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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요유 (逍遙遊) 원문보기 글쓴이: 山木
The Yoga of Knowing The Mind
마음알기 요가
[Part II. The Practical Application]
실제 적용
[The Timelessness of Mind]
마음의 무시간성
If one knows how to apply in a threefold manner this knowing of the mind, all past knowledge lost to memory becomes perfectly clear, and also knowledge of the future, thought of as unborn and unconceived.
In the present, when the mind remains as it is naturally, it is ordinarily comprehended by its own time.
이 ‘마음 알기’를 세 가지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으면 기억 속으로 사라진 과거의 모든 지식이 완전히 명료해지며, 태어나지 않고 상상되지 않은 사념인 미래의 지식도 역시 그러하다.
마음이 본연의 상태에 있을 때 그 마음은 현재 속에서 자신의 시간에 의해 인식되노라.
[Mind in its True State]
참다운 상태의 마음
When one seeks one's mind in its true state, it is found to be quite intelligible, although invisible.
참다운 상태의 자기 마음을 찿을 때, 그것이 보이진 않으나 매우 지성적임을 알게 되나니,
In its true state, mind is naked, immaculate; not made of anything, being of the Voidness; clear, vacuous, without duality, transparent; timeless, uncompounded, unimpeded, colourless; not realizable as a separate thing, but as the unity of all things, yet not composed of them; of one taste, and transcendent over differentiation.
참다운 상태의 마음은 꾸밈없고 순수하며 질료가 없는 공(空)이라 깨끗하고 비었으며 이원적이지 않고 투명하도다.
복합적이지 않고 가로막히지 아니하며 무시간성이고 무색이며 분리된 것으로가 아니라 모든 것의 통일체로 인식되지만 그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니 한 맛이고 차별이 없도다.
Nor is one's mind separable from other minds.
개인의 마음은 다른 마음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To realize the quintessential being of the One Mind is to realize the immutable at-one-ment of the Tri-Kaya.
한마음의 본질을 깨달음은 삼신(三身)이 영원히 하나임을 깨달음이다,
The mind, being as the Uncreated and of the Voidness, the Dharma-Kaya, and, as the Vacuous and Self-Radiant, the Sambhoga-Kaya, and as the Unobscured, shining for all living creatures, the Nirmana-Kaya, is the Primordial Essence wherein its Three Divine Aspects are One.
창조되지 않은 공성(空性)의 법신이며, 비어 있어 스스로 빛을 내는 보신이며, 명료하여 일체 유정을 위해 빛나는 화신인 그 마음은 최초의 실체이고, 그 안에서 그 마음의 세 측면이 하나다.
If the yogic application of this Wisdom be thorough one will comprehend that which has just been set forth above.
이 요가의 지혜를 철저히 적용하면 위의 설명을 이해하게 될것이다.
[Mind is Non-Created]
마음은 창조되지 않음
Mind in its true nature being non-created and self-radiant, how can one, without knowing the mind, assert that mind is created?
마음은 그 본성상 창조되지 않으며 스스로 빛을 내는데,
그 마음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마음이 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There being in this yoga nothing objective upon which to meditate, how can one, without having ascertained the true nature of mind by meditation, assert that mind is created?
이 요가에는 명상할 대상이 아무것도 없는데, 명상에 의해 마음의 본성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이 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Mind in its true state being Reality, how can one, without having discovered one's own mind, assert that mind is created?
참다운 상태의 마음은 실재(實在)인데,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음이 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Mind in its true state being undoubtedly ever-existing, how can one, without having seen the mind face to face, assert that mind is created?
참다운 상태의 마음은 의심의 여지 없이 영속하는데, 그 마음을 직접 보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이 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The thinking-principle being of the very essence of mind, how can one, without having sought and found it, assert that mind is created?
마음의 본질인 사고 원리가 마음의 핵심인데, 그것을 탐구하여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음이 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Mind being transcendent over creation, and thus partaking of the Uncreated, how can one assert that mind is created?
마음은 창조보다 초월적이어서 창조되지 않은 자의 참여로, 어떻게 마음이 창조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Mind Being in its primordial, unmodified naturalness non-created, as it should be taken to be, and without form, how can one assert that it is created?
마음은 창조되지 않은 원초적 무한정의 자연성 속에 무형으로 존재하는데,
그것이 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Inasmuch as mind can also be taken to be devoid of quality, how can one venture to assert that it is created?
마음에는 특성이 없다고 이해하면서 그것이 창조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 ‘Without mind, then, there is practically no objective existence. Thus all existence arises from imperfect notions in our mind. All differences are differences of the mind. But the mind cannot see itself, for it has no form.
We should know that all phenomena are created by the imperfect notions in the finite mind; therefore all existence is like a reflection in a mirror, without substance, only a phantom of the mind. When the finite mind acts, then all kinds of things arise; when the finite mind ceases to act, then all kinds of things cease.’
