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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설교 10:34~43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음 10:44~48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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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베드로는 각 나라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그분이 받으심을 깨달았다며 화평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죄 사함에 관한 말씀을 듣는 모든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일행이 놀라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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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설교 10:34~43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십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와의 만남을 통해 이를 확신합니다. ‘외모를 보다’(34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편애하다’를 뜻하는데, 여기에는 민족·인종·성별·계층 등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 죽음과 부활을 요약해서 전합니다. 이는 그의 다섯 개 설교 중 마지막 설교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부어 주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마귀를 물리치시고 모든 선한 일을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더 깊은 묵상
베드로는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심을 어떻게 깨달았나요?
내가 편견을 버리고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전할 대상은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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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음 10:44~48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내려오십니다. 듣는 이들이 믿음으로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입니다. 베드로를 따라서 함께 고넬료 집에 왔던 할례받은 신자들은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 주시자 놀랍니다(45절; 10:23).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47절)라고 한 베드로의 말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어졌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죄 사함의 은혜와 성령을 선물로 받은 이방인들은 세례받고 교회의 일원이 됩니다. 성령은 먼저 오순절에 유대인에게 임하셨고(2장), 다음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혈인 사마리아인에게 임하셨으며(8장), 이제는 이방인에게도 임하십니다.
●더 깊은 묵상
이방인 고넬료 가족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은 내게 어떤 선물을 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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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없이 열린 구원의 문
아내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우리 두 사람은 우리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증조할머니는 황을 드시고 자살 혹은 낙태를 시도했기에 교회 묘지에 안치되지 못했다. 할머니의 시신은 문밖에 묻혔다. 스웨덴계 미국 이민자인 할아버지는 고등학교 수위를 비롯해서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셨다. 아흔세 살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할아버지의 삶 역시 평생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삶이었다.
여러모로 우리 모두의 삶은 이와 같다. 성경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아무런 수치도 죽음도 없이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 절대적인 친밀함을 경험했던 ‘문 없는 삶’을 묘사하며 시작된다. 그러나 죄로 인해 우리는 문밖으로 쫓겨났다. 우리는 모두 문밖에 있다. 죄는 문이 없는 방이다. 그런데 거기서 예수님이 양의 문이 되셨다. 문이요 길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갈 수 없었던 저 하늘이 이 땅으로 내려왔다.
그래서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 오직 예수님만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로 내내 찾아 왔던 문이다. 이 문이 나타나기 전까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기만 하며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차별 없이 이 문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예수님이 문을 열어 놓으셨다.
선택 훈련 / 존 오트버그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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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사도행전 10장 47절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하시자 베드로는 즉각적으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깨뜨립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물로 세례 베푸는 일을 금할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변화와 결단은 신비한 체험을 통해 생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늘 가까이하며 상고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의 신비한 역사를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깨닫는 안목은 말씀에 서 옵니다. 말씀을 제대로 알면 성령의 역사를 깨닫는 영적 안목이 생깁니다.
회복된 교회야말로 가장 훌륭한 전도자다. - 마틴 로이드 존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고 차별 없이 화평의 복음을 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어 하나님이 제게 허락하신 땅끝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성령의 능력으로 연합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182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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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받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고넬료와 그의 가족이 세례를 받는 사건은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의 서막입니다. 이제 사도행전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를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바로 우리에게 왔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요! 우리가 받은 복음이 은혜인데, 어찌 우리가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이방인과 교제할 수 없는 전통을 어기면서 복음을 전했던 베드로처럼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소외된 자들에게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사울의 회심과 더불어 베드로의 계속되는 복음전도 사역(기적은 말씀 사역을 뒷받침하고 따라오는 사역이다)의 결과, 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오고 그 수가 많아졌습니다.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넘치면서 말입니다. 이런 은혜를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에 풍성히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날의 교회에 참된 회심이 일어나도록 복된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저 교회 다니고, 예배드렸다는 것으로 해야 할 의무를 끝내버린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으며, 진실로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생의 방향을 통째로 전환하는 은혜로운 역사들이 오늘 우리의 교회와 가정과 한국 교회에 많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모든 일들을 그들의 모어로 잘 나눌 수 있는 준비들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자
주님께서 택하여 주시고,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성실히 잘 감당해 나가기 위해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고, 매일매일 시간을 더 아끼고, 잘 활용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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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일어난 일을 듣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다 받으시는 줄을 깨달았노라.
