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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리니 멕케리티가 부르는 < Darknight of soul >
* 다비드의 작품 <소크라테스의 죽음>
[ '신고전주의 미술시대'를 연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 ]
자크 루이 다비드는 1748년, 8월 30일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펄펄 끓는 역사의 격랑 속에서 희비의 생애를 살다간 그는, 자기 이름으로 ‘신고전주의’를 열었던 천재적인 화가였고 정치적 격랑 속에서 끝내 벨기에로 도주하여 쓸쓸히 죽어갔습니다.
후대의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정치적 행각을 빗대어 그의 작품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다비드는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실천하기 위하여 예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술은 정치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얼핏 듣기에 지순한 주장에 따르면 다비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다비드는 천재적인 화가로 가히 한 세기의 미술 양식의 흐름을 좌우하였고 아울러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표현하였다 함이 타당한 평가일 것 같습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마라의 죽음>을 보시죠. 한 남자가 죽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장 폴 마라.1793년 여름의 일입니다.프랑스 혁명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을 때였습니다 심한 피부병에 시달려온 그는 욕조 속에서 일종의 목욕치료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널리스트이자 급진주의자인 장 폴 마라는 프랑스 혁명 이후 세워진 국민공회 일원이자 급진 자코뱅당 리더였습니다.
* 마라의 죽음
파리 시민들의 지지를 입은 자코뱅당의 압력 때문에 지롱드당 의원 29명은 국민공회에서 제명되었고 지방도시를 배경으로 간신히 훗날을 도모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에 귀족 출신의 지롱드파였던 샤를로트 코르도네라는 여인이 거짓 편지를 들고 방문하였다가 그의 가슴에 칼을 꽂은 것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샤틀로트는 사흘 뒤 처형되었습니다.
혁명 정부는 긴급히 화가 다비드를 불렀습니다. 물론 이는 혁명적 정치가들이 어디 화실에다 삐삐를 쳐서 그림 잘 그리는 사람 하나를 급히 부른 게 아닙니다. 다비드는 그들(자코뱅당)과 함께 신념과 행동을 함께 해온 동지였습니다. 마라, 로베스피에르, 당통 같은 사람들이 이론과 연설과 신문을 무기로 삼았다면 다비드는 붓을 들었던 차이뿐이었죠.
마라 살해 사건이 나기 5년 전, 1789년에 프랑스는 마침내 혁명의 격동기로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1789년 6월 20일, 당시 평민 출신의 혁명아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평민 대표와 성직자 중심의 국민의회가 루이 16세의 명령에 따라 회의장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에 혁명 그룹은 긴급히 테니스코트에서 집회를 갖습니다. 이 자리에서 국왕의 허락 없이도 평민 대표와 귀족 성직자들이 힘을 합칠 것을 서약하였습니다. 이때 이미 다비드는 그 현장에 참여하여 ‘프랑스 혁명’을 이끄는 주역들과 수많은 사람들을 생동감 있게 그린 바 있습니다.
* 평민들의 <테니스코트의 집회>
이후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당 리더가 되고 파리코뮌 대표가 되며 다비드 역시 자코뱅 당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윽고 혁명아들과 프랑스 시민들은 1793년의 1월 20일에 루이 16세를 처형하는 의회 결의까지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그해 여름에 장 폴 마라가 척살 당한 것이죠.
혁명 정부가 다비드를 부른 것은 그가 뛰어난 미술가이자 혁명의 신념을 함께 했던 동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림 속에서 마라는, 가슴에 자상의 흔적이 생생하고 욕조 옆의 수건까지 피로 물들어 있음에도, 마치 수난의 예수처럼 거룩하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욕실 안에는, 유럽의 욕실 문화의 디테일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일체의 장식이나 소도구가 없습니다. 오직 마라의 죽음뿐입니다. 다비드는 현세의 많은 요소들을 생략함으로써 마라가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갔으며 그 죽음은 일상의 슬픔이 아니라 숭고한 비극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비드를 ‘신고전주의’의 첫 번째 화가라고 부르는 것은 다비드가 로마에서 그림을 배웠고 젊은 작가들의 영예인 ‘로마 상’까지 수상했을 정도로 고전 로마 문화에 능숙했던 것으로부터 기인합니다.