“마음이 없으면 사실 어떤 개관적 존재도 없으며, 따라서 모든 존재는 우리 마음 속의 불완전한 개념으로부터 생겨난다. 모든 구별은 마음의 차이에서 비롯되지만 마음은 형태가 없기 때문에 그 자신을 보지 못한다. 모든 현상은 한정된 마음의 불완전한 개념에 의해 창조되는 관계상 모든 존재는 거울에 비친 상(象)과 같이 실체가 없으며 단지 마음이 만들어낸 허깨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정된 마음이 활동할 때 모든 종류의 물체가 생겨나고, 한정된 마음이 활동을 멎을 때 모든 종류의 물체가 사라진다.” <대승기신론>
The self-born, qualityless mind, being like the Three Voids undifferentiated, unmodified, how can one assert that mind is created?
자발생 무특성의 마음은 삼공(三空)과 같아서 분화되지도 한정되지도 않는데, 마음이 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Mind being without objectivity and causation, self-originated, self-born, how can one, without having endeavoured to know mind, assert that mind is created?
마음은 객관성과 인과 관계가 없고 스스로 비롯되어 스스로 태어났는데,
마음을 알려고 노력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이 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Inasmuch as Divine Wisdom dawns in accordance with its own time, and one is emancipated, how can opponents of these teachings assert that it is created?
신성한 지혜는 그 자신의 시간에 의해 나타나고 수행자는 해방을 얻는데,
이 가르침을 반대하는 자들은 마음이 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Mind being, as it is, of this nature, and thus unknowable, how can one assert that it is created?
마음의 실상이 이러하여 알 수 없는데, 마음이 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The Yoga of Introspection]
내관의 요가
The One Mind being verily of the Voidness and without any foundations, one's mind is likewise, as vacuous as the sky. To know whether this be so or not, look within thine own mind.
한마음은 진실로 공(空)이고 어떤 기반도 갖지 안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마음도 하늘처럼 비어 있나니,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고 싶으면 그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Being of the Voidness, and thus not to be conceived as having beginning or ending, Self-Born Wisdom has in reality been shining forever, like the Sun's essentiality, itself unborn. To know whether this be so or not, look within thine own mind.
공(空)이며 시작과 끝을 상상할 수 없는 자발생의 지혜는 태어나지 않은 태양의 본성처럼 실재 속에서 영원히 빛나고 있나니,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고 싶으면 그대 자신을 들여다보라.
Divine Wisdom is undoubtedly indestructible, unbreakable, like the ever-flowing current of a river. To know whether this be so or not, look within thine own mind.
신성한 지혜는 끝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결코 부서지지 않으며 파괴할 수 없나니,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고 싶으면 그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Being merely a flux of instability like the air of the firmament, objective appearances are without power to fascinate and fetter. To know whether this be so or not, look within thine own mind.
하늘의 바람처럼 불안정한 흐름인 객관적 현상들은 흘리거나 묶을 힘을 갖지 않나니,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고 싶으면 그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All appearances are verily one's own concepts, self-conceived in the mind, like reflections seen in a mirror. To know whether this be so or not, look within thine own mind.
모든 현상은 사실 개인 자신의 개념이고 마음 속에서 스스로 상상한 것이며,
거울에 비친 상(像)과 같나니,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고 싶으면 그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Arising of themselves and being naturally free like the clouds in the sky, all eternal appearances verily fade away into their own respective places. To know whether this be so or not, look within thine own mind.
외부적인 모든 현상은 스스로 생겨나 하늘의 구름처럼 자연스럽고 자유로우며 제각기 저마다의 처소로 사리지나니,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고 싶으면 그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The Dharma Within]
내면의 법
The Dharma being nowhere save in the mind, there is no other place of mediitation than the mind.
법(法)은 마음 속 아닌 어디에도 없고, 마음 이외의 다른 명상 장소는 없노라.
The Dharma being nowhere save in the mind, there is no other doctrine to be taufght or practised elsewhere.
법(法)은 마음 속 아닌 어디에도 없고, 그 외에 배우거나 실천해야 하는 다른 가르침은 없노라.
The Dharma being nowhere save in the mind, there is no other place of truth for the observance of a vow.
법(法)은 마음 속 아닌 어디에도 없고, 서원 실천을 위한 다른 참된 장소는 없노라.
The Dharma being nowhere save in the mind, there is no Dharma elsewhere whereby Liberation may be attained.
법(法)은 마음 속 아닌 어디에도 없고, 해방을 선사할 그 외의 법은 없노라.
Again and again look within thine own mind.
그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라.
