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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를 소개하는 사람들 10:17~23
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밖에 서서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23 베드로가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이방인의 집에 들어간 베드로 10:24~33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30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구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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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아오자, 베드로는 성령의 말씀대로 그들과 함께 갑니다. 절하려는 고넬료를 베드로가 말리며, 이방인과의 교제는 위법이지만 하나님의 지시로 자신이 왔다고 밝힙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청한 이유를 설명하고,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것을 듣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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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를 소개하는 사람들 10:17~23
하나님은 때에 맞춰 그분의 일을 진행하십니다. 베드로가 환상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의아해할 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합니다. 베드로는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20절)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그에 대해 소개하기를,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며, 유대 사람이 칭찬하는 자’라고 합니다. 고넬료는 선한 인품으로 좋은 평판을 받는 이방인입니다. 성령의 지시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통해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가는 것이 하나님 뜻임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정하신 때에 정하신 방법으로 그분의 일을 이루시며, 의심하는 마음에 확신을 심어 주십니다.
● 더 깊은 묵상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위해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셨나요?
의심이 생길 때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어떻게 분별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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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집에 들어간 베드로 10:24~33
당시 유대인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교제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해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갑니다. 그는 유대인의 금기를 깨뜨리고 비난과 위협을 무릅쓴 채 고넬료 집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는 이방인 선교 사역의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고넬료는 그 자리에 여러 사람을 초청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고넬료는 나흘 전 경험한 환상을 언급합니다(10:3~6). 그리고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명하신 ‘모든 것(말씀)’을 듣고자 ‘하나님 앞에’ 있다고 고백합니다(33절). 고넬료는 말씀을 간절히 사모했으며, 그의 마음은 가난하고 겸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는 심령에 하나님은 단비와 같은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 더 깊은 묵상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교제할 때 베드로는 어떤 위험을 감수해야 했나요?
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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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순종하겠다는 결심
미국 작가 캐서린 마셜의 남편 피터 마셜이 해군 사관 학교 군목으로 가던 날, 교정에서 한 교관이 신입생들에게 학교 수칙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제군들은 이 15가지 수칙을 반드시 기억하고 따라야 한다. 그러나 당장 이 15가지를 다 기억하지 못해도 걱정하지 마라. 지금 당장은 제군들을 가르칠 교관의 지시에 매 순간 복종하겠다는 결심만 확고하면 된다.
알겠나!” 그 순간 피터 마셜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내가 하나님의 모든 교훈을 다 기억하지 못해도 된다. 날마다 나를 인도하시는 그분의 지시에 순종하겠다는 결심만 확고하면 된다. 나는 매 순간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께 순종하리라.’ 우리가 성경의 모든 진리를 다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 다만, 매 순간 살아 계신 주님의 인도하심 앞에 순종하리라는 결심만 확고하면 된다. 그다음에는 성령께서 인도해 주실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때로는 고집스럽게 하나님께 대들고 밀어붙이려 하다가도, 그것이 하나님 뜻이 아님을 깨달으면 기꺼이 고집을 꺾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주님 뜻에 온전히 맡기는 행위다. 우리의 인생길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우리는 그분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고 조용히 안식하면 된다. 마침내 가장 아름다운 결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될 것이니.
첫 마음으로 걷는 길 / 서정오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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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24절
고넬료는 베드로가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친척과 친구들을 모아 놓고 그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신앙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반드시 오십니다(계 1:7). 이 사실을 믿는 성도는 깨어서 그때를 준비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은 스스로 구원하려는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갈망하는 데 있다. - 릭 이젤
오늘의 기도
하나님, 관습과 인간적인 생각으로 순전하게 순종하기를 머뭇거렸던 제 불신앙을 용서하소서. 말씀 따라 올곧게 순종할 때 놀라운 하나님 역사에 동참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제게 주신 하나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기대하며 기뻐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84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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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거나 하지 말라고 지시하시고,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우리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열심히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에게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잘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주님의 세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온전히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하고, 주님께서 맡겨 주신 이들을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자!
형식과 율법에 얽매여서 주님의 참 마음을 바라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담대히 그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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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가 평소처럼 제 구시(오후 3시) 기도시간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
게 하셨습니다. 이튿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할 즈음, 베드로는 기도 중이었는데(정오 무렵) 환상 중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자기 같은 그릇 안에 온갖 짐승들을 먹으라는 명령을 듣습니다. 세 차례 거듭된 환상을 통해서,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정함과 부정함의 의식법 규정(레위기 11장)을 깨뜨리신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을 즈음, 고넬료의 사람들이 문밖에 도착했고, 성령님은 베드로에게 저들을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고 명하십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했을 때, 고넬료는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24).
