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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8일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제1독서 : 2코린 1,18-22
복 음 : 마태 5,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틀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히 사랑하는 관계였는데, 그 관계가 틀어져 오히려 원수가 되는 경우도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를 비교해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할 때는 무엇인가를 계속 주고 싶습니다. 받는 것이 아닌 주는 것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리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믿음과 신뢰로 상대방을 대하고 있습니다.
미워할 때는 억울함에서 시작됩니다. 나만 주고 상대는 받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받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대방에게 나는 호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마음이 생기면 남과의 비교도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남의 말에 더 귀 기울이게 됩니다.
사랑은 공평하게 배분되지 않습니다.
내 사랑이 ‘1’이니, 상대방도 ‘1’의 사랑을 줘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사랑의 크기를 정확하게 잴 수 있는 도구는 세상에 없습니다.
주고 받는 사랑의 크기가 같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똑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편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을 인정해야 사랑에, 특히 주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사랑이었고, 사도 바오로가 말한 ‘주는 것이 많아 행복한’ 사랑입니다.
주님의 자녀는 바로 주님처럼 사랑에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소금과 빛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요.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처럼,
또 빛을 함지 속에 가둬 놓아서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사랑을 내어 줄 수 있어야 의미 있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을 수 있을까요? 아마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짠맛을 잃기도 합니다.
사해에서 생산되는 소금에는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비가 내려 습도가 올라가면 염분이 가시고 불순물만 남게 됩니다.
이것이 짠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신앙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주님 사랑이 뜨거워서 절대로 죄를 짓지 않으며 살아갈까요?
그렇지 않지요. 이스라엘의 사해 소금처럼 짠맛을 잃어
주님의 뜻을 전혀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또 환하게 비출 수 있는 빛을 함지 속에 가둬 놓아서
밝게 빛나는 세상이 되지 못하게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죄를 멀리하고 선을 실천하는 삶,
즉 사랑의 삶만이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으며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주는 것이 많아 행복한 세상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의 소금이자 빛인 우리들
- 주님은 발광체發光體, 우리는 반사체反射體 -
이수철 프라니스코 신부
“주께서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시편27,1ㄱ)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빛나게 하소서.”(시편119,135ㄱ)
오늘 입당송과 화답송 후렴이 오늘 복음과 관련되어 깊은 묵상감이 됩니다.
주님은 발광체인 빛 자체이시고,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라는 것입니다.
흡사 태양과 달의 관계와 같습니다. 이를 참으로 깨달아 알 때 겸손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11,29)
예수성심성월인 6월에 자주 고백성사 보속으로 자주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입니다.
예수성심의 온유와 겸손의 사랑을 배워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세상의 소금으로, 또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문득 오래 전에 써놓은 ‘하늘과 산’이라는 자작 애송시도 생각납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다짐하며 정주한지 33년!
하루에도 수없이 날마다 바라다 본 불암산과 배경의 하늘입니다.
참 많이도 강론에 인용했던 좌우명 같은 시이기도 합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하늘이 주님을 상징한다면 산은 우리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영적 여정은 주님이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주님이시자 영원한 도반이신 예수님과의 우정이 깊어가면서
주님을 닮아갈수록 주님을 환히 반사하는 반사체로 세상의 빛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배치도 의미심장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장엄한 산상설교가 어제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에 이어
곧장 세상의 소금이자 빛인 우리의 신원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참행복 선언은 주님의 기도가 그렇듯 그대로 예수님 삶의 반영이자 요약입니다.
우리가 참행복 선언을 실행하여 살아갈수록 참으로 행복한 성인이 될 것이며
동시에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단 참행복 선언뿐 아니라 7장까지 이어질 산상설교의 실천이 깊어질수록
주님과의 일치도 깊어질 것이며 명실공히 세상의 소금이자 빛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이자 빛은 바로 우리의 신원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참으로 예수님 공부와 예수님 살기는 우리의 평생과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그대로 존재이유의 상실이요 매력상실입니다.
음식이 맛이 가면 버리기라도 하는데 사람이 맛이 가면 참 버릴수도 없어 난감합니다.
정주定住가 안주安住가 되어 타락, 부패, 변질되어 맛을 상실하면 대책이 없습니다.