* there is here added the following excerpts from a translation made by the late G. R. S. Mead of the original Greek of the Proem of the Gospel of St. John, and contained in The Gnostic John the Baptizer (published by John M. Watkins, London, 1924), pp. 123–6:
고(故) 미드Mead가 그리스 원본을 번역한 요한복음 서문과 <그노시스의 세례요한>
1. In the Beginning was Mind; and Mind was with God.
태초에 마음이 있었고, 마음이 신과 함께 있었다.
2. So Mind was God. This was in Beginning with God.
그리하여 마음이 곧 신이었다.
이것이 태초에 신과 함께 있었다.
3. All kept coming into existence through it; and apart from it came into existence not a single [thing].
만물이 그것을 통해 생겨났으니 어떤 것 하나도 그것 없이는 생겨나지 않았다.
4. What hath come into existence in it was Life; and Life was the Light of the [true] Men.
그것 안에서 생겨난 것은 생명이었고 이 생명은 ‘참’ 사람들의 빛이었다.
5. And the Light shineth in the Darkness; and the Darkness did not emprison it...
그리고 빛이 어둠에 비쳤으며 어둠은 그것을 가두지 않았다….
6. It was the True Light, which enlighteneth every Man who cometh into the world.
그것은 세상에 온 각각의 사람을 비추는 참다운 빛이었다.
7. It was in the world; and the world kept coming into existence through it.
그것이 세상에 있었고, 세상은 그것을 통해 생겨나기를 계속했다.
8. And the world did not know it. It came unto its own; and its own did not receive it.
그러나 세상이 그것을 몰랐다. 그것이 그것 자신에게 왔고 그것 자신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9. And as many as received it, to them it gave power to become children of God,—
그러나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그것은 신의 자녀가 되는 힘을 주었으니,-
10. To those who have faith in his name,—Who was brought to birth, not out of [blending of] bloods,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그들은 혈통에서 태어난 자들이 아니며,
11. Nor of urge of flesh, nor urge of a male,—but out of God.
육신의 욕망이나 남성의 욕망에서가 아니라 신에게서 난 자들이라.
12. So Mind became flesh and tabernacled in us,—
그처럼 마음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13. And we beheld its glory,—glory as of [? an] only-begotten Father, —full of Delight and Truth.
우리는 그것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한] 독생자(獨生子)의 영광이요 기쁨과 진리가 충만하더라.
When looking outwards into the vacuity of space, there is no place to be found where the mind is shining,
밖을 향해 텅 빈 공간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빛나는 장소를 찾을 수 없노라.
When looking inwards into one's own mind in search of the shining, there is to be found no thing that shines.
빛을 찾아서 안을 향해 자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거기서도 빛나는 것은 찾을 수 없노라.
One's own mind is transparent, without quality.
자기 자신의 마음은 투명하며 무특성이다.
Being of the C Light of the Voidbess, one's own mind is of the Dharma-Kaya; and, being void of quality, it is comparable to a cloudless sky.
자기 자신의 마음은 공성(空性)의 투명한 빛이고 법신이며 특성이 없고 구름 없는 하늘과 같다.
It is not a multiplicity, and is omniscient.
그것은 다수(多數)가 아니며, 전지(全知)이다.
Very great, indeed, is the difference between knowing and not knowing the import of these teachings.
이 가르침의 의미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참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노라.
[The Wondrousness of these Teachings]
이 가르침의 놀라움
This self-originated Clear Light, eternally unborn, is a parentless babe of Wisdom. Wondrous is this.
자기가 자신의 근원이며 영원히 태어나지 않는(초월적 비윤회) 이 투명한 빛은 부모가 없는 지혜의 신생아로다. 놀랍도다.
Being non-created, it is Natural Wisdom. Wondrous is this.
창조되지 않은 그것은 자연적 지혜로다. 놀랍도다.
Not having known birth, it knows not death. Wondrous is this.
탄생을 모르는 그것은 죽음을 모르는도다. 놀랍도다.
Although it is Total Reality, there is no perceiver of it. Wondrous is this.
그것은 절대적 실재이지만 그것을 아는 자 없노라. 놀랍도다.
Although wandering in the Sangsara, it remains undefiled by evil. Wondrous is this.
윤회 속에 방황하면서도 그것은 악(惡)에 오염되지 않도다. 놀랍도다.
Although seeing the Buddha, it remains unallied to good. Wondrous is this.
붓다를 보면서도 그것은 선(善)과 결탁하지 않노라. 놀랍도다.
Although possessed by all beings, it is not recognized. Wondrous is this.
모든 존재에게 점유되지만 그것은 인지되지 않도다. 놀랍도다.
Those not knowing the fruit of this yoga seek other fruit. Wondrous is this.
이 요가의 성과를 모르는 자들은 다른 성과를 찾노라. 놀랍도다.
Although the Clear Light of Reality shines within one's own mind, the multitude look for it elsewhere. Wondrous is this.
실재의 투명한 빛이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서 빛나지만 많은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그것을 찾도다. 놀랍도다.