베드로는 유대인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고, 유대인만 하나님이 사랑하고 구원하시는 줄 알았다. 그렇기에 자신들과 이방인은 완전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방식이 옳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고, 이방인들의 삶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넬료를 통해 하나님은 그렇지 않은 분이신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섬기고 내가 주님을 따라가는 방식만이 옳고, 나와 다르거나 내 생각, 내 방식과 다르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다른 사람의 다른 방식으로 섬기는 것을 인정하는가?
나 역시 정형화된 사고방식이 있다. 그렇기에 아내가 가끔 바리새인이라고 부른다.
유연한 생각, 넓은 마음을 주님께서 나에게 부어주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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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짐의 순간(행10:34-48절)
오늘 말씀은 드디어 베드로 사도의 생각의 틈새가 메워지고 깨어짐의 순간을 맞이한 이야기입니다. 34절은 베드로 사도의 깨어짐의 순간을 잘 말해줍니다. 우리는 이 깨어짐의 순간에 대해 묵상하기 전에 먼저 베드로 사도가 전하고 있는 화평의 복음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베드로는 화평의 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34-35절과 43절을 차례대로 보시기 바랍니다.
34절에 베드로는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43절에 가면 모든 사람, 즉 가운데 설명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36절부터 43절 초반부까지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베드로가 깨달은 화평의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탄 정복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부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모든 일에 자신이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증인으로서 이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화평의 복음입니까
? 이 복음은 듣고 믿는 모든 사람, 즉 이방인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많이 배운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다 죄 사함을 얻는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평을 얻게 되고,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스스로 만들어 놓은 장벽들이 허물어져서 화목케 하는 직책으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베드로 사도 자신이 서 있는 자리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서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이제 45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은 이방인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랐습니다. 자신들에게 밖에는 구원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만, 그런 잘못된 생각의 장막이 깨지고 있습니다. 이미 살펴본 베드로 역시 그랬습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면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베드로에게 각각 역사하셔서 만나게 하시고 욥바에서 증인들까지 동반하게 하셔서 이방인도 성령 받을 수 있다는 분명한 인준을 해 주신 것입니까? 유대인들에게 주님이 이방인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감옥보다 훨씬 더 무서운 감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각의 감옥입니다. 탑과 같은 사고방식에 한번 자신을 가두게 되면 거기서 나오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의 감옥은 우리 안의 화평을 깨트립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사람들은 꿈에도 자신들의 그런 생각이 화평을 깨트린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넬료를 만나면서 자신들이 생각의 쇼쌩크에 갇혀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생각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어쩔 줄 몰라 하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비극입니다. 아픔입니다. 복음은 화평입니다. 사랑입니다. 분열과 다툼, 변론과 논쟁이 아닙니다. 역사는 생각의 감옥에 갇혀서 수 없는 학살을 자행했던 인디언 정복사와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 분명한 정죄를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미국은 스스로 가둬 놓은 패권주의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화평의 복음은 어디로 사라진 것입니까?
우리는 베드로의 생각의 감옥이 깨어지면서 증거한 화평의 복음을 묵직한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생각의 감옥을 탈출하게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은 나뿐만 아니라 고목처럼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지체를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셨음을 분명하게 기억하십시다.
이방인에게 임한 성령(44-46절)
이 화평의 복음이 고넬료의 가정에 선포되자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이 화평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성령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함께 있는 사람들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임했는데 46절에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였다고 합니다.
요14:16-18절에는 예수님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성령께서 진리의 영이시며 세상은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너희는 성령을 아는데 어떻게 아는가 하면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일4:15-16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그럽니다.
