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에서 사망까지 베일에 싸인 신비로운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 3대 풍속화가인 신윤복을 소재로 한 전시, 드라마,영화 등이 인기를 끌면서 그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하지만 2008년 문화계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는 그에 대한 정보는 '0'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가 집안에서 태어나 풍속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 정도가 '설'로 남아 있을 뿐 그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에 학자들마다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 신윤복은 도화서 화원이었나
신윤복은 화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신일흥과 종증조부 신세담은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된 화원(畵員)으로 알려졌다. 부친 신한평은 영조 때 임금의 화상인 어진(御眞) 제작에 참여한 화원이었다.
신한평은 정조시절 낙마해 정조 12년(1788) 귀양을 간 기록이 있다. 하지만 신윤복이 부친이나 조부처럼 도화서에서 일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원복 국립전주박물관장은 "각종 의궤에서 신윤복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며 "그가 화원으로 활동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어느 문헌을 찾아봐도 신윤복이 화원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은 없다"며 "또 조선시대에는 부자가 같은 곳에서 근무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신윤복을 소재로 한 소설 '색, 샤라쿠'의 저자 김재희 씨도 "아버지가 화원이었으니 신윤복도 시험 정도는 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 있다"고 말했다.
화원이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해도 그는 수많은 풍속화를 그렸다.
국보 제135호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를 비롯해 '탄금(彈琴)', '미인도(美人圖)' 등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 걸작을 많이 그렸다.
반면 신윤복이 화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조선시대 화원은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직업으로 신윤복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화원이었다"며
"또 오세창이 정리한 '근역서화징'에 신윤복이 화원이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 김홍도와의 관계는
김홍도와 신윤복은 조선후기 시대 동시대 인물이었지만 그 둘이 사제관계였다는 기록은 역사에 남아있지 않다.
화풍으로 봤을 때 신윤복이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할 뿐이다.
조선시대 기록에 신윤복과 김홍도가 사제관계였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 둘이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는 견해도 있다.
이태호 교수는 "김홍도와 신윤복은 동시대 살았던 화가들"이라며 "둘의 화풍을 비교해봤을 때 신윤복은 김홍도의 화풍을 따랐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김재희 작가 역시 "두 사람의 작품을 비교해 볼 때 신윤복이 김홍도를 모사한 부분이 굉장히 많이 보인다"며 "그림 원본을 접하기 어려웠던 당시를 돌이켜 보면 신윤복이 김홍도의 제자였거나 최소한 가까운 사이였을 가능성은 크다"고 밝혔다.
◆ 신윤복은 플레이보이였나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는 신윤복은 한량과 기녀 등 남녀 사이 정을 주로 그렸다.
그의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여인들은 틀에 박힌 캐릭터가 아니라 자유 연애를 즐기는 관능적인 여성상으로 그려졌다. 이는 신윤복이 활약하던 사회 분위기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화법이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에서 그가 플레이보이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미술작품은 대부분 본인의 경험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김재희 작가는 "금기시되던 기방에 대한 그림도 많고 작품의 필치를 볼 때 신윤복은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남자인가 여자인가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은 남장여자로 등장한다.
문근영이 연기하는 신윤복은 중성적인 매력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TV에서는 신윤복이 여자로 설정돼 있지만 그는 남자다. 남존여비 사상이 심했던 당시 조선사회에서 여성이 화가로 사회 일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김달진 미술연구소장은 "신윤복이 남자라는 사실은 모든 미술사학자들이 동의하는 내용"이라며 "당시 사회분위기상 여성이 풍속화가를 그리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승환 기자 / 손동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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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申潤福 1758(영조 34)~?
조선후기의 화가. 자는 입부(笠夫), 호는 혜원(蕙園). 본관은 고령(高靈). 화원(畵員). 벼슬은 첨정(僉正)에 올랐다.
혜원 신윤복은 정확한 생존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은 화가이나, 김홍도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신윤복은 김홍도에게서 받은 영향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고 새롭게 변화시켜서 그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창안하여 김홍도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풍속화의 대가가 되었다.
당시의 서민 사회의 풍속을 매우 세밀하게 잘 그려, 김홍도와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힌다.
훌륭한 그림을 많이 그려 한국 미술사에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양반 중심의 체계적 문화에서 벗어나 부녀자들을 그리는 등 그림의 소재의 다변화를 꾀하였다.
시골 주막의 서정적인 풍속을 날카로운 화필로 잘 그려냈다.현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참된 모습을 즐겨 화폭에 담았다.
김홍도와 함께 조선사회의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히며 그의 작품 중 대다수는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주류이다.