[The Fourfold Great Path]
네 개의 위대한 길
All hail to this wisdom here set forth, concerning the invisible, immaculate Mind!
This teaching is the most excellent of teachings.
분간할 수 없는 완전한 마음에 관해 여기 밝힌 이 지혜에 경배하나니!
이 가르침은 가장 뛰어난 가르침이로다.
This meditation, devoid of mental concentration, all-embracing, free from imperfection, is the most excellent of meditations.
정신집중이 없고 총괄적이며 결함 없는 이 명상은 가장 탁월한 명상이로다.
This practice is concerning the Uncreated State, when rightly comprehended, it is the most excellent of practices.
창조되지 않은 상태에 관한 이 수행은 바르게 이해할 때 가장 뛰어난 수행이로다.
This fruit of the yoga of the Eternally Unsought, naturally produced, is the most excellent of fruits.
영원히 구하지 않음에도 자연스레 얻어지는 이 요가의 성과는 가자 탁월한 성과로다.
Herewith we have accurately revealed the Fourfold Great Path.
네 개의 위대한 길을 우리는 여기에 분명히 보였나니,
This teaching without error, this Great Path, is of the Clear Wisdom here set forth, which, being clear and unerring, is called the Path.
그릇됨 없는 이 가르침, 이 위대한 길을 여기 밝힌 투명한 지혜이며,
투명하여 그릇됨 없는 그것은 길이라 불리노라.
This meditation upon this unerring Great Path, is of the Clear Wisdom here set forth, which, being clear and unerring, is called the Path.
그릇됨 없는 이 위대한 길의 명상은 여기 밝힌 투명한 지혜이며,
투명하여 그릇됨 없는 그것은 길이라 불리노라.
This practice relating to this unerring Great Path is of the Clear Wisdom here set forth, which, being clear and unerring is called the Path.
그릇됨 없는 이 위대한 길의 수행은 여기 밝힌 투명한 지혜이며,
투명하여 그릇됨 없는 그것은 길이라 불리노라.
The fruit of this unerring Great Path is of the Clear Wisdom here set forth, which, being clear and unerring is called the Path.
그릇됨 없는 이 위대한 길의 성과는 여기 밝힌 투명한 지혜이며,
투명하여 그릇됨 없는 그것을 길이라 불리노라.
[The Great Light]
위대한 빛
This yoga concerns the foundation of the immutable Great Light.
이 요가는 또한 변함없는 위대한 빛의 근원에 이어지나니
The teaching of this changeless Great Light is of the unique Clear Wisdom here set forth, which, illuminating the Three Times, is called 'The Light.'
이 변함없는 위대한 빛의 가르침은 여기 밝힌 단 하나의 투명한 지혜로서 여기 밝혀지나니 삼세(三世)를 비추는 그것은 ‘빛’이라 불린다.
The meditation upon this changeless Great Light is of the unique Clear Wisdom here set forth, which, illuminating the Three Times, is called 'The Light.'
이 변함없는 위대한 빛의 명상은 여기 밝힌 단 하나의 투명한 지혜로서 여기 밝혀지나니 삼세(三世)를 비추는 그것은 ‘빛’이라 불린다.
The practice relating to this changeless Great Light is of the unique Clear Wisdom here set forth, which, illuminating the Three Times, is called 'The Light.'
이 변함없는 위대한 빛의 수행은 여기 밝힌 단 하나의 투명한 지혜로서 여기 밝혀지나니 삼세(三世)를 비추는 그것은 ‘빛’이라 불린다.
The fruit of this changeless Great Light is of the unique Clear Wisdom here set forth, which, illuminating the Three Times, is called 'The Light.'
이 변함없는 위대한 빛의 성과는 여기 밝힌 단 하나의 투명한 지혜로서 여기 밝혀지나니 삼세(三世)를 비추는 그것은 ‘빛’이라 불린다.
[The Doctrine of the Three Times]
삼세의 가르침
The essence of the doctrine concerning the Three Times in at-one-ment will now be expounded.
이제 하나됨(합일)에 있어서 삼세(三世)에 관하여 설하노라.
The yoga concerning past and future not being practised, memory of the past remains latent.
과거와 미래에 관한 요가를 수행하지 않으면 과거의 기억은 암장(暗臟)되고,
The future, not being welcomed, is completely severed by the mind from the present.
받아들이지 않는 미래는 마음에 의해 현재로부터 완전히 단절되며,
The present, not being fixable, remains in the state of the Voidness.
고정될 수 없는 현재는 공(空)의 상태에 머물도다
[The Yoga of the Nirvanic Path]
열반의 길의 요가
There being no thing upon which to meditate, no meditation is there whatsoever.
거기에 명상할 아무것도 없고, 아무런 명상도 거기에 없다.
There being no thing to go astray, no going astray is there, if one is guided by memory.