그 혼자서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로마 군대 백부장인 고넬료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절했다는 것은 그의 겸손을 보여줍니다(25).
주둔군 백부장이, 한낱 식민지의 어부 출신에게 절을 한다는 것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어부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는 인식이 분명하고 강했기 때문에, 절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방문이 아닌, 하나님의 방문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자기가 베드로를 청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33). 이것은 모든 시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의 표준입니다.
“관습이 아닌 주님 뜻을 따르십시오” 안광복 목사
베드로가 환상에 대해 고민을 하고 질문을 하고 있을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 앞에 도착합니다.
그 때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의심하지 말고 만나 그들과 함께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자기 집으로 청하여 오시라고 자기들을 이곳에 보냈다고 전합니다.
그들과 함께 유숙한 베드로는 이튿날 그들과 함께 욥바를 떠나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올 때 고넬료가 그를 맞이하고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자 베드로가 이르되 나도 사람이라고 일으켜 세웁니다.
고넬료는 겸손한 사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입니다.
하나님은 귀한 사람 고넬료를 베드로와 만나게 합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고 가까이 하는 것은 위법인 줄 너희도 알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고 하셔서 부름을 사양하지 않고 왔다고 말합니다.
초청한 고넬료나 초청받은 고넬료는 무슨 일을 하여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만남을 통해 이방인을 세우시고 선교의 꿈을 펼치십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기도하는 중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 베드로를 청하여 오라고 말씀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다고 기뻐하며 말합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와 고넬료를 만나게 하시고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만남을 주관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피할 사람을 피하게 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시는 이웃과 교제하며
서로 사랑과 기쁨을 나누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텐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만남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만남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멀리한다고 하셨사오니
꼭 만나야 될 사람과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잘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과 지혜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만남들을 통해
우리 안에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게 하시고 주님의 나라를 함께 만들어 가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오며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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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부정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부정한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결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 기쁨은 안다면 우리의 삶과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그들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고 사랑을 전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요구되었던 명령이고 지금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명령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이웃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고넬료와 그의 가족이 세례를 받는 사건은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의 서막입니다. 이제 사도행전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를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바로 우리에게 왔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요! 우리가 받은 복음이 은혜인데, 어찌 우리가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이방인과 교제할 수 없는 전통을 어기면서 복음을 전했던 베드로처럼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소외된 자들에게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7월13일 동인천지하상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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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1.안개 걷어내기
베드로는 환상에서 동물이 담긴 그릇과 그것을 잡아 먹으라는 음성을 듣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환상과 음성 그리고 성령의 음성과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까지 많은 것들이 베드로의 생각을 바꾸어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어느정도 예수님이 정결법을 완성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무두장이(가죽을 만드는 사람)의 집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무두장이는 동물의 시체를 만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정결의식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집에 머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아직은 이방인에게까지 마음을 열정도로 열리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두꺼운 껍질이 깨지고 있습니다.
로마의 장교 고넬료가 가진 환경에서 그 환경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베드로가 유대인의 오랜 전통을 깨고 이방인과 교제를 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등은 참으로 깨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와 순종으로 조금씩 그들을 가로막고 있던 안개를 걷고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환상을 보았을 때 바로 자신의 종과 부하를 보냈습니다. 그가 오후 3시에 환상을 보았는데 그것을 보자마자 이미 늦은 시간인 오후 3시에 즉시 사람을 보냈습니다. 단순한 심부름인데 세 사람이나 보냈습니다.
총 소요 날짜가 고넬료가 베드로를 만난 그 날까지 합하여 총 4일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 50Km입니다. 그래서 하루 반나절 거리입니다.
그들은 전혀 지체함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도 욥바의 동료들과 함께 갔는데요. 6명(행 11:12)이나 함께 갔습니다. 증인이 되기에 확실한 숫자입니다. 그리고 고넬료는 베드로의 일행을 기다리면서 친척과 친구 등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서로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2.안개가 걷히고
베드로가 자신이 본 환상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었을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때에서야 베드로는 많은 의구심들이 걷히고 진리를 더욱더 선명하게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Ac 10:28) 베드로는 고넬료와 모인 사람들을 보고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아무도 속된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이 정결하다'입니다.
이제 고넬료는 '경외하는 사람'으로만 남아 있지 말고
완벽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선포하는 베드로나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매우 감격하였을 것입니다.
