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동장 울타리에 흐드러지게 피인 벚꽃의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뒤에 올 잎새를 위해 천길 낭떠러지로 낙하하는 꽃잎의 모습을 보고 저는 숭고한 희생정신 하나를 배웠습니다. 저역시 한 알의 밀 알이 되겠노라 수없이 다짐하고 올곧이 걸어온 이 길입니다.
제가 교직에 발을 들여놓은지 어느덧 20년이 다가옵니다. 82년 6월 육군 대위로 제대한 저는 회사를 잠시 다니다 다음해 3월 의정부 경민학원에 여상으로 첫 발령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체육 교사로서 교외지도 육상부 감독 행사계 등 저에게 부여된 일이 너무 과중되었습니다.
여상이라 학급당 체육시간이 일주일에 1시간이었습니다. 체육교사 혼자서 주당 24시간의 수업과 야간산업체 특별학급의 수업까지 담당했습니다. 봄가을 두번의 체육대회와 체력장 신체검사 등 부담되는 행사를 치룰 때마다 정말 힘겨웠습니다. 특히 육상부 지도를 위해 저는 방학까지도 반납해야 했습니다. 그당시 저는 대한민국 모든 교사가 조국을 위해 저처럼 고생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해가 바뀌고 새학기가 시작이 되면 저는 올해도 죽었구나 하는 소리가 제 입에서 절로 나왔습니다. 교사는 그렇듯 학생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사람으로 알고 운명에 순응했습니다.
88년 3월 저는 모범교사라는 이사장님의 표창을 받고 그 학원 안에 있는 중학교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중학교에는 체육교사가 저를 포함해 4명이 근무했습니다. 체육교사 4명이 서로 업무를 나누어 가짐으로 하여 저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유 소년 시절에 제게 네 얼굴을 나이 40에 책임져라 한 링컨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저도 몇 년 뒤에는 필연적으로 불혹의 나이를 맞이 한다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그 조여드는 듯한 압박감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한편 두편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92년 1월 중풍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너무 그립고 보고싶어 어머니 나의 어머니라는 제목의 첫시집을 필두로 94년 9월 노을은 구름을 물들이며 진다 까지 5권의 시집을 발간하였습니다.
94년 새학기가 시작되기 전 봄방학을 맞이하여 저는 저의 가족을 데리고 강화도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가에 애기봉이라는 팻말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급하게 방향을 틀어 그곳으로 갔습니다. 애기봉은 나즈막한 산 봉우리였습니다. 저는 무심히 흐르는 강물과 손에 다을듯한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분단의 고통을 실감했습니다. 가족과 더불어 주위를 둘러보는 가운데 커다란 돌에 새겨진 시 한편을 무심코 읽게 되었습니다.
병자호란 때 한 여인이 북으로 끌려간 지아비를 애태우며 그리워하다 그 산봉우리에 쓰러져 생명을 잃었다는 한편의 서정시였습니다. 그 시를 읽는 순간 저는 심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저는 교사로서 조국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사실 목숨은 걸지 않았습니다. 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을 생각하니 부끄럽기 그지없어 더 이상 제 삶을 지속해야 할 가치가 없었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산봉우리를 내려와 다시 강화도로 향하면서 저는 아내에게 며칠 뒤 새학기가 시작되면 저를 한시간 일찍 출근을 시켜주었으면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모처럼 봄바람에 취해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아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즈음 교직을 계속할 것이냐 그만 둘 것이냐를 놓고 무척이나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근심스런 아내의 질문에 저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일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두 아이의 가장으로서 10여년 다닌 직장을 그만두려고 할 때의 저의 참담한 심정은 누구도 같이 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필연적으로 새 학기는 시작되었고 한 시간 일찍 출근 해 보니 서너분이 이미 나와 업무를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며칠 동안 어떤 선생님이 가장 먼저 출근하는가를 살폈습니다. 누구인가 궁금했는데 바로 이순을 눈 앞에 두고 계신 교감 선생님이셨습니다. 저는 젊은 교사로서 송구스러움이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애기봉에서의 각오를 다짐해야 했습니다.
