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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망하는 고려에 명운을 걸다 비참하게 패배한 비극적 군상과 함께,
단호한 개혁의 비전으로 조선을 힘차게 열어 간 호걸들의 이야기다.
삼국과 고려가 ‘자연적 국가’(natural state)인 반면,
조선은 설계도에 의해 건설된 ‘의식적 국가’(conscious state)다.
그래서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나간 인물들은 지략이 넘치고 의지가 헌걸차다.
공민왕·이제현·이색·신돈·우왕·이인임·최영·이성계·정몽주·정도전·조준·길재 등
12인의 드라마를 독자와 함께 감상해본다.
▎종묘 공민왕 신당 안에 있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정.
노국공주는 공민왕의 영혼이 숨쉰 유일한 안식처였는데,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다 세상을 떠났다.
고려 말 공민왕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뛰어난 자질과 원대한 이상을 갖고 쓰러져가는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나라와 백성은 물론이고 그 자신조차 구하지 못했다.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났는데,
운명의 여신은 그를 버렸다. 몽고 여인 노국공주와의 순애보적 사랑은 그 한 사례다.
그녀는 공민왕의 영혼이 숨쉰 유일한 안식처였는데,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다 세상을 떠났다.
그 뒤 공민왕의 몸은 살았으나 영혼은 죽었다.
노국공주가 죽자 공민왕은 손수 초상을 그려놓고,
“밤낮으로 식사를 대할 때면 슬피 울며, 3년 동안 고기반찬을 들지 않았고,
벼슬에 임명받거나 사신으로 나가는 신하들은 모두 능에 가서
궁중에서 예를 행하는 것과 같이 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의 사랑은 참으로 지극하여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었다.
공민왕은 죽어서도 노국공주 옆에 묻혔다.
공주의 정릉과 나란히 선 공민왕릉은 고려 왕릉 중 유일하게 쌍릉이다.
가슴 뭉클한 이야기다.
▎공민왕의 친필 현판인 임영관.
임영관은 고려시대 중앙 관리들이 묵었던 관아(官衙) 유적으로 2006년 복원됐다.
하지만 공민왕의 실패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국가와 정치를 담당하기에는 너무 인간적이었다.
그의 지고한 사랑은 결과적으로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위태롭게 했기 때문이다.
국가와 정치의 최고 목적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만,
그 목적을 위해 때로는 인간을 넘어서는 일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역사는 웅변하고 있다.
사실 공민왕은 왕건과 더불어 고려가 낳은 가장 걸출한 왕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는 단지 한 시대가 아니라 고려왕조의 마지막 희망이 걸려 있었다.
때도 그러했고, 지위도 그러했고, 능력도 그러했다.
하지만 공민왕은 운명이 그에게 준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이 위대한 인간은 어떻게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 파멸에 이르렀는가?역사에는 평화롭지만 평범한 시대가 있고,
어렵지만 창조적인 시대가 있다.
한국 역사에서는 14세기 말과 19세기 말이 그렇다.
14세기 여말선초의 변혁은 한국의 전통적 정체성을 탄생시켰고,
19세기 한말의 변혁은 한국인의 근대적 정체성을 형성했다.
공민왕대 이후 40여 년 동안 고려는 부단한 전쟁과 기근,
폭정을 겪었지만,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창조적인 시대였다.
고려 말 실천적 지식인들은 도탄에 빠진 백성의 고난과 국가의 정신적 타락을 슬퍼했다.
이들은 이 위기를 극복할 대안으로 성리학을 받아들여 변혁 운동에 헌신했다.
그 결과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다.
▎개성시 소재 공민왕릉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쌍분 능묘다.
왼쪽이 공민왕의 무덤인 현릉(玄陵), 오른쪽이 노국공주의 무덤인 정릉(正陵)이다.
즉위할 즈음의 고려는 중병 앓는 환자14세기 말 고려의 변혁은 공민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공민왕은 1351년 2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45세인 1374년 죽었다. 그 시대는 대변동기였다.
1351년, 유복통(劉福通)의 한족 농민반란군(紅巾賊)이 대륙에서 거사했다.