그런데 그 앞선 13절에서는 이 사실을 아는 것도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서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3:16절에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묻습니다.
이런 관찰들을 통해서 성령께서는 믿을 때,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계시에 대해서 마음이 열리게 하고 서로 사랑하게 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성령의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말씀에 기초해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지금 우리들 속에 내주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갈 때 성령의 열매는 우리들의 삶 가운데 주렁주렁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 강림이 꼭 믿을 때 내주하신 것 같지 않다는 것에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기억을 더듬어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는 이방인들에게 최초로 성령께서 임하시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처음 예수께서 성령을 받으실 때 비둘기처럼 성령이 임했다고 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는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머리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높이며 방언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다 이 사건이 뭔가 사람들에게 가시적인 임재의 상징이 필요할 때 취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요시해야 할 것은 성령께서 다른 보혜사로 오셨으며 우리 안에 내주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실 때 우리의 삶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에 관한 부분만큼 신비로운 부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난히도 말이 많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령은 자주 우리 편리한대로 이렇게 저렇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인격적인 성령보다는 그래서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고뇌하고 성령의 통치를 받는 것보다는 무엇인가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성령, 능력적으로 임하시고 치유하시는 성령만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서신서 쪽으로 가면 갈수록 그러한 모습은 현저하게 줄어들고 오히려 성령의 열매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언급되고 있음을 봅니다.
10장 전체를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고넬료에게 보여진 환상이 보였습니다. 어떤 환상입니까?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는 환상입니다. 그러나 환상은 고넬료에게만 보인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에게도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환상은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이럴 때 고넬료와 베드로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자기를 부인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의 틈새 메우기라는 제목으로 살폈습니다. 이런 순종과 자기부인을 통해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납니다. 사모하는 마음과 겸손한 지도자가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화평의 복음이 증거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무리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따라서 10장의 핵심은 베드로의 자기부인과 말씀을 통한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사람 고넬료를 구원받은 무리 속에 포함시키시면서 이방인을 향한 포문을 여시기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세계관 뒤집기, 혹은 생각의 틈새 메우기는 바로 그 일을 위해서 필요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환상을 통해서 먼저 순종의 마음을 준비하지 못하고 말씀을 증거 했더라면 그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말하게 하시고 그 진실한 베드로의 순종과 사모하는 고넬료의 가정이 만나는 지점에서 역사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베드로는 화평의 복음이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화평의 복음을 감옥을 벗어나는 것처럼 생각의 감옥을 벗어남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은총을 베푸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유대인이 화평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이렇게 생각의 감옥을 탈출하고 겸손하게 순종했던 사람들...
화평의 복음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마음을 열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성장하고 아름다워졌습니다.
그러므로 화평의 복음은 베드로가 생각의 틈새를 메우고 깨어짐의 순간을 맞이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묵상은 두 가지입니다.
베드로가 깨어짐의 순간을 맞이한 것이 첫째이고
둘째가 그 깨어짐의 순간을 화평의 복음으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화평의 복음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화목케 하는 직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가정에서 화평의 복음에 순종하는 귀한 삶을 살아내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고넬료 집에 모인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복음의 경계를 허무십니다. 이로써 이방인 선교가 더 가시화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34,35절 민족과 혈통, 출신을 넘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복음이 허용되지 않는 영역이나 대상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 기존의 종교적 신념과 편견을 허무십니다. 구원받은 우리야말로 이 차별 없는 복음의 최대 수혜자입니다. 경계 대신 곁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을 묵상해보십시오.
36~43절 예수님을 통해 화평의 복음을 전해주실 뿐 아니라,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주셔서 진정한 화평을 누리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전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변호의 대상이 아닌 증거의 대상이기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진술만으로도 복음은 역사합니다. 내 삶 속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살아 역사합니까? 그분에 대한 증거가 여전히 내 입가에 생생히 차오릅니까?