고전 문화에 능숙하게 된 다비드는 프랑스로 귀국하여 1784년 작품인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를 시작으로 <소크라테스의 죽음>, <사비네의 여인들>, <나폴레옹 대관식> 등을 그렸습니다. 이 모든 작품들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양식이 고스란히 재현된 것으로서 엄격한 구도, 뚜렷한 윤곽선, 세부에 대한 극도의 사실적 묘사, 윤리적인 주제, 숭고한 비극미 등의 공통점을 갖습니다. 이는 근대를 향한 영웅적 열망이 지배했던 그 당대의 감성이기도 했습니다.
관점에 따라서는 다비드가 정치적 경향성의 작가이고 더욱이 한쪽 편향의 나팔수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할 수 있지만, 그 시기가 ‘프랑스 혁명’이라는 격랑의 시기였고 누구도 그 파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으며 오히려 다비드는 자신이 익힌 예술 양식과 정치적 신념을 가급적 일치시키고자 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레카미에 부인은 당시 파리 최고의 미인으로 손꼽혔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은, 단단한 정치적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온 몸을 던졌던 장 폴 마라의 죽음을 정밀하게 그린 사실화이자 당대의 혁명적 열기에 대한 경건한 투사이며 동시에 자신의 예술적 정치적 신념까지 은은하게 드러낸, 매우 정치적인, 그러면서 동시에 매우 인간적인 기록화이기도 합니다.
다비드는 자코뱅당의 우두머리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자 투옥됩니다. 그렇지만 후에 나폴레옹에게 중용되어, 예술적·정치적으로 미술계 최대의 권력자가 되어 화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앵그르, 그로, 제라르를 비롯하여 19세기 중엽에 활약한 고전파 화가들은 모두 그의 밑에서 나왔습니다.
나폴레옹 실각 후 추방되어 1816년 브뤼셀로 망명하였고,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 작품 감상 >
*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이 작품은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5년 전에 제작되었으며, 신고전주의의 신호탄이자 다가올 혁명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혁명을 앞지른` 미술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혁명 전야의 투지 정신을 담아내고 있으며, 당시 열광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림은 늙은 부친 호라티우스 앞에 한 줄로 선 삼형제가 조국을 위해 싸움터를 떠나기에 앞서 부친께 맹세를 하고 있는 긴박한 순간입니다. 오른쪽에 슬픔에 젖어 있는 연약한 여인들의 표정은 한층 감동적인 요소를 더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18세기 말 고전미술의 복고운동과 정치적 시대상을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주제는 플루타르크 전기에 나오는 애국심과 사랑의 갈등이 담긴 로마사 중의 한 에피소드입니다. 고대 로마와 이웃의 알바 군대는 싸움을 해야 할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대 전체가 전투를 하는 대신 양쪽에서 세 대표를 선정해 승부를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로마의 대표로는 호라티우스의 삼형제가 뽑혀 알바의 대표인 쿠라티어스 가의 세 아들과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호라티우스 가의 여동생 카밀라가 쿠라티어스 가의 한 아들과 약혼해 시집가게 되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에서는 호라티우스의 세 형제가 한동아리가 되어 칼을 들고 있는 아버지에게 팔을 들어 엄숙하게 선서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뒤에서는 검정 옷을 입은 큰며느리가 두 아이들을 달래고, 둘째 며느리는 실의에 빠져 기절한 듯 축 늘어져 있습니다. 그 옆의 소매 없는 흰 옷을 입은 젊은 여자가 약혼한 카밀라입니다.
그녀는 머리를 의자에 댄 채 팔을 늘어뜨리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는 호라티우스 가의 형제들이 쿠라티어스 가의 삼형제를 죽이고 개선했습니다. 오빠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카밀라가 자신의 남편될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항의를 하자 큰오빠는 여동생 카밀라를 죽여버렸습니다. 또한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죽인 아들을 칭찬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는 형제마저도 희생한다는 이 비극적인 로마의 설화는 코르네유가 각색하여 수년전에 파리에서 공연되었기 때문에 다비드는 그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죠.