(자신이 수행하며 살았던 다른 시대 다른 생애들 동안의 체험으로 생겨난 귀중한 지혜)의 과거의 기억이 회복된다면,
거기에 방황할 아무것도 없고, 아무런 방황도 거기에 없노라.
Without meditating, without going astray, look into the True State, wherein self cognition, self-knowledge, self-illumination shine resplendently. These, so shining, are called 'The Bodhisattvic Mind.'
명상하는 일 없이, 방황하는 일 없이, 참 상태를 들여다보라.
거기에 자기 인식과 자기 이해와 자기 조명의 찬란한 빛이 있나니,
그처럼 빛나는 이것들은 ‘보살의 마음’이라 불린다.
* Plotinus teaches of this same Divine Illumination, which he himself realized and of which he thus has right to speak: ‘When one shall see the divine resplendence of virtue within onself; when one shall dwell within oneself wholly; when one shall cease to meet within oneself any obstacle to unity; when nothing foreign any longer altereth, by its admixture, the simplicity of thine inner essence; when within thy whole being thou shall be a veritable light, immeasurable, uncircumscribed, unincreasable, infinite, and entirely incommensurable because transcendent over all measure and quantity; when thou shalt have become such, then, having become sight itself, thou mayst have confidence in thyself, for thou wilt no longer have need of a guide. Thereupon, thou must discern with great care, for only by means of the eye that will then open itself within thee shalt thou be able to perceive the Supreme Beauty. To obtain this vision of the beautiful and of the divineness within, one must begin by rendering oneself beautiful and
divine’ (1. vi. 9).
신성한 조명 상태를 플로티우스 역시 놀라우리만치 유사한 언어로 가르친다.
그는 스스로 그것을 체험했으며 이렇게 말할 자격을 갖는다.
“사람이 자기 내부에서 신성한 광휘를 보게 될 때, 완전히 자기 안에 거주하게 될 때, 이질적인 어떤 것이 혼합되어 내면적 본질의 순수함을 바꿔놓지 않게 될 때, 자신의 전 존재 속에서 측량하거나 제한하거나 확대하거나 분간 할 수 없는 무한 실제의 빛이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될 때, 당신이 이와 같이 되었을 때 당신은 보이는 것 그 자체가 되어 더 이상 인도가 필요 없어지고 자신 속에 확신을 갖게 된다. 그리 되면 주의 깊게 식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새롭게 열린 내면의 눈을 통해서만 당신은 지고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부의 이 아름답고 신성한 시력을 얻으려면 자신을 아름답고 신성하게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In the Realm of Wisdom, transcendent over all meditation, naturally illuminative, where there is no going astray, the vacuous concepts, the self-liberation, and the primordial Voidnesss are of the Dharma-Kaya.
모든 명상을 초월하여 스스로 빛나는 지혜의 나라에는 방황이 없으니,
공허한 개념들과 자기 해방, 원초적 공(空)이 곧 법신(法身)이다.
Without realization of this, the Goal of the Nirvanic Path is unattainable.
이러한 자각 인식 없이 열반의 목표는 달성되지 않는다.
Simultaneously with its realization the Vajra-Sattva state is realized.
그러한 자각과 함께 금강살타의 상태도 실현되도다.
These teachings are exhaustive of all knowledge, exceedingly deep, and immeasurable.
이 가르침은 모든 지식을 꿰뚫고, 무한정의 깊이로서, 헤아릴 수 없다.
Although they are to be contemplated in a variety of ways, to this Mind of self-cognition and self-originated Wisdom, there are no two such things as contemplation and contemplator.
갖가지로 숙고하더라도 스스로 인식하고, 스스로 발생하는 지혜의 이 마음에는 숙고와 숙고자의 구분이 없다.
When exhaustively contemplated, these teachings merge in at-one-ment with the scholarly seeker who has sought them, although the seeker himself when sought cannot be found.
철저히 숙고할 때 이 가르침은 그것을 탐구해온 자와 하나가 된다.
비록 탐구자 자신은 찾아도 발견되지 않는다.
(This paradoxical phrase implies that the seeker per se, the mind in its natural state of the Voidness, has no individualized, personal existence; and that, therefore, the seeker himself, although sought, cannot be found
이 역설적 문구는 탐구자 자신이 개별화된 개인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설령 탐구했다 하더라도 그 자신은 발견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Thereupon is attained the goal of the seeking, and also the end of the search itself.
그리하여 탐구의 목표가 달성되고 탐구 그 자체의 끝에 이른다.
Then, nothing more is to be sought; nor is there need to seek anything.
그러면 탐구할 아무것도 없고 무언가 탐구할 필요도 없다.
This beginningless, vacuous, unconfused Clear Wisdom of self-cognition is the very same as that set forth in the Doctrine of the Great Perfection.
