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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
서인도양
“전단장님의 통지문입니다. 포르투갈함대를 공격하여 이집트함대를 보호하라는데요.”
통신사관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레이더를 살펴보며 말하자 장난기가 발동한 함장이 다가가서는
뒤통수를 한대 갈겼다. 경쾌한 타음이 들려왔다.
“딱”
“잘 익었군. 자식이 빠져 가지고, 함장에게 애기하는데 고개도 안 돌리고 말하냐.
어쭈 관등성명 안나오지 ?”
통신사관이 맞은 부위를 손으로 문지르다 소리쳤다.
“대위 정. 희. 문. 시정하겠습니다.”
“앞으로 잘해 싸사. 안 그럼 국물도 없어.”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놈들을 어찌 요리한다.”
함장이 깍지를 끼고 손가락 마다 마디에 힘을 주자 톡톡 하는 마디 어긋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어뢰 몇발만 쏘고 말죠. 저놈들 겁나도 오지도 못 할텐데요”
통신사관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끼어 들었다.
눈을 한번 흘긴 함장은 포기했다는 듯 대꾸도 하지 않고. 무장관을 바라보며 간단한 명령을 내렸다.
“어뢰 8발만 발사해”
양만춘함 후미에 장착된 4연장 어뢰발사기에서 연속적으로 어뢰가 빠져 나와 물속으로 사라졌다.
함장은 흰 항적을 그리며 멀어지는 어뢰를 바라보았지만 명중을 의심하진 않았다.
기동함대만의 자랑 유도어뢰의 명중률은 백발 백중이기 때문에 느긋이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살라마 사령관은 고구려함의 거대함에 다시 한번 놀랐다.
자신의 배도 이집트에서는 제법 큰 축에 속했는데 고구려함은 그것보다 100배는 더 커보였다.
캘리컷 함대에게 꽁무니를 붙잡혔을 땐 거의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8척의 캘리컷 함선이 거대한 폭발을 이르키며 사라졌다.
물기둥이 치솟자 추격 중이던 나머지 함선들이 추격을 포기하고 생존자 구조에 나섰기 때문에
살라마 함대는 무사히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다.
고구려 전대가 속도를 내자 살라마 함대는 뒤로 쳐졌다.
“엄청나군! 저런 함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
살라마 옆에 있던 부관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크기도 크기지만 도데체 뭘로 움직이는 거야. 저렇게 큰 배를 가지고 있으니
운하 폭을 200미터로 하려고 하는 거구나.”
살라마는 대한제국이 수에즈 운하건설 계획을 들으면서 가졌던 의문이 하나 해결되었다.
당시 그는 대한제국이 운하 폭을 최소 200미터로 설계한다는 소리를 듣고 코웃음을 친적이 있었다.
그렇게 크게 만들려면 시간과 돈이 엄청 들텐데 자신의 상식으론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 고구려함을 보곤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앞으로 30분후면 말라카 상공이다. 모두들 마지막 점검을 시작하라.”
최초로 실전에 투입된 6대로 이루워진 폭격기 편대가 하늘 높이 날고 있었다.
제주사령부의 끊임없는 요청에 결군 해군성에서는 대만에 전개된 해군항공대의 출격을 승인했다.
야마토함대의 해체는 제주함대 사령부로서는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어떻게든 앙갚음을 해 줘야 했다.
“해상여단이 뿌려놓은 폭격유도신호가 잡힌다. 1번기부터 폭탄 투하에 들어간다. 다들 잘 하도록.
실전이니까. 어리 버리 하다간 승진에 지장이 있다.”
“1번기 투하, 2번기 투하 3번기 투하.”
3대의 폭격기에서 3톤짜리 폭탄 6개가 떨어져 내렸다.
정확히 지면으로부터 40미터에서 외피가 터지자 액화석유가스가 대기를 가득 메웠다.
폭탄 중앙에 있는 기폭장치가 작동하여 불꽃을 일으키자.
순식간에 전폭기 아래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마닐라로 가자.”
한차례 말라카 상공을 선회한 편대장은 편대를 다음 목표지점으로 이동시켰다.
“저놈들 완전히 불고기가 되었겠는데요.”
8사단의 해병대 대원들이 말라카 해안가에서 폭격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말라카 요새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가자. 상륙명령이다. 우린 가서 쓰레기나 치우면 되겠다”
대기중이던 보트가 서서히 해안가로 다가가고 후미에 있던 함대에서 함포가 쏘아졌다.
자카르타에서는 야마토함대의 전사자들을 위한 추모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이재룡 사령관은 짧은 추모사를 마치고 식장을 빠져 나와 항구로 향했다.
“조호르와 아체국에서 배신을 했으니 그 대가를 받아야 하겠지. 이인화소장이 대신 좀 받아주게나.
난 제주를 오래 비워둘 수 없으니 그만 가겠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이번 야마토함대의 불운은 유감입니다. 복수에 대해선 너무 염려마십시오.
저희가 백배 천배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식장을 이재룡대장과 같이 빠져 나온 이인화소장은 자신의 부대로 돌아갔다.
그의 기계화사단은 바티비아 요새 공격 준비중 야마토함대의 후퇴 소식을 듣고
급거 기지 방어전으로 병력을 배치했었다.
적의 함대가 격멸 되고 나자. 그는 바티비아를 공격하여 끝장내버릴 생각이었다.
수마트라에 웅크리고 있는 아체국도 그가 없애야만 하는 나라였다.
조호르 왕국은 해병 8사단이 책임지고 세상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전 부대에 지금부터 출동대비태세에 들어간다.
방어전에서 공격전 대형으로 부대를 편성하고 내일 아침 바티비아를 공격할 수 있도록
준비를 철저히 하도록.”
사령부에 들어오자 자리에 앉지도 않고 사단의 출동대기 명령을 내렸다.
갑자기 내려진 명령에 요원들이 멍하니 있자. 이인화 소장이 호통을 쳤다.
“뭐하나. 빨랑빨랑 움직이지 않고.”
이집트
수에즈항 제우스항이라고도 한다. 파나마 운하 건설이 벽에 부딛히자, 천인단에서는 대서양으로의
최단거리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수에즈 운하 건설과 북극항로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다.
우선적으로 시행이 결정된 수에즈 운하는 파나마운하 건설보다는 한결 쉬운 공사다.
평지에 가까운 지대에다 바닥은 모래와 진흙이 대부분이고 뚫고 지나갈 높은 산도 없었다.
옆으로는 나일강이 흐르고 있고 중간에는 거대한 호수가 세 개나 있었다.
수에즈 운하의 총 책임자인 대한제국 토목계의 살아있는 신화인 정약용은 대충 운하 건설을 위한
기초 시설이 마련되자 본국에서 고구려 전단이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고구려전단이 가져오는 준설기와 포크레인, 불도저가 이제 투입되어야만 했다.
그 동안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도로를 타고 흑해를 통해 수송된 자재로 저유소와
숙소 기타 제반시설을 포트사이드과 홍해의 수에즈항에 건설했다.
이제 포트사이드와 수에즈를 연결하는 총장 150킬로미터의 자동 연결 체계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운하 건설작업을 착수하기만 하면 되었다.
운하 건설 과정에서 생기는 팔천만 입방미터의 모래와 흙은 나일강에서 흘러 들어오는 토사를
막기위해 포트사이드항 왼쪽에 만들어질 거대한 방파제 건설에 쓰여진다.
파내어진 흙과 모래는 컨베이어로 운반되어 바다를 매우게 되는 거의 자동화 준설 체계가
완성된다면 아주 빠른 시일안에 운하가 건설 될 수 있다. 거기에 운하의 조기 건설을 위해
공사가 수에즈와 포트사이드 양쪽에서 동시에 시작되었다.
이미 포트사이드쪽에서는 이집트 농민들이 대거 동원되어 작업에 들어가 있었다.
3949년(1616) 봄
말라카를 떠난 한자동맹의 상선대가 유럽에 도착한 것은 다음해 초봄이다.
희망봉에서 잠시 머물다가 독일에 도착한 한자 상선들은 물건을 풀어놓고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뤼베크는 다시 한번 인도로 상선단을 파견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괴상한 소문을 접하게 된다.
“한자동맹 놈들이 유럽을 동양인들에게 팔아 먹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살아 돌아 오고 나머지 유럽 원정군은 모두 포로로 잡혀서 노예로 팔려나갔다.”
“말라카와 인도에 있던 유럽인들이 사라졌다.”
“동양의 미개인들은 유럽인들을 잡아먹는다.”
“한자동맹놈들은 배신자다.”
대부분 홀로 살아 돌아온 한자동맹을 매도하는 내용과 대한제국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악담들
이었다. 뤼베크는 자신이 돌아온 뒤로 단 한 척도 동남아에서 귀환하지 않은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어느 나라에서도 그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없었다.
이미 자신이 그곳을 떠난 지 6개월이 되어 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겨우 내내 수만명에 이르는 병사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유럽인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퍼져 나간 것이다. 그들은 돌아온 한자동맹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또다시 상선을 파견할
움직임을 보이자 의심은 확신이 되어갔다. 유럽각국의 표적이 된 한자동맹은 결국 상선대 파견을
포기하고 각국에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편지를 보냈다.
대한제국의 스파이들이 퍼트린 소문이 아라비아 남도에서 스웨덴까지 퍼져갈 무렵 이탈리아인들이
터키제국에서 동양의 향신료를 싣고 프랑스의 성 말로항에 입항했다.
그들의 입항 소식이 알려지자 주위에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어 동양에 대한 소식을 물었다.
“대한 제국 해군이 영불함대를 박살내고 다시 말라카에 있던 연합군을 몰살시켰다던데.
말라카에 있던 유럽인들은 대부분 학살당했다는 거야. 대한제국군이 어떻게 영불 함대가
빙돌아 간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것이 이상하지만 말야. 아무튼 이번에 동남아에 간 함대는 전멸이야.
들리는 말로는 고아항도 거의 박살 났다고 하던데.”
한 이탈리아 상인은 “이상하지만 말야”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한자동맹이 알려주었다” 라는 말로 이해되었다.
“대한 제국에서는 이번에 원정대에 참가하지 않은 나라의 상선들만이 동남아에 입항 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공포했네. 그들은 동남아 일대와 말레이반도, 인도 차이나 반도, 신대륙 전체를
자신의 영토라는 것도 공포했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영국하고는 영원한 적대관계를 유지하겠다더군.
터키제국도 대한 제국의 공포를 인정해 주었다네. 엄청난 일이지.”