참으로 세상에 속화俗化되지 않고 세상을 성화聖化하는 소금으로 살기위해
주님과의 깊은 일치의 관계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세상과 분리할 수 없는 존재인 우리들을 뜻합니다.
세상을 떠난 우리들, 음식을 떠난 소금처럼 무의미합니다.
부단히 녹아 사라지면서 세상의 부패를 막아주고
맛을 조장하면서 끝까지 변질되지 않는 소금으로 남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우리 정주의 수도자는 물론 신자들의 삶이 이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기에 앞서 주님은 우리의 소금과 같습니다.
우리의 부패와 변질을 막아주는 소금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떠날 때 악취 나는 부패腐敗인생 되기 십중팔구이고,
주님과 우정이 깊어질수록 한결같은 삶에 향기로운 발효醱酵인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성령은 우리의 소금이자 효소酵素도 됨을 봅니다.
악마는 영리합니다. 시간낭비하며 이미 부패 변질된 매력 상실한 사람을 유혹하지 않는다 합니다.
유혹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고마성道高魔盛, 도가 높은 곳에 유혹도 극성이란 말도 있습니다.
도가 높아 매력적이 될수록 악마의 유혹도 가열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적전쟁의 삶에 소금이신 주님과의 일치를 통한
한결같은 삶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세상의 소금인 우리 신원에 이어 세상의 빛이 또한 우리의 영예스런 신원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빛입니다. 발광체이신 빛이신 주님을 반사하는 세상의 빛인 우리들입니다.
새삼 주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주님과의 관계와 더불어 함께 가는 빛의 농도입니다.
주님을 떠날 때, 주님과의 관계가 냉담으로 점차 소원해질 때,
빛은 사라지고 어둠이 점차 크게 자리잡아갈 것이며 저절로 매력 상실에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우리 삶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독서와 복음의 두 말씀이 깊은 여운으로 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도 되시면서 ‘아니요!’ 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는 늘 ‘예!’만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이 그분에게서 ‘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아멘!’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시자 평생 도반이신 예수님처럼
전적 순종의 “예!”의 사람, “예스 맨(yes-man)”의 삶을 살 때,
예수님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아멘!”의 삶을 살 때,
참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의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삶은 ‘알렐루야-찬미’와 ‘아멘-감사’로 요약됨을 봅니다.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로 살다가, ‘아멘- 하느님 영광’으로 마치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의 삶이라면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하겠는지요!
또 하나 복음의 결론같은 말씀도 참 중요합니다.
“이와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바로 우리 삶의 궁극 목표입니다.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자폐적인 삶도 막연히 추상적인 삶도 아니라
착한 행실을 통해 구체적으로 그대로 세상에 드러나는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찬양함으로
궁극에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이자 빛으로서의 삶은 그대로 존재 자체로 복음 선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평생 변질되지 않고 언제나 한 결 같이 세상의 소금이 되어
세상의 부패를 막고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우리 수도원은 세상과 고립된 섬같은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활짝 열려있는 세상의 중심같은 존재입니다.
세상의 부패를 막아 주고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서의 존재!
바로 우리들의 자랑스런 신원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주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여정, 예닮의 여정입니다.
이래야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소금인, 세상의 빛인 수도공동체가 되기 위해
매일 평생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 전례기도에
항구한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바로 이 공동전례기도의 은총이,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세상에 속화, 변질되지 않고 세상을 정화, 성화하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아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신원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선언하십니다.
곧 우리가 어떤 존재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주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는 말은
바로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아들로서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행실을 보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무엇을 행하느냐는 문제라기보다 어떻게, 그리고 어디를 향하여 행하느냐? 문제입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자신을 녹이고 자신을 태우는 일이요,
세상이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우리의 사명이나 역할 의 본질이 우리의 신원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신원을 깨우쳐주고 밝혀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다.”(마태 5,13-14)
이는 우리의 신원이 세상을 향해 있는 존재임과 동시에
우리의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세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합니다.
곧 우리를 세상 위에서 비추는 빛이고, 세상 안에서 녹는 소금이라 하십니다.
곧 세상 안에서 자신을 ‘녹여’ ‘세상’의 부패와 불의를 막고 세상의 맛을 내는 ‘소금’이라 하시고,
자신을 ‘태워’ ‘세상’을 비추어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라 하십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문헌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세상 안에 살되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곧 세상에 살되 세속 정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사명은 단지 어둠을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막는 데 있고,
빛을 비추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빛으로 이끌어 가는 데 있습니다.
