별할 수 없는 시간
우리는 무엇인가 준비하는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던 거리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수십 명이 쓰러질지
아니면 수백 명이 쓰러질지 모른다
한때 사거리 편의점 입구에 모인 사람들
커피를 마신 종이컵들이 쌓였던 때를 기억한다
언젠가 큰 거리에서 내뿜던 최루탄 가스에 쫓겨
골목보다 먼저 쓰러진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살았다
퇴근 후 집으로 일찍 들어가는 길을 잃어버렸으며
우리 함께 연접된 끈을 잃어버렸다
이제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더 이상 소중한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해야할 시간
잃은 것들을 그리워하며 거리를 서성이는 자들은
지금 단호한 행동이 필요하리
장례차가 급히 지나가고
사거리를 지나간 사람들은 언제 다시 돌아올지
돌아오지 못할지, 알 수 없는 일
주인을 잃은 개 한 마리 어슬렁거린다
허공 속에 길이 있다
이광소
그대가 여백으로 남겨두고 간 허공
미지의 넓은 공간을 바라본다
지상을 달리다가 지칠 땐
그대 힘찬 목소리와 손짓을 기억한다
내가 날 수 있는 곳이 아직 열려 있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외로움을 안은 채
우주의 깊이를 짚어본다
나뭇가지 위에 둥지를 틀던 새가 기지개를 펴듯
접은 날개를 펼치는 허공,
새알 품기 위해 밤마다 별들이 내려오는 통로
나무들도 제 몸을 구부리며 길을 만든다
빌딩과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벗어나
나무와 새와 별, 그 사이에 열려진 세계
내 외로움이 끝나는 날까지
수많은 빛과 날개가 숨어 있는 허공의 깊이,
그곳에 길이 있다
횡단보도
이광소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비가 내리고
나의 아침은 비에 젖어 있다
횡단보도 건너편에 너는 있고
그곳은 햇빛이 비치고 있어
활짝 핀 장미꽃잎이 나를 설레게 한다
횡단보도를 건너기는 쉽지 않은 일
석기시대 유목민이 밤새워 토기에 빗살무늬를 새기며
한곳에 정착하고 싶었던 갈망으로
빗살무늬 보도를 건너가야 하리라
계절풍이 두 겹, 세 겹 옷자락을 붙잡는다 할지라도
어제까지 나 혼자만의 방식을 버려야 한다
장미꽃잎의 깊이를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겹겹이 싸인 시간, 그 어두운 터널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비가 내리고
내 마음은 햇빛이 비치는 그곳에 있다
난간
이광소
우리는 아스라하게 난간 위를 걷는다
밖과 소통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걷는 것이지만
한 발 헛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횡단보도를 건너가다가 과속한 차에 치인 사람도 있고
늦은 밤 귀가하다가 끌려가 성폭행을 당한 사람도 있고
해외관광을 떠났다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은 사람도 있다
지상에 안전지대는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난간이고
낮이건 밤이건 때도 없이 사건이 발생하는 걸 보면
순간과 순간 사이가 난간이다
된바람이 몰아치는 오늘따라
갈대들이 함께 어울려 흔들리는 동작이
저리 아름답게 보인 적은 없다
살아서 흔들리는 손짓들, 함성 깃든 몸짓들은
죽음을 통과한 순간의 의식儀式이다
쓰러지고 엎어지고 수많은 난간을 지나온 내 젊음은
잃은 것도 또한 많았지
집을 잃고 부모님을 잃고 역병으로 직장을 잃고
눈먼 기타리스트가 마지막 주고 간 기타마저 잃고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집에서 직장까지가 난간이고
그리운 사람과의 거리가 난간인데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고도를 찾아가며**
지금 강물을 가로지른 용연구름다리 난간 위에서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고 일몰을 바라보고 있다
낮과 밤 사이
