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만든 사람들, 공민왕(2) 변혁의 시대를 몰각하

[해어름]

이색과 최영을 하나로 묶었더라면 

희망에서 혼란으로 갔다가, 무력감과 자책 끝에 자멸…

정치적 자질 뛰어났으나 변화의 방향을 통찰하는 데 실패

▎충북 단양군 매포읍의 도담삼봉.

가운데 큰 봉우리에 자리잡은 정자는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공민왕의 비극은 정도전 등 신흥사대부의 사상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기인했다.

지성은 모든 정치가에게 불가결한 것은 아니지만,

변혁시대의 정치가에겐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지

성이 결여되면 당사자의 진지한 노력과 뛰어난 능력은 오히려 희극이 된다.

지성과 통찰력의 결여가 공민왕 몰락의 인물론적 배경이다.

기철 일파를 제거하지 않고는 개혁은 물론 왕조차 위험했다.

하지만 원이 존재하는 한 그들을 제거할 방법은 없었다. 그

런데 공민왕은 대륙에서 발생한 한족 농민반란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원과 대립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지만, 과감히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조일신의 난이 실패하자, 공민왕은 원에 의해 폐위될 위험에 직면했다.

공민왕은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그 위험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당시 한족 농민반란을 막느라 여유가 없었던 원조정도 일단 이 문제를 덮어두었다.

하지만 공민왕의 입지는 극도로 위축되어 더 이상 개혁을 도모할 수 없는 형편에 빠졌다.

그러자 권문세족들은 바로 세력을 회복했다.

이후 4년여간 공민왕은 무기력하게 보냈다.

하지만 공민왕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356년(공민왕5) 5월 기철, 그리고 원 황실에 딸을 바친 노책, 권겸,

그리고 그 일족들이 모두 피살되었다.

공민왕은 작은 연회를 열고 친원 세력들을 모두 초청하여, 이들을 모두 죽였다.

거사는 공민왕의 측근, 외척 등 극소수에 의해 극비리에 이루어졌다.

전형적인 궁정 암살극이었다.

거사에 성공하자 공민왕은 즉시 압록강과 동북면에 군대를 파견하여 방어태세를 굳혔다.

아울러 원에 복속된 고려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한 달 뒤에는 원의 연호 지정(至正)을 정지했다.

연호를 따르는 것은 신속(臣屬: 신하로서 예속됨)의 상징이었으므로,

이는 명백한 고려의 독립선언이었다.

원은 대군을 동원하여 토벌하겠다고 위협했지만, 결국 현상을 인정했다.

한족의 농민봉기에 시달리던 당시 원에는 고려를 진압할 여력이 없었다.

공민왕이 거사에 나선 것도 이런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은 아직 결정적으로 몰락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민왕의 거사는 사실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이 사건은 정치적 곤경을 타개하는 공민왕의 정치적 자질들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정치적 민첩함과 과단성, 치밀함, 유연성, 교활함,

잔인성, 이 모든 것이 이 사건 속에 녹아 있었다.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통해 고려는 거의 100년 만에 원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다.

또한 1170년 무신난 이래 처음으로 고려의 왕은

진정한 의미에서 독자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거의 200여 년만이었다. 더 이상 무신의 지배도, 원의 지배도 없었다.

개혁을 위한 기본 요건이 모두 갖춰졌다.

마지막으로, 매우 적절한 시기에 옛 영토를 회복했다.

뒤에 명과의 국경분쟁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처럼,

만약 이 시기를 놓쳤다면 고려는 그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려의 역량을 생각할 때, 공민왕의 구토 회복은 매우 모험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결정은 시의 적절한 것이었다.

원의 과거(制科)에 합격하는 것을 선망한 고려 지식인

▎서울 마포에는 공민왕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서울에서 사당을 지어 기리는 유일한 고려왕이다.

사진은 마포구가 주최한 공민왕사당제례 모습.

그런데 공민왕은 이 사건을 단순히 정치적·군사적 승리로만 보지 않고,

고려의 정체성 회복을 위한 계기로 인식했다.