곧 단지 자신의 영혼 구원만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랑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세상을 비출 수 빛인 것은 아닙니다.
단지 “빛의 자녀”(요한 12,36;에페 5,8)로서 그 사명을 수행할 뿐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헌장>(Lumen Gentium)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인류의 빛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비추는 빛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여야 할 일입니다.
이는 우리가 결코 자기 자신을 향하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과 타인’을 향하여 있는 존재요, ‘하느님’을 향하여 있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신원이요 사명입니다.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마태 5,16)
주님!
빛이 불타오르게 하소서.
제 안에 심으신 심지에 불을 붙이시고, 제 몸을 녹여 빛이 되게 하소서.
어둠을 피하지만 말고, 막고 부수게 하소서.
빛을 비추지만 말고, 껴안고 이끌게 하소서.
제 행실이 사람들을 비추고, 세상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어릴 때 동화책에서 ‘우렁각시’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가난한 총각이 밖에서 고된 일을 하고 돌아오면
누군가 집을 청소해주고, 맛있는 저녁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총각은 누군지 궁금해서 살펴보니 우렁각시가 청소도 해주고,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그 뒤로 이웃을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숨은 곳에서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을
‘우렁각시’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캠핑을 가면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텐트를 치는 일, 음식을 만드는 일, 쓰레기를 치우는 일, 장작을 피우는 일,
설거지, 장을 보는 일이 있습니다.
새벽에 전날 먹었던 음식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혼자 남아서 음식을 준비하는 분이 있습니다.
쓰레기를 버리고, 새롭게 쓰레기봉투를 내어 놓은 분이 있습니다.
캠핑이 즐거울 수 있는 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렁각시처럼 솔선수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렁각시’가 될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할 때면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 손도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도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을 기억합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렸던 베로니카를 기억합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숨은 곳에서 봉사하는 ‘우렁각시’를 보았습니다.
장대같은 비가 내리는 여름날이었습니다.
한 형제님이 성당으로 오셔서 열린 창문을 닫았습니다. 하수구에서 오물을 꺼냈습니다.
성모 상 앞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본당 신부가 피정을 가면 성당에 오셔서 본당 신부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형제님도 있었습니다.
눈이 오면 마당의 눈을 치웠습니다. 차량 봉사를 하였습니다.
설날이나 추석 때면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떡을 나눠주던 형제님도 있었습니다.
미사가 끝나면 신자들이 함께 나눌 음식을 장만하는 자매님도 있었습니다.
예쁜 꽃을 심어서 성당을 환하게 꾸며주는 자매님도 있었습니다.
성당에 다닌다는 이유로 잘못한 이웃을 용서해 주었던 형제님도 있었습니다.
우렁각시가 많은 본당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쳐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인류를 구원할 큰 업적을 남기는 것일 수도 있고,
사업에 성공해서 큰 재물을 얻는 것일 수도 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남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합니다. 들에 핀 작은 꽃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다면 그것도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살고, 주어진 일에 감사를 드리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면
그 또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최 민순 신부님의 아름다운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두메 꽃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해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그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을 수 있도록 하십시오.”
오늘 내가 걸어온 길이 신앙인으로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가 걸어온 그 길로 다른 사람들도 기쁜 마음으로 따라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 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소금과 빛의 공통점은 주위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입니다.
소금은 음식에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며 인체 내 전해질 농도의 균형을 유지합니다.
빛은 에너지를 생성하고 어둠을 몰아내어 활동 영역을 확대해 주지요.
소금과 빛은 인간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 요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소금과 빛이라고 하신 것은,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는 격려인 동시에,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목표를 설정해 주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그리스도인은 홀로 자족하는 외딴섬이 아니라
서로 선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로 불리움 받았으니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이(우리가) 소금처럼 "제 맛"을 간직하기를, 빛처럼 모든 사람을 비추기를 바라십니다.
번쩍이는 금도 아니고 명품도 아니지만 세상 어디서나 꼭 필요한 소금이기를,
세상 곳곳을 묵묵히 비추는 빛이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우리가) 소금이고 빛이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소금 자체, 빛 자체가 주목받고 칭찬받는 것이 아니라,
그 영향으로 세상에 주님께서 드러나시는 거지요.