44~48절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임했던 성령을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부어주십니다. 이 광경을 본 할례 받은 신자들은 깜짝 놀랍니다. 만일 출발점이 달랐다면 성령 체험의 유무에 따라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빠졌을지 모릅니다. 예수를 믿음도, 성령의 임하심도 온전히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혼자 독차지하기보다 함께 나눌 때 기쁨도 배가됩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34,35절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차별을 걷어낸 복음의 비밀을 깨달은(28,29절)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활짝 열려 있는 복음의 안내자로 쓰임 받습니다. 이방인도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낯선 복음’에는 귀를 닫고, 유대인만이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낮익은 복음’에만 마음을 내어주진 않습니까? 복음에 대해서 많이 아는 자로 자긍하기보다 복음을 깨달은 자로 순종하며 오늘을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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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설교는 간단명료합니다. 이방인들도 익히 들은 바 성령의 능력으로 약한 자를 치유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신 예수를 사람들이 십자가에 매달았으나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복음이 여기에서 같이 멈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베드로의 복음 설교의 핵심은 단지 십자가와 부활이 전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와 부활의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증거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신 이유는, 마지막 날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은 자, 즉 쭉정이는 불에 사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산 자는 둘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전한다면 십자가와 부활에서 멈추지 마십시오. 천국에 갈 준비가 되었는지 반드시 질문하시고 그에 대한 대답을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날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5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은 욥바에서 같이 온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저들은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저들 역시 이미 성령을 체험한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성령까지 체험하였지만 저들의 고정관념은 아직도 구원이 오직 유대인에게 임한다는, 즉 저들은 선택받은 민족이며 그들 중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자기들은 또한 특별한 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11:1-2).
앞서 언급한 대로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고정관념은 마귀가 인간의 정신을 옭아매는 밧줄과 같은 것입니다. 밧줄 하나가 코끼리를 구속하듯이, 전에 죄로 인해 묶여 있었던 영혼의 밧줄은 믿음으로 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성령까지 받은 유대인들이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은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방인에게로 한 발자국도 나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그들이 그 생각을 틀을 깨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유독 방언의 역사가 컸던 이유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기에 용이한 것이 방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특별히 방언을 해야만 성령이 임한 것으로 강조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방언을 무시하는 자들은 그들 역시 자신만의 고정관념 안에 붙들려 있는 자들입니다.
고전 12:6-10, 6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처럼 은사는 다양합니다. 믿음도 은사입니다. 많은 목사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지혜의 말씀의 은사입니다.
목사든 평신도든 믿음 생활을 의무적으로 하는 사람과 기쁨으로 하는 사람은 천지차이인 것입니다.
어떻게 신앙생활을 잘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마시고 어떻게 하면 주님과 기쁘게 동행할 것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는 것에 대해 비난하는 사도들과 형제들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간증을 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50km 떨어진 생면부지의 두 사람, 그것도 무두장이 집에서 일하는 유대인과 로마제국의 백부장이 이틀 만에 상봉하여 극적으로 만난 사건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건임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은 그 누구도 트집을 잡을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고넬료와 백부장이 만나기까지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는 증인들이 있고 시간적인 절묘한 타이밍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성경의 역사가 드라마틱 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고, 하필이면 음욕이 가득한 여주인을 만나 억울하게 감옥을 갔는데, 하필이면 그때 술맡은 관원장과 떡맡은 관원장과 같은 방에 있게 된 것과 하필이면 그때 꿈을 꾸게 되고 하필이면 그때 술맡은 관원장이 복권이 되었고, 또 하필이면 그때 애굽 왕 바로가 꿈을 꾸었고, 하필이면 꿈대로 풍년과 가뭄이 일어났으며, 하필이면 그때 요셉의 형제들이 곡식을 사로 요셉 앞에 나타났겠습니까?