마치 독립선언문 같이 느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역사적인 만남과 환상을 서로 맞추어 보면서 그 뜻을 깨닫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주저하지 않고 확실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최소한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주저함이 없어야 합니다. 알고 확신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주저함이 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그 다음의 일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의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즉시 그것에 순종하여 행하십시오.
지금은 아직 모르지만 어쩌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어가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많이 모릅니다. 인생은 많이 안개 속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알고 깨닫게 된 것이 있다면 담대히 그것을 행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놀랍고 영광스러운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7월13일 하루쉬는날 폭우속에서도 변함없이 주님사랑을 전하는 조은숙집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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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의해 베드로가 견고한 인종의 벽을 부수고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전체 베드로와 고넬료를 만나게 하십니다. 둘 사이에는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촉망받는 로마의 장교와 갈릴리 어부의 삶이 겹칠 리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공통점은 둘 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 유일한 교집합을 점점 넓혀가십니다. 기도하는 두 사람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2,9절), 서로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제거하신 후에, 만남을 주선하십니다. 그렇게 분열의 높은 담장의 돌을 하나씩 덜어내심으로 만물을 통일하시고 인류를 화해시키시는 새 창조의 역사(에베소서 1장 10절)를 진행하십니다.
19~23절 말씀 전할 자와 말씀 들을 자를 모두 준비시키십니다. 사울을 두려워한 아나니아를 설득하시고 사울에게는 아나니아가 방문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처럼, 베드로에게는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하시고 고넬료에게는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묵상과 기도를 통해 누구를 만나라 하시고, 누구를 초청하라 하시는지 귀 기울여봅시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24,25절 고넬료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이 모습은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기꺼이 빌립 앞에 엎드려 세례를 받았던 장면과 겹칩니다. 세상의 지위를 따지자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때문에 기꺼이 자신을 낮춥니다. 나는 예배드릴 때에 주님의 임재 앞에서 그리고 주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히 나를 낮춥니까?
26~29절 베드로는 환상을 보고 성령에 이끌려 이방인의 집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아직 그들이 복음을 들을 대상이라는 생각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바울의 충격적인 회심과 즉각적 복음 선포와 비교하면, 베드로의 변화는 작고 느립니다. 그러나 그 느릿한 걸음으로 인종의 높은 벽을 완전히 넘어서는 순간이 오고 있습니다. 나도 느린 보폭일지라도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걷다 보면, 놀랍게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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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 듣고 이방인, 그것도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위치에 있는 고넬료의 집으로까지 먼 길을 인도받은 정통 유대인 베드로는 그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초청한 고넬료에게 어떠한 음성을 듣고 초청하게 된 것인지에 대한 자초지종을 묻게 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가 구체적으로 인도함을 받은 것과 동일하게 그 역시 베드로가 잠시 머무는 집의 주인이 자신과 동일한 이름인 시몬인 것과 그의 직업, 또 그의 집이 욥바의 바닷가에 있다는 것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인도받은 것임을 알려줍니다.
베드로에게 이와 같은 성령의 거부할 수 없는 이끄심이 없었다면 결코 이방인의 집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을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고 고넬료의 거룩한 삶과 기도에 대해 그토록 응답하고 싶으셨던 하나님의 열망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준비된 축복을 부어주시기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기도와 삶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기를 간절하게 바라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자녀의 인생이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해지고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순종하는 인생이 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부모에게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된 크로노스의 시간을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하고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카이로스의 삶으로 채워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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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음식법의 시대가 끝이 났음을 분명하게 천명하시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잡아먹어라.”는 말씀은 레위기의 음식법을 하나님께서 모르셔서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음식법의 시대가 끝이 났음을 알리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은 고넬료를 염두에 두신 말씀이지만 음식법이 시대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성취되어 끝이 났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이방인들에 대해 여전히 편견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의 생각의 틈새, 즉 잘못된 세계관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있는 생각의 틈새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 이 생각의 틈새가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무중력 상태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라온 환경,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사상,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고 나면 해결해야할 수많은 생각의 틈새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럴 때 그런 틈새들을 말씀으로 하나씩 메워 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가 어떻게 생각의 틈새를 조금씩 메워 가는가를 말씀을 통해서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고넬료에게 있는 사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신앙생활에 소중한 것인가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를 원합니다.