이로써, 중국과 동아시아 전체가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기 위한 대혼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일본에서는 1336년 이래 60여 년간 두 명의 천황이 남북조로 나뉘어 패권을 다투었다.
이런 혼란과 권력공백을 틈타 왜구가 40여 년간 동아시아 해안을 휩쓸었다.
1367년 명(明)이 원(元)을 축출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가 남북조를 통일하고 무로마치 막부를 수립했다.
공민왕이 즉위할 즈음 고려는 중병을 앓는 환자였다.
1170년 무신정권에 의해 고려의 전통 정치체제가 파괴된 후,
몽고의 잇단 지배에 의해 고려는 사실상 독립을 상실했다.
몽고 제국의 지배는 이중적이었다.
무자비한 정복자였지만, 동시에 고려 왕조의 수호자이자 동북아 평화의 안전판이기도 했다.
고려 왕실은 몽고의 도움으로 무신 지배를 종식하고 왕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북방민족에 시달리던 고려는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아래 유례없는 100년의 평화를 누렸다.
그런데 몽고의 지배 아래서 고려는 개혁을 추진할 수 없었다.
원종 이래 고려의 왕은 모두 원에 의해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왕들은 원으로부터 충성을 의심받아서는 안 되었고,
누구도 원의 의사에 배치되는 정책을 수행할 수 없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정왕은 원에 의해 폐위되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은 다시 복위되었으나, 충혜왕은 원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일생을 소진해야 했던 왕들은 개혁을 꿈꿀 여유가 없었다.
원 황제 인종(仁宗)과 무종(武宗)을 즉위시키는 데 조력함으로써,
원 중앙정부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충선왕조차 친원 특권세력에 밀려 개혁에 실패했다.
충목왕 대에는 원 황제의 강력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개혁파들은 정동행성과 친원세력의 반발을 극복하지 못했다.
▎고려시대 사찰인 운주사 전경.
고려 말 불교 이데올로기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의해 무너졌지만
공민왕은 성리학의 개혁적 성격을 인식하지 못했다.
왕을 폐위시킬 힘을 가진 권문세족공민왕이 즉위할 무렵
고려의 최대 개혁과제는 ‘국가’ 그 자체의 재건이었다.
고려 말의 국가는 명목만 존재했고 껍데기만 남았기 때문이다.
전통시대의 백성들에게 국가는 원천적으로 수탈자였지만, 국가 없는 상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국가는 절제된 수탈자이지만, 무국가 상태는 홉스의 자연 상태이기 때문이다.
고려 말의 국가와 사회 상황은 자연 상태로 악화되어가는 와중에 있었다.
이른바 권문세족으로 불리는 소수의 특권세력이 부와 권력의 기초인 토지, 백성, 관직, 군대를 독점했다.
국가는 사실상 이들에 의해 점령되고 사유화되었고, 수탈의 압력은 임계점을 향하고 있었다.
이들은 겸병을 통해 대규모 사유지를 집적하고 양민을 불법적으로 노비화하여 거대한 농장을 경영했다.
1388년(창왕 즉위년) 위화도회군 뒤 전제개혁에 나선 대사헌 조준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근년에 이르러 겸병이 더욱 심해,
간악한 무리가 주군(州郡)과 산천(山川)을 경계로 삼아 모두 조상의 땅이라 우기고,
서로 밀치고 서로 빼앗으니, 하나의 땅에 주인이 5, 6명이 넘고 1년에 세금을 8, 9차나 거두고 있다.
백성이 빚을 내서도 사전의 소작료를 충당하지 못하고,
처자식을 팔아도 빚을 갚을 수 없고, 부모가 주리고 떨어도 봉양할 수 없다.
원통하게 부르짖는 소리가 위로 하늘에 사무친다.”
가난한 농민은 토지를 빼앗기고 자녀를 팔거나 노비로 전락했다.
공민왕 10년 75세의 이제현이 목격한 백성들의 삶은 비참했다.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
“요즈음 남방엔 흉년이 자주 들어, 굶주린 백성 왕왕 길가에 쓰러지네.
수령 중 글자 아는 자 백에 두셋뿐, 장님 벙어리처럼 불법을 모른 체하네.