자유론과 부인론을 쓴 J. S 밀의 살찐 돼지보다는 야윈 소크라테스를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눈덮인 산 정상에 올라가 굶어서 얼어죽은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불꽃처럼 떠올랐습니다. 교사의 생애는 먼훗날 자신의 두손 위에 비록 무의미한 것들이 흩날릴 지라도 학생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시는 교감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저는 출근시간을 6시로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의정부 지역은 광범위 하여 먼곳에서 통학하는 학생이 마을에서 첫차를 타지 않으면 차시간 간격이 길어 그 다음 차를 타고 오면 지각을 한다는 겁니다. 집이 먼 학생일수록 이른 아침부터 등교해 현관 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선생님을 애타게 기다려야 했습니다. 선생님의 출근시간이 늦어질수록 학생들은 추위에 움츠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선생님이 수위실에서 열쇠를 가져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추위에 떨고 있을 학생들을 생각하니 정말로 측은하고 안쓰러웠습니다. 그 날 이후 제가 일찍이 학교를 가야 한다는 사명감에 저는 도무지 깊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후 저는 학교에 학생 한명이 있어도 교사 한 명이 필히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동트기 전에 출근하여 문을 열고 학생들을 교실로 들여보낸 후 저는 온수통을 들고 교사들이 마실 물을 떠오고 학교 주변의 널려있는 휴지를 주웠습니다. 8시가 되면 3학년 보충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1.2학년 교실 복도를 오가며 자율학습을 위해 조용히 시켰습니다. 그 학원은 예수를 따라가자 라는 표어 아래 일주일에 한 번은 교직원 전체가 모여 예배를 보았습니다. 저는 수업 시간마다 끝나는 1분을 기도의 시간으로 정하고 학생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의아해 하며 장난치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얼마 뒤 자신을 위해 선생님이 기도해 준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제가 기도하자면 잘 따라 주었습니다.
95년 3월이었습니다. 교과서 채택은 부정의 온상이 듯 파렴치한 범주를 이미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교무 부장이 체육과 주임인 저에게 몇 번을 선택하라는 지시를 했고 교장 선생님의 주도하에 열린 협의회는 형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만의 하나 몇 번을 선정하라고 지시했는데 이행하지 않는 과목의 교사에게는 다시 쓰라고 하는 강요가 있었습니다.
그렇듯 교과서는 채택이 되었고 부정으로 채택된 회사에서 얼마의 돈이 내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어과 등 몇 개 과의 일백여만원씩 지불이 되어 영어과 주임이 정직한 김 교사에게도 20만원을 건네주었던 것입니다. 평소에 김 교사는 신앙을 모토로 학생들에게 양심을 부르짖는 교사였으므로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20만원의 돈은 그의 가슴을 떨리게 하였고 며칠 동안 고민하게 하였습니다.