베드로의 고민
베드로는 세 번의 같은 환상을 본 후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베드로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이 환상이 현재 나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의 사고체계가 바뀌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합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신앙적인 성결을 유지하는 표지인 것으로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내가 속되지 않다고 한 것을 네가 왜 속되다고 하느냐?”는 말씀이 떨어졌을 때 그의 고민은 시작되었습니다. 도대체 이 말씀이 무엇 때문에 주어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겨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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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틈새를 메우는 두 번째 원리는 묵상의 원리입니다.
말씀 앞에 깊이 생각하는 훈련입니다.
본문의 베드로는 환상을 통해서 구체적인 그림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환상보다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이야기하십니다.
그럴 때 과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의 생활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묵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묵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게 적용하기 위한 노력의 시간입니다. 그것이 그러한가 하여 생각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말씀이 내게 주어졌을 때, “아 그렇구나!!!”하고 깨달음의 수준으로 끝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아! 참 신선하다”그렇게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전부다 묵상하고는 거리가 있는 표현들입니다. 베드로가 깊이 고민하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환상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를 몰라서 고민하고 있습니까?
환상은 너무 분명합니다. 음식 법에 대해서 너의 편견을 버려라. 왜 내가 속되지 않다고 한 것을 네 기준, 네 생각으로 속되다고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지금 내 생활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답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되씹고 되씹어서 내 삶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입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만 생각의 틈새는 발견되고 메워지는 것입니다.
순종의 원리
그런데 아직 베드로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이러한 성령의 명령하심에 대해서 베드로는 어떻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23절, 28-29절, 34-35절을 차례로 보시면 이 문제가 해결됩니다.
아직도 베드로의 의문은 완전히 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베드로의 생각 여부를 묻지 않으시고 주권적으로 명령하십니다.
의심하지 말고 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보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9장에서 제자 아나니아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가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나니아 역시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아직 아무도 보증해 주지 않은 사울의 개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증하시기 때문에 아나니아는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형제, 사울아!라고 부르는 것을 봅니다.
이것과 베드로의 경우는 그 무게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같습니다.
성령께서는 베드로의 생각을 물으신 것이 아니라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성경 전반에 걸쳐 요구되고 있는 태도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각을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한 주님의 요청에 순종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임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그치고 찾아온 이들에게 이유를 묻습니다. 고넬료가 보내온 하인들, 즉 이방인들과 함께 유숙했다고 하는 사실에서부터 이미 베드로는 환상의 의미를 이해했으며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베드로는 할 수 없어서 자신의 생각을 잠시 유보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러한 순종이 교회사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이제 복음은 유대인의 울타리를 넘어서 이방인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땅 끝까지 이르기 위한 교두보가 설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사건의 이면에는 한 사람 베드로의 자기 부인을 요구하는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순종의 결과를 34-35절에 뭐라고 합니까?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깨달았도다.”
그렇습니다. 생각의 지평이 넓어졌습니다. 사고의 경계가 커졌습니다.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그릇이 커졌습니다.
어떻게 했더니 그렇게 되었습니까?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려움에 직면해서 피하지 않고 그 훈련을 받아낸 사람은 그 그릇이 엄청나게 커져 있습니다. 영적인 수준이 달라져 있습니다.
.깨닫고, 깊이 생각하고 그치면 그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삶이 변하지 않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지식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으로 변해버립니다. 그래서 신선하지 않은 말씀에는 전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실천해 보면 거기에 다른 세계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앎은 순종까지, 삶으로 드러나는 것까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리해야하는 중요한 원리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이런 일은 한 번으로 끝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직 제대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다시 실수하고 고생합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이 부분을 완전히 뛰어넘게 됩니다. 사실 베드로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안디옥 사건에 또 실수를 합니다. 결국 예루살렘 총회에 이 문제가 상정되어 해결을 본 후에야 완전히 이 부분을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뭡니까?
반복이 필요합니다. 잘못된 세계관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과 부단한 반복과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모하는 마음
자, 이제 시선을 고넬료에게 돌려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도착했을 때 고넬료는 어떻게 맞이하고 있습니까? 25절입니다.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그랬습니다. 여기 엎드리어 절하니 라는 말은 프로세쿠네센(prosekuvnhsen)은 발에 입을 맞추는 행위를 말합니다. 왕 앞에 절하거나 신상 앞에 절할 때 이런 단어가 쓰였습니다. 고넬료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로마의 군인입니다. 베드로는 피정복민인 유대인입니다. 인식론적으로 볼 때에도 베드로는 갈릴리 촌 출신의 불학무식한 사람이요 고넬료는 로마의 교육을 제대로 이수한 인텔리입니다. 그런 고넬료가 허름한 옷을 입은 베드로, 자신보다 배운 것도 보잘것없는 베드로 앞에 마치 신을 대하는 것처럼, 왕을 대하는 것처럼 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객관적으로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 잘 이해가 가십니까? 저는 이것이 고넬료의 신앙을 드러낸다고 봅니다.
