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에 발표했던 단편 <배드민턴 치는 여자>를 모태로 한 신경숙의 네번째 장편소설. 세종문화회관 옆 화원에서 꽃을 돌보는 여종업원으로 취직을 한 오산이는 한순간 온몸을 덮쳐온 격렬한 욕망에 붙잡혀 도시 한복판을 걷는다. 오산이의 기억 밑바닥엔 어린시절 미나리 군락지의 푸른 풍경이 있고, 그곳에는 푸른 반점을 지닌 친구로부터 거부당했던 상처가 봉인되어 있다. 그녀는 어느 여름날 사진기자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고...표제의 <바이올렛은> 수줍은 여인을 은유하기도 하는 보라색 꽃의 일종이다.
미디어 서평
'세상의 욕망'에 철저히 버림받은 한 여인의 아픔
세상에 눈을 뜨기도 전부터 23살이 될 때까지 버림받기를 반복하며 살아온 여자 오산이의 깊은 슬픔을 신경숙(39) 특유의 더딘 숨결로 어루만지는 장편 [바이올렛](문학동네)이 나왔다. 작은 보라색 꽃을 피우는 바이올렛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비극적 운명의 여인 이오를 상징한다. 헤라의 질투로 소가 되어버린 이오를 위해 제우스가 피워준 꽃 바이올렛은 욕망의 희생양이 된 여인을 의미한다.
신경숙은 조용한 페미니스트다. 그의 소설 속 여인들은 남성의 폭력에 모질게 대항하지 못한다. 하지만 잔뜩 웅크리고 아픔을 견뎌내는 것이 비명을 내지르는 것보다 더 처절하게 폭력의 잔인함을 보여준다.
"수세대에 걸쳐 이유도 없이 존엄성을 무시당한 여인들이 떳떳치 못한 대우로 고통받다가 낯선 방에서 죽어가는 일은 허다했다."(10쪽)
오산이의 아버지는 그녀와 어머니를 버린다. 그후 산이는 자신을 둘러싼 삶의 공간에 쉽게 융화되지 못한 채 계속 겉돈다.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사는 미나리 군락지 마을에서 산이는 이방인이다. 기쁨, 슬픔, 노여움, 자잘한 감정표현까지 안으로 삭이는 주인공은 여린 식물과 같은 생을 살아간다. 청승맞은 꽃 바이올렛과 동격을 이루는 산이는 신씨의 1992년작인 단편 '배드민턴 치는 여자'의 분신이다. 작가는 단편의 육체를 좀더 풍만하게 만들어 10여년만에 장편으로 내놓은 것이다. '베드민턴 치는 여자' 속의 그녀를 다시 세상에 내보내는 작가의 시선은 깊고 담담하다. 새삼스럽게 역사의 지층 속에 사장된 익명의 존재들이 지녔을 슬픔이나 고독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는 신씨는 뿌리깊은 소외와 단절을 겪은 오산이가 좀더 넓은 공간을 떠돌도록 만들었다.
오산이는 원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당한다. 유년시절 푸른 반점을 지닌 친구 서남애에게 입을 맞춘 것 때문에 갑작스런 절교를 당하고, 새살림을 차리기 위해 떠나는 어머니로부터 여러 차례 버림받는다. 오퍼레이터로 취직하려다 세종문화회관 옆 화원 종업원이 된 그녀. 맛있는 음식 냄새와 생동감 넘치는 서울의 거리에 섞이지 못하던 산이는 동질감을 주는 나무와 꽃들의 숨소리로부터 위로받는다.
어느날 바이올렛을 찍기 위해 화원을 찾아온 사진기자에게 자줏빛 욕망을 품지만 그마저도 좌절된다. 사랑해도 되겠느냐며 속삭였던 그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 화원의 단골손님인 최씨에게 강간을 당한 후 작가가 섬세하게 그려낸 서울의 광화문 언저리를 정처없이 떠도는 그녀.
"슬픔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또렷한 기억이 그녀에겐 있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기도 전에 다가온 그애의 돌연한 멸시를 갚아주기 위해서는, 죽을 수밖에 없다, 내 죽음만이 그 애의 마음을 돌이켜놓을 것이다, 언젠가 죽어야 한다면 지금 여기서 죽으리라."(271쪽)
오래전에 남애로부터 받은 마음의 생채기에서 다시 선명한 피가 흐른다. 불행한 삶의 공간을 맴도는 여자 산이. 신씨는 하찮은 존재로 인해 이 고독한 현실 속의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되고 타인에게 한발짝 다가가고 싶은 충동으로 마음이 흔들린다면 작가로서 그보다 소망스러운 일은 없겠다고 밝힌다.
전지현(문학) / 세계일보 / 20010803
출판사 서평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며 한없이 망설이는 문체. 신경숙 장편 <바이올렛> 출간
바이올렛, 가녀린 아름다움과 세계의 폭력성의 조우
이 작품에서 표제인 '바이올렛'은 다양한 상징성을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사전의 정의대로 꽃의 일종이며, 보라색이라는 색깔을 나타내기도 하고, 수줍은 연인을 은유하기도 한다. 동시에 그것은 기표(signifiant)의 유기성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폭력(violence)과 연결된다.작가는 이런 다채로운 의미가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여러 삽화와 비유를 통해 긴밀하게 형상화해놓고 있다.