공민왕은 즉위하던 해 몽고식 머리 모양과 복장을 과감히 버렸다.

충숙왕은 일찍이 몽고식 예절을 올리는 충혜왕에게

“너의 부모는 모두 고려 사람인데, 어찌 나를 보는 데 몽고례를 행하느냐”고 질책했다.

하지만 몽고의 지배가 100여 년 지속되면서 고려인의 정체성은 매우 약화되었다.

몽고를 증오했던 한족도

“원이 중국의 주인이 되어 80여 년이 지나자 언어, 복식, 기용,

문물에서 오랑캐의 것으로 변하지 않은 것이 드물다”고 생각했다.

쿠빌라이에게 봉사한 정주학파의 거장 허형(許衡)은 지배의 정통성을 ‘민족’이 아닌 ‘문명’에 두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고려 지식인들은 원의 과거(制科)에 합격하는 것을 선망했다.

대표적 지식인이자 개혁파였던 이색과 그의 부친 이곡은 모두 제과 합격자였고,원에서 관리 생활을 했다.

친원파들은 고려를 몽고의 일부로 만들자는 입성책(入省策)도 주장했다.

충선왕도 자신을 몽고인으로 생각했다.

특히 그는 쿠빌라이의 외손자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고려로 돌아가라는 원 조정의 요청을 거부하고, 원에 머물렀다.

하지만 공민왕은 원에 보낸 표문(表文)에서,

한반도인들이 “수당의 절정기에도 다만 속박을 받는 데 불과”했다고 주장하여,

독립성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냈다. 그는 또한 친원 세력의 제거 직후 내린 교서에서,

“우리 태조께서 창업하시고 여러 임금이 서로 이어받아,

모두 능히 선대의 왕업을 밝혀, 의관(衣冠)과 예악(禮樂)이 찬연히 볼만 하였다”고 하였다.

나아가 그는 “우리 조종(祖宗)의 법을 회복”하는 것이 새로운 정치적 목표 중 하나라고 천명했다.

‘의관예악’이나 ‘조종의 법’은 전통 어법에서 문명적 인식을 표현하는 말이다.

공민왕은 몽고와의 동화를 믿지 않았고, 가치 있게 여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원으로부터의 이화(異化)를 통해 고려 자신의 가치를 발견했다.

1356년 고려에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사람들도 이 시대가 낡고 퇴락했으며,

새 시대가 열려야 하는 전환의 시대라고 보았다.

하지만 몇 년이 그럭저럭 지나 간 후,

13세기 몽고의 침략 이래 가장 참혹한 전쟁이 6년여 동안 고려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 전쟁은 동북아의 정치적 안정을 지탱하고 있던 원제국의 쇠약과

그로 인한 힘의 공백으로 인해 발생한 소용돌이였다.

이 시대는 고려 역사상 가장 비참한 시대 중의 하나였다.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으로 서경(西京, 평양)과 개경(開京)이 함락당하고 폐허로 변했다.

왜구는 전 연안지방을 휩쓸고 내륙으로 진출하여 마침내 개경까지 위협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요동지역의 신흥세력은 취약한 동북부지방을 노리고 두 차례 국경을 넘었다.

고려가 쇠잔해지자 원은 공민왕을 제거하기 위해 군대를 출정시켰다.

해마다 기근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세력가들은 이 혼란 속에서도 백성에 대한 수탈을 멈추지 않았다.

전쟁과 기근, 부패한 정치 이 모든 재앙이 일시에 고려인을 엄습했다.

노국공주 죽음으로 정치와 인생 같이 무너져

▎북한 개성시 고려박물관에 전시된 공민왕 묘실.

공민왕은 뛰어난 자질에도 불구하고 고려와 백성을 구하는 데 실패했다.

역사에서 희망은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공민왕은 희망에서 혼란으로 갔다가, 무력감과 자책 끝에 정치로부터 퇴장했다.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했지만, 무엇보다도 공민왕의 희망과 자신감을 파괴했으며,

나아가 그와 신하들, 백성들 사이의 신뢰를 파괴했다.