여기 22절의 하인들의 평가를 들어보십시오.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그랬습니다. 이게 지금 누구에게서 나온 말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집안 하인 두 사람, 그리고 누굽니까? 종들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 도합 셋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와서 고넬료에 대해서 소개장을 쓰는데 뭐라고 씁니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압니다. 아랫사람들이 진심으로 상전을 존경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그런 진심어린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넬료의 성숙함이 베드로 발 앞에 엎드려 절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26절입니다.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여러분! 얼마나 가슴이 따뜻해지는 광경입니까?
그리고 고넬료는 베드로를 초청한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33절입니다.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 앞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지금!! 하나님의 카이로스에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으로 듣겠다는 말이지요.
여기 ‘있나이다’라는 말은 현존한다는 뜻입니다. 사모하는 마음! 준비된 마음! 이것이 생각의 틈새를 발견하고 메워 가는 시작이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이렇게 베드로의 세계관을 바꾸는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생각의 틈새였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주님의 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베드로의 세계관이 바뀌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모하는 사람, 겸손한 사람 고넬료를 준비시키시고 성령께서 직접 베드로를 움직이시고 인도하셔서 둘의 만남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베드로의 세계관, 즉 유대인들의 이방인들을 향한 마음이 열려지지 않으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은 첫 발을 띨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처음 예수 믿고 거듭나면 기쁘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생각의 틈새들을 메꾸는 작업을 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일은 사모하는 마음, 깊이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들여다보는 마음,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을 자양분으로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세계관이 바뀌어야 좋은 그리스도인입니다. .
오늘도 하나님께서 또 새로운 날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말씀의 거울 앞에 우리의 잘못된 세계관들을 발견하고 고쳐나가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하고 적용하고 순종해야 변합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말씀이 들려지고 보입니다. 오늘이 우리에게 그런 날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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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고넬료에게 임재하신 하나님께서는 또한 베드로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방인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기 위하여 환상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고넬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직접 행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분명하며 늘 한결 같으심을 봅니다. 베드로라고 하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 에게 나타나셔서 베드로가 가진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으셨습니다.
사도였던 베드로도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뻔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영적으로 앞선자라고 하여도 항상 하나님 앞에 겸손함으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묵상하기
내 생각에 사로잡혀 주님의 뜻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고넬료의 영적 자세
베드로 사도가 온다는 말을 듣고 고넬료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친척들을 모아 두고 베드로 사도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왔을 때 땅에 엎드려서 맞을 정도로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찾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1년 52주 동안 매주 은혜를 받고 살아갈 수도 있고 매주 은혜 없이 지날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은혜를 사모하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를 더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예배가 습관화되고 말씀 앞에 겸손하지 못함임을 우리는 기억하고 항상 고넬료와 같이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말씀을 듣고자 몸을 낮추는 겸손함을 가질 때 우리의 삶 속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됨을 느낄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예배를 사모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베드로의 섬기는 자세
종종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자리를 마치 자신이 이룬 것처럼 생각하여 실패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오늘 베드로는 자신의 발앞에 엎드리는 고넬료를 붙들어 세우면서 자신도 같은 사람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단지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이곳에 왔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역으로 섬기더라도 낮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사역을 나의 선택이나 교역자의 임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보내심같이 우리가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은혜의 고백입니다. 바울사도도 자신의 사역을 고백하면서 말하였습니다.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이처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랑하거나 주장하는 자세로 행하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한량없으신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사역들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묵상하기
나는 늘 섬기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가?