또한 바이올렛은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비극적 운명의 여인 이오와 중첩됨으로써 그 내포를 심화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의 한복판, 그 익숙한 공간이 돌연 오랜 세월에 걸쳐 그 모습을 달리해가며 벌어지는 신화적 비극이 상연되는 무대로 탈바꿈한다. 따라서 바이올렛의 보랏빛은 수난의 핏자국이자 소외된 자, 억눌린 자의 멍자국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동시에 처절하며, 애잔한 동시에 섬뜩하다.
오산이.
이 여자에게 이름을 지어준 지가 꼭 일 년이 되었다. 오산이는 내 단편 <배드민턴 치는 여자>의 분신이다. 이 여자를 바로 다시 세상에 내보내려 했는데 다른 작품에 밀려 이제야 이루었다. 빚어지지 못찬 채로 내 마음속에서 십여 년을 함께 산 셈이다. 오해 많은 세상에 이 여자를 내보내려 하니 미안해 죽겠다. 제대로 맛있는 것도 먹이지 못했고, 좋은 옷도 입히지 못했으면, 종내는 꿈과 욕망조차 바스라지게 했으니 이 여자의 어미나 되는 듯 마음이 쓰리다. 이 여자를 통과해가는 시선 속에서 이 여자가 새로 부활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작가 후기'에서--
혼신의 문학만이 줄 수 있는 가슴 먹먹한 감동
그 여자, 오산이를 따라가는 내내 독자의 마음은 아슬아슬하다. 조심조심 내려가 절망의 밑바닥에 발을 딛고야 말 때까지 위태롭게 이어지는 시간은 저릿하기까지 하다. 지금이라도 광화문 네거리에 나가면 바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바로 우리 옆에 늘 존재하는 여자인 것만 같기에 그 애틋함은 더 간절해진다.
그러나 그녀 곁에 존재하는 또다른 그녀의 분신 수애나 건강한 낙원의 공간을 일구는 벙어리 화원 주인을 통해 작가는 삶의 환한 국면을 놓치지 않는다. 아마도 이들, 화원과 농원의 인물들은 늘 마지막 시선에서는 삶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신경숙 소설의 아름다운 현실일 터이다.
작가는 이야기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오늘 여기에 있는 나를 일깨우는 영화를 보거나 노래에 귀를 기울이거나 글을 따라 읽을 때면 새삼스럽게 역사의 지층 속에 사장된 익명의 존재들이 지녔을 슬픔이나 고독을 생각하게 된다. 뿌리깊은 소외와 단절을 겪으면서도 헤아릴 수 없는 거리와 도저한 시간을 헤치고 오늘 나를 방문해서 나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들 속에는 그들의 영혼이 스며 있다고 생각한다.
잊혀진 그들이 끊임없이 걸어오는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이끌어내 새로운 세계를 이루는 것이 영화이며 노래이며 소설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글쓰기는 결국 이미 사라진, 지금 있는, 앞으로 탄생할 미미한 존재들과의 쓸쓸한 조우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깊은 밤중에 읽는 몇 줄의 아름다운 문장에 마음이 흔들리듯이 누군가 내 소설 속의 하찮은 존재로 인해 이고독한 현실 속의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되고 바스러진 과거를 껴안게 되고 타인에게 한 발짝 다가가고 싶은 충동으로 마음이 흔들린다면 작가로서 그보다 소망스러운 일은 없겠다."
작가의 겸손한 소망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혼신의 힘으로 작품 속에 쏟아져 있음을 안다. 망설이고 더듬거리며 서서히 존재의 심연과 대면해가는 신경숙의 문체. 온몸으로 밀고 나간 단어 하나하나의 밀도가 그 가슴 먹먹한 혼신을 증명한다.
신경숙의 소설에선 처음부터 독자를 휘어잡아야 한다거나 도중에서 독자를 놓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나 잔꾀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느릿느릿 사소하고 아름다운 것들,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한테까지 한눈을 팜려 소요하듯 따라가게 만단다. 짜임새 없이 마음가는 대로 쓴 것 같은데 읽고 나면 바로 그 점이 이 작가만의 구성의 묘였구나 싶어 못내 감탄을 하게 된다. 나에게 신경숙 문학의 매력은 식물이 주는 위안과도 같다. --박완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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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신경숙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85년 중편<겨울 우화>로 [문예중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 소설집 ,강물이 될 때까지>,<풍금이 있던 자리>,<오래 전 집을 떠날 때>,< 딸기밭>, 장편소설<깊은 슬픔>(전2권),<외딴방>,<기차는 7시에 떠나네>, 산문집<아름다운 그늘>을 펴냈다.
1993년 한국일보문학상과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1995년 현대 문학상, 1996년 만해문학상, 1997년 동인문학상, 2000년 21세기 문학상, 2001년 이상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