“그렇군 세계역사상 이런 대제국이 건설된 적이 있었냐 말야.”
이탈리아 상인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던 한 청중이 감탄어린 표정으로 상인의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이탈리아 상인들의 말말말들은 유럽전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와전되고 부풀려져 거의 한자동맹을
포함한 게르만 민족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소문이 소문을 재생산하면서
마침내 원정에 참여했던 국가들이 한자동맹을 해체시키기 위해 뤼베크에게 압력을 넣었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독일의 황제에게 공식 항의 서한을 보내고, 전쟁을 각오 해야 할 것이라는
협박을 했다. 뤼베크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그것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자
한자동맹을 맺은 70여개의 도시에 연판장을 돌리고 동조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그는 가만이 앉아서 유럽인들에게 교수형을 당하고 싶진 않았다.
발렌슈타인은 예수회 고해신부의 주선으로 모라비아에 거대한 영지를 가진 늙은 체코의 미망인
루츠레티아 네크쇼바와 3942년에 결혼함으로써 자신이 지금까지 누리지 못한 풍족한 생활을 했다.
특히 3947년에 그녀가 죽고 난 뒤, 그녀의 전 재산을 상속하자 그는 호사스러운 삶을 청산하고
뭔가 새로운 것을,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뭔가를 찾고자 했다.
발렌슈타인은 어려서부터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 다니며 안목을 넓혔고 수도원에서 정식 교육도
받았다. 무언가를 열심히 갈구하던 끝에 그가 찾아낸 것은 힘없는 황태자를 일으켜 세워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는 일이다.
그래서 요즘 보헤미아에서 합스부르크왕가의 페르디난트2세를 돕는데 자신의 재산을 쏟아 붇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페르디난트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옹립할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은 그의 힘이 미약하여 자신의 재산으로 밑그림을 그리던 중에 유럽에서 일고 있는 전운을
감지하곤 행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3949년(1616) 여름 극동항
한성에 있는 황립 중등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은하이족 족장의 아들과 그의 親舊들이 극동항에
입항한 제일 기선 여객선에 올랐다. 대한제국에서는 은하이족을 비롯한 많은 신대륙의 원주민들을
자연스럽게 대한 제국민으로 편입시키고자 상당히 우호적인 정책을 펼치며, 상호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족장의 아들과 그의 親舊들은 입학금과 학비로 매년 금 100킬로그램을 지불해야만 했다.
이는 다른 외국인들의 학비를 책정하는 기준이 되었는데, 대한제국의 우수한 학문과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황금을 지불해야만 해서 사실상 소수 왕족이나 부유한 귀족, 상인들이
아니고서는 대한제국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것도 교육부에서 특별히 인가한 나라의 사람 에게만 혜택이 주어졌다. 하지만 일단 대한제국에
귀화하기만 하면 그 능력에 따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는데, 섬 하나를 통째로 빌려 자신만의
마을을 만들 수도 있었다. 물론 그에 걸 맞는 세금을 내야 하지만 말이다.
“대단한 배야 !”
은하이족 족장 아들은 이번 유학을 위해 이름을 새로 지었다. 그는 자신의 부족을 지칭하여
은하이라 부르길 희망했고.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부족민들도 크게 환영했다.
은하이는 족장 아들이라는 지휘에 걸맞게 일등칸에 마련된 방에서 親舊들과 담소를 나눴다.
“이렇게 큰 배를 일찍이 본적이 없어. 모두 철로 만들어졌단 말야. 무게만 해도 엄청날 텐데
어떻게 떠 있을 수 있는지.?”
그들은 바다보다는 육지생활이 더 익숙한 생활을 수 천년 해왔다. 부족이 가지고 있는 배는
기껏해야 통나무를 깍아서 만든 강을 건너거나 강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것이 전부였다.
자신들은 배의 크기는 나무가 얼마나 두껍게 자라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 그들에게 자신들이 타고 있는 여객선이 사람을 무려 일천명이나 싣고도 가뿐하게 떠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가히 신의 기적과도 같았다.
3949년(1616) 프라하
보헤미아인들은 대부분 신교를 믿고 있었지만 그 지역을 통치하는 영주가 믿는 종교를 믿어야
한다는 조약에 따라 그들 훗날 체코인이라 불린, 보헤미아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신교에서 구교로
바꿔야만 했다. 페르디난트는 독실한 로마 카톨릭 신자로 자신의 영지에 살고 있는 모든 주민들에게
개종하도록 강요했고, 신교도들을 억압해서 그에 반항하는 세력이 언제나 보헤미아지역을
한여름의 안개처럼 떠돌아 다녔다.
프라하에 있는 자신의 성에서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인 발렌슈탄인의 방문을 맞아
아리따운 부인과 함께 정원을 산책했다. 그들의 주위에는 근위병들이 병풍처럼 서서 타인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했다.
“이번에 동방원정이 실패하면서 원정에 참여했던 귀족들이 거의 몰락 직전에 있고,
그들을 제기 불능으로 만들기 위해 영불 국왕이 그 화살을 한자 동맹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술수를 쓰고 있는 듯 합니다.”
“발렌슈타인경은 그럼 저들이 한자동맹을 모함하고 있다는 것이요 ?”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이태리인들이 한몫 거들고 있지요.”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런다는 것인지 난 알 수가 없구려.”
“실패한 원정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이고 다른 나라에서도 귀족이나 지방영주를 비롯한
상인들의 입지가 많이 약해졌습니다. 그 틈을 타고 각국의 왕들이 자신들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고
왕권신수설을 주창하며 귀족의 권리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제임스왕이 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치정과 비리사건으로 쫒겨 날 운명이였던 베이컨경을 법무장관직에 임명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왕권에 대항하고 자신들의 힘을 키우기 위해 귀족들이 힘을 합치고 있습니다.
그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한자동맹을 희생양으로 삼아 전쟁을 일으키려는 듯 합니다.
전쟁만큼 좋은 것이 없죠.”
“전쟁은 왕들에게도 위험부담이 클 텐데. 안 그렇소 발렌슈타인경 ?”
“그렇습니다. 하지만 귀족의 군대와 비용으로 전쟁을 치른다면 져도 좋고, 이겨도 좋지요.”
“조만간에 유럽이 전쟁터로 변할 것입니다. 좋든 싫든 우리도 그 소용돌이에 뛰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겠지. 저들이 한자동맹을 희생양으로 삼겠다고 결심했다면 그 불통이 우리에게도 튈 수 있겠군.
보헤미아인들의 개종에 박차를 가하고 로마-카톨릭에 협조를 요청해야겠어. 내부단속이 우선이이야”
자신이 신교자임에도 페르디난트를 위해 주저없이 신교자들을 박해해 온 발렌슈타인은 페르디난트가
내부 단속에 무게중심을 옮겨놓자 내심 불안 했다. 외적에 맞서기 위해선 내부 융합이 필요했다.
“그것보단 대한 제국에 밀사를 보내 협력의사를 타진함이 좋을 듯 합니다만.”
“그건 안돼. 그들이 끼어 들면 우린 정말로 유럽연합군에 조각날 지도 몰라.
더군다나 그들은 우리의 영원한 적 터키와 한통속이지 않나.”
발렌슈타인은 이미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일만에 가까운 용병을 모집해서 훈련을 시키고 있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황제인 페르디난트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옹립하기엔 부족한 세력이었다.
여기에 대한 제국의 힘이 합세하면 좋겠지만 페르티난트는 대한제국을 업고 들어올 터키제국의 힘이
유입되는 것을 우려해서 그의 제안은 거절 되었다.
그는 독일을 하나로 묶고 과거의 신성로마제국을 재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유럽의 전운을 이용한 역사의 맥을 잡는 뭔가가 떠오를 듯 하면서도 떠오르지 않았다.
3949년 (1616) 겨울
모스크바는 며칠째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겨울로 온 시내가 꽁꽁 얼어 붙었다.
동토의 땅에 햇빛이 찾아들자, 거대한 상업도시 모스크바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3946년 러시아의 많은 부분이 대한제국에 편입되고 한동안 귀족들이나 교회에서 걷어가던
세금 아닌 세금이 완전히 사라지자, 러시아는 빠른 시간 안에 안정을 찾아갔다.
각 상공인과 농민들은 잉여 생산품을 팔기위해 모스크바로 몰려들었고 이것들을 사가기 위해
북부유렵의 상인들이 또 모스크바로 몰려 들었다.
그래서 모스크바는 이제 완전히 상업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겨울이 다 가도록 낡은 외투 한장으로 버티던 막심 고리끼는 큰 맘을 먹고 모스크바 시장에 나왔다.
그의 수중에는 아침에 아내가 주고간 돈 대한제국 돈 100원이 들려 있었다.
아내는 출근 하기 전 돈을 주면서 외투 한벌 사라고 하였다. 100원이면 그에게는 엄청 큰돈이다.
아내 월급이 천오백원이었으니 말이다. 100원이면 천연 모피코트를 사지는 못 할지라도 만주부에서
건너온 오리털 잠바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러시아에서 만든 외투는 같은 돈으로 두 세벌을 살 수 있었지만 “만의류”에서 만든 옷은
비싼 만큼 오래 입을 수 있어서 더 이득이었다.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옷도 아내가 제국군이 버리는
것을 주어온 것인데 앞으로 몇 년은 입을 만 했다. 큼지막하게 “만의류”라고 끼릴 문자와 한글로
간판을 내걸고 있는 상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예쁘장하게 생긴 점원이 인사를 했다.
“어서오십시오 손님”
여점원은 자신과 같은 러시아인 인데도 제국 말을 제법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막심 고리끼는 제국 말을 배우지 못했다.
무료 강습소가 지천으로 깔려 있었지만 어쩐지 이 나이에 어린 꼬마들과 섞여서
제국 말을 배운다는 것이 쑥쓰러워서 강습소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죄송하지만 전 제국 말을 할 줄 모르는데요 ?”
어린 아이가 간밤에 오줌을 싸고 그걸 親舊에게 들킨 그런 창피함이 밀려왔다.
여점원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손님을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한번 둘러 보시고 마음에 드시는 것이 있으시면 부르십시오 “
이번에는 점원은 러시아어로 말을 했다. 그녀는 다른 손님이 들어오자 재빨리 다가가
똑같은 인사말을 제국말로 건냈다. 그가 옷을 고르는 동안 그녀의 말소리가 간간히 귀에 들려왔지만
대부분이 제국 말이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봐요 아가씨. 이거 얼마죠 ?”