1365년 왕비 노국공주가 죽자 그는 정신적 아나키 상태에 빠져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두 차례의 왕위계승 경쟁에서 패배한 공민왕이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노국공주와의 결혼 때문이었다.

고려의 왕들은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원 공주들과 하나같이 불화했다.

하지만 공민왕은 달랐다. 공민왕 19년 신하들과 맺은 맹세문에서,

그는 “연경에 있을 때 이미 노국공주와 고락을 같이 하였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단순한 왕비 이상의 존재로서, 고독한 공민왕의 인생에서 유일한 친구였다.

그녀의 성격은 “온공(溫恭)하고 세심하여 아내의 도리(婦道)를 따랐으며,

자상하고 혜애(惠愛: 은혜롭게 사랑함)하여 능히 어머니의 도리(母儀)를 드러냈다”고 한다.

총명하고 동정심이 많았지만 동시에 소심하고 격정적인 성격의 공민왕에게 그녀는 안식처가 되었다.

김용의 난 때는 밀실 문을 막고 앉아 왕의 생명을 구했다.

그러나 그녀는 공민왕이 자신의 모국 원을 배척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으며,

제2차 홍건적의 난에는 안동으로 피난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녀가 죽자 공민왕은 깊은 회한에 몸부림쳤다.

생모 명덕태후가 “어찌하여 비빈(妃嬪)을 가까이하지 않느냐”고 묻자,

왕은 “공주 같은 사람이 없다”고 대답하고 눈물을 흘렸다.

술에 취하면 공주를 생각하며 울었다.

공주의 무덤 “정릉(正陵)에 제사하고,

제사가 끝나자 능 주위를 돌아보고 배회하며 슬퍼하고,

정자각에 가서 공주의 초상을 보며 잔치를 베풀고

원나라 음악을 연주하며 생시와 같이 술잔을 올렸다.”

왕의 슬픔은 너무나 간절하여, 자학이나 자기연민처럼 보인다.

정치의 세계에서 사적 감정을 이처럼 직접 노출하는 것은 매우 예외적이고 위험하며, 유해하다.

공민왕은 누구보다도 그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듭되는 정치적 곤경에 직면하여 가까스로

현상을 유지하고 있던 왕은 마지막 끈조차 상실한 듯 보였다.

공민왕은 정치의 세계에서 떠나 한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의 정치적 인내력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신돈(辛旽)의 기용은 정치적 고립과 정신적 혼란을 타개하기 위한 극단적 처방이었다.

정치와 인생에 자신감을 상실한 그는 초현세적 구원을 희망했다.

한편 왕비를 추모하기 위해 거창한 토목공사를 강행하여

노역에 지친 백성들로부터 완전히 인심을 잃었다.

하지만 신돈의 권력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자, 1371년 공민왕은 신돈을 처형했다.

그 뒤 잠시 정치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원·명 교체기인 이 시기에 그는 대외정책에서는 상당한 재능을 발휘했다.

명과의 우호관계를 굳건히 지키고, 주인 없는 요동을 차지하기 위해 두 차례나 이성계를 파견했다.

하지만 그는 전체적으로 모든 것을 방관했으며,

음주와 성적 쾌락에 탐닉하여 방종한 생활에 빠져들었고, 그로 인해 죽음을 맞았다.

공민왕의 성적 방종은 도를 넘어섰다.

공민왕 21년, 자제위(子弟衛)가 설치되었다.

공적으로는 왕의 경호를 위해 귀족 자제를 선발했지만,

사실은 왕의 동성애 파트너들이었다.

공민왕은 동성애자였으며, 관음증과 사디즘적인 취향을 가졌다.

그는 “부인 모양으로 화장을 하고,

어린 내비(內婢)의 얼굴을 보자기로 덮고 자제위의 김흥경, 홍륜의 무리를 불러 난행하게 하였다.

왕은 옆방에서 구멍으로 들여다보다가 마음이 동하면 곧 홍륜 등을

왕의 침실에 들어오게 해 왕에게 난행(淫行)하게 하기를 남녀간에 하듯이 하여,

번갈아 수십인을 치르고서야 그치곤 하였다.”