농부를 몰아다 왜구를 막게 하니, 적의 칼날 닿기 전에 먼저 흩어지누나.
호족의 종들은 말 타고 와 공전을 빼앗고,
관청은 밀린 세금징수에 흉년을 돌아보지 않네. 슬프다
민생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누가 우리 임금 위해 정무를 덜어줄까.”
1349년 충목왕 대의 전제개혁자 재상 왕후가 죽었을 때,
백성들은 관을 바라보며 소리쳐 울고(號泣), 부모같이 제사 지냈다.
그를 본 이제현은 “근래에 많은 재상이 죽었지만 우리 백성이 눈물을 뿌리는 것을 보았는가?”라고 반문했다.
개혁을 향한 백성들의 바람은 이처럼 절실했다.국가 재정이 붕괴되어 군대도 유지할 수 없었다.
고려 말의 군대는 호족과 군벌의 사병이었다.
40여 년간 왜구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공민왕은 승려 신돈을 등용한 이유로,
“세신대족(世臣大族)은 친당(親黨)이 뿌리를 맞대어 서로 감싸는 점”을 들었다.
부패의 한쪽 고리를 잘라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고려 후기의 귀족집단은 친소에 차이가 있을 뿐 큰 테두리로 보면 모두 친족들이었다.
이들은 개경을 중심으로 거주하면서 누대에 걸친 연혼(連婚)으로 인척을 맺어,
독점적인 특권집단을 형성했다.
권문세족들은 대부분 원 황제나 고위 관리에게 딸을 바쳐 혼인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마음먹으면 왕을 폐위시킬 수도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국가기관도 이들을 제어하지 못했고, 왕명도 이행되지 않았다.
안동 권씨 권준(權準) 집안 사람이 충렬왕비 숙비(淑妃)의 이모를 납치했으나,
순군(巡軍)은 처벌하지 못했다.
또 권준의 아들 합포만호 권용(權鏞)의 수탈을 백성들이 호소했지만,
감찰사가 덮어두고 조사하지 않았다.
이에 공민왕은 감찰사 관리를 불러
“권용의 당파가 나라에 가득 차 있어 감히 그 죄를 다스리지 못하니, 네가 능히 이를 다스리겠느냐?
못하겠으면 바로 고하라”고 질책했다. 이처럼 국가의 공적인 기능은 거의 붕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원 지배기 고려의 왕도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권문세족이었다.
왕 역시 원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왕권을 인정받았다.
권문세족의 농장처럼, 왕 역시 개인 토지(食邑)와 개인 창고를 가지고 있었다.
충렬왕은 개인 창고 내방고(內房庫)를 보유했다.
또한 권농사(勸農使)를 전국에 파견하여 백성에게 왕의 개인 토지를 경작게 하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했다.
충혜왕은 직접 상거래까지 했다.따라서 고려 말 정치개혁의 목표는 외형적으로 왕권 강화와
사전 혁파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정상적인 국가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를 고민하면서 새로운 세계관을 수용하여 개혁세력으로 등장한 지식인들이
바로 이색을 필두로 하는 정몽주, 정도전 등 신진 성리학자들이었다.
권력에 고도로 민감한 인물로 성장공민왕은 삼수 끝에 왕위에 올랐다.
부왕 충숙왕은 성격이 사나운 장자 충혜왕보다 둘째 아들 공민왕에게 마음을 두었다.
충숙왕은 충혜왕을 “언제나 무뢰배(撥皮)라고 부르며, 사랑스럽게 대하지 않았다.”
충숙왕은 병석에 누워 측근 윤택(尹澤)에게 공민왕의 옹위를 부탁했다. 하지만 원은 충혜왕을 택했다.
그의 강력한 후원자는 충혜왕을 아들처럼 아낀 승상 엘 테무르였다.
그런데 충혜왕은 고려 시대 최악의 왕으로, 부왕의 말처럼 왕이라기보다 하나의 무뢰배였다.
그는 신하의 아내는 물론 아버지의 후궁, 외숙모까지 간음했고,
거스르는 사람은 철퇴로 쳐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충숙왕의 몽고 왕비 경화공주까지 강제로 겁탈하여, 원에 압송되었다.