* 사비니의 여인들
작품의 배경은 고대 로마의 건국 역사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는 도시에 여자가 적어 인구를 늘리기 위해 이웃 도시 사비니를 침략하여 그곳의 여인들을 납치해오도록 명령합니다.
얼마 뒤 이번에는 사비니인들이 빼앗긴 그들의 딸과 여동생들을 데려오고 로마에 복수하기 위하여 군대를 결성하여 로마를 공격합니다. 격렬한 전쟁 속에서 양 군대를 중재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로마에 살고 있던 사비니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은 모두 사비니인의 딸인 동시에 로마인의 아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헤르실리아라는 여인을 필두로 여인들은 사비니의 군대에 있는 아버지와 오빠를 향해 부부의 연을 맺고 있는 로마의 병사들과 싸우지 말 것을 애원합니다.
다비드는 이 사건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데 있어 독특한 접근 방법을 보여줍니다. 로마와 사비니의 전쟁을 다루었던 이전의 서양 화가들은 역사화의 전례들을 따라 주로 여인들이 납치당하는 순간의 장면을 그렸지만, 다비드는 그 이후의 사건 전개에 주목하였던 것이죠.
이와 같은 장면은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었던 것으로, 다비드는 이를 웅장하면서도 마치 무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극적으로 그려냈습니다. 작품은 다비드 화풍의 몇 가지 변화를 보여줍니다. 먼저 단순한 배경에 몇몇의 주요 인물만이 등장했던 그의 이전 작품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이 작품은 구성이 복잡하며 후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각양각색의 동작들을 삽입하여 훨씬 더 역동적인 화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나폴레옹 대관식
1804년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나폴레옹은 자신의 대관식을 가졌습니다. 그 자리에는 교황 피우스 7세도 참석했습니다. 자신이 나폴레옹의 머리 위에 황제관을 씌워주면 자연스럽게 그가 무릎을 꿇을 것이고 그건 교회의 권위를 드높히는 일이 되리라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관을 씌우려 관을 들어 올리자 나폴레옹은 그걸 두손으로 받아 들고는 곧바로 뒤돌아서서 내빈들을 바라보며 꼿꼿이 선 채로 스스로 자신의 머리위에 관을 올려 놓았습니다. 나폴레옹 역시 현실세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교의 힘을 자신의 권력 강화에 이용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 앞에 한 여자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는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그림상으로는 이 여자가 대관식의 주인공처럼 보입니다. 이 여자가 바로 나폴레옹의 부인 조세핀입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이었던 1796년 자신보다 6살이나 많은데다 두 아이까지 둔 미망인 조세핀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따라서 이 둘의 결혼은 나폴레옹 가족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으며 특히 어머니인 레티치아는 둘의 결혼을 제일 반대했습니다. 그녀의 그런 심사는 결혼식 이후 8년이나 지난 이 대관식 날까지 계속됐는지 실제로 레티치아는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화가 다비드는 레티치아를 그림 속에 등장시켰습니다. 황제의 대관식에 모후가 참석하지 않는다면 황제에게 두고두고 누가 될 것이라 생각해서였죠. 그래서 그녀를 아들 부부를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배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대관식 그림은 나폴레옹 일가의 가족 사진같은 느낌을 줍니다. 나폴레옹의 형 조세프와 동생 루이, 여동생 카롤린과 엘리사가 보입니다,
* 알프스를 넘는 니폴레옹
기본적으로 정치화가였던 자크 루이 다비드는 하마터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던, 프랑스 혁명의 열렬한 옹호자였습니다. 잇따르는 정치적 사건 속에서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열광적인 지지자가 되었고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여 새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을 찬양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1800년에 나폴레옹이 북부 이탈리아를 침략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던 사건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스스로 이 장면을 선택한 다음, 다비드에게 자신을 '사나운 말 위에 올라탄 평온한' 모습으로 그릴 것을 명했습니다.
