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가수 김현식이 서른 넷, 짧은 삶을 마치기 전에 日刊스포츠에서 연재한 자서전입니다.
다 알겠지만 70년대 말의 젊은이들의 문화는 통기타와 생맥주문화였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장발이었다. 나 역시 마치 히피족과 같이 어깨까지 치렁치렁 머리를 늘이고 다헤진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그러다 경찰에 적발돼서 머리를 잘린 적도 있었다.
오랫동안 듀엣으로 같이 활동하던 승희와 헤어지게 되었다. 서로가 음악적으로 많이 성숙했다고 생각했고, 또 갈수록 두드러지는 서로가 개성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
혼자 활동하던 내게 어느날 김동환이란 친구가 찾아왔다. 같이 진짜 음악을 해보자는 거였다. 그 친구의 태도가 워낙 진진해서 나는 그의 제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같이 듀엣을 하기로 결정하고서 우리는 연습을 위해 인천 앞 작약도로 떠났다. 배낭에 기본적인 생활도구들을 챙겨넣고 약간의 양식과, 또 우리의 연습장이자 숙소로 쓸 2인용 텐트까지 챙겼다. 그리고 작약도의 한 바닷가에 텐트를 쳐놓고 맹연습에 들어갔다. 바닷물이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모래사장, 밤늦게 램프의 불을 밝힌 텐트 속, 어디나 모두 우리의 24시간 연습장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음악을 위해서 그토록 열정을 바쳤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음악만을 생각하며 지낸 한달여간의 기간은 내 음악의 가장 큰 밑거름이 된 시간이었다. 한 번은 저녁무렵 우리의 연습텐트 근처에서 고기를 잡던 뱃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매일 고된 노동을 하며 힘겹게 살아거던 그들에게는 우리가 한적한 바닷가를 찾아 휴가를 즐기고 있는 부잣집 아들들로 보였었나 보다. 그들은 바닷바람에 검게 그을린 얼굴과 울퉁불퉁 근육질의 체격으로 우리의 텐트 속에 들어왔다. 그리곤 다짜고짜 '당신들이 하는것이 꼴 사나우니 당장 여기를 떠나라'고 윽박질렀다. 만약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면 강제로라도 떠나게 하겠다는 기세였다. 동환이와 내가 아무리 설명했지만 그들의 기세는 막무가내였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우리가 비록 무명이었지만 노래를 부르면서 열심히 살아가려는 가수라는 사실을 알려주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우리가 연습해왔던 외국곡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좋아할 성싶은 뽕짝들고 그럴싸하게 기타반주로 불렀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험악했던 그들의 기세가 조금씩 누그러져 노래가 끝날 때쯤에는 박수까지 치며 따라 부르고 있었다. 결국 그날 우리와 그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술추렴을 하며 같이 노래했고, 그 일로 오히려 그 사람들과는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 뒤로 먹을 것과 일용품을 구해다주는 등 우리를 많은 면에서 도와주기도 했다.
그렇게해서 한달여에 걸친 우리의 '지옥훈련'은 끝났다. 우리는 짐을 다시 꾸리고 서울로의 금의환향(?)을 위해 정든 우리의 연습장과 이별을 고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던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어찌어찌 생필품을 조달하느라 돈을 썼더니 주머니에 한푼도 남아있지 않았다. 친했던 뱃사람들은 다 배를 타고 이미 떠났다. 어떻게 사정해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왔다. 그러나 서울까지 돌아갈 길이 막연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일단 걷기로 했다. 까마득한 염전들 사이를 걸어서 어느 읍내, 서울가는 시외버스들이 드나드는 곳에서 사람들에게 구걸을 해서 간신히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 한여름의 땡볕 아래서 배낭을 메고 걷던 끝이 없을 것 같던 염전이 눈에 선하다. 마치 그때 그 염전을 걷는 것이 훌륭한 가수가 되기위해 내가 당연히 감내하여할 고행인 것도 같았다.