그는 운 좋게 이 곤경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왔다.하지만 그의 운은 거기까지였다.
충혜왕의 난행을 견디다 못해, 기황후의 동생 기철 등은 원 조정에 폭정을 탄원했다.
원은 사자를 보내 충혜왕을 밧줄로 묶고 발로 차며 압송하였다.
원 순제(順帝)는 “너는 남의 임금이 되어 백성을 박탈함이 너무 심했다.
비록 너의 피를 천하의 개에게 먹여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라고 힐난했다.
그는 유배 도중 죽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듣고 슬퍼하는 자가 없었으며,
백성들은 기뻐 날뛰면서 ‘다시 갱생의 날을 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국가의 위신으로 보면 슬픈 일이었다.
고려 신민들은 일찍부터 공민왕에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의 총명함과 백성에 대한 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모친 명덕태후 홍씨는 공민왕이 “(충혜왕의 후계자로서) 원자가 되었을 때 백성들은 희망을 붙이고,
오직 임금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충혜왕의 무도함을 원망하였고 나도 역시 그렇게 여겼다”고 말했다.
당시 원 관리로 재직 중이던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도 공민왕의 왕위 계승을 요청했다.
그러나 충혜왕의 아들이 있었고, 공민왕은 후원자가 없었다.
그의 모친 홍씨는 고려 여인이었고, 아직 원의 공주와 결혼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고려인들의 바람과 달리 8세인 충목왕이 즉위했다. 하지만 그는 5년 뒤 죽었다.
황제는 공민왕의 습위를 명했다. 희망에 부푼 공민왕의 행차가 본국으로 떠나려 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충혜왕의 서자인 12세의 충정왕(忠定王)으로 변경되었다.
공민왕은 또다시 고배를 들었다. 그러자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이 떠났다.
박천부라는 사람만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공민왕은 그에게 “오직 너만이 있구나. 나라고 어찌 나라로 돌아갈 날이 없겠느냐.
너는 꼭 머물러 있다가 나와 함께 가자.
내가 만일 돌아가게 될 때에는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공민왕은 1349년 10월 위왕(衛王)의 딸 노국공주(魯國公主)와 결혼했다.
왕이 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노국공주의 아버지 위왕 볼로드 테무르는 공민왕의 부왕 충숙왕 비 금동공주의 오빠다.
그리하여 원은 1351년 10월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공민왕을 왕으로 삼았다.
공민왕은 즉각 이제현을 정승으로 임명하였다.
이제현은 당시 고려에서 가장 명망이 있었던 개혁파 인물이었다.
이제현에 따르면, 공민왕의 즉위 소식을 듣자
“위로는 명덕태후로부터 아래로는 소민에 이르기까지 기뻐하여 날뜀은 가히 말로 다할 수 없었다.”
또한 “왕의 말씀에 무릇 백성과 나라에 이로운 일은 모두 아래로 행하라 하니,
보고 듣는 자가 갱생의 보람을 가지지 아니함이 없었다”고 한다.공민왕은 1351년 12월 귀국했다.
혹독한 경쟁과 좌절, 10여 년에 걸친 원 궁정생활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을 권력에 고도로 민감한 인물로 만들었다.
즉위 당시 그는 겨우 22세에 불과했다.
그러나 청년다운 개혁의지뿐만 아니라 노회한 권력 감각을 보여주었다.
강화도에 유배된 조카 충정왕은 독살되었다.
잔인하지만, 아예 화근을 자른 셈이다.
즉위 원년(1352) 2월 공민왕은 즉위교서에서 ‘새 출발’(更始)을 다짐했다.
공민왕의 모범은 태조 왕건이었다.
이색에 따르면, 공민왕은 “근세의 잘못된 일을 고치고, 장차 태조의 옛일을 회복시키려고 하였다”고 한다.
왕건은 고려의 건국자이기도 하지만, 정치가로서 위대한 인물이다.
이제현은 충선왕과 대화를 나누면서, 왕건의
“원대한 식견과 깊은 사려는 후세 사람이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천인(天人)의 필치 자랑했던 예인 공민왕즉위교서는 공민왕의 결의와 정국운영 방침이 잘 드러난 문서다.