베드로가 환상이 무슨 뜻일까 생각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행10:19~20)
여기서 "두 사람"이라고 번역한 것은 바티칸 사본을 따랐기 때문이고,
다른 사본들에는 "세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둘이냐 셋이냐가 아니라,
베드로가 그들을 불러 들여 함께 유숙했고 동행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셋 중 한 사람은 할례자였지만, 둘은 무할례자였습니다 병사 한 사람은 할례자였습니다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행10:7)
여기서 "경건한"은 "εύσεβής"(유세베스)인데,
헌신된이라는 형용사로 주로 모세율법에 헌신한 할례자를 의미합니다 물론 고넬료는 경우가 좀 다릅니다
"그가 경건하여"(행10:2) 고넬료는 무할례자였습니다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행11:3)
다만 굳이 경건했다고 기록한 것은 할례자보다 더 경건한 삶을 살았고 성령충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종은 무할례자였는데 함께 유숙했습니다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행10:23)
베드로가 얼마나 진리에 민첩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오랜 관습을 진리보다 더 떠받듭니다
그래서 헛된 관습 하나도 수많은 피를 흘려야 겨우 개혁될까 말까 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유대교적 관습을 과감히 탈피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행10:28~29)
그 어떤 관습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결코 앞설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진리에만 민첩하기 원합니다 물론 저들의 억지비방과 박해는 각오해야 합니다
"모세를 배반하고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행21:21)
그러나 이 싸움을 싸우지 않고,
오히려 관습을 진리처럼 떠받들고 강요하기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납득이 되지 않아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막7:9)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진리에만 깨어 민첩하기 원합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시4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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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베드로가 지붕에서 기도하고 있을때 환상을 보았다.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에 불결한 짐승들이 담겨있는데 잡아먹으라는 음성이 들린다.
베드로가 거부하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불결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이 들렸고 보자기는 하늘로 올라갔다.
고넬료는 가아사랴에서 기도중에 환상을 보았고
베드로는 욥바에서 기도중에 환상을 보았다.
물리적으로 두 사람은 가깝지 않은 거리에 있었지만
두 사람이 만나라는 하나님의 사인이였다.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를 구원하기 위하여 빌립 집사를 보내심과 같이
고넬료를 구원하기 위하여 베드로를 보내실려고 하고 있다.
불결한 짐승이 가득담긴 보자기의 환상에 대해서 베드로는 잘 이해를 못한 것 같다.
베드로가 이 환상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17)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집 앞에 도착해서 큰 소리로 물었을 때(18)
성령님이 베드로에게 다시 설명을 해 주신다.
다음날 베드로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길을 떠난다.(23)
특이한 것은 욥바에서 온 형제들 몇 사람도 동행한다.(23)
베드로가 도착했을 때 고넬료는 발 앞에 엎드리어 경의를 표한다.(25)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 믿고 최고의 경의를 보낸 것 같다.
베드로가 자기를 청한 이유를 묻고(29)
고넬료는 자신이 본 환상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31~)
지금 여기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 와 있으니 주께서 당신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귀 기울여 듣겠습니다.(33)하고 말씀 들을 준비를 한다.
고넬료의 태도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겸손하다.
고넬료는 점령군의 장교이다.
유대인에게 엎드려야 할 이유가 전혀없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할 입장에 있는 유대인에게 이렇게 정중하게
대하는 인품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또한 말씀을 들을 준비를 이렇게 사모하며 열심히 준비하는 모습에 감동이 있다.
귀 기울여 듣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듣겠다는 태도이다.
내가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이런 태도로 말씀을 들어야 겠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만남이 있지만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 특이하다.
오늘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고 전화해야 할 사람이 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성령님이 인도해 주심으로 만나는 사람들이다.
만남의 축복이 있게 하옵소서.
좋은 친구와의 만남, 좋은 부모와의 만남, 좋은 선생님들과의 만남,
좋은 배우자와의 만남,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님과의 만남, 성령님과의 만남
이 모든 만남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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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23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오늘 본문에서 욥바에서 일어난 사건은 유대인에게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율법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방 신을 섬기는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금하고 있기에 베드로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비록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고 지시를 하셨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묘한 타이밍에 단 한시의 오차도 없이 가이사랴에 있는 백부장 고넬료와 50km 떨어진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부정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약 8백여 년 전에 욥바에서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요나 선지자가 순종하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곳이 바로 욥바입니다. 구약에서 불순종의 장소가 신약에서 순종의 역사적인 장소로 바뀐 것입니다.