자기 인식의 이 시작도 없고 비어 있으며 혼란스럽지 않은 투명한 지혜는 대완성의 가르침에 담긴 그것과 똑같다.
Although there are no two such things as knowing and not knowing, there are profound and innumerable sorts of meditation; and surpassingly excellent it is in the end to know one's mind.
지知와 무지 無知의 구분은 없더라도, 수많은 종류의 심오한 명상이 있고,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은 결국 지극히 훌륭한 일이다.
There being no two things as object of meditation and meditator, if by those who practise or do not practise meditation the meditator of meditation be sought and not found, thereupon the goal of the meditation is reached and also the end of the meditation itself.
명상 대상과 명상하는자의 구분이 없으니, 명상을 수행하거나 수행하지 않는 자가 명상의 명상자를 찾아도 발견되지 않을 때, 명상의 목표가 달성되고 또한 명상 그 자체의 끝에 이른다.
There being no two such things as meditation and object of meditation, there is no need to fall under the sway of deeply obscuring Ignorance; for, as the result of meditation upon the unmodified quiescence of mind, the non-created Wisdom instantaneously shines forth clearly.
명상과 명상 대상의 구분이 없으므로 깊은 무명無明에 빠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한정되지 않는 마음의 본질에 대해 명상한 결과 창조되지 않는 지혜가 동시에 명료히 비추기 때문이다.
Although there is innumerable variety of profound practices, to one's mind in it's true state they are non-existent; for there are no two such things as existence and non-existence.
갖가지 종류의 심오한 수행이 무수히 존재한다 한들, 참다운 상태에 있는 자의 마음에는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와 비존재의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There being no two such things as practice and practitioner of it by those who practise or do not practise the practitioner of the practice be sought and not found, thereupon the goal of the practice is reached and also the end of the practice
수행과 수행자의 구분이 없으니, 수행하거나 수행하지 않는 자가 수행의 수행자를 찾아도 발견되지 않을 때, 수행의 목표가 달성되고 또한 수행 그 자체의 끝에 이른다.
Inasmuch, as from eternity there is nothing whatsoever to be practised, there is no need to fall under the sway of errant propensities.
수행할 아무것도 원래 없으므로 그릇된 성향에 빠질 필요가 없다.
The non-created, self-radiant Wisdom here set forth, being actionless, immaculate, transcendent over acceptance or rejection, is in itself the perfect practice.
창조되지 않고, 스스로 빛나는 이 지혜는 (윤회적 사고작용에 의한) 움직임이 없고, 순수하며 수용과 거부의 이원성을 초월하기에 그자체가 완전한 수행이다.
Although there are no two such things as action and performer of action, of one seeks the performer of action and no performer of action be found anywhere, thereupon the goal of all fruit-obtaining is reached and also the final consummation itself.
행위와 행위자의 구분이 없으니, 행위자를 찾아도 어디서든 행위자가 발견되지 않을 때, 모든 결실 획득의 목표가 달성되며 마침내 최종 완성 그자체에 이른다.
There being no other method whatsoever of obtaining the fruit, there is no need to fall under the sway of the dualities of accepting and rejecting, trusting and distrusting these teachings.
결실 획득의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이 가르침의 수용과 거부 내지 신뢰와 불신 같은 이원성에 빠질 필요가 없다.
Realization of the self-radiant and self-born Wisdom, as the manifestation of the Tri-Kaya in the self-cognizing mind, is the very fruit of attaining the Perfect Nirvana.
스스로 빛나는 자발생의 지혜가 자아인식의 마음속에 있는 삼신三身
의 표현임을 깨닫는 것이 완전한 열반에 이르는 성과이다.
[The Explanation of the Names Given to this ]
이 지혜에 주어진 이름들의 설명
This Wisdom delivers one from the eternally transitory Eith Aims.
이 지혜는 윤회적인 마음을 속박하는 모든 덧없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한다.
Inasmuch as it does not fall under the sway of any extreme,
it is called 'The Middle Path.'
어떤 극단으로 흐르지 않으니 그것은 '중도中道'라 불린다.
It called 'Widom' because of its unbroken continuity of memory.
중단되지 않는 기억의 연속성이기에 '지혜知慧'라 불린다.
Beinf the essence of the vacuity of mind,
it is called 'The Essence of the Buddhas.'
비어 있는 마음의 본질이므로 '불성佛性'이라 불린다.
If the significance of these teachings were known by all beings, surpassingly excellent would it be.
이 가르침의 의미가 모든 존재에게 알려진다면,
정말 훌륭할 것이다.
Therefore, these teachings are called 'The Means of Attaining the Other Shore of Wisdom [or The Transcendental Wisdon].'
따라서 이 가르침은 '지혜의 피안[또는 초월적 지혜]에 이르는 방편'이라 불린다.
To Them who hace passed away into Nirvana, this Mind is both beginningless and endless; therefore it is called 'The Great Symbol.'