여기에서 공민왕은 “시세가 쇠퇴하고 풍속이 퇴폐하여, 조정에는 요행으로 얻은 관직이 많고,
창고에는 평소의 저축이 없으며, 주변 오랑캐가 국경을 침입하고, 하늘은 재변(災變)을 고하고 있다”고 밝혔다.
당시 고려 정치의 가장 큰 문제가 인사와 재정, 국방이라고 본 것이다.
그의 인식은 정확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고려 정부는 대민행정 같은 실무를 위해 존재한다기보다,
권문세족의 명예와 권력을 위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제의 문란으로 국가재정이 붕괴된 상태였고,
그 결과 군대를 유지할 수 없어 국방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첫째 정부를 혁신하고,
둘째 전제를 개혁하고, 셋째 군대를 복구시켜야 했다.
1388년 위화도회군 뒤 조선 건국파들이 한 일도 이것이었다.
공민왕은 국가를 혁신하기 위해
“사욕을 이겨 정신을 가다듬고, 날마다 근신하여 거짓됨을 고치며,
아첨하는 사람을 버리고 간절하고 정성스러운 사람을 쓰며, 관후한 정치를 베풀지 않으면, 무
엇으로 천자의 덕을 갚고 조종의 업을 보존하리오”라고 다짐했다.
공민왕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전대의 왕들이 사냥, 연회와 음주, 노래와 춤, 섹스, 토목공사에 몰두했던 것에 비해
공민왕은 놀라울 정도로 육체적 쾌락에 무관심했다.
그는 당시 중국과 고려 최고의 명승으로 알려진 보우를 중국에서 만난 뒤 그에 깊이 심취했다.
매와 개는 당시 귀족들의 취미생활인 사냥에 필요한 것이었지만, 공민왕은 이를 비난했다.
그는 재상들에게 “그대들이 모두 매와 개를 기른다니 사실인가?”라고 묻고,
“지금 사방에서 병란이 일어나 백성이 살기가 심히 어려운데,
그대들이 어찌 나라를 근심하지 않고 개와 매를 놓아 곡식 심은 것을 밟게 하느냐”라고 힐난했다.
공민왕은 바둑에 약간의 취미가 있었고, 예술에는 매우 뛰어났다.
성현은 “공민왕의 화격(畵格)이 매우 높다.
지금 도화서에 소장된 노국공주의 진영(眞影)과 흥덕사에 있는 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은
모두 공민왕의 수적(手跡)이며, 간혹 큰집에 산수를 그린 것이 있는데, 매우 기절(奇絶)하다”고 평했다.
이덕무는 이서구(李書九) 소장의 ‘천산대렵도’를 보고 “섬세한 그림이 참으로 천인(天人)의 필치”라고 평가했다.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몽고(원)에 항전하려는 의지가 담긴 유산이지만
고려는 원제국의 붕괴와 함께 무너지는 역설적 운명을 맞았다.
그러나 말 타는 법조차 몰랐고, 2차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으로 파천할 때 어려움을 겪었다.
공민왕 원년 2월 국정방향을 제시한 ‘즉위교서’가 발표되고,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방침이 폭포수같이 쏟아져 나왔다.
공민왕은 특별히 전제개혁을 추진하다 죽은 왕후에 대해, “정승 왕후는 불행히 먼저 죽었으니,
내가 심히 이를 애도”한다고 말했다.
공민왕은 ‘관후(寬厚)한 정치’를 약속하고,
모든 정책은 궁극적으로 “이 백성을 편히 다스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민왕은 인재를 발탁하려는 열의와 능력이 출중했다.
윤소종(尹紹宗)은 “공민왕이 명철하여 사람을 얻음이 많았다”고 평가했다.
공민왕은 “한 고조가 사람을 알아보는 것 같은 총명이 있어, 즉위 초 자리를 비워 현인을 구하고,
밤늦게 밥을 먹고 정치하는 이치를 도모했다”고 평했다.
공민왕은 귀국 도중 원송수(元松壽)를 한 번 보고 즉시 요직에 발탁했다.
“원송수가 길에서 맞아 알현하니 풍의(風儀)가 청수(淸秀)하고 진퇴에 법도가 있었다.