여러 날 고심 끝에 결단을 내린 김 교사는 교장 선생님을 찾아 뵙고 돈의 출처에 대해 이유를 물었으나 답변이 확연치 않았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김 교사에게 정히 부담스러우면 영어과의 보충자료라도 구입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김 교사는 선생님들 대다수에게 20만원씩 지불된 돈을 회수해 결손가정으로 하여 불우해진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사용했으면 한다고 제의했습니다. 김 교사의 말을 들은 교장선생님은 굳이 그럴 필요없다 하시며 김 교사를 설득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교장실에서 나온 김 교사는 같은 과 교사들에게 돈을 회수했습니다. 급기야 1백20만원을 교과서가 채택되었다고 거액의 돈을 학교에 건네 준 서적사장을 만나 부정한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돌려주었던 겁니다. 그러자 교장선생님이하 돈을 받은 교사들은 김 교사를 부적응자 광신도라며 정신병자 취급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여러 명이 한 사람을 침몰시키려는 잔인함을 슬프게 보았습니다. 정신이 멀쩡한 사람도 주위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 부치면 자기 스스로 혼란에 빠져 당황하는 경우가 흔히 있지만 그 와중에서 김 교사는 용케도 두터운 신앙심으로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교감선생님이 김 교사를 휴게실로 부르시더니 당신 나이가 몇이냐. 내 나이가 몇인데 내 아들 같은 사람이 왜 그 모양이냐. 옆에 놓인 벽돌을 가리키며 성질 나는 대로하자면 김 선생의 머리를 찍어 버리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김 교사는 더 이상 학교에서 설자리가 없을 만큼 고독한 존재로 소외되고 있었습니다. 과연 김 교사는 조직으로부터 낙오되어야 하는가. 그래도 정직을 우선으로 하여 학생들 앞에 떳떳한 교사로 남고 싶어 자신에게 불의한 돈이 지급되자 그것을 거부한 의로운 교사였습니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모든 교사로부터 곤욕스럽게 소외되는 모습을 투명하게 바라보고 있는 저로서는 의로운 자를 돕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순간 성서에 기록된 강도 만난 자의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모든 이들이 외면하고 돌아서는데 착한 사마리아인이 그를 주막으로 데리고 가 치료해 주고 나머지 치료비까지도 지불해 주겠다는 성서의 말씀이 저의 머리를 스쳤습니다. 왜 사람들은 정직한 사람을 속으로는 인정하면서 겉으로는 회피하는 것일까 에 대해서 저는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자기 자신의 신변에 이상이 있을까 두려워 정직하고자 하는 의지마저 움츠리게 하는 듯 하였습니다. 김 교사는 교사로서 자신의 생각이 정녕코 올바른데 주위에서 명색이 교사라는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질책하며 뒤에서 빈정거리는 모습을 보고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과서 비리 사건으로 하여 학교는 긴장을 하였고 정직한 김 교사를 제거하려고 어찌나 갖은 음모를 꾸며대는지 저는 더 이상 침묵할 수가 없어 하나님을 부르짖는 이 사장님께 편지를 드렸습니다. 편지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교감 선생님과 서적 사장과의 교과서 채택과정에서 은밀한 관계와 교사들에게 지불된 돈의 내역을 설명하고 누가 잘하고 누가 잘못했는가를 하나님의 공의로운 말씀으로 판단하시어 시비를 가려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제 편지를 받아보신 이 사장님은 즉시로 협의회 회장을 불렀고 즉시 사건 경위에 대해 파악해 보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일들이 눈에 띄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늦은 밤 여중에 어느 부장이 저에게 전화를 걸어 김 선생은 어쩌자고 이사장님께 그런 편지를 써서 보냈느냐며 책망을 한 후 앞으로 400여명의 교직원의 눈총을 어찌 받으며 살라고 하느냐고 협박성 발언을 하였습니다.
교과서에 대한 사건은 7주간이나 이어졌고 마무리를 해야 할 즈음 7인의 징계위원회에서 저에 대한 신문이었습니다. 교장 선생님 위주로 편성된 위원회에 불려간다는 것은 가슴이 떨리고 두려운 일이지만 저는 오히려 결의에 찬 눈빛으로 7주간이나 끌어 온 지루한 논쟁을 종결시키려 그 자리에서야 했습니다. 무슨 이유로 제가 그 자리에서야 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갑니다. 저를 불러 세운 그 분들의 속셈은 하나님만 아실 겁니다. 정직한 김 교사와 저를 매장시키려 했는지 아니면 김 교사를 부적응자라며 소외시킨 교사들에게 경종을 울리려 한 것인지 그 순간까지 미로를 보는 것 같이 아득하기만 하였습니다.
저는 7인의 징계위원회에서 참석한 위원들에게 먼저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거대한 바다가 썩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약 10초가 흘렀어도 답변하시는 분이 없어 정적을 깨고 그럼 제가 답을 올리겠습니다. 바다가 썩지 않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소금 때문이라고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고여있는 물은 언제라도 썩게 마련이고 썩지 않으려면 부단히 움직여야 하는데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역할은 바람이 합니다.