하필이면 기가 막힌 웅덩이에 빠져있는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하필이면 인생의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자녀들에게 드라마틱한 인생으로 이끄십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똑같이 당하는 일이라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재수에 옴 붙어서 인생이 꼬이는 일일 수 있지만, 즉 우연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필연적으로 이끄시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우리 믿는 자들에게 '이젠 됐다!"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이젠 됐다고 선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안식처는 오직 하늘나라입니다. 이 땅에서 일시적인 안식이 주어질지 모르지만, 우리는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나가야 합니다.
7월14일 동인천 지하상가 에서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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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가치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의 삶....-
베드로는 하나님은 차별이 없으신 분이심을 깨닫고,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의 핵심을 전하게 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있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심을 보고, 즉시로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편견의 경계선의 넘어서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34~35절).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유대인이 가지고 있었던 편견의 경계선을 넘어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변질되어 버린 모세의 율법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판단하였습니다. 베드로 역시나 조금 전만해도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주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34~35절)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내 안에 있는 잘못된 편견들을 깨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 번 내 뇌리에 박힌 타인에 대한 편견의 옷을 벗어 던지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래전에 같이 사역을 했던 한 분을 교육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분에 대한 좋지 않은 편견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요?? 함께 나눔의 시간이 있는데, 그분과 일대일 같은 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부담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나에게 주어진 편견의 경계선을 넘어서도록 하는 하나님의 시험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앞으로 이분과 몇 차례 더 만나야 합니다. 아니 어쩜 지금 배우고 있는 것으로 계속 동역을 해 나아가야 할지 모릅니다. 내 안에 그분을 이해하고, 불편한 감정들을 내려놓고, 거룩한 일에 함께 하는 동역자로 인정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말을 듣고 깨닫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내가 넘어서야 하는 편견의 경계선은 무엇입니까?
화평의 복음에 증인이 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36~43절).
하나님은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깨달은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그리고 그 집안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화평의 복음’(36절)을 전합니다. 죄인 된 우리 인간들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가져다주는 복음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허물고 인간 서로 간에 화평을 주는 복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의 다리를 놓으심으로 에덴에서 잃어버렸던 화평을 다시금 누릴 수 있게끔 하셨습니다. 그 결과 민족과 나라 그리고 사람과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로 사랑과 화평을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39절) 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신뢰할진대 우리에게는 결코 두려움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고넬료 역시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듣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어느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반드시 듣고, 고백하도록 해야 합니다. 외적으로 완벽하게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그는 여전히 세상에 속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내 주변,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화평의 복음에 증인이 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전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 오늘 내가 화평의 복음에 증인이 되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성령의 능력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44~48절).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던 중에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인하여 놀랐습니다(45절). 이 사건이야 말로 구원의 보편성을 유대인들에게 확실하게 심어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능력과 역사에 대해 능동적으로 반응했습니다. 바로 세례를 베풀도록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지체임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며칠 더 그들과 함께 먹고 자며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와 능력에 우리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전혀 느끼지도 못한 무지함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쉬지 않고 나의 삶에 간섭하시고, 순간순간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이끄심에 능동적으로 반응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하례 받은 신자들은 고넬료와 사람들이 성령의 임재를 받자 각각 어떠한 반응들을 보였습니까
? 성령의 능력이 어떻게 나의 삶을 이끌어 오셨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오늘도 내 안에 있는 편견의 경계선을 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행 10:34~48절).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설명하고 고넬료가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는 이야기입니다.
1.외모를 보지 않고
유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 고넬료는 할례를 받지 않았고 음식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개종자가 될 수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의식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Ac 10:34–35) 베드로는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인종이나 민족으로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고벨료도 유대인이나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불공평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물론 때때로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편애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본문이 간혹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본문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세상은 불공평하게 보이는 수많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결코 공평하지 않은 것을 많이 느낍니다. 힘과 권력이라는 외적인 조건이 절대적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힘과 권력을 소원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그리 소원하지 않는 사람은 그런 힘과 권력에 대해서도 조금 더 자유하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힘과 권력에 대해 전혀 메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힘과 권력 모든 것을 완전하게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편애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때는 항상 전략이 있습니다. 전략 때문에 무엇인가를 먼저 하기도 하고 나중에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전략)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께서 누구를 더 사랑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불공평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나라 사람들을 향하여 공평하십니다.