“인도(人道)가 멸하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리오”

명덕태후는 공민왕에게

“왕의 업무가 지극히 많아 밤낮으로 정무를 해도 오히려 미치지 못하는데,

지금 왕은 해가 중천에 떠서 일어나니, 군국의 사무가 어찌 지체됨이 없겠는가”라고 질책했다.

윤소종은 “천하가 위란하고 국가에 재앙이 있는 때를 당하여,

깊이 구중에 거처하여 혹 한 달씩이나 정사를 듣지 않고,

어리석은 아이들과 소인배들을 가까이 한다”고 비판했다.

판사 윤호(尹虎)는 왕에게 “어두운 사람이라고 언제나 속일 수는 없으며,

밝은 사람을 속이려는 것은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니,

한 사람의 손을 가지고 천하의 눈을 가리기 어렵도다”라는 시를 바쳤다.

왕의 음행과 독선을 풍자한 것이었다.

자제위에게 후비들을 능욕토록 하자,

조준은 “인도(人道)가 멸하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리오”라고 탄식했다.

모반은 두려움과 경멸이라는 상반된 감정의 소산인데, 공민왕의 암살 역시 그러했다.

이처럼 공민왕의 음행은 상식을 초월한 것이었다.

또한 공민왕의 인간성은 파멸적인 상태에 빠졌다.

환관 최만생(崔萬生)이 익비의 임신 사실을 알리자,

왕은 “내가 후사가 없어 일찍이 공주의 영전을 부탁할 데가 없는 것을 염려했는데,

익비가 이제 임신하였으니 내가 무슨 근심이 있으랴”라고 말했다.

이어 홍륜이 불륜의 당사자임을 알자,

“내일 창릉(昌陵)을 배알하고 거짓으로 주정을 부려 홍륜의 무리를 죽여 입을 막겠다.

너도 이 모책을 알고 있으니 또한 마땅히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 밤 최만생과 홍륜은 왕을 암살했다.

1374년 9월, 재위 23년, 45세의 젊은 나이였다.

불륜에 의한 임신을 알고 왕이 기뻐했다는 것을 보면,

그는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이라도 불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공민왕은 조카 충정왕을 독살하고 측근 정세운, 안우를 죽였다.

그의 핵심 측근들도 거의 같은 운명을 맞았다.

처음에는 정치적으로 불가피한 상황이 존재했다.

하지만 최만생과의 대화를 보면, 공민왕은 오랜 정치적 삶에서 피폐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익비는 물론이고, 홍륜 등 자제위의 인물들도 결국은 공민왕이 탐닉한 욕망의 희생자들이었다.

이는 정치적 불가피성과 무관했다. 말년의 공민왕은 단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이기적이고 냉혹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사관은 “왕은 천성이 본래 엄중하고 행동이 예에 맞더니,

중년과 만년에 시기하고 사납고, 거칠고 미혹함이 더욱 심하였다”고 평가했다.

“신하의 말이 능히 나보다 슬기롭지 못하다”

▎목은 이색의 영정.

이색은 25세 청년 시절 공민왕의 측근정치 등 인사파행을 강하게 비판했다

공민왕대 말년의 정치적 상황은 참으로 암울했다.

하지만 초년의 정치적 분투와 성공은 눈부신 것이었다.

고려는 오랜 세월에 걸친 정치적 공백으로 거의 붕괴 직전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오직 자신의 정치적 수완에 의해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공민왕이 기울였던 남다른 노력과 뛰어난 정치적 재능을 생각하면, 그는 매우 불운했다.

공민왕의 실패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대규모 전쟁이나 기근처럼 시대 상황이 따라 주지 못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당대인들의 평가를 보면,

공민왕에게 상당한 기회가 있었으나 살리지 못했다고 본다.

첫째 공민왕은 마지막까지 측근정치를 청산하지 못했고, 마침내 그 희생양이 되었다.

1351년 11월 조일신이 공민왕의 첫 인사 명단을 가지고 원에서 귀국했는데,

그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공민왕을 원에서 수종한 측근인 원저수종공신들이 기밀, 경호, 재정, 병권 등 주요 직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질이 열악한 사람이었다.