마침내 마음 쏙드는 물건을 찾아낸 그가 러시아 말로 점원을 부르자 점원이 쪼르르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대략 16-17살 정도 먹은 것 같은 소녀 티가 아직도 남아있는 소녀였다.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에 눈길의 그녀의 가슴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왼쪽가슴에는 나타샤라고 한글과 끼릴 문자로 쓰여진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 88원 입니다. 같은 값이면 이 옷을 권해 드리고 싶은데요.
이 제품은 털 목도리가 사은품으로 딸려 있습니다. ”
점원이 고리끼가 집어 든 옷 바로 옆에 걸려있는 옷을 집어 들었다.
모양새는 그게 그거였지만 털 목도리를 하나 더 준다니 금새 마음이 바뀌었다.
“ 그래요. 그럼 그걸로 하죠. 여기요.”
그가 10원짜리 9개를 건네주자 점원이 돈을 받아 들고 거스름돈을 가져왔다.
“크기는 맞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입어보고 사시는 것이… 저쪽에서 한번 입어보시는 것이 ?”
그녀가 가리킨 곳에 글자가 쓰여 있었지만 그는 사실 끼릴 문자도 제국 글도 알지 못하는
까막눈이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창피함이 밀려와 등에서 땀이 솟았다.
잔돈과 옷을 챙겨 들고 고리끼는 점원이 소리치는 소리를 뒤로 황급히 거리로 나왔다.
뒷말을 채 알아 듣지 못했다.
“ 크기가 안 맞으시면 5일 안에 바꾸러 ….”
“ 안 바꿔준다는 애긴가 ? 크면 큰 대로 입고 작으면 좀 덧대서 입으면 되겠지.
그나저나 목도리가 하나 생겼으니 아내에게 줘야 겠는 걸.
예전에는 글을 몰라도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는데 세상이 많이 변했어.
이 나이에 공부가 잘 될려나….”
고리끼는 남은 돈으로 싸구려 보드카 한병과 밀빵을 사들고 서둘러 집에 들어갔다.
그에게 도시는 농촌보다 살기 힘든 곳이다.
특별한 재주도 없는 그는 하루 하루를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제국군 식당에서 일을 하는 아내마저 없었다면 그는 이번 겨울에 굶어 죽었을 지도 몰랐다.
크레믈린궁 지하실에서는 유럽 정보 책임자들의 간담회를 겸한 회의가 한창 진행중이다.
여기엔 천군부와 천인단 정보부서들의 국장급 인물들이 대거 모여 있었다.
이제 유럽과 터키제국만이 대한제국의 잠재적 적국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정보 수집활동도 그쪽에 치우쳐 있었다.
“한자동맹이 이렇게 맥없이 무릎을 꿇어 버리다니 너무 싱겁게 끝나버렸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몇 년 정도는 유럽에 소용돌이를 만들 줄 알았는데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상선을 모두 연합군에 넘겨버리고 이익금도 다 줘버리다니.
동맹내의 농민들만 죽어 나겠습니다.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르지만.”
누군가가 유럽내 농민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느냐는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켰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 버렸으니, 어쩔 수 없고 북유럽쪽이 잘 해주기만 기다려 봐야지요.
우리의 親舊 발렌슈타인이 아직 까진 잘 하고 있으니까.
이쯤에서 반대쪽에도 힘을 좀 보태줘야 균형이 맞지 않을 까 싶습니다.”
“이미 적당한 인물이 그들을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프랑스의 한 수도원 사제의 이름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우리가 개입되었다는 것은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왕이면 덴마크쪽으로 하지 그랬습니까 ?”
“덴마크는 어차피 끼어 들게 되어 있습니다. 크리스티안 4세나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는
모두 다 독일 땅에 욕심이 많은 인물입니다. “
“구스타프가 제국에게 영토 반환과 함께 불가침조약과 보상금을 요구했다지요 ? “
“그렇습니다. 천인단에서는 보상금을 조금 줘 버리고 조약을 체결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푼돈이 문제가 아니고 발틱 해에 안전한 항구를 건설하는 게 더 시급하니까요.”
“하지만 구스타프가 그런 제의를 해 왔다는 것이 이상하군요. 영토적 야심이 큰 사람이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계륵 같은 존재가 아닐까요?. 민란을 막는데 비용과 군대가 너무 많이 들어가고
앞으로 있을 전쟁도 준비해야 되니까요. 어쩌면 그들에게는 더 이득일 지도 모르죠.”
“ 그럴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발틱 해는 겨울엔 얼어 버려서 군사 항으로 쓰긴 부적절한데
천군부에서 그걸 모를리 없을 테고 하여간 이상하단 말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그동안 벌어진 일들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주고 받았다.
벽난로에는 장작불이 활활 타올라 방 공기를 따뜻하게 유지시켰다.
회의실 벽에 걸려있는 유럽 전도에는 각국의 경계선과 현재의 주요 인사들의 이름이
빼곡히 쓰여져 있었고 간혹 노란색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기도 했는데
노란 동그라미는 스웨덴과 독일에 특히 많았다.
“이만 하시고 본건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천군부와 천인단에서는 아직 해군성의 기지들이
대서양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유럽이 오랫동안 혼란에 빠지길 원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10년동안은 서로 으르렁 거리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점을 잘 양지하시고 세부계획을 각 부서별로 조율 하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우리에게 우호적인 인물을 포섭하는 정책도 병행하시기 바랍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해체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들의 회의를 들었다면 전 유럽이 대한 제국에게 선전포고 할 내용들이 논의되고
실천 방향이 계획되었다. 회의를 마치고 사람들이 회의실을 빠져 나가자 마지막까지 남은 한 사람이
모든 자료를 벽난로에 던져 버렸다. 자료들이 모두 타 재로 변할 때까지 자리를 지키던 그가
불 소시개로 재를 몇 차례 흩트려 버리고는 회의실을 나가자 모닥불이 저절로 꺼졌다.
3950년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에 오르자, 예수회의 교육을 받은 골수 카톨릭교도인 그는
신교도 탄압정책을 강도 높게 진행시켜, 루돌프 2세가 지방 영주, 기사, 도시에게 내린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을 골자로 한 3942년 작성된 칙령서를 파기했다.
일촉 측발의 긴장감이 신교와 구교사이에 감돌고 있을 무렵, 누군가가 페르디난트의 대관을
프라하성 창문에서 떨어뜨린 사건이 발생했다. 그 소식을 접한 페르디난트 2세가 크게 화를 내고
왕권에 도전하는 무리들을 잡아 처형하기 시작했다.
끝내 대관을 떨어뜨린 자를 찾지 못하자 그는 더욱더 잔인하고 혹독하게 신교도 귀족들과 농민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페르디난트 2세의 명령을 받은 발렌슈타인의 용병들은 신교도마을을 불사르고
어린아이까지도 창으로 찔러 죽이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독일 브레멘
“ 더 이상 기다릴수 없습니다. 신교연합이 일어나 구교연맹을 깨뜨려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 신교도들이 구교도들의 창칼아래 신음하도록 방관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린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
신교도 중에서 가장 신망 받는 프파르츠 백작이 신교연합소속 영주들의 설득에 나섰다.
“이미 보헤미아는 피의 보복으로 수만의 보헤미아인들이 죽어가고 있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페르디난트와 싸우고 있습니다. 페르디난트는 조만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라 제국의 모든
영지에서의 신교 탄압을 시작할 것입니다. 더 이상 미루다간 우리 신교도들은 설 땅을 잃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프랑스가 여러분을 돕겠습니다. 물론 스페인이 배후를 노리고 있어서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할 수는 없지만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
라슐리 추기경의 특사 자격으로 참석했다는 한 프랑스인이 거들고 나섰다.
그러자 여기 저기서 프파프츠 백장을 옹호하는 발언이 쏟아졌다.
신교연합인으로서 회의에 참가한 뤼베크는 어디에 붙을 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를 비롯한 대부분의 한자동맹 도시들은 신교도들이나 이번 연합에 참가할 여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구교로 개종할 수 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그는 마침내 중립 선언을 했다.
“저희 한자 동맹은 지금 해체 위기에 몰려 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동맹차원에서의 적극적인 지지를 하지는 못 하겠습니다.
다만 각 도시들이 개별적으로 신교연합군에 참가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
이번 회의의 결과로 신성로마제국내의 신교도 귀족과 보헤미아인 그리고 몇몇 도시들의 개별적인
참여로 신교 연합군이 결성된다. 프파프츠 백작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고 각 세력을 규합하여
페르디난트 2세와 독일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종교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보헤미안 프라하 근교에 있는 바이서베르크에 발렌슈타인이 이끄는 일단의 기병대가 들이닥쳤다.
“한 놈도 남김없이 끌어내라”
기병들이 마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마을을 뒤져 사람들을 마을 공터로 내 몰았다.
일부 병사들은 집안으로 들어가 값이 나갈 물건을 끄집어내 마차에 싣느라 바빴고,
한쪽에서는 여자들을 겁탈했다.
“으흐흐”
카톨릭교도라고 보기에 역겨울 정도의 미소를 띠고 한 병사가 어느 오두막에서 나왔다.
그는 허리춤을 어루만지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병사가 오두막안으로 들어갈 참인지 바지를 반쯤 내리려 했다.
“들어가서 하라고 이번 이교도는 살맛이 그만이야. “
히죽 웃으며 동료를 바라보던 이가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오두막 안은 난장판이었다. 바닥에 누어있던 여자는 자포자치 한 듯 누가 들어오든지
상관하지 않는 듯 했다. 그녀는 알몸으로 바닥에 팽개치듯 누워 있었다.
병사가 서둘러 바지를 내리고 음침한 눈으로 알몸을 감상하더니 서서히 다가가
그녀의 하체에서 흐르고 있는 허멀건 액체를 손으로 찍어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그는 신음 소리를 한번 내고 그대로 여자의 다리를 들고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반응이 없으니 이거 흥이 나지 않는군. 여자 눈을 떠라.”
자기에게 깔린 여자는 나무토막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여자 눈을 뜨라니까.”
병사는 소리를 지르더니 우왁스런 손으로 여자의 얼굴을 때렸다. 입가에 핏줄기가 맺혔다.
여자의 눈이 떠지더니 그녀는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녀의 웃음은 섬뜻한 한기를 내 뿜고 있어서 병사를 저절로 움츠리게 먄들었다.
잠시 기세를 눌린 것이 부끄러워 누가 보고 있지나 않는지 주위를 한번 둘러 보았다.