하나님은 외적인 조건으로 편애하지 않으시고 대신 무엇을 보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신다고 말씀합니다. 곧 외적인 조건(유대인인가 이방인가)이 아니라 내적인 조건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인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에 대해 반론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데 또한 맞지 않은 것도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Ac 10:39)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과는 아무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 아들이 '나무에 달려 죽으심'으로 속죄를 하시는 일에 우리의 믿음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우리는 구원함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구원은 믿음으로가 아니라 은혜로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로 인하여 우리의 믿음이 또한 중요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그 은혜마저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은혜는 바로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것이 됩니다.
2.믿음으로
'믿는다'는 것의 주어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은혜와 믿음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믿음은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Ac 10:43) 믿는다고 모두 죄사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죄사함의 길을 주셨고 믿음의 사람들의 죄를 사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십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에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성에 대한 고백으로서 '내가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게 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다가 사람의 의지를 로봇 의지로 전락시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로봇 의지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한 사람으로서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행위와 분리시키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어떤 의도로든 거짓입니다. 모든 선한 행위가 믿음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믿음은 선한 행위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때로는 회개와 동일어처럼 사용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의를 행하는 사람'을 받으신다 하셨는데 이것의 다른 표현은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이십니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Ac 10:36) 하나님은 누군가를 편애하심으로 구원밖으로 밀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믿기만 하면 모든 사람은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고넬료와 그의 집에 모인 모든 사람이 믿기만 하면 되는 믿음(행위없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의 대열로 들어섰습니다.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Ac 10:43)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은혜로 주시는 구원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고넬료와 그의 동료들은 오직 믿음으로 이제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믿음에의 초대에는 어떤 사람도 제외시켜서는 안 됩니다.
만약 누군가를 믿음에서 제외시키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매우 악한 사람입니다. 믿음을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 생각하여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책임을 소홀히 한다면 그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이 당시에 고넬료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고넬료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오늘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함에 이루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이 믿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 믿음을 악화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믿음을 오염시키지도 말아야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요 주로 모시는 믿음은 모든 사람에게 열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고넬료와 그의 집에 모인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외적인 조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그의 모습이 중요하였습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Ro 2:9–11) '믿음으로 사는 것'은 조건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외적인 조건이 아닙니다.또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아주 불공평한 분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도 잘못입니다.
믿음은 '오늘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은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서 믿음이 부족한 것을 많이 봅니다. 믿음을 외치지 말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구호가 아니라 고넬료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구제로 사는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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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역사적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증거하자 고넬료의 집안에 성령이 임한다는 내용으로, 이에 베드로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모인 사람들을 보며 환상의 의미를 깨닫고는 기존의 종교적 신념과 편견을 버립니다. 그리곤 복음을 전하자 예루살렘에 임했던 성령이 이방인에게도 임합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베드로의 설교, 부활의 증인된 사도들, 성령 강림, 이방인 세례와 교제 등입니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 부활하신 주님은 아무에게나 자신을 보여주지 않으셨으니, 곧 평소 그분을 따르고 그 분과 교제한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베드로의 말입니다. 즉,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구사의 아내 요안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11제자, 그리고 예수님의 친 동생 야고보 등 입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한자들로, 오늘 본문대로 함께 먹고 마셨던 자들이지요. 예수께서 인정하시는 자들은 주님과 교제가 있던 사람들이지 결코 상관이 없는 자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가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지만,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라면 이 땅에서 그 분과 동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 그렇다면 도무지 주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끄러운 구원은, 어쩌면 억지로 지은 말 같기도 합니다. 주님과의 긴밀한 관계없이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상의 한 강도는요? 예, 그것은 단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구원이 임한다는 것을 강조한 예일 뿐, 그렇게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합법화 한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정당화된다면 죽기 직전에 예수 이름만 부르면 그런 모든 사람은 다 천국에 간다는 논리가 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죽기 전에 주님의 이름만 부른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곳에서 예수그리스도와 살지 않은 사람이 그 나라에서 주님과 살 수 있다는 그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교수님에게서 배운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교훈하신 것대로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교수님을 닮게 되는데 극히 정상적입니다. 존경하는 선배를 둔 운동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는 선배의 몸동작 하나하나와 같게 됩니다. 닮은꼴이 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주님을 흠모하면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그 분을 만난 자라면 그 분의 산 같은 영향력을 도저히 거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의 삶을 쫓다 보면 주님과 같은 삶을 살게 되기 마련입니다.