고위직에 포열한 이들은 법을 무시하고 권력을 전횡하여 공민왕의 개혁에 대한 신뢰를 파괴했다.

▎정도전의 초상.

공민왕이 발탁했던 정도전은 고려의 폐허 위에 조선의 사상적 주춧돌을 세웠다

당시 25세의 청년 이색은 공민왕의 이런 인사에 대해

“아직 현사(賢士)를 우대하는 것을 보지 못했고,

정치에 자문이 급할 터인데 아직 저녁에 입시하는 신하를 위해 횃불이 밝혀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현사가 어찌 모두 등용될 수 있으며 간사한 자가 어찌 모두 물러가겠는가.

이렇게 하고서 다스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겠는가?”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명승 보우 또한 불법을 묻는 공민왕에게,

“군왕이 삿된 사람을 버리고 바른 사람을 등용한다면, 나라를 다스림이 어렵지 않다”고 답했다.

그러자 공민왕은, “내가 정사(正邪)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지만,

다만 그들이 나를 원에 따라가 모두 근로하였기 때문에 가볍게 버리지 아니할 뿐”이라고 말했다.

공민왕으로서도 의리와 인정상 논공행상을 외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정치적으로 취약한 권력기반을 지탱해 줄 자신의 손발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정치적 고비 때마다 목숨을 걸고 왕을 지킨 것은 개혁파 지식인들이 아니라 이들 측근이었다.

공민왕 5년 친원파를 제거할 때 칼을 들고 나선 것도 이들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개혁파 지식인들과 불화를 빚었다.

조일신은 이제현이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공민왕의 핵심 측근이었지만, 식견이나 학문, 명성에서는 이제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제현은 정승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조일신과 이제현은 단순한 개인을 넘어 공민왕의 정치노선이 지닌 모순을 상징하고 있다.

신돈의 등용이나 자제위의 설치도 부정적 정치노선의 사례들이다.

그러나 역사가 입증한 바처럼,

이 시대를 개혁할 비전과 의지를 갖춘 자는 이제현을 비롯한 신진 성리학자들뿐이었다.

둘째 정치적 소통에 실패했다.

즉위 초 공민왕은 신하들과 매일 만나 모든 국정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했다.

하지만 그 뒤 그 역시 모든 평범한 왕들과 똑같은 길을 걸었다.

정치적 경험이 완숙해지면서 그는 신하들의 의견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사견에 따라 정치를 전단했다.

이첨은 공민왕이 “여러 정무를 경험하기에 이르러 ‘신하의 말이 능히 나보다 슬기롭지 못하다’고 하여,

상벌과 임면(任免)을 임금 마음으로 결단하고 자문함이 없으므로,

나라의 치란(治亂), 정치의 득실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고 탄식했다.

공민왕 12년 감찰대부 김속명 역시 공민왕이

“즉위한 지 오래되어 국사를 두루 알고, 만전의 지혜를 가져서, 사람들을 많이 믿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 때문에 윤택은, “무릇 일의 득실은 임금이 비록 그것을 환히 알고 있어도,

대신에게 맡겨서 처리하지 않으면, 부지중에

그 해 악이 이루어져서 구하고자 해도 할 수 없다”고 공민왕에게 충고했다.

그러나 1365년(공민왕 14) 무렵부터 왕은 점점 폐쇄적인 인간이 되어,

끝내는 신하들과의 대화가 단절되었다.

이처럼 처음에는 자신의 뛰어난 자질과 정치적 성공으로 인해,

다음에는 실패로 인해 그는 점점 더 좁은 울타리 안에 자신을 가두었고,

결국 그의 주위에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는 고립되었고, 마침내 파괴적인 정국변동을 통해 정치로부터 도피했다.

그 결과가 신돈의 집권이었다.

성리학은 왜 진보의 이데올로기였나?

5대에 걸쳐 고려정치를 목격했던 공민왕의 모후 명덕태후는 작고 전 우왕의 손을 잡고 유언을 남겼다.