열반에 이른 사람들에게 이 마음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므로 '위대한 상징'이라 불린다.
Inasmuch as this Mind, by being known and by not being known, becomes the foundation of all the joys of Nirvana and of all the sorrows of the Sangsara, it is called 'The All-Foundation.'
이 마음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서 열반의 기쁨과 윤회의 모든 슬픔이 생겨나므로 '모든 것의 근원'이라 불린다.
The impatient, ordinary person when dwelling in his fleshly body call this very clear Wisdom 'common intelligence.'
성급한 일반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 속에 거주할 때 이 지극히 투명한 지혜를 '평범한 지식'으로 부른다.
Regardless of whatever elegeant and varried names be given to this Wisdom as the result of thorough study, what Wisdom other than it, as here revealed, can one really desire?
철저한 연구의 결과 이 지혜에 아무리 우아하고 다체로운 이름이 주어진들, 여기 보인 이 이상의 어떤 지혜를 참으로 바랄 수 있을까?
To desire more than this Wisdom is to be like ibe who seeks an elephant by following its footprints when the elephant itself has been found.
이 지혜 이상의 것을 바라는 자는 코끼리가 이미 발견되었음에도
그것을 찾기위해 그 발자국을 추적하는 자와 같다.
[The Yoga of the Thatness]
진여眞如의 요가
Quite impossible is it. Even though one seeks thoughout the Three Regions, to find the Buddha elswhere than in the mind.
삼계三界를 두루 찾아 다닌다 해도 마음 속 아닌 다른 곳에서는 부처를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Although he that is ignorant of this may seek externally or outside the mind to know himself, how is it possible to find oneself when seeking others rather than oneself?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외부나 마음 밖에서 자신을 알려고 애쓸 경우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을 찾으면서 어떻게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까?
He that thus seeks to know himself is like a fool giving a performance in the midst of a crowd and forgetting who he is and then seeking everywhere to find himself.
그처럼 자신을 알려고 애쓰는 사람은 군중 속에서 움직이면서 자신이 누구인지는 잊어버리고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찾으려 애쓰는 바보와 같도다.
This simile also applies to one's erring in other ways.
이 비유는 다른 형태의 잘못에도 적용된다.
Unless one knows or sees the natural state of substances [or things] and recognizes the Light in the mind, release from the Sangsara is unattainable.
사물[또는 대상]의 본래 상태를 알거나 보는 마음 속의 빛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윤회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Unless one sees the Buddha in one's mind, Nirvana is obscured.
자신의 마음 속 부처를 보지 못하는 한 열반은 가려진 상태로 있다.
Although the Wisdom of Nirvana and the Ignorance of the Sangsara illusorily appear to be two things, they cannot truly be differentiated.
비록 열반의 지혜와 윤회의 무지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은 구별되지 않는다.
It is an error to concieve them otherwise than as one.
열반의 지혜와 윤회의 무지를 하나가 아닌 다름으로 생각함은 잘못이다.
Erring and non-erring are, intrinsically, also a unity.
잘못과 잘못 아님 역시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By not taking the mind to be naturally a duality and allowing it, as the primordial cosciousness, to abide in its own place, beings attain deliverance.
마음을 이원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원초적 의식으로서의 그것이 자신의 장소에 머물게 함으로써 존재는 해방을 얻는다.
The error of doing otherwise than this arises not from Ignorance in the mind itself, but from not having sought to know the Thatness.
그렇게 하지 않는 잘못은 마음 그 자체의 무지에서가 아니라
진리를 알려고 애쓰지 않았던 데서 비롯된다.
Seek within thine own self-illuminated, self-originated mind whence, firstly, all such concepts arise, secondly, where they exist, and, lastly, whither they vanish.
자기 스스로 빛을 발하며 스스로 발생된 마음안에서 구하라.
모든 개념이 그로부터 생겨나 거기 존재하고 결국 그 속으로 사라진다.
** yoga of introspection, Mahārshi
내관의 요가/ 마하리쉬
‘it is only when the subtle mind projects itself outwards through the brain and the senses that names and forms of the grosser world come into existence.
'외부 세계에 이름과 형태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미묘한 마음이 뇌와 감각을 통해 밖으로 그 자신을 투사할 때이다.
When the mind lies absorbed in the Hridaya [the mind’s Spiritual Centre or Source], these names and forms vanish.
마음이 그 근원인 흐리다야(Hridaya;心)에 머물 때 이름과 형상이 사라진다.
When the outgoing tendencies of the mind are suppressed and, with all its attention turned on itself alone, the mind is retained within the Hridaya, that condition is called introspection, or the subjective vision [Skt. antarmukha-drishti].
마음의 외향성이 억제되고 마음의 주의력이 그 자체로만 향하게 되면 마음은 흐리다야 속에 안주하며 그 상태는 주관적 시각, 또는 내관(內觀) [자기성찰; antarmukha-drishti]이라 불린다.