큰 바위 얼굴을 일평생 바라보고 산 사람이 큰 바위 얼굴의 닮은꼴이 됩니다. 그 비전이 큰 바위얼굴이 되는 셈이지요.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오늘 무슨 말을 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주님처럼 말하고 행동하기를 원합니다. 정말 존경하고 흠모하는 사람이라면 닮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특별한 경우만이 아닙니다. 상황과 형편에 맞아서가 아닙니다. 일상에서 주님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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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10:34-43)
베드로는 하나님이 사마리아인에게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8:14-25). 하지만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미칠 수 있음을 인정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이 만민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특별히 선택하셨다는 선민사상에 젖어 있는 유대인이 이방인을
동료로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신념에 어긋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 고넬료를 만나며 새로운 깨달음에 이릅니다. 외적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합니다. 여기서 ‘의’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함께하시며,
죽음에서 살리셔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 묵상 질문: 하나님이 받으시는 ‘의’란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믿음의 사람다운 모습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나요?
이방인에게도 임하신 성령(10:44-48)
복음이 온전히 드러나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성령의 역사는 사람의 인종이나
신분에 따라 제한받지 않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사람의 중심이 어떠한지가 중요합니다.
고넬료와 친척과 친구들은 한자리에 모여 하나님이 하실 일을 사모하며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자, 베드로와 함께 온 유대인 성도들이 놀랍니다.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에게도 성령의 역사와 구원의 은혜가 임함을 확인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들과 같이 성령을 받은 이들에게 주저 없이 세례를 베풉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진리가 선포되는 곳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 묵상 질문: 베드로가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어떤 믿음의 태도를 보여 주나요?
- 적용 질문: 예배 때마다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하나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의 기도
제 안에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마치 진리인 것처럼 착각하는 잘못된 가치관이 있다면
깨닫게 하소서. 이방인의 구원을 부인했던 유대인처럼
왜곡된 틀 안에 저와 다른 사람을 가둬 두었던 것을 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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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와 베드로의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가이사랴에 살고있는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기도할 때에
욥바에 피장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청해오라는 환상과
욥바에 있는 베드로가 지붕에서 기도 할 때에
짐승이 담긴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잡아 먹으라는 환상을 보고
무슨 뜻인가 궁금해 할 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초청하여 두 사람이 만났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와 있으니
주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말씀해 달라고 매우 정중하게 요청했다.
드디어 오늘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씀을 선포한다.(34)
지난 3년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베드로도 새롭게 깨닫는 것이 있다.
1.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34)
2.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신다.(35)
베드로가 새롭게 깨달은 그 진리의 말씀이
내 삶에고 동일하게 적용되게 하옵소서.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구별하지 않도록 도와 주옵소서.
의를 행할 힘은 없지만 성령님 도와 주옵소서.
날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베드로가 입을 열어 전하는 복음은 무엇인가?
만유의 주되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평의 복음이다.(36
나도 이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1. 만유의 주 되신 예수그리스도(36)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만유의 주이시다. (Jesus Christ is Load of all)
만유의 근원이시요 만유의 지배자이시다. 아멘.
2. 하나님께서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으신 예수이다.(38)
3.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계신다.(38)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4.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다.(38)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사역들을 소개한다.