“우리나라가 왕업을 전한 지 이제 500년인데,

임금이 거의 다 신료의 말을 듣지 않았다.

왕은 중대한 문제를 상고하고 대사를 결정할 때는 반드시 시중 경복흥, 이인임, 판삼사 최영 및

여러 재상에게 자문하여 삼가 자기 마음대로 행하지 마시오.” 공민왕은 그런 단점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명덕태후의 따르면, 고려 정치 전체가 그 점에 미숙했던 것이다.

공자는 “나는 임금이 된 것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

아무도 내 말을 어기지 못하는 것이 즐거울 뿐이다”라는 말을 한마디로

“나라를 잃는다는 말에 가깝다”고 평한 바 있다.

한국 정치사에서 소통을 정치의 핵심 문제로 다룬 것은 여말선초의 성리학자들이다.

정도전은 <경제문감>에서 “천하가 모두 간쟁하는 것”을 이상적인 정치로 보았다.

이율곡에 따르면, 이를 이상적으로 실천한 정치가가 세종대왕이다.

그는 “예로부터 큰일을 성취한 군주가 지극한 정치를 흥기시키려 했을 때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현자를 대하였는지라,

군신간의 수작이 마치 메아리 울리듯 하였으며 마음을 열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상하가 서로 미쁘게 되어 정치가 이루어졌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셋째, 공민왕의 정신적 지평이 제한적이었다는 점이다.

공민왕은 종교와 예술에 뛰어난 소양을 가졌고,

그 문명적 반성은 ‘고려성’에 대한 뚜렷한 인식에 이르렀다.

정치적으로는 정치가의 책임과 부지런함을 강조한

<서경(書經)> ‘무일(無逸)’편의 정치관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이제현과 이색으로부터 본격화된 정치운동과 문명운동의 성격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다.

수다한 정치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개혁이 당대의 역사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무신란 이후 고려의 지성계는 파멸적인 상태였다.

유교적 지성만 아니라 불교도 정신적으로 부패하여,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

14세기 말 고려에서 새로운 역사적 전환을 이뤄낸 것은 성리학이었다.

12세기말 주희에 의해 남송에서 완성된 이 신유학은 세속적 세계에서 어떻게 완전한 삶이 가능한지,

아니 세속적 세계야말로 왜 인간의 진정한 완성의 공간이 되어야 하는지를 체계적으로 제시했다.

그것은 가족과 국가 안에서의 삶보다 출가인의 삶을 이상으로 제시하면서,

천 년간 중국 사상계를 지배한 불교에 대한 반격이자 대안이었다.

이 정신 조류는 1283년(충렬왕 9) 안향에 의해 고려에 처음 소개되었지만,

안향의 대안이 역사에서 절실히 인식된 것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뒤였다.

이제현은 충선왕의 만권당에 10여 년간 머물면서

성리학의 요체를 체인(體認: 마음속으로 깊이 인정함)했고, 이색이 그 뒤를 이었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이 중영(다시 부흥시킴)되었다.

이색은 그 책임자를 맡아 “다시 학식을 정하고, 매일 명륜당에 앉아 경전을 나누어 수업하고,

강경을 마치면 서로 함께 논란하여 지루한 것을 몰랐다.

이에 많은 학자가 모여서 서로 보고 감화를 받으니,

정주(程朱: 정자와 주자)의 성리학이 비로소 흥기했다.”

이 운동은 여말선초의 정신 및 정치운동에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고려의 전통적인 정신세계 및 정치세계를

전면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이곳으로부터 분출되어 개화하였다.

정몽주, 정도전, 박상충, 이숭인, 김구용, 윤소종 등이 그 추종자였다.

하지만 공민왕은 자신의 품 안에서 자란 이 운동의 의미를 자각하지 못했다.

역사의 결과를 놓고 보면, 성리학의 비전과 신흥무장의 무력이 만나 역사를 바꿨다.

정도전과 이성계가 그들이다. 두 사람 모두 공민왕에 의해 발탁된 인물이었다.

이들보다 한 세대 앞선 사람들이 이색과 최영이다.