“그렇지. 그래야 재미가 있…. 으악”
등에 뭐가 박힌 듯 그의 손은 연신 자신의 등을 더듬고 있었으나
여인이 찌른 부러진 책상다리는 손에 닿지 않았다.
그의 비명소리를 듣고 밖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남자를
여자에게서 떼어내곤 창으로 여자의 복부와 가슴을 찔렀다.
그녀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대장님. 마을을 수색중이던 한 병사가 적의 잔당에 등을 찔려 죽었습니다. “
마을에서 약탈한 물목을 읽고 있던 발렌슈타인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용병 한 사람당 꽤 많은 돈을 지불하며 고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자기 몫도 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이런 조그마한 마을 하나를 수색하면서 말이다.
“ 혈채를 받아야겠지. 마을 사람들은 다 모았나. ?”
“ 그렇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늙은이와 애들뿐이라서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무슨 소리. 그 애들이 커서 반역자가 되고, 그 늙은이들이 그 애들에게 우리와 싸우는 방법을
가르칠 것이다. 늙이나 애나 보헤미안 인들은 모조리 죽이던가 잡아 가야 한다. 가자.”
발렌슈타인이 말 허리에 힘을 가하자 말이 터벅터벅 앞으로 나갔다.
그에 맞춰 호위병들이 같이 움직였다. 그들이 도착한 공터는 울음바다였다.
아이들이 울자, 우는 아이들 달래는 여자들도 울고 그저 늙은이들만이 십자가를 만지며
기도를 올리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발렌슈타인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창끝에 찔려 피가 흐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며
차갑게 명령을 내렸다.
“저들의 옷을 모두 벗기고 한쪽으로 끌고 가 모두 죽여라.”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사람들의 옷을 찢어 발겨 삽시간에 모두를 알몸으로 만들었다.
그 중에는 처녀도 있었고 어린여자애도 있었다.
수치심에 온몸을 부르르 떨던 그들은 병사들에게 끌려갔다.
바이서베르크가 고향인 한스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고향으로 향했다.
그의 고향은 프라하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항상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프파프츠의 명령을 받고 프라하를 정탐하기 위해 본대를 떠난 그는 자신의 마을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자 마음이 급해졌다.
“ 대장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입니다.”
“ 그런거 같군. 별일 아니었음 좋겠는데. 자네가 먼저 가서 동정을 살펴보고 오게나
우린 여기서 잠시 주위를 살펴볼 테니. “
“ 알겠습니다. 대장. “
한스의 부대는 대부분 페르디난트의 군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구교도에 대한 증오심이 가장 강했다. 정찰을 간 네로가 한참이 지나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머뭇거리며 뜸을 드렸다.
“ 무슨일이야 ? 네로, 마을엔 별일 없는 거지? “
네로의 표정으로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던 한스는 혹시나 하고 확인을 하고 싶었다.
“ 대장. 바이서베르크는 사라졌습니다. 수백명이 죽은 체 나무에 매달려 있습니다.”
“ 뭐라고 네로. 다시 한번 말해보게 지금 뭐라고 했나. 네로 !”
한스는 네로의 어깨를 흔들며 격렬히 몸을 떨었다.
“ 내 이 놈들을 가만 두지 않겠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구교도 마을이 어디인지 알아봐 “
“ 대장. 우리 임무는 정찰입니다. “
“ 네로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한스는 네로에게 자신의 의견에 동의 할 것인지를 물었다. 네로는 한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대신 부대를 지휘해야 하는 사람이다. 네로 역시 한스의 마음을 이해했다.
“ 가장 가까운 곳은 남쪽으로 3마일 정도 가면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적지 깊숙한 곳이라 자칫 전멸할 수도 있습니다. “
발렌슈타인은 며칠전 바이서베르크에서 잡아온 한 시골처녀를 농락중이었다.
알몸으로 끌려가던 그녀가 자신의 눈에 띤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이처럼 아리따운 여인이 용병들에게 끌려가 실컷 농락당하다 죽었을 지도 몰랐는데,
다행히 하느님이 자신을 어여삐여겨 자신의 눈에 띠게 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요즘이 가장 즐거운 나날들 이었다.
신교도 마을을 약탈하여 모은 재산들로 그동안 들어갔던 비용을 대부분 매워 놓았고.
가끔 이런 즐거운 일도 있었다. 발렌슈타인은 고아로 자라서인지 유난히 여색을 밝혔다.
“발렌슈타인 백작님 안에 계십니까 ? 저 페르난데입니다. “
“ 안됩니다. 그러시면…”
방문앞에서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리더니 페르난데가 갑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침대위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페르난데를 바라보던 발렌슈타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자네 지금 뭐하는 건가 어. 이게 무슨 짓이야.?”
페르난데는 침대위의 요지경에 얼굴을 돌리고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허둥댔다.
뒤쫒아 들어온 시종이 무척 난감해 했다. 어설픈 시간이 흐렸다.
발렌슈타인이 대충 정리를 하고 자리에 앉아 헛기침을 몇 번하고는 분위기를 잡았다.
“ 무슨일인가 ? 그대의 목을 걸만큼 중요한 일이길 바라네.”
페르난데는 발렌슈타인이 고용한 용병들의 대장이고 그가 가장 신임하는 자 이기도 했다.
“ 브라이텐펠트가 신교도들에게 기습을 당해 모든 주민이 몰살당했습니다.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들 모두 알몸으로 창에 찔려 죽었는데 백작님에게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이 일로 페르디난트 2세께서 무척 진노하셨다는 전언입니다.”
“ 부리이텐펠트라면 라이프치히 근처가 아닌가 ? 그곳 수비대는 뭘 하고 있었다는 거야?
추격대는 이미 보냈겠지 페르난데.?”
“ 그렇습니다. “
“그건 그렇고, 무슨 메시지를 남겼다는 건가 ?”
페르난데가 어물쩡 거리자 발렌슈타인이 다시 한번 물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이런 악마 같은 이교도 놈들, 난 급히 국왕을 만나봐야 되겠다.
기병대에 출동대기 명령을 내리고 대기하라고 해. 이번에 완전히 신교도놈들을 끝장내야 되겠어.
기독교인이 유대놈들이 자주 사용한다는 문구를 자신에게 보냈다는 것은
자신들이 이교도임을 인정하는거야.”
“알겠습니다.”
페르난데가 인사를 올리고 뒤돌아서며 침대위에서 백치미를 풍기고 있는 여인을 힐끗 쳐다 보았다.
‘ 대단한 미인이군. 저런 미인을 소유할 수 있다면 아무것도 부럽지 않겠군.’
덴마크 코펜하겐
덴마크 왕 크리스찬 4세는 지금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에 온 신경을 쏟았다.
이미 내전은 구교도의 승리로 굳혀지는 듯 보였다. 군대와 지원에서 쳐지는 신교연합군은
정규전에서 단 한 차례도 이기지 못했고, 프파프츠백작이 이끄는 대규모의 연합군이
바이서베르크에서 패배하여 신교도왕으로 추대된 프리드리히 5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소수의 떠돌이 보병들이만이 각지를 돌며 구교도를 약탈하고 다녔지만,
이는 신교도들의 탄압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빌미만을 제공하곤 하였다.
“ 스코트랜드에 갔던 프란시스코가 돌아왔습니다. 폐하.”
“ 들라해라.”
“ 폐하의 신하 프란시스코. 폐하의 명령을 수행하고 왔사옵니다.”
“ 먼길에 수고가 많았소 프란시스코경. 갔던 일은 어찌 되었소.”
“ 성과가 있었습니다. 저희 신교도를 지원하는 많은 귀족들을 만나고 그들의 후원을 약속 받았습니다.
조만간 그들이 약속한 것을 덴마크로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네덜란드에서도 저희들을 돕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눈치만 보고 있던 놈들이니까. 이제 판만 벌리면 되겠군.
내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야. 우리는 이번 일에 나라의 운명을 걸어야 한다.
위대한 덴마크 왕국에서 떨어져 나간 스웨덴 조차도 저 만큼 커 버렸는데 우린 아직도 그대로야. ”
신교와 구교간의 살육전속에서 페르디난트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3951년 등극하게 되었다.
황제로 등극한 그는 황군을 조직하고 발렌슈타인과 틸리에게 군 통솔권을 주고
발렌슈타인은 내치를, 틸리는 외치를 담당하게 했다.
발렌슈타인의 노골적인 신교도에 대한 탄압은 보헤미아인의 3분의 2이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많은 신교도 독일인들을 유럽전역으로 흩어지게 했다. 고향에서 쫒겨 난 그들은 유럽각지의
신교도 귀족들을 움직여 구교도와 또다른 한판 승부를 하기위해 혼심을 다해 노력했다.
우여골절 끝에 조직된 제 2차 신교도군은 덴마크왕을 총수로 함부르그근처에서
틸리가 이끄는 황군과 대규모 전투를 준비 했다.
대명부 곡부.
명의 산동성의 곡부는 춘추시대 노나라의 도성이며 공자의 고향이다.
그곳에는 공자를 모신북경의 고궁, 태산의 대묘와 더불어 중국 3대 건축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공묘가 있고 그 동쪽에는 공자의 자손들이 살아온 공부가 있다.
공부는 1038년에 세워져 공자의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장원으로 면적은 18만2m에 이르며
방은 463개나 될 정도로 광대하고 화려한 장원이다. 그리고 그 옆으론 공자와 역대 자손이 묻힌
묘소로 담장 둘레만 7.25km로 세계 최대의 씨족 묘지인 공림이 있다.
울창한 떨갈나무 숲으로 유명한 이 숲은 언뜻 보면 거대한 숲처럼 보이고 들어서면 공동묘지 같은
느낌이 든다. 거의 공자의 자손들과 유학에 뜻을 둔 자들만이 기거하던 이 곡부라는 도시에 때아닌
이방인들이 작년부터 오가더니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났다.
공부의 안채에서 기거하던 당대의 문인이며 명의 고관을 지낸 황도주가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황도주는 복건성 출신으로 청렴 ·엄격하기로 유명하였다. 학행이 높고, 문장 ·서화를 잘하였으며,
천문 ·역학에 정통하였다.
“ 먼길 오시느라 고생했습니다. 선사님.”
승복을 입은 고승이 합장을 하며 황도주의 인사를 받았다.
“ 대인께서는 신수가 훤하십니다. 밖에 있는 떡갈나무가 몸에 좋은 모양입니다.”
“ 산수 좋은 곳에서 할일 없이 소일하다 보니 몸이 축날 일이 있나요.
그래 요즘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나 전해주십시오 선사.”