예수님의 사역은 온 갈릴리에 두루다니사
1)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2)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3) 백성중에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마4:23)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도 계속해서 소개하고 있다.(39)
5. 예수님은 나무에 달려 죽으셨다.(39)
6. 하나님이 3일 만에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40)
7. 예수님은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심판자이다.(42)
8.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은 죄 용서를 받게 된다.(43)
결국 베드로가 전한 내용은 무엇인가?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님과 예수님이 행하신 일, 십자가, 부활, 심판, 용서등
복음의 핵심 내용들만을 전했다.
베드로 사도가 증언한 예수님에 대한 사실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시고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고
믿는 자를 용서하시는 그 사실을 나도 증언하게 하옵소서. 아멘.
꼭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느낌이 드는데 베드로가 전한 증언은 바로 이런 것이엿다.
베드로가 이런 증언을 하고 있을 때 놀라운 사실이 일어난다.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왔다.(44)
성령받는 비결이 나오는 구나.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는가?
1.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이 임하는 구나.
2. 진리의 말씀을 전할 때 성령님이 임하시는 구나.
주여 나에게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
성령이 임한 증거들이 있다.
1.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했다.(46)
2.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렸다.(46)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성령을 받은 증거로구나.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넬료와 그 가정에 세례를 준다.(48)
아마 이방인 가운데 최초의 세례자가 되는 것 같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심을 깨달았습니다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3:29~30)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35)
그래서 십자가의 죄 사함의 복음과 부활의 영생의 복음을 이방인에게도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마저 여전히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했습니다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행11:19)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하는 것은 편견은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편견은 차별이라는 죄악을 낳는 것입니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2:9)
예수님은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행15:9)
그래서 예수님은 가까이 오는 모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행10:38)
믿는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10:43)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10:44)
그러므로 아무도 차별하지 않기 원합니다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2:1)
오직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기 원합니다 그래야 주께서도 우리를 공평으로 살펴 주실 것입니다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시17:2)
주께서 우리를 보살피실 줄 믿습니다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욥10:12)
항상 깨어 살펴주실 줄 믿습니다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어 살펴 주소서"(시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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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행하는 이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안광복 목사
고넬료의 초대로 욥바에서 가이사랴로 온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납니다.
고넬료가 꿈에서 환상을 본 그대로 말하자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받아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셔서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설교를 합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인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였지만 하나님이 사흘 만에 그를 다시 살리셨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증언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미리 택하여 알게 하신 증인으로 우리를 부르셨으니 당연히 증언하며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증언하며 말씀을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여야 합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와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을 보고 모두 놀랍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푸는 것을 금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명합니다.
고넬료의 가정 안에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고 세례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므로 교회가 부흥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고 온 세상의 주권자가 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섭리하시지만
인간의 깊은 마음을 굽어 살피시는 본인 줄 믿습니다.
말씀의 능력 속에서 성령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망을 증거하며 살게 하시고
날마다 성령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며 살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참된 평강을 누리게 하시며
구원의 은혜와 참 소망의 기쁨을 충만하게 경험하는 복된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는 그 시간 한가운데 그 이방인들 위에 성령을 부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따르던 이들과 동일하게 방언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이들로 선택되었고 베드로와 함께 온 유대인들은 복음을 전하면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놀랄 수밖에 없었고 물세례 베풀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매일 구원의 기쁜 소식으로, 주어지는 생명의 능력으로 놀라고 새로워지는 과정입니다. 과거와 똑같은 오늘, 마지못해 살아가는 시간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매일 그분의 성령으로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환대를 전하는 샘솟는 힘을 공급받는 여정입니다. 어제와 다른 오늘, 또 오늘과 다른 내일을 경험하고 기대하는 복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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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말씀 속에 담긴 주님의 메시지를 깨닫고, 그 말씀을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경배하고, 주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안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고,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일꾼으로 조금이라도 더 성숙해져 갈 수 있도록 저희들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죄악을 깨끗게 하시는 그 능력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뜻이 전해지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 가운데 오신 그 크신 사랑이
만나는 모든 심령마다 그 영혼의 가슴판에 새겨지는 역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자연재해로부터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을 찾아가 만져주시고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