문명의 전환에 대한 공민왕의 감수성이 좀 더 예민했다면,

공민왕의 안에서 이색과 최영은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대를 살고, 같은 조정에 있으면서도,

역사에서 만나지 못하고 각각의 길을 갔다.

최영은 오히려 이인임 노선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어, 신진 성리학자들을 탄압했다. 그

리하여 이색과 최영은 역사에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공민왕이 가교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그들의 삶은 물론 고려 자신도 갱생하여 로마처럼 1천 년간 지속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하자, 고려 안의 개혁도 실질적으로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의 정치와 문명은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왜냐하면 1388년 위화도회군 이후 조선 건국파에 의해 전면적인 개혁이 재개되기까지,

더 이상 상황의 개선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성균관의 잠재력에 무지했다

1370년(공민왕 19), 공민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명태조 주원장은

“왕의 소임은 가히 무겁다 할 것이니, 오직 지자(智者)라야

능히 환난을 미연에 방지하고 위기를 돌이켜 편안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지성이 언제나 정치가의 필수 요소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칭기즈칸은 글자도 몰랐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했다.

하지만 급격한 문명 전환기에는 높은 지적 능력이 필요하다.

대원군은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대원군은 뛰어난 정치적 자질은 갖춘 인물이었다.

박은식은 “대원군은 용맹과감하고 풍치(風馳: 바람처럼 달림)가 번개처럼 빠르고

제합(制合)·변통하여 구례에 구애되지 아니하고,

일을 바로 단행하여 다른 사람의 말에 좌우되지 아니하고,

권척을 배제하고 문벌을 깨트리고, 군포를 혁신하며,

서원을 철폐한 것 같은 유는 모두 뛰어나고 굳센 힘에서 나온 것이다.

여러 대 내려오던 습관의 동주(銅柱: 구리로 만든 기둥)·철벽을

손을 대어 부수어버린 것은 참으로 정치상 대혁명가라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조선 초기였다면, 대원군은 매우 성공적 정치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창조된 체제를 강화해야 하는 시대(administrator)가 아니라,

모든 것이 변하는 시대에 등장하였으며, 그 스스로 창조적 역할(initiator)을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변화의 성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왕조를 ‘혁거’해야 할 시대에 왕조를 ‘재건’하고자 했다.

당대의 정치상황에 대한 그의 이해는 근본적으로 전통적인 사유에 갇혀 있었다.

특히 대외상황에 대한 대처방식은 병자호란 이후의 화이론적 패러다임에 의존했다.

대원군은 질풍노도 시대의 문전에 서 있었으나,

자신이 어느 시대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대원군 집정기 10년에 대해 황현(黃玹)은

“이것은 천 년에 두 번도 없는 좋은 기회이므로 큰 일을 할 수 있는 시기였다’고 애석해 했다.

이처럼 대원군은 희망 용기와 힘, 기회를 가지고 있었으나,

새로운 시대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박은식은 한 정치가에게 개혁의지와 재능, 권력, 용기,

나아가 시운이 겸비되기란 매우 어렵지만,

대원군은 이 모든 것을 갖추었으면서도 애석하게 ‘배움’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일본의 근대를 연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율의(律儀)가 있어도

물사(物事)의 이(理)에 어두워, 나라를 걱정하는 것은 알아도 나라를 걱정하는

소이(所以)의 도(道)를 알지 못하는 자”를 비판한 바 있다.

지성은 모든 정치가에게 불가결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변혁시대의 정치가에게는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결여될 경우, 돈키호테처럼 당사자의 진지한 노력은

오히려 시대착오라는 희극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공민왕 역시 뛰어난 정치적 자질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려 왕조를 구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품안에서 자라고 있었던 성리학 운동의

새로운 문명적·정치적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목은 이색의 영정. 이색은 25세 청년 시절

공민왕의 측근정치 등 인사파행을 강하게 비판했다.

정도전의 초상. 공민왕이 발탁했던 정도전은 고려의 폐허 위에 조선의 사상적 주춧돌을 세웠다.

[김민정]

공민왕의 애환 고려의 멸망 잘보고
갑니다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