요나와 베드로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른 한 사람은 환상을 본 차이가 아닙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회개를 하였지만 그의 회개는 온전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억지춘향식으로 니느웨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오히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성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요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즉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기적을 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을 때 우리가 밟는 땅, 즉 욥바가 불순종에서 순종의 땅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다면, 이방인 즉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편견을 깨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비로소 복음이 우리의 이웃을 통해 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를 용납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지는 교회 공동체가 됨으로써 저와 여러분의 삶의 영역이 복음으로 확장되는 축복의 장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4절(24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과 앞서 9절에서 언급한 이틑날입니다. 고넬료가 처음 환상을 본 것은 이틀 전 오후 세시 경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자는 고넬료에게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를 청하라고 말합니다. 이에 고넬료는 지체없이 집안 하인 둘과 부하 중 경건한 한 사람을 욥바로 보냅니다. 이들이 욥바에 다다른 시간은 다음 날 정오 경이었습니다(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가이사랴와 욥바의 거리가 50km인 점을 고려할 때 아마도 저녁식사를 마친 후 여장을 준비하여 바로 출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보낸 일행을 맞이한 베드로 역시 지체하지 않았습니다(23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12시간 넘게 걸어온 그들을 바로 돌려보낼 수 없기에 베드로는 그날 쉬게 한 후에 다음 날 그들과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청하라고 명하신 후에 불과 이틀 만에 고넬료와 베드로가 상봉하게 된 것입니다.
며칠 후가 아니라 이틑날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을 받을 때 이처럼 즉각적인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주님의 명령을 받고도 마음에 주저하고 있다면 그것은 베드로의 순종이 아니라 요나의 순종입니다. 억지춘향인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순종한 것은 같은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확연히 다른 것입니다. 결국 요나의 순종은 순종하고도 하나님의 책망을 받는 순종입니다.
우리의 순종이 이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은 순종해야 하는데 고집을 부리고 이리저리 재다가 한 대 얻어맞고는 마지못한 순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물론 얻어맞더라도 그 길을 간다고 한다면 그것도 은혜입니다(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하지만 기왕이면 즐겁게 순종하는 길을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순종은 오직 믿는 대상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순종이 바로 그렇습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의 종이 되었던 시절의 자아가 마음 한 쪽을 자리잡고서는 여전히 주인행세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혈기가 튀어나오고, 내 고집과 교만이 튀어나옵니다. '내가'라는 말이 '주님'이라는 말 앞에 항상 수식어처럼 따라붙습니다.
우리는 신분 상으로 참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죄로부터 자유자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합니다(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우리에게는 영적인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이지 다시 죄를 선택하기 위한 자유가 아닙니다(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복음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다시 죄를 선택할 자유도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할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침(세)례를 받았다고 복음이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산 자가 되셨듯이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를 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은 다시 복종의 단계로까지 나가야 합니다. 전에 죄에 완전히 복종하였듯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오늘 본문의 고넬료와 베드로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25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를 맞이하는 고넬료의 행동은 베드로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넬료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신에 대한 경외감이 아이러니하게도 신에 대한 체험에 반비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였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부터 시작해서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 등 수많은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에 대해서 그들은 생생하게 들어왔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제가 처음 성경을 보면서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은, 어떻게 엄청난 기적을 보면서도 그렇게 무덤덤할 수 있었냐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기적을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었냐는 것입니다.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처음에는 놀라지만, 이후에 반복되는 기적에는 무덤덤해진다는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기적으로 맛 본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은 무엇이었습까? 그것은 자신들을 위해 더 큰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민 11:4-6,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매너리즘에 빠지면 안 됩니다. 말로는 은혜라고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며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도 세상 남부럽지 않게 살았는데 하나님 이게 뭡니까? 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에 섞인 다른 인종이 내는 소리입니다. 육신의 소리입니다. 우리가 세상 가운데 있었을 때에 죄에 익숙해진 육신의 소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이 들 때마다 가차없이 잘라버리시기 바랍니다(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대부분 하나님을 체험했을 때의 반응은 고넬료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익숙해지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교회에 대한 불평불만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주인 되시는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갖는 자는 진정한 신앙인, 복음인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교회 안에 있다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결국 지식적으로 아는 수준에 머문다면 과거의 우리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에서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베드로도 율법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자신의 몸으로 깨닫고 그것을 써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기록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복음을 직면한 자의 모습과 태도는 어떠한지를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을 많이 듣고 보고 깨닫고 깨달은대로 순종의 삶을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온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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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이 필요한 응답(10:17-23상)
세상에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도 많지만,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도 많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체험한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골똘히 생각했지만, 스스로 해답을 찾지 못합니다.
모든 해답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자신이 보낸 사람들이니
방문자들을 의심하지 말고 따라가라 명하십니다. 베드로는 방문자들이 있는지도 몰랐고
누군지도 몰랐지만, 성령의 말씀에 순종해 지붕을 내려가 그들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던 환상의 의미를 하나님이 보내신 이방인을 통해 깨닫습니다.
순종이 깨달음의 시작입니다.