“ 앉아서도 천리를 보시는 분이시라 소승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려.”
“ 하하하 입심은 여전하십니다. “
하녀 하나가 찻잔을 들고 들어왔다. 그들은 잠시 말문을 닫았다.
하녀가 찻잔에 차를 가득 따르고 방을 나서자 선사라 불리는 고승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 산동성주가 잠시 만나자고 하기에 그곳에 들렀던 적이 있었습니다.
성주가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하나 하더군요. “
황도주는 눈을 반짝거렸다.
그가 복건성에 있는 자신의 고향을 버리고 이곳 산동성에 기거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산동성주
때문이다. 산동성주 누영염을 여진족 족장 출신으로 대한제국의 눈에 띄어 산동성주를 맡게 되었다.
대한제국에서는 만주족과 왜귀족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해 산동성을 대부분 그들에게 맡겼다.
그런 성주가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면 무엇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 그래 복명반한이라도 같이 하자고 그러던가요.?”
고승이 눈을 크게 뜨더니 큰소리로 호탕하게 웃었다.
“ 역시 앉아서 천리를 보신다더니. 소승은 아직도 멀었습니다. “
“ 그래 뭐라 하셨습니까 ?”
“ 글세요. 한번 알아 맞춰 보시지요.”
“ 그럴까요. 하지만 영염이란 자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을까요. 지금의 대한제국은 커가는 죽순과
같아서 도저히 그 기세를 누를 수 없을 것 같더군요. 괜한 희생만 날 뿐입니다. “
“ 소승도 그 점을 염려하였지요. 하지만 성주가 그 동안 많은 일을 한 모양입니다.
동조자가 수백만은 될 듯 하더군요. “
“ 수백만이면 뭐 합니까 ? 저들의 군대역시 백만이 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화남지역에서는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듯 합니다.
과거에 저들이 뿌려놓은 씨앗이 이제 결실을 맺고 있는 거지요.
백성의 지지 없이는 어떤 혁명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 하지만 대인. 백련도를 아시는 지요? “
“ 아니 그럼 백련도에서도 이 일에 가담한단 말입니까 ? 어찌 그런일이. “
백련교는 민중에 기반을 둔 불교종파의 하나다. 과거 명의 태조 주원장을 가장 많이 도와주었고
그에 걸맞게 가장 많은 탄압을 받은 단체이기도 하다. 비밀결사형태로 조직되어 있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 명 곳곳에 백련교도가 없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백성들에게 대륙을 지배했던 어떤 왕조보다 너그러웠다.
그런데도 그들이 복명반한의 대열에 낀다는 것이 이상했다.
“ 저도 처음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만, 지금 백련교를 이끌고 있는 왕명이라는 교주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듯 합니다. “
“ 왕명이라면 왕윤의 사촌을 말하는 것인지요.?”
“ 그렇습니다.”
“ 아니 그런 간신 모리배가 어찌 백련교주가 되었단 말입니까 ?”
“ 아마도 산동성주가 뒤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있는 듯 합니다.
거기에 황실 보물들이 쓰여지고 있고요. “
“ 아무리 그렇다고 그래도 대한제국을 누를 만한 힘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더군다나 왕명 같은 간신배와는 한 배를 탈 수가 없습니다.”
“ 대인. 오월동주도 하였는데 왕명이면 어떻습니까.
단지 그의 세력을 이용하고 나중에 견제하면 그 뿐입니다.”
“ 글쎄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도록 하시고, 차가운 곡차라도 한잔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
이런 풀잎차보다야 곡차가 시름을 잊기에는 좋지요 “
“ 곡차 좋지요. 내 어찌 대인의 홍루주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황도주는 고승이 객방으로 떠나자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보기에 이미 대세를 기울고 있었고 명왕조의 회복은 어려워 보였다.
백성들은 이미 대한제국의 여러제도에 익숙해져 있었고 별 어려움 없이
그들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인정하는 듯 보였다. 한족의 정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흥망성쇄가 있듯 언젠가는 대한제국도 힘을 잃을 때가 올 것이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한족이 다시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한족의 정기를 잃어버려서는 안되었다.
백성들을 일깨우고 그들의 마음에 한족의 정기를 간직하도록 하기 위해선 희생이 필요해 보였다.
자신의 한 몸을 희생하여 한족의 정기를 일깨울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니던가 ! 하늘에 떠있는 달만이 자신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지를 밝혀 주고 있었다.
대명부 경찰조직의 총수인 민경헌 총경은 아침 일찍 산서성에서 올라온 일급비밀 보고서를
읽어보고 있었다.
“ 드디어 명 황실의 물건이 나돌아 다닌다 이건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빠르군. ”
민경헌은 보고서에 도장을 내부에 찍고는 특급으로 분류하는 도장을 외부에 다시 찍었다.
그가 특급으로 분류된 서류는 천군부와 천인단에 지급으로 보고되게 되어 있었다.
“ 비서, 특수 3 부장 들어오라고 해. “
“ 네 총경님”
잠시후 특별수사대 3부 부장이 들어왔다.
특수부는 크게 1/2/3/4부로 나뉘어져 있었고 3부는 점령지의 왕족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부서였으며,
1부는 요주의 인물 감시 2부는 일반 사건중에서 특수사건, 4부는 군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 부르셨습니까 ?”
“자네도 알겠지만 산서성에서 명황실 물품의 유통이 확인되었더군. 처음 있는 일이니 잘 조사해 보고.
필요하다면 4부의 협조를 받도록해. “
산서성 보고서는 이미 그에게도 올라와 있어서 출근하자 마자 읽어보았다.
“ 알겠습니다. 하지만 4부의 병력으론 감당하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
“ 그점은 천군부에 건의 하도록 하지. 천군부도 자네들의 보고서를 받아보길 원하네.
받고 싶은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겠지. 3군의 협조를 받으려면 뭔가 확실한 물증이 필요해
물증이 나오면 다시 이야기 하기로 하지.”
“ 그럼 도청 장비라도 지원해 달라고 해 주십시오. “
“ 그러지. 하지만 너무 기대는 말게. 우리에게 그런 고급장비까지 줄 놈들이 아냐.
위험한 물건이거든. 이틀에 한번씩 보고서를 올리도록 하게. 내가 할 말은 다 끝났네.”
특수3부는 지난 십년동안 명황족들의 계보를 추적하고 그들의 자손들을 찾아내 감시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들은 오래 살지 못하고 몇 년 사이에 대부분 죽었다.
일본황족이 멸문되었듯이 명황족도 오래지 않아 멸문될 것 같았다.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 한 자들을 찾아내면 말이다. 그런데 그 단서가 나타난 것이다. 산서성에서.
“ 짐을 꾸려라. 곧 산서성으로 간다. “
허삼수부장이 특수3부의 사무실을 산서성으로 옮겨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장물아비였다.
“ 그러니까, 야귀라는 도둑이 이 물건을 가져와 처분을 부탁했단 말이지.? “
“ 그렇습니다요 나리님. 저 물건이 어떤 물건 인지 알았다면 바로 신고했을 것입니다요.?”
퉁퉁 불어있는 얼굴에 흐르다 멈춘 검은 피가 묻어있는 한 사내가 책상위에 올려져 있는
황금 용이 조각되어있는 제법 커다란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 그 야귀는 어디가면 만날 수 있을까 ?”
“ 그것이 저는 잘 모릅니다. 워낙. 윽”
쇠몽둥이가 날아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등을 때렸다.
“ 잘 생각해봐 그러면 생각날 거야. “
“ 확실하진 않지만 시전뒷골목에 가끔 나타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 그래. 그리고 뭐 다른 거 생각나는 것 없나 ? 이를 테면 저 물건을 어디서 훔쳤다던가.
뭐 그런거 말야. “
한때 산서성의 순무였던 고영상은 대한제국이 명을 정복한 이후로 대한제국의 눈을 피해
장사길에 나섰다. 그는 대한제국이 상권을 차츰차츰 장악해 오고 있던 시기에 산동성 성주의 도움을
받아 산동성과 산서성의 상권을 규합하여 화북지방에서 대한제국의 상인들에 대항했다.
그는 많은 재물을 모아 젊은 인재를 키우고 한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중의 한사람 이다. 그런 그가 요즘은 좌불안석이었다.
“ 아직도 그 물건을 찾지 못 했단 말이냐.?”
고영상이 자신 앞에 부복한 자를 호통치고 있었다.
“ 이미 그 물건은 하북성을 벗어난 듯 합니다. 추적해본 결과 물건은 산서성의 곽궁도라는 사람이
잠시 소유하였다가 야귀라는 자가 물건을 훔쳐낸 것 같습니다만 아직까지 야귀를 찾지 못 했습니다. “
“ 그 야귀라는 자는 어떤자인가 ?”
“ 여러가지 잡기에 능한 자 입니다. 소문에 의하면 백련교도라고도 하고
그냥 백수건달에 도둑놈이라고 합니다. “
고영상은 백련교라는 말에 뭔가가 잡히는 듯 했다. 백련교주 왕명을 따르지 않는 자도 많았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과정에서 생기는 불협화음이 백련교에도 있어서
백련교 본연의 교리로 돌아가려는 원리주위자들이 이번 일에 끼여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일단 너는 이 일에서 손을 떼라 그리고 그 물건을 한 번이라도 본자는 모두 죽여라.”
“ 네 대인. “
허삼수부장이 하북성 석가장에 나타난 것은 그가 산서성에서 꼬박 한달을 야귀 뒤꽁무니만
쫒아다니다가 야귀가 최근 하북성에서 목격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다.
“ 아주 신출귀몰한 놈이야. 이놈을 어디서 잡아야 하나. 아무래도 경찰서의 협조를 얻어야 겠어. “
허부장은 야귀를 찾지 못 하자. 할 수 없이 밤손님을 전담하고 있는 일반 수사관의 협조를 받고자
했다. 이런 일은 그들의 정보망이 더 정확할 지도 몰랐다.
“ 안녕하십니까 ? 전 허삼수라고 합니다. 야귀에 대해서 좀 여쭤 볼 것이 있습니다만. “
허부장이 석가장 경찰서에 들어서자 서장은 허리를 구십도로 꺽으며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서장의 소개를 받아 만난 이 말단 수사관은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 저 같은 말단에게 특수부에서 무슨 볼일 이신지.”
“ 야귀에 대해서 잘 아신다고 들었습니다.”
“ 알긴 잘 알죠. 막가는 도둑놈입니다.”