황제의 이목구비가 이상화되어 표현된 가장 큰 이유는 나폴레옹이 그림이 제작되는 동안 한 번도 모델로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비드는 포즈를 구상하기 위해 아들을 사다리 꼭대기에 앉혀야만 했습니다. 다비드는 마렝고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입었던 제복을 빌려 나폴레옹의 군복은 좀 더 정확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무엇보다도 나폴레옹 제국의 위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사납게 몰아치는 바람에 거칠게 나부끼는 말의 갈기와 나폴레옹의 망토는 그림에 웅장한 느낌을 부여합니다. 아래쪽 바위에 새겨진 한니발과 샤를마뉴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승리를 이끌어냈던 또 다른 장군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최고의 선전일 뿐, 진실은 훨씬 무미건조합니다. 사실 나폴레옹은 화창한 날에 알프스 산을 넘어 진군했습니다. 또한 다비드는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을 토대로 앞발을 들고 서 있는 말의 자세를 그렸지만 사실 나폴레옹은 노새를 타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습니다.
첫댓글 소크라테스의죽음과 나폴레온 대관식 그림이 다비드 작품이구만유.
죠세핀은 나폴 사후에 그 신세가 어찌되엇나요? 혹시//?
조세핀은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귀양간 뒤 바로 죽었습니다. 나폴레옹 가족들을 잠깐
살펴보면...어머니 레테지아는 나폴레옹보다 오래 살았고 항상 나폴레옹이 센트헬레나
섬을 탈출하여 자기 앞에 나타날 것을 믿었다고 합니다. 강단있고 무척 검소했던 성품이
었다고 합니다..형 조세프도 오래 살았습니다. 이탈리아왕과 스페인왕을 역임했습니다.
바로 밑의 동생 뤼시엥은 나폴레옹이 쿠테타로 집권할 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으나 형과
여러가지로 다툼을 벌이곤 해서 어머니와 나폴레옹의 두통거리였습니다. 그 밑의 동생 루
이는 네델란드왕으로 책봉되었으나 나폴레옹의 눈에 나 쫓겨나고 맙니다.
막내동생 제롬도 베스트팔렌 왕으로 있다가 나폴레옹 몰락 후 미국으로 건너가 죽을 때까
지 미국 경찰로 지냈다고 합니다. 첫째 여동생 카롤린은 나폴레옹 부하 뮈라와 결혼하고 나
폴리왕으로 책봉된 남편 뮈라와 그곳에서 살다가 나중에 쫓겨납니다. 둘째 여동생으로 콘스
탄스가 있습니다. 조세핀이 데리고 온 딸 오르탕스는 나폴레옹의 세째 동생 루이와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는데 그가 바로 나중에 나폴레옹 3세가 됩니다. 조세핀이 데리고 온 아들 으젠은
나폴레옹 형제 누구보다도 끝까지 의붓아버지 나폴레옹에게 충성했다고 합니다.
햐! 고박사님 나폴 가계도 화끈하게 꿰뚫고 잇으시네,, 나폴3세 이거이 족보가 막 꼬임다 동생과 데리고온 딸과 결혼
ㅎㅎㅎ나폴3세! 스페인 여행시 나폴형이 왕노릇햇다고 가이드가 야그해서 들었습니다
명황실의 규화보전급 가계도 공부 잘 했습니다
추가해서...나폴레옹의 둘째부인인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 루이지는 나폴레옹이 센트헬레
나로 유배가자 오스트리아의 나이페르크 백작과 결혼합니다. 나폴레옹과의 사이에 난 아들 로
마왕(나폴레옹 2세)은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귀양간 뒤 외할아버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
가 빈으로 데려갑니다. 이후 라이히슈페트 공작으로 책봉되어 군에서 장교생활을 하다가 21세
때 폐렴으로 아깝게 죽습니다. 외할아버지 프란츠 2세로부터 매우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데 사진
을 보니까 무척 준수하게 생겼더군요. 1830년 7월 혁명 당시 일부에서는 나폴레옹 2세로 책봉시
키자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메테르니히 때문에 무산되었다는 뒷얘기가...
예 오스트리아 빈 관광 갓을때 관광코스에 들어 잇어 시신 묻은 방인가? ㄱ거기 잠깐 스쳐갓읍니다
가이드가 고박사 수준보다 한참 아래라 이런 감로주를 마실수없엇읍니다
이상하게 전생에 나폴 똘만이엇는지 좀 땡깁니다. 이제 만복입니다/ 감사합니다
구정 잘 지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