경계도 없이 가볍게 흘러가는
흰 구름과 내통하면서
* 아르투르 랭보의 시 「굶주림」 인용
**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차용
잠수부
이광소
]
전북대학병원 7352호 중환자실
산소 튜브를 코에 꽂고 있는 그녀는
잠수부처럼 심해 속으로 잠수하고 있는 듯하다
죽은 자들을 수색하는 수색작업인 양
살아 있는 자들을 구조하는 구조작업인 양
수심이 깊어질수록 강한 압력을 받는 잠수부는
벌목장이에 온몸을 찍힌 후유증처럼
호흡이 차츰 거칠어지지만
그녀가 마지막 시도하고 있는 것은
삶과 죽음 사이를 탐색하며 귀 기울여
기력을 다해 헐떡이는 사람을 찾아
안전신호를 보내려는 것
상어 떼에 쫓기는 듯
허공에 뜬 헛손질이 잦아진다
갑자기 순발력이 헐거워지는 손짓
허리벨트에 사각형 납덩어리로 된 웨이트도 던지고
숨을 바위나 동굴을 찾고 있는지
앙상하게 드러난 나무뿌리 같은 그녀 손을 붙잡자
쿡! 쿡! 기침하며
물을 뿜어 올리는 상체, 앞뒤로 요동한다
입을 벙긋거리며 지금 수면 위로 뜨고 있을까
파도 속으로 기울어졌던 어깨 너머
나뭇가지 흔들며 솟아오르는 갈매기 날갯짓이 언뜻 보인다
그녀가 눈을 뜨자
선체처럼 기우뚱거리던 병실은
겨우 중심을 잡는다
그녀의 눈이 내 눈과 마주친 순간
주먹 쥔 손에 용수철을 놓친 듯하더니
병실의 유리창이 깨어지는 소리,
그녀 눈빛은 창밖 잎새처럼 팔랑거린다
가슴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지
잎새 사이에 쥐똥나무 열매만 한 눈물을
대롱대롱
공중에 무덤을 판다*
이광소
우리는 노래를 부른다
평생 땅만 파다 쓰러진 부모님
죽어서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아파트가 밀고 들어와
죽어서도 쫓긴 신세가 되었으니
아직 살아 있는 우리는
편히 쉴 곳을 찾아 노래를 부른다
땅 한 평도 없이 전세에서 월세로 쫓기면서
공사장에서 공사장으로 떠돌다가
동료 중 몇은 신축공사장에서 추락하여 죽었다
우리는 노래를 부른다
전기톱에 손가락을 잃었을지라도
우리는 공사장에서 일을 멈출 수 없다
삼천 도의 가스용접으로 눈을 잃었을지라도
대인들은 명산을 찾아 골프를 즐기며
땅에 투자하여 소유물을 늘려가지만
편히 등 대고 누울 땅도 없는 우리는
아우슈비츠 포로들처럼 공중에 무덤을 판다
땅을 파다가 쓰러지면
화장의 연기는 공중으로 피어오르고
그제야 우리는 공중에서 편히 쉴 수 있을까
바람이 된 우리는 땅이 없어도 자유로울까
노래를 부르다 쓰러진 포로들은
사슬을 풀지 못하고 기진맥진,
공중에 무덤 파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오늘 낮에도 누군가 엠블런스에 실려 갔다
* 파울 첼란의 「죽음의 푸가」에서 인용
덕진 연화교 흔들다리
- 부재 *4
이광소
덕진호수를 가로지른
연화교 흔들다리를 건너가노라면
몸도 흔들흔들 마음도 흔들흔들
살아가면서 몸이 무거운 날은
한번쯤 흔들려 볼 일이다
가라앉았던 것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시간은 흔들흔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쓰러지면서 달렸던 학창시절 추억이 연꽃처럼 피어오른다면!
아버지와 헤어졌던 마지막 순간을
물고기가 물고 수면 위로 뛰어오른다면!
해 진 뒤 분수에 레이져쇼가 펼쳐진 순간
남도 강진의 추억, 아이를 밴 여자와 함께 숨어들어갔던
그때 그 찬란한 떨림이 살아난다면!
한순간의 떨림으로 폭풍우 속을 달렸던 넘어졌던
뜨거운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 철이 들어 바흐의 수난곡을 들으며
내가 헤쳐가야 할 고난의 시간은 다가오는데
한번쯤 흔들려 볼 일이다
형주를 짊어져야 할 비장한 순간을 위해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조절하면서
생의 호수에 잠긴 어떤 것들이
중심을 잡으며 나를 지탱하고 있었는지
어떤 것들이 아직도 뜨겁게 살아 있어
내일을 지탱하고 갈 것인지 알 수 없어
흔들흔들 흔들흔들
이광소
1942년 전주 출생.
1965년 문공부 신인예술상 시부문 당선.
2017년 ⟪미당문학⟫문학평론 당선(필명 이구한)
시집으로 『약속의 땅, 서울』 『모래시계』 『개와 늑대의 시간』이 있음.
주요 평론으로 <현대시의 현상과 존재론적 해석> 등이 있음
현)⟪미당문학⟫편집주간(이구한)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