‘ 그런 놈을 특수부에서 신경쓰다니 특수부도 할일이 없나보군.’
혼잣말인지 들으라고 한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허부장은 새까만 말단 수사관이 자신에게 불경하게
대하는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한족이고 자신은 조선인이었으며, 지방경찰과 특수부는
따로 노는 조직이기 때문에 특수부 요원들은 자신의 조직원이 아니면 항상 존대를 하도록
교육 받고 있었다.
“ 야귀가 이번에 훔치지 말아야 할 것을 훔쳤더군요. “
“ 그 백련교도 같지도 않은 놈이 황제의 속옷이라도 훔쳤나 보군요. 그 빌어먹을 놈.”
“ 속옷이 아니고 만력제의 술잔을 훔쳤더군요. “
만력제란 이름이 튀어나오자 젊은이의 눈이 흔들렸다.
“ 만력제의 술잔을 훔치다니 대단한 놈이지요. 대륙에서 최고를 달리는 도둑이라는 명성이
부끄럽지 않군. 하지만 저 역시 그 놈이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나타나면 알려드리지요.”
“ 꼭 알려주십시오. 그럼 또 뵙죠. 그래도 야귀가 백련교도라는 것을 알았으니
아주 헛걸음은 아니군요”
허부장은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하곤 뒤돌아 섰다.
하지만 그의 눈은 젊은 수사관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3951년(1618) 극동시
극동부는 이땅에 온지 거의 8년만에 동쪽으로의 확장을 시도했다.
그동안 극동사령부가 동진을 자제했던 것은 파나마의 안정을 위한 지원과 해상로 및 육상로의
연결이 중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극동부 동쪽을 지배하고 있는 은하이족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정책에 기인한다.
지난 8년 동안 은하이족과 극동부간에 쌓여진 우호관계를 바탕으로 임동표 소장은
은하이족과 협약을 맺고 극동사령부의 동진을 은하이족의 정식허가를 받아냈다.
“이것으로 대한제국과 은하이족간의 협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임동표소장이 조약서에 서명을 하고 악수를 건네자 은하이 족장이 손을 맞잡았다.
“아들놈이 잘 있는지 걱정입니다. 요즘은 편지도 보내지 않고 있으니
언제 한번 서울에 가보고 싶군요”
열흘이 멀다하고 보내오던 은하이가 벌써 한달째 소식이 없었다.
한글을 모르는 이 늙은 족장은 아들에게서 편지가 오면 어린아이처럼 좋아서
주변에 있는 한글을 깨우친 사람을 닥달하곤 했다.
편지를 읽어주던 사람이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라는 말을 할 때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리곤 답장을 바로 대필해서 보내곤 했다.
“별일 있겠습니까 ? 궁금하시면 제가 한번 연락을 해 볼까요 ?”
임동표소장은 군 직속 통신망을 통하면 며칠 안에 소식을 알아낼 수 있었다.
“아닙니다. 그런 일에 대한 제국의 공공기관을 이용해서야 되겠습니까.
조금 있으면 소식을 전하겠지요”
“그러시지요. 혹 소식이 들어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족장은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하고는 조인식장을 떠났다.
그의 같이 온 소부족장들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극동부 인사들도 서로 악수를 하며 껴안았다.
성대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행해진 조인식과는 좀 어울리지 않게 조약서 내용은 아주 단순했다.
“대한제국와 은하이 및 그 부속 부족은 상호 존중한다.”
라는 문구가 태극문양과 은하이족을 상징하는 붉은 나무 문양 위에 궁서체로 인쇄되어 있었고
왼쪽에는 임동표소장의 서명과 오른쪽에는 은하이족장의 손바닥이 찍혔다.
협약의 내용은 간단했지만 상호 존중이라는 단어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정신 세계를 중시하는 은하이족은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탐사대는 은하이족의 안내를 받아 밑으로 사막을 돌아 록키대간을 넘었다.
탐사대는 대서양까지 횡단하며 곳곳에 흩어져 있을 이 대륙의 실질적인 주인들과
은하이족과 맺은 것과 같은 조약을 체결하길 원했다.
그들이 대대간을 넘기 전 은하이족의 주선으로 호피족, 푸브로족과 상호존중 조약을 맺었고
마지막으로 아파치족과 조약을 맺었다. 아파치족은 대륙 동부와 서부의 원주민족의 중간자적 성격을
띠고 있는 종족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은하이족의 후예임을 의심치 않으며 자신들의 영원한 어머니 대대간 저 편의
종족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다. 그들의 영역은 동쪽으로 대평원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끝났다.
한없이 펼쳐져 있는 대평원은 인류학적으로 다른 원주민들의 소유이다.
그들은 들소를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였고, 정착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들 생황에서 오는 특성상 전투적이고 활동성이 강한 종족으로 아파치족과 부족간 소규모 충돌을이
생기긴 했지만, 워낙 넓은 땅에 비해 인구수가 적었기 때문에 부족간 전면전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한쪽에서 싸움을 걸어오더라도 다른 쪽은 마음만 먹으면 자리를 옮기면 그만 이였다.
탐사대를 대간 동쪽까지 안내한 아파치족의 전사들은 커다란 강줄기가 나오자
뒤 돌아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갔다. 그들 말로는 이 강을 경계로 자신의 땅이 끝난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아주 먼 오랜 옛날부터 강을 건너 동쪽 땅으로 간 자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전설이 아파치족 사이에 전해져 내려와서 아파치족 전사들은 강을 건너길 꺼려했다.
아파치족 전 족장인 제로마미는 평화를 위한 영혼의 안식처에서 명상에 잠겨
자연과 성스러운 대화에 빠져 있다, 희미한 살기를 느끼고 눈을 떴다.
이상한 모양의 하얀 옷을 입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노인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정체불명의 노인에게서는 알 수 없는 평온함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가 느낀 살기는 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주변 계곡 곳곳에서 희미한 실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노인이 자신에게 다가올수록 점점 더 강해졌다.
마치 날카로운 송곳이 자신의 심장과 머리를 겨누어 순식간에 꽤 뚫고 지나갈 것 같은
예리함이 느껴졌다. 거의 수백에서 수천보 떨어져 있는 곳에서 나오는 살기에
제로마미는 마음의 평화가 무너져 내리자 저절로 이마에 주름살이 만들어 졌다.
“안녕하십니까 ? 명상을 하시는 중이신가 본데 방해 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
그 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말이 아니었다.
주위의 살기에 그는 그 노인을 제대로 처다 보기에도 힘겨웠다.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위협은 이제 죽음만을 기다리는 자에게도 공포감을 주었다.
백의 노인이 한 손을 들어 올리자, 주위에서 압박해오던 살기가 점점 사그라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주위 대지는 미약하게 떨고 있었다.
‘도데체 저 노인이 누구이길래 주위가 이렇듯 험악해지는가 ?
아파치족의 성지인 이곳에 이렇듯 거리낌없이 들어오다니.’
제로마미는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었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불쾌감과 공포감이 혼재하여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가 있는 이곳은 오직 신과 대면하려는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아파치족의 성지였다.
그 역시 조만간 죽을 것임을 알고 이곳에 들어와 있었다.
주위는 수억년동안 침강의 역사를 간직한 우뚝선 붉은 바위와 계곡들 그리고 붉은 산으로 채워져
있었다. 푸른 하늘만 빼면 모든 것이 붉은 이곳을 아파치족은 자신들의 영원한 안식처로 믿어왔다.
이제 거의 해가 질 무렵인지 하루를 마감한 태양이 서쪽 하늘에 걸렸다.
붉게 물든 산, 붉은 계곡, 그리고 붉은 하늘, 순식간에 주변의 모든 것들이 붉은 광채로
휘감겨 사람의 마음을 빼앗았다.
“대단하군. 장엄 그 자체야. 어떤 신성한 힘이 깃들어 이런 광경을 연출한단 말인가 ?”
처음으로 맞는 장엄한 석양에 김영철 전천인단장은 매료되어 있었다.
그는 주위의 경호원들을 멀리 떨쳐버리고 싶었으나 앞에 있는 한 원주민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지금 한창 명상중인 것 같았는데 자신 때문에 아무래도 명상에 지장을 입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좀더 일몰을 보고 싶었던 그는 본의 아니게 불청객이 되었다는 마음에
서둘러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노인이 등을 보이며 언덕을 내려가자 주위에서 밀려오던 살기가 점점 사라지더니
아무 느낌도 전해지지 않았다.
제라미미는 주위가 조용해지자 다시 명상에 잠겨 그 노인을 생각했다.
“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또다시 명상을 방해 받은 그는, 멀리 붉은 하늘을 헤치고 붉은 태양을 따라
자신에게 날아오는 물체를 보고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 물체는 점점 다가오더니
자신이 있는 언덕 아래에서 맴돌았다.
허리를 굽혀 밑을 내려다보자, 그가 보았던 하얀 옷의 노인이 날아 다니는 이상한 물체에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하얀 옷의 노인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이상한 물체도 다시 날아올라 태양으로 사라져버렸다.
“누구란 말인가 ?”“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 그는 이상한 노인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자. 자기 부족을 지켜주는 신이라는 단정을 해버렸다.
오히려 그 편이 마음 편했다. 적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이 뭐라고 하셨는데 우매한 내가 알아 듣질 못 했구나 !.”
제마미미의 탄식속에서 태양이 사라지자 땅거미가 내려 않기 시작했다.
“천군부에서 난리입니다. 단장님의 소재가 갑자기 사라져서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습니다.”
“허 참. 무슨 일이 생긴건가 ?
김영철과 극동부에서 나온 장교가 헬기 안에서 고함에 가까운 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보다 못한 부조종사가 여분의 통신기를 그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난 이미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지 않았소. 그런데도 이런 군용 헬기를 이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이거늘. 이제 그만 이 촌로를 가만 놔두시게나. 이미 신임 천인단장도 꽤 경륜이 쌓였을 테니
무슨 문제인가. 그리고 조장관도 그만 이곳으로 오라고 해.
실권도 없는 자리만 차고 않아서 뭐하겠다는 건지. 어련히 알아서 하려구. 참 그 사람도….”
“조장관님이야 원래가 그런 분이 아니십니까. 조선팔도를 떠나기 싫답니다.”
“난 이번에 아주 휼륭한 자연의 조화를 보았다네. 자네들도 같이 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말야.
장엄하고 신비로웠어. 이곳으로 이사와야 되겠다는 생각이 절도 들더라구.
그건 그렇고 날 찾은 이유가 뭔가 ?”