When the mind emerges from the Hridaya and busies itself with the creation of the gross world, that condition may be termed extrospection, or the objective vision [Skt. bahirtnukha-drishti].
마음이 흐리다야에서 나와 외부 세계를 창조하느라 바쁠 때, 그 상태는 객관적시각, 또는 외향적 관찰 [bahirtnukha-drishti]이라 부를 수 있다.
When the mind resides within the Hridaya, the primal thought of ego, or the “I”, gradually vanishes and what remains is the Transcendent Self or Ātman [the Brahmanical equivalent to the One Mind of the Mahāyāna].
마음이 흐리다야 속에 머물 때 에고나 '나'라는 사념은 사라지고 진아(眞我 Ātman)- 대승불교의 '한 마음'에 해당- 가 남는다.
It is that state, wherein there exists not the slightest trace of the notion “I”, which is called Real Vision [Skt. Swarūpa-drishti], and, also, Silence [Skt. Maunam].
'나'의 개념이 완전히 사라진 이 상태는 참다운 견해,
또는 자색견自色見과 정적靜寂이라 불린다.
This Silence is spoken of as the Vision of Wisdom [Skt. Jñāna-drishti] in Vedanta. Thus quiescence is nothing but that state when mind remains merged in the Self, the Brahman [Skt. Ātmaswarupam].’
이 정적은 베단타 철학에서는 지혜의 시각, 또는 지견知見이라고도 한다.
그리하여 정적은 단지 마음이 범아일여凡我一如에 머무는 상태에 머무를 따름이다'
(See Who Am I? pp. 6–7, upon which our more clearly expressed version is based.) <나는 누구인가>
This realization is likened to that of a crow which, although already in possesion of a pond, flies off elsewhere to quench its thirst, and finding no other drinking place returns to the one pond.
이 깨달음은 연못 옆에서 갈증을 풀기 위해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가 물 마실 장소를 찾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까마귀의 깨달음에 비유된다.
*The Mahārshi employed a similar illustration: ‘A man wandering in the sun retires to the shade of a tree and enjoys the cool atmosphere there. But after a time he is tempted to go into the hot sun. Again finding the heat unbearable, he returns to the shade. Incessantly he thus moves to and fro, from the shade into the sun and from the sun into the shade. Such a man, we say, is ignorant. A wise man would not quit the shade.’ (Cf. Who Am I? p. 12.)
라마나 마하리쉬도 비슷한 예를 들었다.
'태양 아래서 방황하던 사람이 나무 그늘로 들어가면 서늘함을 즐긴다.
그러나 얼마후 그는 햇볕 속으로 들어 가고픈 유혹을 느낀다.
다시 그는 햇볕이 뜨거움을 알고 그늘로 돌아온다.
끊임없이 그는 그늘에서 햇볕으로 햇볕에서 그늘로 왔다 갔다 하기를 반복한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어리석다고 말한다.
현명한 사람은 그늘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Similarily, the radiance which emanates from the One Mind, by emanating from one's own mind, emancipates the mind.
한마음에서 발하는 광휘는 그대 마음에서도 똑같이 방사되면서 마음을 해방시킨다.
The One Mind, omniscient, vacuous, immaculate, eternally, the Unobscured Voidness, void of a quality as the sky, self-originated Wisdom, shining clearly, imperishable, is Itself the Thatness.
한마음은 모든 것을 알고 비어 있으며, 순수하고 영원히 명료한 공空이며, 하늘처럼 무특성이며 투명하게 빛나며, 스스로 생겨나는 불멸의 지혜이며, 그 자체가 진리다.
The whole visible Universe also symbolizes the One
눈에 보이는 우주의 모든 것 역시 한마음을 상징하도다.
By knowing the All-Consciousness in one's mind,
one knowes it to be as void of quality as the sky.
자기 마음 속의 전체의식을 앎으로써 그것이 하늘처럼 무특성임을 알게된다.
Although the sky may be taken provisionally as an illustration of the unpredictable Thatness, it is also symbolically so.
비록 말할 수 없는 진리를 알리기 위해 부득이 하늘을 사용하지만,
그것은 단지 상징일 뿐이다.
Inasmuch as the vacuity of all visible things is to be recognized as merely analgous to the apparent vcacuity of the sky, devoid of mind, content, and form, the knowing of the mind does not depend on the sky-symbol.
마음도 내용물도 형태도 없이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하늘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의 비어 있음을 알리는 단순한 비유일 뿐이며,
마음을 아는 일은 하늘의 상징에 의존하지 않는다.
Therefore, not straying from the Path, remain in that very state of the Voidness.
그런즉 길에서 어긋나지 말고 참다운 공空의 올바른 상태에 머무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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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요유 (逍遙遊) 원문보기 글쓴이: 山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