이번 교과서 채택과정에서의 김 교사의 정직한 행동은 바로 이 학원을 썩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부정한 돈을 서적사장에게 되돌려주었습니다. 김 교사의 중대한 결단이야말로 교육계의 신선한 바람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주위에 온갖 눈총을 받아가며 김 교사의 편에서야 했고 지금 이 자리에서 신문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 명의 교사들이 김 교사에게 한 말들을 부연해 말씀드리자면 당신은 부적응자다 광신도다 정신이 돈 사람이다 지금 당신의 행동이 진정 하나님의 뜻이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아니냐.
특히 그를 도와야 할 목사까지도 구약시대의 선각자가 있었지만 올바른 소리를 하다가 모두 죽지 않았느냐며 회유와 협박을 하였습니다. 예수를 따라가자 라며 부르짖는 이 학원이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김 교사의 고통을 보고 도저히 묵인할 수 없어 그를 데리고 오산리 기도원에 가서 그와 더불어 밤 지새우며 기도를 했습니다. 이 학원이 기독교적 신앙을 중심으로 예수를 따라가자 하였기에 저는 위기에 처한 김 교사를 데리고 하나님께 기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7인의 징계위원회에서 저의 발언이 있은 후 3일 뒤 여중과 남중 교감 선생님 두 분이 정직 3개월이라는 징계를 받고 교과서 비리 사건은 종결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97년 3월 저는 그곳 사립학교를 떠나 공립인 고양시 화정 중학교로 전출을 명 받았습니다. 그해 6월 매일 신문사와 보훈처가 주관 한 제 1회 호국문예가 있다는 관보를 보고 저는 애기봉에서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응모했는데 그 곳에서 저에게 수필부문에 당선되었다고 통보하였습니다. 며칠 뒤 저는 매일 신문사 사장님이 수여하는 장려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전임 학교에서 했던 것처럼 이른 아침 출근하여 휴지를 줍고 기름걸레로 복도를 밀었습니다. 그 다음 해에 저는 체육 부장에서 환경 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에 따라서 환경에 대한 글짓기 공문을 받아 보아야 했습니다. 글짓기 공문을 보고 저는 문학적 소질이 있는 학생을 찾았습니다. 최 안나 등 몇 명의 학생을 집중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그 학생들은 글짓기 대회에 응모하여 여러 번에 걸쳐 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가장 저를 기쁘게 한 글짓기 공모는 교육부에서 주최한 고마우신 선생님 체험 수기에서 최안나 학생이 의롭고 참된 삶을 가르치시는 우리 선생님이란 제목으로 입선하여 2000년 9월 교육부 장관 상을 받았습니다. 그 학생이 쓴 수기는 바로 저에 대한 모습을 면밀히 관찰해서 쓴 글이라 저는 내심으로 무한한 영광을 누렸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제게 있어 또 다른 행운은 제2건국위원회에서 1999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신지식인으로 선정해 준겁니다. 제가 건국위로부터 신지식인이 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저는 동명 2인일 거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궁금하여 다시 문의해 본 결과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추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의구심이 들어 확인해 보았더니 제가 어딘가에 공모한 한송이 들꽃을 피우기 위해 라는 글로 인하여 신지식인이 되었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글쓰는 분들 중에는 저보다 빛나는 이름을 갖고 계신 분들이 별처럼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신지식인으로 선정해 주었다니 제가 정말로 신지식을 갖추었는지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체육교사로서 타 과목 교사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방학 중에도 도서관에 가서 책과 더불어 지냈던 건 사실입니다. 아름다운 시 한편을 쓰려고 무던히 골몰했습니다. 그러나 저같이 무지한 사람을 나의 조국이 신지식인이란 칭호를 가슴에 달아주니 저는 그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작년 가을 시와 시인 협회에서 한 하운 문학상을 공모한다고 해서 저의 시 20여편을 보냈습니다. 뜻밖에도 제게 당선 통보가 전해 온 것입니다. 2001년 3월 김포 시민회관에서 신세훈 한국문인협회장이 직접 수여하는 문학상을 받고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저는 지난해 11월 고양시에서 포천군으로 내신을 내었습니다. 순박한 시골 학생들과 같이 생활하고픈 마음에서 쉽게 결정했습니다. 2001년 3월 다행히도 제가 바라던 내촌중학교로 전출을 명 받아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현재 관사에서 몇 분의 동료 교사와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 때묻지 않은 학생들을 제가 오염시키면 어쩌나 하고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내촌중학교 학생들의 가장 순수한 모습은 선생님을 보면 어디서나 반갑게 인사를 한다는 겁니다.