“유럽쪽이 상상했던 것 보다 무척 시끄러운가 봅니다. 그 일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급히 본토로 오시라는 연락입니다. 지금 비행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글쎄 그 일이야 다 처리할 사람이 있고 그런 일이 아닌 것 같군.
그렇게 서두를 일도 아니고 늙은이가 이젠 더 이상 할 일도 할 여력도 없고 말야. “
군용헬기가 비행장에 도착하자 임동표소장이 뛰어 오더니 김영철을 대기하고 있는 비행기로 모셔갔다.
임동표소장이 뭔가 얇은 종이를 건네자 김영철 안색이 변해갔다.
“치우 천황 붕어”
하필이면 전임 천인단장이 극동부에 가 있을 때 치우천황이 붕어하셨다.
치우천황의 붕어소식이 알려지자 전국이 울음바다로 변했다. 차기 황제에 대한 논란도 일어났다.
이름뿐인 천황이었지만 그 상싱적인 면이 조선 백성에게 미치는 힘을 무시 못해서
천인단이나 천군부에서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모든 원로들과 중신들의 협의가 필요한
사항이었으며 가능하면 잡음을 최소화하고 신속히 이루워져야만 했다.
치우천황은 슬하에 6명의 공주와 3명의 왕자를 두었다. 공주들은 대부분 천인단과 천군부 고위급
자제들과 혼인을 하였고, 왕자들 역시 그들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 중 첫째 아들이 이미 황태자로
내정되어 있어서 다음 황제 자리는 그가 맡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그는 마음이 심약하고
몸에 병이 있어 황제의 자리에 오르길 극구 사양했다.
그렇게 되면 둘째와 셋째중 한 사람이 황제에 올라야 하나 아무도 황제에 오르려 하지 않았다.
황제의 상징적인 권력을 빼면 황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황궁에서 죽을 때까지
지내야만 했고, 황제와 관련된 외척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당연히 장인들은 자신의 사위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고,
본인들 또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황제가 되기 보다는 일개 범부로 자유롭게 살고 싶어했다.
황궁에서는 치우 천황의 장례가 한창일 때,
천인단 건물 회의실에서는 천인단과 천군부의 확대 회의가 열렸다.
“이번 기회에 황궁의 일에 적합한 법을 세우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황실은 나라의 안녕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나라가 황제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지금 치우천황의 승하로 온 제국이 술렁거립니다.”
천인단장이 평소의 자기 소신을 내 비쳤다.
과거 같았으면 역적으로 몰려 삼족이 멸하고도 모자랄 발언이지만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대부분의 회의 참석자들이 그의 발언에 공감하고 있었다. 한사람만 빼고 말이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왕자들이 차기 황제에 오르길 꺼려하니,
그에 합당한 대우가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차기 황제를 선출하는데 있어서 계속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황궁부를 책임지고 있는 황궁부 장관이 황궁의 권위에 맞는 대우를 요구하고 나섰다.
“어떤 대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
“이를 테면 정사에 관여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는 다던가 아니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군부 장관이 큰소리로 그의 말문을 막았다.
“그건 아니 될 말입니다. 정사에 관여 하다니요. 황제는 절대로 정사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흔들리면, 이는 우리의 대업도 같이 흔들리는 것이 됩니다.
설마 그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장관.”
“그것이 아니라……”
황궁부 장관은 뭔가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뾰족한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자자. 그만 하십시다. 황궁부 장관의 말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 점을 어느 정도 참작하여 법을 만들어 보도록 합시다.”
여기저기서 그에 대한 발언이 계속되고 있을 즈음 김영철 전 천인단장이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 모두들 반갑게 그를 맞이하고는 자리를 내주었다.
김영철 전 단장은 한참 회의를 지켜본 후 회의가 거의 끝나갈 무렵 발언권을 얻어 한마디를 남겼다.
“황실은 궁극적으로 사라져야 합니다. 지금 당장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황실의 권한을 축소하고 상징적인 의미로 남겨두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황실의 존속을 위한 어떤 조치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 주십시오.
이점을 유념해서 법을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치우천황의 장례를 마치고 한달이나 지나서야 황실을 위한 법이 새로이 제정되어
황궁부에만 통보되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 황제는 대외/대내적으로 국가를 대표한다.
-. 황실의 재정은 국가에서 담당한다.
-. 황제는 면책특권과 특별 사면권을 가진다.
-. 장자가 황위를 계승한다.
-. 장자 유고시 또는 나이가 16세를 넘지 않았을 경우, 직계가족에서 연장자 순으로 황위를 계승한다.
-. 황제의 외척과 황족은 군부를 포함한 모든 관직에 오를 수 없다.
그 외 세세한 많은 것들이 법으로 정해져 황족의 운신을 제한했지만
이 법은 대외적으로 공표하지는 않았다. 혹시 모를 소요를 염려해서다.
이렇게 해서 태조 치우 천황의 장자인 황태자가 예정대로 2대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바로 금강 천황이다.
산동성 공부
“조선의 황제가 죽었군.”
황도주가 무뚝뚝하게 치우 천황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저도 그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치우 천황이란 자가 죽어서, 한성에서는 차기 천황자리 때문에
시끄러웠다는 후문입니다. 오히려 저희들에게는 좋은 소식입니다. 차기 천황이 한족에게 내려졌던
각 성간 이동 제한을 철폐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습니다.”
“그래 적절한 시기에 하늘이 우리를 돕는군. 우리의 거사가 성공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 거야.
그건 그렇고, 산동성에 주둔 중인 황군의 동태는 어떤가. 그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해야만이
우리의 거사가 성공할 수 있을 텐데.”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군의 주력은 대륙에서 점점 빠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러시아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듯 합니다. 산동성은 대명부 직속 경찰병령이
소수 있습니다만 이것도 우려할 일이 아닙니다.
일단 산동성과 산서성의 지방군이 우리와 뜻을 같이 했고, 백련교도가 합세한다면
소규모 경찰정도야 가볍게 제압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우려하는 것은 만주에 주둔 중인 황군이
얼마나 빨리 대응할 것인지와 우리에게 수군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주변성에 주둔중인 황군을 못 움직이게 하는 것도 해결해야 할 난제 입니다.”
무관 출신 답게 고영상은 군의 움직임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 있는 듯 했다.
“괜찮네. 어차피 우리가 이길 수 있는 황군이 아냐. 다만 우리는 우리의 자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기 위해 이 일을 계획한 것이 아닌가 ? 천운이 우리의 손을 들어준다면 혹 이길 수도
있겠거니 하는 실낱 같은 희망을 가지고 말야. 자네는 황군의 무기를 본 적이 있는가 ?”
“없습니다.”
“난 많이 보았지. 경천동지할 무기들이었어. 우리들은 최악의 경우에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할 수도 있겠지. 더불어 죄없는 많은 백성들도 함께…”
극동부 붉은 나무숲 마을
극동부에서는 은하이족을 비롯한 원주민들의 이동생활을 정착생활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그들은 부족국가에서 사회의 발전이 멈춰 있기 때문에 대한 제국의 많은 면들을
이해 하지 못해서 원주민과 극동부와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은하이족은 지나치게 넓은 땅을 자신들의 부족 소유로 하고 있었고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도
강력해서 종종 극동부 정착민들과 마찰을 빚어 왔다.
개인간의 마찰을 해소하고 위험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채택한 정책이 바로 원주민의 정착화와
종족간 결혼 장려책 이었다. 일단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 필요 이상의 땅을 소유할 필요가 없어졌고,
잔여분은 정착민들에게 적절히 분배될 수 있었다. 그렇게 하고도 아직 대륙에는 미 개척지가 많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 정착촌에서 조선장교와 원주민 족장 딸의 결혼식이 열렸다.
이제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줄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춥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함이 될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더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행이 될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두개의 몸이지만
두 사람의 앞에는 오직
하나의 인생만이 있으리라
이제 그대들의 집으로 들어가라
함께있는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 위에서 그대들은
오래도록 행복하리라
결혼 축시를 끝으로 결혼식이 끝나자 마을 전체가 축제분위기에 휩싸여 곳곳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은하이족과 아파치족은 점차적으로 정착생활에 적응 되어 갔다. 이동생활이 몸에 밴 그들이지만,
극동부에서 여러모로 지원을 해주고 있어서 점차적으로 정착촌을 넓혀 나갔다.
그들은 차츰 도시를 형성했고, 인구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겨우 십만을 육박하던 은하이족은 대한제국과 접촉한 이후 인구수가 오만이 늘어나
이젠 십오만이 되었으며, 기타 군소 은하이족 계열의 종족을 합치면 삼십만에 육박하는 숫자였다.
그들은 극동부의 마을이 동부로 이동해 감에 따라 점차적으로 동부로 자신의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다른 종족에 비해 말을 이용한 기술을 빨리 습득한 아파치 족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기동성을 확보하자. 그들은 하루에 백킬로 이상을 돌아다니면서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다.
천군부건물 지하실에서는 원정실장 주재로 유럽 문제에 대한 논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지하실 한 쪽 벽면에는 대형 세계지도가 걸려 있었고, 각군의 배치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전쟁은 앞으로도 수년간은 지속될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는 거의 황폐화 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곳을 터키에서 점령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떤가 그쪽의 상황은 ?”
“터키제국은 그동안 동남아의 향료무역 독점에서 막대한 이윤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유럽원정을 위한 충분한 힘을 비축해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술탄인 무스타파는
오래 살기 힘들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터키제국이 출병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럼 다음 대를 기다려야겠군.”
“지금 터키제국의 정치가 상당히 혼란스럽습니다. 내란으로 번질 우려가 공사로부터
연일 보고 되고 있으며, 운하경비를 위한 추가 병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수에즈 운하건은 해병사령부에게 일임하도록 합시다. 터키 공사에게 대한 제국에게 협조적인
협력자를 만들 수 있는지 문의 해 보십시오. 답변을 들은 후 그 점은 다시 논의 하도록 합시다.
삼사년후면 수에즈운하가 개통될 것입니다. 그전에 우린 유럽에 해군기지를 보유해야만 하는데
아무래도 좋은 지역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지도상으론 이곳이 가장 좋은데 그곳에 우리 기지를 세우게 되면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가만있지
않을 거고, 너무 본토와 떨어져 있어서 방어하기에도 힘듭니다.