비록 김홍도처럼 임금님 밑에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으나 그만의 대단한 선과 아름다운 필체로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그의 작품대다수는 항상 부녀자들이 나오며 양반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대부분 양반들은 앉은 자세로 향연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며 부녀자들은 춤추고 노래하고 술을 따르며 기생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 민족의 민속놀이나 흥겨운 농악을 그린 김홍도에 비해 신윤복은 세밀하고 표독스러운 느낌을 멋지게 자아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사물의 모습을 한층 더 화사하고 화려하게 돋보이기 위하여 배경을 그 색에 맞게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의 그림
[기방무사 (妓房無事) (1805) ]
방안에서 남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가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당황한 듯 하죠?
아마도 방안의 여인은 기생의 몸종이고 방안의 남자는 기생을 찾아왔다가
그녀의 몸종과 사랑을 나누던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갑자기 기생이 들어오니 사내는 이불로 자신의 벗은 몸을 가린 듯 하구요 혜원의 춘화 중에는 이와 같은 내용으로
이불을 덮지 않은 채 벌거벗은 사내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있답니다.
[단오풍정(端午風情) (1805)]
신윤복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죠 단오 날에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며 놀던 조선시대 여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놀이의 이유는 악귀를 물리치고자 하는 액땜의 뜻이 있다고 합니다.
멀리서 목욕하는 여인들을 훔쳐보고 있는 소년들은
절간의 젊은 스님들 같은 데요. 그 모습이 익살스럽습니다.
[무녀신무(巫女神舞) (1805)]
일반 집에서 굿을 하고 있는 풍경입니다 갓을 쓰고 부채를 들고 춤을 추는 무당 앞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빌고 있는 아낙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혜원은 이렇게 흥미롭고 이색적인 생활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 즐겼지요. 그래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 기녀, 무녀들입니다. 여기서도 기녀의 붉은 의상은 우리의 시선을 기녀에게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쌍검대무(雙劍對舞) (1805)]
한 가운데서 긴칼을 들고 춤을 추는 무녀를 중심으로 악단과 양반, 기녀들이 둘러앉아 있습니다
주변의 푸른빛들과는 대조적으로 무녀의 치마는 붉은 색이네요. 덕분에 시선이 무녀들에게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역동적으로 펄럭이는 치맛자락을 보니 얼마나 현란하게 춤을 추는 지 알 것 같아요.
[연당의 여인 (1805)]
평론가들에게 신윤복 회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작품입니다
연꽃이 활짝 핀 연못 을 바라보며 여인의 모습을 시원하면서도 운치 있게 그려내었습니다
생황을 불려는 듯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담뱃대를 든 채 툇마루에 앉아 있는 이 여인은 은퇴한 기생인 퇴기인 듯 합니다.
순간의 모습을 잘 포착하여 깔끔하게
화면에 담아낸 혜원의 솜씨가 놀랍습니다.
[월야밀회(月夜密會) (1805)]
달빛만 고요한 한 밤중에 인적 드문 길의 후미진 담 장 밑에서 한 쌍의 남녀가
깊은 정을 나누고있습니다.
남자는 차림새로 보아 관청의 무관인 듯 하고 그 남자의 여인은 기생인 것 같습니다.
그들의 만남을 한 쪽에서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여인은 이들의 만남을 주선해준 사람인 듯 하구요.
담 밖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화가의 시선이 재미있습니다.
[월하정인(月下情人) (1805)]
어스름한 달빛 아래서 양반인 듯 잘 차려 입은 남자가 초롱불을 들고 길을 재촉하는 것 같네요
여자는 쓰개치마를 둘러쓰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조금은 주저하는 듯한 모습이고요.
배경은 간략히 묘사되어 있지만
대신 이들의 표정과 행동에서 미루어 짐작되는 그네들의 감정은
온 화폭이 모자라는 듯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왼쪽 담에는 "달은 기울어 밤 깊은 삼경인데,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이 안다
(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라고 씌여 있습니다.
[주사거배(酒肆擧盃) (1805)]
주막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취객들과
주모의 모습을 그려내었습니다.
그러나 여느 주막과는 다르게 주변의 기와집과 마당 안의 매화도 보이는 것이
양반들을 상대하기에도 손색없는
꽤 반듯한 집 같아 보입니다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손님들도
선비와양반들인 듯 하구요.
매우 일상적인 조선시대의 한 생활상입니다.
[주유청강(舟遊淸江) (1805)]
특별히 하는 일없이 유희나 즐기며
세월을 죽이고 있는선비들을 한량이라고 하죠.
그 한량들이 기녀들을 데리고 뱃놀이를 나왔습니다.
조선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풍경입니다.
화면 위쪽에는
“피리 소리는 바람을 타서 아니 들리는 데
흰 갈매기가 물결 앞에 날아든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청금상련(聽琴賞蓮) (1805)]
연못가에서 세 남자가 기생을 데리고 유희를 즐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옛 선비들은 기생들과 즐기는 놀이도
양반들이 지녀야 할 풍류로 생각하였기에 당당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기녀들의 옷맵시나 선비들의 옷매무새,
가야금, 우아한 정원의 나무들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잘 알게 해 줍니다 | |
첫댓글 그렇군요. 안타까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