한번만 더 지난날을 돌이켜 보겠습니다. 제가 교직에 머물면서 솔직히 얻은 것 보다는 잃은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지각 결근 조퇴 연가 병가를 모르고 오직 학생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저에게 있어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상처 하나를 꺼내어 보여드리겠습니다. 몇 해 전 일입니다. 작은 어머니가 운명하셨다는 연락을 받고 6촌 형을 만나 서울역으로 향했습니다. 장지가 충남 광천이라 홍성행 기차표를 끊어 놓고 의구심이 생겨 철도 직원에게 내일 새벽 홍성에서 첫차가 몇 시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직원이 말하길 대천에서 오는 기차가 홍성에 6시쯤 도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두말 않고 제 표를 환불하였습니다. 제 도발적인 행동에 망연함을 느낀 6촌형에게 저는 학생들을 위해 늦어도 6시30분에는 출근해 있어야 합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뒤돌아 서야 했습니다. 오늘 5월 12일 토요일 저를 보살펴 주신 5촌 아저씨의 아들 저의 6촌 동생의 결혼식 날입니다. 차마 연가를 낼 수 없어 지금 교무실에 홀로 앉아 글을 쓰면서 친척들의 얼굴을 그려봅니다. 저는 현재까지 교직에 머물며 제게 부여된 사명을 다하는 과정에서 친척들로 부터 소외될 수 밖에 없었고 친구들도 서서히 저를 멀리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낌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작년 1월 작가 성 석제가 동아일보에 기재한 홀로 독하게라는 글을 보고 저의 삶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인식했습니다. 그 내용을 조금 피력하자면 신념이 있는 자는 갈 때까지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독하지 않으면 영웅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처와 자식의 머리를 베고 황산벌 전투에 나서는 계백의 독한 의지와 애마의 머리를 단칼에 쳐버리고 냉정히 돌아서야 했던 김유신의 강인한 정신 이 숭고하리만치 처절한 현장을 보고 작가는 독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글로 표현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며 저역시 유소년 시절에 그 분들의 강직함을 가슴 속에 새겼기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이곳 포천군에 내신을 내어 온 것도 힘겨워 하는 아내에게 더이상 피해를 줄 수 없다는 특단의 조치였습니다. 이제 글을 마치며 저의 시 한편을 올리겠습니다.
오후
주저앉아 절망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내 곁을 떠나갔고
울타리 곁에 쓸쓸히 서서
안타까움 손 흔들어 달랬어
타인들은 높은 곳에서 웃는데
나는 땅바닥을 기어다니며
일어설 수 없는 몸짓으로
애원하며 숨쉬고 있었어
아직은 시력을 잃을 나이가 아닌데
세상은 너무 흐려 보였고
티없이 맑은 애였을 때
지구를 떠나갔어야 옳았어
지금 떠나가기엔 내 마음이
몹시도 혼탁해져 있음에
조금은 더 살아야 하겠어
속죄하는 심정으로 말이야
저는 현재 내촌중학교 교사입니다. 이곳을 저의 마지막 무덤으로 여기고 혼신의 힘 다하여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투신할 것을 약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