서울로 올라온 우리는 이브와 쉘브르에 내가 노래를 불렀다. 동환이와의 호흡은 '지옥훈련'으로 맞췄던 만큼 누구보다도 잘 맞았고, 우리의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져 갔다. 한번은 이장희 선배가 진행하던 <0시의 다이얼>이라는 당시 최고 인기의 라디오 프로에 게스트로 나간 적이 있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아마 이장희 선배가 특별히 배려한 것 같았다. 우리는 제법 이장희 선배와 음악 얘기도 하고 우리의 노래들도 직접 불렀다. 나올때 우리는 출연료로 2천원을 받았다. 당시 2천원이면 친구 몇명이 나이트클럽에서 신나게 놀 수 있을 만큼 적지않은 액수였다. 돈보다도 방송에서도 이제 대접받는 가수가 되었다는 생각에 뛸듯이 기뻤다.
그러던 중 나는 뜯하지 않은 일로 잠시 음악을 중단해야만 했다. 무대뒤에서 몇모금 빨아본 대마초 때문에 잠시지만 구속의 몸이 되었다. 법이 정한 형량을 채우느라 나는 그후 약 8개월동안 영아의 생활을 했다. 그때가 78년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때 나는 군대소집영장을 받게 되었다. 어쨋든 죄를 지어 수감되어 있는 몸인데 영장을 받게되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8개월 후 나는 범법자로서 군대 소집이 정지되고 출감후 경기도 미금 부근의 훈련소에서 6주간의 기본교육을 받게 되었다. 기억나는 것은 다들 나와 같은 결격사유가 있어서 훈련을 받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우리끼리는 끔찍하게도 서로를 아껴주었다. 아마 그때 나는 절도범, 병역기피자 등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 알게된 것 같다. 그들에게는 훈훈한 정같은 것이 있었다. 사랑하던 애인이 변심한데서 폭력을 휘두르고 들어온 사람도 있었는데, 나는 그때 그 사람도 가장 뼈아프게 사랑외 소외받은 소외계층이라고 내 나름대로 생각했다.
나는 6주간의 훈련을 받고 다시 사회에 복귀했다.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적은 기간으로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마쳤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론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 기간만큼 열심히 노래를 해서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라는 뜻으로 알았다. 다시 통기타와 음악다방과 밤무대를 돌면서 노래부르는 생활이 시작됐다. 이때부터는 또 나만의 노래를 만들기 위해 밤을 꼬박 세우는 버릇이 생겼다. 후에 내가 속한 그룹의 이름이 되기도 한 노래 <봄여름가을겨울>도 이때 만들어진 노래다.
내가 작곡도 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평소 나를 눈여겨보던 이장희 선배의 주선으로 서라벌 레코드사에서 앨범을 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가수로서 나의 첫번째 앨범을 낸다는 사실이 조금은 두렵기도 했지만 앨범제작은 어떤 일보다도 내가 가수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며칠간의 고민 끝에 그 제안에 응했다. 그러곤 거의 매일밤을 만들어놓은 곡을 정리하고 다듬느라 지새웠다. 가수가 자신의 앨범을 만드는 것은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집을 만드는 것이나, 영화감독이 영화를 만들어 내놓는 것과 거의 똑같은 작업이다. 그만큼 조금이라도 좋은 작품을 내놓기 위하여 뼈를 깎는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타이틀로 <김현식 1집>이 나오게 됐다. 그러나 이 앨범이 나오기까지는 녹음이 끝나고 2년이 더 지나 80년이 되었다. 음반사 측에서 대마초 직후의 내 이미지를 염려해서 발매 시간을 연기한 것이다. 아무튼 일단 <김현식 1집>을 녹음하고 나서 나는 서라벌의 식구가 됐다.당시 서라벌에 소속돼 있던 가수들과 함께 군장병 위문공연도 가고 해변공연도 다니고 하면서 나는 본격적인 가수로 알려지게 됐다.
첫댓글
띵곡이죠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