소금과 빛 역할을 하는 이들은 진리 자체이시고 빛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바를 명료히 제시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 '아멘!' 합니다."(2코린 1,20)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우리의 응답은 순종입니다. 겉과 속이 같은 "예!"지요.
사도가 "그분께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2코린 1,19)라고 하듯,
이 순종의 모범은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린 "예!"는 맹목적인 굴종이나 무성의한 방관의 태도에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의 이해에서 흘러나옵니다.
온전한 진리이시고 온전한 선이시며 온전한 아름다움이신
아버지의 의지와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며 자신을 던지는 사랑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또한 우리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2코린 1,22)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인장과 성령은 우리 영혼이 "소금기"와 "밝기"를 간직하게 해 줍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다움을 유지시켜 주는 필수 요소라 할 수 있지요.
우리는 이 "소금기"와 "밝기"를 지켜나가길 원하시는
아버지의 부르심에 "예!" "아멘!" 하고 응답합니다.
세상의 소금인 제자(우리)로 인해 부정부패와 억압, 소외와 무관심으로 풍겨나는 악취가
그리스도의 향기로 뒤바뀝니다.
세상의 빛인 제자(우리)로 인해 어둠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절망에 빛이 스며듭니다.
단번에 온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어도 우리가 속한 세상 한 구석,
스쳐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에 단 한 영혼이라도 일으켜 세울 수 있다면
하느님은 우리로 인해 찬양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의 "예!" "아멘!"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우리의 소금기와 밝기는 겸손하고 결연한 "예!" "아멘!"의 고백으로 지켜지고 확장될 것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의 요구에 무조건 "예" 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신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소금과 빛은 공기와 물, 혹은 양식처럼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물론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은 내어놓아야 합니다.
소금이 녹지 않고 불이 타지 않으면 누구도 살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싶어 합니다.
배우자를 위해, 자녀를 위해, 이웃을 위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왜 잘 안 될까요?
이것에 대한 통찰을 그린 영화가 있습니다.
‘삼사라’(The Samsara: 2001)입니다.
삼사라란 의미는 영겁의 재생과 윤회가 벌어지는 세계를 뜻한다고 합니다.
윤회의 세상이 삼사라인 것입니다.
해발 3500m에 위치하는 라닥의 어느 수도원의 동굴에 한 승려가 고행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타쉬’입니다. 3년째 명상에 잠겨 있는 것입니다.
머리는 길어서 어깨까지 내려오고 손톱과 발톱은 마음껏 자라서
마치 동물의 그것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때 고행 기간이 끝나 감에 따라 그의 스승과 동료 승려가 동굴에 도착합니다.
오랜 명상을 끝낸 타쉬의 손과 발과 온몸은 거의 굳다시피 하였습니다.
이런 그를 정성껏 씻겨 주고 손톱과 발톱도 잘라주며 머리까지 깎아줍니다.
일행들이 그를 싣고 사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폐허가 된 사원을 지납니다.
그곳의 돌무더기에 쓰인 문구를 우연히 주인공은 보게 됩니다.
그 돌에는 티벳어로 다음과 같이 씌어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사원으로 돌아온 타쉬는 3년간 고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라마교 최고의 입문식에 참여하고 고위직까지 받게 됩니다.
그 행사날에 축제가 벌어지는 데 예상치 못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젊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광경입니다.
생전 처음 그런 장면을 목격한 타쉬는 그 이후로 매사가 의욕이 없게 됩니다.
이것을 보고 그의 도반 승려의 눈에는 눈물이 맺힙니다.
아마도 이후로 전개될 험난한 인생 여로가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변화된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사원에서는 마을 축제에 참여할 것을 권유합니다.
그런데 마을 축제에서 운명적인 여인과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여인을 보고 나서부터 모든 것이 뒤틀려지는 생활이 시작됩니다.
이런 현상을 눈치 챈 그의 스승이 타쉬를 어느 묵언 정진 중인 고명한 승려에게 보냅니다.
그 승려는 동굴 속에서 정진하고 있었는데 타쉬가 오자마자 알아채고 그림을 내밉니다.
그림 속에는 남녀가 교합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약간 기울어 보면 해골로 변하는 신기한 그림입니다.
모든 애욕이 허무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자로 된 액자도 보여줍니다. 그 액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곳에 도가 있노라.”