- 묵상 질문: 성령께서 이방인을 위해서도 일하신다는 사실을 유대인 베드로가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 적용 질문: 내 기대 또는 신념이 말씀과 충돌할 때는 언제며,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준비된 응답(10:23하-33)
매 순간 주님 뜻을 따라 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지시를 받고 순종하는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의 사자가
하신 말씀을 듣고 멀리 있는 베드로를 청했고, 베드로는 자신을 청한 사람이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에게 갑니다. 고넬료는 친척과 친구들을 모아,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명하신 것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기억하며 그분이 이루실 일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가 들어오자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나도 사람이라” 하며
엎드려 경의를 표하는 고넬료를 일으켜 세우고, 이방인과의 교제가 유대 사회에서는 ‘위법’이지만
하나님 뜻임을 인정합니다.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준비된 사람들의 순종으로 성취됩니다.
- 묵상 질문: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생각을 알면서도 고넬료가 베드로를 청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일들 가운데 제 머리로 이해할 수 없고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해
순종하지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믿음 없는 태도를 용서하시고
베드로처럼 의심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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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절에 보면 베드로는 그가 본 환상이 무슨 뜻인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찾아와서 문 밖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18절에 그들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19절과 20을 보시기 바랍니다.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내려가서 그 사람들을 보고 무슨 일로 왔느냐고 합니다(21). 그러니까 그들이 백부장 고넬료가 하나님의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고 한다고 합니다(22).
오늘 본문에 보면 여전히 베드로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이방인에 대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베드로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는 구약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하는 것을 절대 먹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사람이 속되다고 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여전히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이방인에 대한 차별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떤 차별이나 편견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고보서 2장 1절에 보면 “약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너무나 차별이 많습니다. 특히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한 차별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입니다. 교회도 세상과 같이 사람을 어떤 외적 조건을 가지고 차별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사람을 차별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교회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합니까?
1. 우리가 구원을 얻는 방식을 볼 때 우리는 절대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합니다.
1절을 다시 한 번 더 보겠습니다.
“약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이 말씀에 보면 왜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우리가 돈이 많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우리가 지식이 많아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우리가 남들보다 건강하고 젊고 얼굴이 잘 생겼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는 구원하신 방식은 인간적인 조건이 아닙니다.
반대로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방식은 조건적이 아니라 역 조건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약2장 5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약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기준을 보았을 때 오히려 조건이 되지 않는 사람을 택하여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을 볼 때도 나옵니다. 당시에는 장자를 더 좋은 조건으로 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장자인 에서를 버리시고, 작은 자인 야곱을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부자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교회 안에서 돈 이 많은 사람이 우대를 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돈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똑똑하고 학벌이 좋고 지식이 많아서 구원을 받은 것이라면, 교회 안에서 지식이 있는 자와 지식이 없는 자를 차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방식은 결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외양이나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인간적인 외양이나 조건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사람을 외적인 조건에 따라서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합니다.
2. 또 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거나 인간적인 차별을 두지 말아야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 때문입니다.
약2: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9절을 보면 사람을 차별되게 대한다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을 어긴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만 계명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외모로 대하지 말고, 차별대게 대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또 만일 누구든지 간음죄를 지으면 그 사람은 치리를 받아야합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이나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이나 같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만일 간음해서 치리를 받는다면, 사람을 차별한다면 그것도 치리를 받아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우리가운데 사람을 어떤 외적인 조건을 가지고 차별한 죄가 없는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합니다.
3. 또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하는 이유는 종말론적 이유입니다.
약2:13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약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만일 우리가운데서 사람을 차별해서, 그 사람들을 긍휼이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사람을 차별되게 대한 다면 종말에 심판대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한다, 즉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사람을 차별되게 대하지 않는 우리의 행위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면--당연히 그 사람은 사람을 인간적인 외모나 조건으로 차별되게 대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운데서 예수를 구원의 주님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사람을 대할 때 차별되게 대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결코 온전한 참 믿음이 아닙니다. 거짓 믿음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단순히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 그 믿음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야합니다.
--특히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더 약하고 더 어렵고 더 힘들어하고 더 차별받는 사람들을 더 돌아봐 주고 사랑해 주어야합니다.
이렇게 할 때 주님이 오셨을 때 우리를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불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발걸음을 날마다 바라보시고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인생을 온전히 그 창조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님께 맡기며
전심으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주님의 제자로 나아가도록 성령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손길로 덮어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여호와의 영의 기름 부으심에 따라 겸손과 순종으로
나아가도록 선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