그가 지목한 곳은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지브랄타 해협이였으나,
그곳은 유럽 두 강대국의 바로 코 밑이여서 방어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못 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지금당장 그곳에 기지를 건설하고 함대를
주둔시킨다는 것은 너무 위험부담이 큽니다. 일단 이곳에서 그곳까지 항해시간이 자그마치 두달이나
걸립니다. 중간에 기항할 곳도 없고 유럽 함대와 조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수에즈 운하가 건설될때까지 기다리자는 말씀입니까 ?”
“그렇습니다. 그보단 북극해를 관통하여 우리 함대를 발틱으로 보내 놓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이미 스웨덴에서 반환 받은 옛 러시아땅에 기지가 건설 중에 있습니다.
기지 준공에 맞추어 보스토치니 함대를 그곳으로 이동배치 했으면 합니다. 아울러 파나마 운하가
완공되면 점차로 아프리카 서안까지 태평양 함대의 활동영역을 넓힐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렇게 합시다. 아직 해병대의 완편이 이루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많은 해외기지는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수 년동안은 외교부와 협력해서 유럽 지식인을
포섭하는 일에 전념하도록 하십시오. 필요하면 이곳에 초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요.”
3952년(1619)
산동성 성주가 머무는 관가는 철통 같은 경비로 언제나 삼엄했다.
사방이 어둠으로 뒤덮혀 있을 늦은 시각에 문틈으로 새어 나온 불빛들이 마당에서 아른 거렸다.
“드디어 우리가 기다리던 한족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군. 일단은 주요 길목의 검문소는 그대로 유지하고 나머지들은 다 치우도록 하게.
조만간 우리들의 일을 시작하도록 하지. 하지만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게.
저들은 이번 기회를 이용할 지도 모르니. 전국의 백련교도들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하게.
산동비둘기는 중추절에 날아간다고.”
“알겠습니다.”
소근거리던 그들의 말이 어느 한 순간 딱 멈추더니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안가에 모든 불이 꺼지고 적막감이 주변을 휘감았다. 방안에 또 다른 출구가 있는지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도 방안에는 성주 혼자만이 잠자리에 들었다.
허삼수부장은 지난 몇 년동안 술잔의 출처를 밝히지 못하고 전 대륙을 떠돌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가 찾아낸 것이라곤 백련교가 이번 일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전부였고,
몇몇 백련교도를 통해 교주가 왕명이라는 것을 알아냈을 뿐이다.
그가 뭔가 중요한 지점에 다가가기만 하면 언제나 알 수 없는 힘에 막혀 버리곤 했다.
특수3부 요원이 산서성에서 백련교와 관련 있는 중요 인물을 탐문하기 시작한 것도 벌써 몇 개월째다.
허부상이 서있는 집은 거상 고영상이 기거하기에 손색이 없는 규모를 자랑했다.
“고영상이란 자는 어떤 자인가 ?“
허부장이 묻자 1부에서 지원나온 한 직원이 대답했다.
“과거 산서성의 순무를 지낸 자입니다. 지금은 상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제법 많은 돈을 번 것으로
추측됩니다. 산서성과 산동성 하북성에 이곳과 같은 저택을 소유하고 있고 발이 꽤 넓어서
주변에 늘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근래에 산동성 성주와 만나는 것이 자주 목격되었습니다.”
“장사치란 말이지. 지금은 산동성 성주와 자주 만난다. 냄새가 많이 나는군.
어디 한번 들어가 볼까. 만나보면 뭔가 감이 잡히겠지.”
고영상은 집사가 가져온 전갈을 받고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지금 문밖에는 특수부 요원들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와 있다는 것인데 만날 수도 안 만날 수도 없었다.
일을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발각된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일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버렸다. 일단 만나서 저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미리 대비하고 있는 곳에 허무하게 죽으러 갈 수는 없었다.
“들어오시라고 해라. 손님방에 모시도록.”
“네 대인.”
정갈한 손님방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소박하게 꾸며져 있었다.
왼편에는 작은 다탁이 놓여져 있었고 침목이 아랫목에 이불 위에 놓여져 있었다.
방바닥은 깨끗하게 훔쳐져 있어 먼지 하나 없었다.
“초면에 이렇게 환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대인.”
허삼수는 눈을 고영상의 눈에서 떼지 않고 입술을 놀려 인사를 했다.
“바쁘신 분들이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
“이곳이 누추하다면, 제 집은 개집이겠습니다. 대인”
허삼수의 독설에 고영상이 얼굴을 찌푸렸다.
“대인은 과거 순무라는 관직을 맡으셨다는데 부정축제를 많이 하신 듯 합니다.
이렇듯 잘먹고 잘 사니 말입니다. “
“허허허. 그거야 치우천황과 금강천황의 따스한 보살핌으로 저희 같은 필부가 호의호식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제가 어찌 사나 보러 오신 것을 아닐테고?”
고영상은 이쯤해서 허삼수의 기를 눌러야 겠다는 생각에 조선의 천황을 들먹였다.
“그렇지요. 전 요즘 한 도둑놈을 찾고 있는데 혹 대인께서 알고 계시는지 그것을 알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저 같은 장사치와 도둑은 상극이라 서로 가까이 하질 않습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래서 더욱더 서로에 대해 잘 알지 않겠습니까 ?
서로 상극이니 알아야 잘 피하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
“그런가요. 그럼 어디 어떤 도둑놈인지 들어나 봅시다.“
고영상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도둑놈이란 말에 힘을 주었다.
살짝 얼굴을 찌푸린 허삼수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야귀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야귀라. 야귀라. 아 그 야귀놈. 들어보긴 했죠. 귀신 같은 놈이라지요.
당대 최고의 도둑이라더군요. 근데 그놈이 특수부가 관심 갖을 일을 벌였나요?”
“그렇습니다. 이걸 보시지요.”
그러면서 허부장은 가져온 보자기를 풀었다. 여전히 그의 눈은 고영상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탁에 올려진 물건을 보았을 때의 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는 안간힘을 썼다.
다탁에 올려진 것은 명황제의 보물이었다. 이것은 주원장이 죽기 전에 후손들을 위해 명인에게
명하여 만든 물건이었고, 명 황제는 황실에 경사가 있을 때마다 이 잔을 꺼내 전시하곤 했다.
잔을 바라보던 고영상의 눈은 고요하기만 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
“아니 고대인은 이것이 무엇인 줄 모르십니까 ?”
“잘 모르겠는데. 금으로 만든 술잔이지만 너무 커서 사용하기에 불편하겠군요.”
“그렇지요. 그 야귀라는 놈이 이걸 곽궁도에게서 훔쳐서 누군가에게 팔았지요.
그것이 다시 누군가가 훔쳐서 장물로 내놓았다가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혹 이 물건이 이 집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까 ?”
“저는 처음 보는 물건입니다. 저를 찾아오신 용건이 그것이라면 저는 이만 물러날 까 합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요.”
“그렇습니까. 어쨓든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 둘러보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저희 집사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
허부장과 헤어진 고영상은 서너시간 시간이 흐른 후 집사를 불러 드렸다.
“그들은 갔는가 ? 집사.”
“그렇습니다 대인”
“뭐 특별한 점은 없었겠지.?”
“네 대인. 그냥 집 주위를 한바퀴 둘러보고는 아무 말없이 나갔습니다.”
“알고 온 것인지 모르고 온 것인지 감이 잡히질 않는군. 산동비둘기가 날아오르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는데 벌써 이곳까지 왔다는 건 불길하군. 연결고리를 다 끊어버렸는데도 말야.
대단한 놈들이야. 저들이 저 물건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토록 우리가 찾아 헤매도 알 수가 없었군.”
허부장은 산서성에 있는 경찰청에 돌아온 후 아무도 만나지 않은 체 생각에 잠겼다.
몇 시간을 고심한 끝에 그는 대명부 경찰총경 직통전화에 전화를 걸었다.
잠시후 총경비서가 전화를 총경에게 연결시켰다.
“고생이 많구만 허부장.”
“아직까지 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괜찮네. 그래 무슨 소식이라도 있는 건가 ?”
“아무래도 이번 일은 상당히 복잡한 것 같습니다. 의외로 연결고리가 너무도 많습니다.
거대한 코끼리의 허벅지를 더듬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최고라고 자부하는 허부장의 입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는가 ? 요즘 힘이 많이 들었나 보군.
잠시 휴가를 다녀오는게 어떤가.”
“아닙니다. 총경님. 사건을 빨리 해결하고 쉬겠습니다.”
“그래 좋을대로 하게. 그런데 뭐가 필요한가 ?”
“아무래도 고영삼을 도청해야겠습니다.
그는 이번 일에 깊숙히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한참 뜸을 들인 총경이 전화기 저편에서 다시 말을 해왔다.
“증거는 있나. 증거가 없으면 천군부에서 승인이 나지 않을 텐데.
고영상은 요주의 인물이야 아마도 천군부에서 24시간 감시하고 있을 텐데”
“그건 총경님께서 힘 좀 써 주십시오. 요즘 이상하게 천군부나 천인단에서는 한족에게
필요이상으로 많은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아직은 저들을 믿을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내 권한 밖이야.”
“왜 그러십니까. 총경님. 이번 한번만 좀 어떻게 해보세요.
천군부에 후배들 많잖아요. 네 총경님.”
그는 걸맞지 않게 총경에게 어린아이처럼 떼를 썼다.
그의 직감은 이번에 뭔가 큰일이 물려올 것이란 걸 말하고 있어서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순무를 지낸 자가 황제의 술잔을 몰라본다는 것은 말도 안되었다.
그가 황제의 술잔을 볼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거짓말을 했다.
중추절 천불사
산동성 성도 제남에서 동남쪽으로 2.5km 거리에 있으며 높이는 284m에 불과하지만
울창한 숲과 화초가 일구어낸 자연미와 정자누각 등의 인공미가 어우러져 경치가 아름다운
천불산에 암벽에 많은 불상을 새기고 세운 천불사가 있다.
산에 올라서면 멀리는 유유하게 흐르는 황하, 가까이는 제남성 전체가 바라다 보인다.
오늘이 중추절이라 그런지 유독 천불사에 사람이 많았다.
“몇시간 안 남았군 ! 진인사 대천명이라. 하늘의 뜻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가 ?”
“그러하옵니다. 주군. 몇 시간만 있으면 군사들이 움직일 것입니다.
계획대로 모든 것이 이행되고 있사오니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그렇겠지. 적어도 산동성은 장악할 수 있을 거야. 그 이후가 문제지.
과연 한족들은 어느편에 설 것인가 ? “
성내 곳곳에서 불꽃놀이를 하는지 옹기종기 불꽃들이 모여서 타오르다 사라졌다가는 다시 피어 올랐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해요~~~^~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