이 글을 보고 타쉬는 부리나케 되돌아와 그의 스승에게 따지듯이 묻습니다.
부처님도 29세까지는 속세에서 사셨고, 깨우침도 속세의 경험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5세 때부터 속세를 떠나 부처님같이 살아왔지만,
부처님 같은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수행 후 온다던 자유와 금욕 후의 만족감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깨우치기 위하여 몰라야 할 것도 있지만, 포기하기 위하여 알아 둘 것도 있지요.”라고 말하면서
사원을 떠나게 됩니다. 환속하게 된 것입니다.
떠돌이로 나서면서 찾아간 곳이 전에 마을 축제할 때 눈이 마주쳤던 처녀의 집입니다.
추수할 때까지 일을 도와주기로 한 것입니다.
결국, 처녀와 결혼하게 되고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아들까지 낳고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세속의 일이라는 것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곳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세상 욕망에 물들어가는 타쉬는
수행자의 모습이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속세의 인물로 변하였습니다.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하여 일꾼을 줄이자고 말하는가 하면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집에서 부리던 여자 일꾼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범부보다 더 못하게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도반이었던 친구 승려가 방문하였습니다.
스승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승의 편지를 전달해 주었습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난 삼사라를 향해 귀의하게 됐구나. 우린 다시 꼭 만날 것이다.
우리가 재회하는 그날 수천 가지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과 한가지 욕망을 정복하는 것 중,
어떤 게 더 중요한지를 알게 되겠지.”
스승의 편지를 받고 난 후 타쉬는 반성하게 됩니다.
수천 가지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살아왔지만,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욕망을 죽이고자 그렇게 수행했던 것이 다 허사였다는 옛 기억도 있습니다.
그래도 한 욕망을 정복하기 위해 수행을 다시 하기로 합니다.
타쉬는 아내와 아이가 잠든 사이에 집을 떠나게 됩니다.
마치 부처님이 야소다라 왕비와 아들 라훌라를 남겨두고 떠나듯이 새벽에 떠납니다.
그리고 다시 삭발하고 승복을 걸친 모습이 되었습니다.
한참 길을 걷던 중 어느 무너진 오래된 사원 앞에 다다르자
놀랍게도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야소다라 왕비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그 왕비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책임한 행동에 대하여 질타합니다.
“당신이 불도를 사랑한 열정이 내게 보여준 사랑만큼만 강했어도
당신은 지금 이 현세에서 부처가 됐을 거예요.”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온전히 욕망을 이겨내지도 못하는
이도 저도 아닌 타쉬의 모습을 질타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타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지만,
아내는 염주가 든 단지를 남편에게 주고 가버립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타쉬는 절규하게 됩니다.
땅을 뒹굴며 절규하다 잠이 들게 되고 잠에서 깨어나자 눈에 무언가가 보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3년간 명상을 마치고 난 후 사원으로 가던 길에 보았던 바로 그 돌이었습니다.
그 돌에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을 돌리자 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바다에 던지면 되느니….”
이 글을 보고 타쉬는 짙푸른 창공을 쳐다보게 됩니다.
창공에는 독수리 한 마리가 자유롭게 날고 있었습니다.
[출처: ‘영화이야기-삼사라’, 다음 카페, ‘따밥사모’]
타쉬는 수행을 하여 욕망을 가라앉히면 열반에 이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욕망을 죽이려고 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내려가 참사랑을 실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욕망이 살아있는 한 그것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또 이웃들의 피와 눈물을 흘리게 할 뿐임을 알았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불교 교리의 한계를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구도의 한계를 느끼고,
욕망을 죽이고 참 빛과 소금이 될 에너지원인 신의 존재에
우리 몸을 담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은 나의 사랑이 마르지 않게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사랑 안에 자신이 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욕망도 사라지고 마르지 않는 물을 내어줄 수 있는 생명의 원천이 됩니다.
이것이 빛과 소금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복음은 진복팔단 바로 뒤에 나옵니다.
진복팔단은 먼저 자신의 욕망을 비우고 하느님으로 자신을 채워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할 때 박해도 받겠지만 가장 행복하다는 내용입니다.
내가 비워지고 주님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내가 주는 한 방울의 물은 금방 말라버립니다.
내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욕망이 사라지고 참 만족을 느끼기 전에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내 물이 마르면 다른 물을 빨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