왕이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 곧 뽑아 기밀(機密)을 맡기고 날로 친신(親信)함을 보였다.
지주사(知奏事: 중추원의 정3품 벼슬.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자리)로 옮겨
인사에 참여하니 인사를 신중히 하여 조금도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전대 왕들의 실패 원인을 소통 문제로 파악공민왕은
또한 훌륭한 인물들에 대해 극진한 존경의 뜻을 표했다. 원송수가 오면 왕은 반드시 일어서서 기다렸다.
이색(李穡)과 이인복(李仁復)을 접견할 때는 반드시 청소하고 향을 피우게 했다.
총애를 받는 승 신희(神照)가 왕에게
“임금이 신하를 접견하는 데 반드시 공경하기를 어찌 이와 같이 하나이까” 하자,
왕은 “네가 어찌 알리오. 이 두 분은 도덕이 용렬한 유학자가 아니며,
또한 이색은 학문이 껍질을 버리고 알맹이를 얻었으니,
비록 중국에서라도 또한 비길 만한 유례가 드물다.
어찌 감히 업신여기랴”고 하였다.
공민왕의 개혁정치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직접 정치를 주관(親政)하고,
정치적인 소통을 중요시했다는 점이다. 소
통은 모든 정치적 덕목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자질을 요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도 어렵지만, 자신의 견해로부터 자유롭기는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종묘 공민왕 신당의 준마도(駿馬圖).
공민왕은 즉위교서에서 전대 왕들의 실패 원인이 소통에 있다고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대에 왕이 친애하는 신하들의 은폐로 하정이 상달되지 못해 주상을 그르치는 데 이르렀다.
그러므로 대언(代言: 왕명을 하달하는 벼슬)이 정치의 득실에 관하여
차례로 아뢰는 것(轉對)과 관련 기관의 보고는 친히 들어야 한다.
그리고 경연에 참여하는 신하들과 호위군사는 신중하게 선택해서
바른 사람과 군자가 항상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공민왕은 또한 “원로대신,
대부, 선비는 차례로 입시하여 경전과 역사, 좋은 말을 진강하라.
무릇 권문세가가 빼앗은 전택과 노비, 해가 오래된 송사,
또한 억울한 옥사는 그를 살펴 다스려라. 첨의와 감찰은 나의 이목이니,
시정의 득실과 민간의 이해(利害)를 직언하여 꺼리지 말라”고 촉구하였다.
이를 위해 공민왕은 당대의 정치적 원로들을 총망라하여 경연관에 임명했다.
이를 통해 정치적 반대파까지도 포괄하는 정치자문기구를 구성하고,
폭넓게 여론을 수렴하고자 했다.
또한 “첨의, 감찰, 전법사, 개성부, 선군도관(選軍都官)은 처리한 송사에 대해
5일에 한 번씩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고려 중엽부터 왕은 한 달에 여섯 번씩,
즉 5일에 한 번씩 정무를 듣고 처리하도록 육아일(六衙日)을 제정했다.
하지만, 이처럼 왕이 매일 대신들을 만나 정치를 토론하고,
정기적으로 실무를 직접 처리하는 것은 거의 전례 없는 일이었다.
이는 조선시대에 와서 보다 강화되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도 세종대왕 정도만 매일 정무에 종사했다.
고려의 왕 중에는 왕건이 그런 사례다.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미천한 가문에서 일어나 외람되게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서,
여름에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지 않으며,
몸과 마음을 괴롭힌 지 19년 만에 삼한을 통일하였다”고 말했다.
고려의 왕들 중 실제 정무에 종사한 왕은 많지 않았다.
충숙왕은 대인기피증에 걸려 “항상 깊은 궁전에 거하고, 매양 즐거워하지 않으며,
정사를 친히 하지 않았다.” 충혜왕은 누릴 수 있는 모든 환락에 탐닉했다.
강력한 개혁정치로 처음을 시작했던 충선왕도 한 번의 좌절을 경험한 후 사적인 행복을 추구했다.
이처럼 의욕적인 시작과 달리 끝까지 정치적 관심을 지속했던 왕은 드물었다.
최승로(崔承老)는 경종의 정치를 평가하면서,
“이른바 시작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끝을 잘하기가 어렵다”고 하였고,
성종에게는 “착하게 시작한 마음으로 인하여 유종의 미를 생각하라”고 충고하였다.
조일신의 난으로 중단된 개혁정치충목왕 대의 상소에서 이제현은
왕과 신하의 소통이 막히면 국가에 근본적인 위험이 초래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재상이라 해도 연회가 아니면 왕을 볼 수조차 없었고,
특별히 부르지 않으면 왕을 만날 수 없었다.
그는 왕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제발 날마다 편전에 앉아 언제나 재상들과 함께 정무를 논의하고,
혹 날을 가려서 왕에서 직접 아뢰게 하되, 비록 일이 없더라도 이것을 없애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대신은 더욱 멀어지고 환관 같은 무리만 더욱 친근해져,
백성의 편안함과 어려움, 국가의 안위를 왕께서 듣게 되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최고통치자가 직접 정치를 관장하고,
피치자들과 원활한 소통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다른 어떠한 정치적 노력도 무의미하다.
그로부터 국가를 부패시키는 모든 요소가 자라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현명한 관리들이 배제되고 비정상적인 정치적 통로가 개설됨으로써,
민생과 국가의 문제가 방치된다.
하지만 공민왕은 집정 초기에 이러한 장애를 잘 극복했다.
공민왕 19년 이첨(李詹)은 공민왕이 즉위 초
“어전에서 정사를 들으므로, 재상부터 모든 관계기관이 다 진언하고,
각기 그 직무에 따라 아뢰었기 때문에,
민정(民情)이 왕에게 전달되어 사무가 막힘이 없어,
거의 승평(昇平: 나라가 태평함)에 이르렀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공민왕의 의욕적인 개혁정치는 얼마 가지 않아 중단되었다.
공민왕 원년 9월, 측근 조일신의 난이 발생했다.
난을 일으킨 조일신은 기황후의 일족인 기철 등을 모두 죽이고자 했다.
하지만 셋째 기원만 처치하여, 난은 실패했다.
조일신의 권력이 커지자 기철 일파는 조일신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위협했다.
조일신이 난을 일으킨 것은 선수를 친 것이다.
하지만 전체 상황을 보면, 이 사건은 기철 일파를 제거하기 위한 공민왕의 책략이었다.
왜냐하면 조일신만이 아니라 왕권도 심각하게 위협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는 두 명의 왕이 존재하는 것과 같았다.
기황후의 아버지 기자오가 영안왕에 책봉되었기 때문에,
원 정부 내 지위에서 기씨 일문은 공민왕과 대등했다.
공민왕 4년의 향연 자리배치를 보면,
왕과 기황후의 모친 이씨는 모두 남면(南面: 임금처럼 남쪽을 향해 앉음)하고,
황후의 여동생은 동쪽에 앉고, 기철과 원 사신은 서쪽에 앉고, 재상들은 계단에 앉았다.
왕과 이씨는 동등했고, 고려 신하들은 기씨 일족보다 낮았다.
기철은 공민왕에게 자신을 신하로 칭하지 않았다.기철 일문의 권력은 막강했다.
“관리의 선용과 이동이 기철의 좋아하고 싫어함에 따랐다.
서울과 지방의 관청에 다 친척을 두고, 무릇 요직은 심복이 아닌 이가 없었다.”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 노비를 가지면 뺏을 때까지 그치지 않고,
토지를 소유하면 뺏지 않고는 못 배겼다”고 한다.
그러나 공민왕 자신도 원을 두려워하여 이런 행패에 대해
“감히 한 번도 문책을 못했다.” 하물며 “많은 백성의 원한은 어찌 밝게 나타나겠는가?” 그 결과,
기철 등이 “나라 다스리는 법을 흔들어 정령(政令)이 이에 따라 움직였고,
기강이 서지 아니하여 통제할 방법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2부 계속)
첫댓글 역사이야기 , 역사탐방방에 많이 올려주세요!
유익한 역사적 내용들 올려주셔서 참으로 감사 합니다.
역사는 쟁취하는 자의 기록 ᆢ
역사공부 잘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